설악의 품에서 넋을 빼앗기고(장수대--십이선녀탕)
언제: 2004년 8월 29일
누구랑: 사계절 산악회원님들과 나
어디로 : 장수대--대승폭포--대승령--안산 갈림길--안산--두문폭--12선녀탕--응봉폭포--남교리(약 7시간)

 

설악에 가고 싶었다.
아니 설악에 안기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날때마다 설악의 모습을 동경했고, 가끔씩 설악의 치마폭에 안기어도 비선대나 비룡폭포가 고작이었다..
더 이상 올라야 겠다는 생각도 안해봤다.
아니 엄두도 못 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런 내가 설악을 오르고 싶어 안달아 난 것은 지난 겨울 이었다,
오대산 산행을 하고 난 뒤 하루 밤 속초에 머무르면서 였다.


아침에 창문을 열어 젖히자,  멀리 하늘과 맞닿은 선에 하햫게 눈덥힌 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첩첩이 접힌 능선뒤에 홀로 우뚝 솟아 동해를 응시하고있는 모습이 왜 그리 아름답게 다가오는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난 그 봉우리가 대청봉이란 사실을 알았고는, 오르고 싶은 충동이 더욱더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은 혼자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길도 모르고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사실 무박을 할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설악에 대한 산행기를 즐겨 읽으며 대리 만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 왔다. 사계절 산악회에서 설악산 안산을 간다는 안내장을 보았다.
대청봉은 아니지만 설악의 안산과 12선녀 폭으로 오른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굳히고 마누라에게 결재를(?)올렸다.


"당신 산이 그렇게 좋아" 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씨를 만들 것 같은 생각에 서였다.
그런 뒤에도 집요한 방해 공작이 뒤따랐다. 그 공작은 산행 당일까지 계속되었다. 집으로 동생네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놀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잠을 자겠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처지도 못되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5시에 집을 나왔다. 24시 분식집에 들러 김밥 두즐로 아침을 해결하고 버스에 몸을 실으니 잠이 쏟아진다.
지방산 갈때는 차창밖의 경치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내 잠에 빠지고 말았다.
홍천을 지나 타이어가 빵구가 나서 차가 멈추어 설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자동차까지 빵구가 나 방해를 하다니?. 일요일이라 정비사를 부르는데 어려움이 따랐지만 우여곡절 끝에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돌아올 때 몇시간 늦게 만든 원인이 될 줄이야?
예정보다 한시간여 지체 끝에 버스는 설악의 품으로 접어들었다.


10:20분 옥녀탕 휴게소에 도착했다. 그렇게도 오르고 싶었던 설악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장수대 매표소에서 매표를 한뒤 곧장 산으로 접어 들었다.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온다는 말 때문에 서두를 수 밖에 없었었다..
산꾼들은 산으로 들어서자 마자 사냥감을 만난 포수마냥 사냥감(?)을 향해 돌진한다.


0.9km의 즐거움.
장수대서 대승폭포까지는 1km남짓했지만 내가 느끼는 감동은 몇 km를 걸으며 느낀 듯 했다.
초입부터 만나는 오르막이라 몸은 아직 적응이 안된 탓인지 숨이 턱까지 차 오른다. 11-10 산악 구조 표지대를 지나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등산로를 가로질러 쓰러져있다. 세월의 무게를 못이긴 탓일까? 아니면 산에서 태어나 산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을 하는 중일까?  주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고작 백년 남짓 살텐데, 노송의 나이 수백이 넘으니 이제 육신을 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철사다리를 오르니 건너편 산봉우리가 보인다.


조물주의 작품이라지만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40여분 오르니 왼쪽 계곡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만난다.
 대승폭포다. 수량이 적었지만 그 규모나 위용은 보는이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한 많은 여인이 하얀 소복의 옷고름을 늘어 뜨린채 흐느껴 우는 듯 가날프게 들린다. 아마도 수량이 많았으면 성난 군중의 함성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개성의 박연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더불어 한국의 3대 폭포란다.
전망대 바닥에는 구천은하(九天銀河)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지만 필획의 기운으로 보아 예사의 글씨는 아닌 듯하다. 심산에서 만나는 글씨 한점이 주는 즐거움이야 또 무슨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씨가 조선시대 명필인 양사언의 글씨라 하니 감회가 더 새로워진다.
가날픈 폭포의 물소리를 뒤로한채 발길을 돌렸다.


대승령까지는 1.2km
지나온 길과 다르게 육산으로 변했다.  소나무 군락과 주목의 군락을 지나고 고개로 오르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어느정도 올랐을까? 1000m이상에서만 자란다는 금강초롱을 만났다. 산길을 따라 가로등을 켜놓은 듯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은 너무 아름다울 따름이다. 하늘이 가까워지고 급한 경사길을 10분으르니 대승령이다(1210m)
장수대, 안산, 귀때기청봉, 중청, 그리고 백담사로 갈라지는 길이다. 언제가는백담사도 가고 귀때기청봉으로 도가고, 중청을 거쳐 대청에까지 오르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안산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승령에서 안산가는 길은 능선을 따라 걷기에 시원한 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었다. 아쉬운 것은 구름이 건너 산을 덮고 있어 절경이 묻혀있다는 것 이었다. 대승령까지의 길에서 피로가 겹쳐왔다. 잠이 모자라서 생기는 피로 같았다. 앞서 가던 아저씨도 힘이 드는지 가다가 쉬다를 반복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대승령에서 안산 가는 길은 멧돼지들이 먹이를 찾는 다고 온통 땅을 뒤져 놓았다.
길을 같이 가는 것도 인연인지라, 우린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간다한 유동식을 나눠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랬다.
안산 갈림길에 올라서니 먼저 온 산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쉬고 있었다.


안산 가림길(1320m) 남교리 7.6km,
이곳에서 일행은 방향 착오를 일으키고 만다.
안산가는 길을 잊어버리고 바로 남교리쪽으로 발길을 돌려버린 것이다. 한발 앞서간 대장이 폐찰을 잘못 붙여 놓은 탓이었다.
어렵게 올라와 안산(1430m)에 오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안산 가는 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는 야생화 군락지를 보지 못한 것이 산행내내 가슴이 아팠고, 더욱이 안산에서 설악의 주능선을(중청, 대청, 공룡능선)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이라는데 그것마져 볼 수 없었으니 오늘 산행의 10%는 모자란 듯 했다 . 그래도 12선녀탕계곡에서 좀더 여유로움을 가지고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아 위안으로 삼았다.


능선끝 쉼터(1360m)에 도착하여 다시 안산 가는 길에 미련이 남아 혹시나 하고 안산 오르는 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남교리를 향하여 내려가는 길은 쉬운 길만 아니었다.
내리막 길이었지만 너덜길을 통과해야하고 넘어진 나무 아래로 기어가며 약20리 길을 걸어야 하기에 체력적인 소모가 심할 것 같았다. 한참을 내려오니 안산에서 내려오는 길과 마주쳤고 첫 번째 개울을 만났다.
상류라 물의 양은 적었지만 땀을 씻기에는 충분했다.
동행하던 아저씨(?)와 세수를 하고 조금의 휴식을 취했다.
하산길 계곡에 숨은 작은 폭포와 이름모를 소(沼)들이 하산 길의 지루함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14:00 아담한 계곡에 자리잡고 점심을 먹었다.
신발을 풀고 양말까지 벗어놓고 계곡에 발을 담근채 밥을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하지 않았던가? 김치 몇조각, 김 몇장이었지만 진수성찬 못지 않았다. 살속까지 파고드는 찬 기운은 지금까지 쌓인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20여분의 꿀맛같은 휴식시간을 마치고 어디 숨은지 모르는 두문폭포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몇분을 걷지 않았는데 거칠게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계곡아래 살펴보니 폭포와 소(沼)가 숨어 있다. 이게 선녀탕인가? 동행하던 아저씨와 함께 그저 멋지다는 감탄사만 남발 할 뿐이었다.


몇 번의 계곡을 가로지르다 갑자기 계곡이 넓어지고 하얀 암반위로 맑디맑은 물이 떨어져 소를 이루고 있는 두문폭포를 만났다. 이곳이 설악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12선녀탕의 시작인 듯 했다.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12명의 선녀가 용대리(용례)의 아름다움에 반해 12년만에 12개의 소를 만들었는데, 일에 지친 네 선녀가 죽고 말았다. 남은 8선녀가 네 선녀를 각자 소에 넣고 묻었다. 그래서 지금은 8개의 소만 남아 았다는 설과, 12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전설이면 어떻고 저런 전설이면 어떨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움을 참을 수 없었다. 어찌나 물이 맑든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색깔이 변해 있었다. 저 물에 풍덩 뛰어들어 멱이라도 감고 싶지만 속세에 묻은 때를 씻는다는 죄를 지울 것 같아 참아야 했다. 어느 조각가가 빚어도 저렇듯 아름답게 빚어 낼 수 있을까? 아니 어느 도공이 구워낸들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탕(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쉬움이 있다면 탕에 대한 안내가 있었으면 더 좋았으리라.


두문폭에서 시작해 30여분정도 펼쳐지는 장관은 '멋지다' '우와' ...란 말들 외는 표현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지막 탕인 복숭아탕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베낭을 풀고 발을 담그고 말았다. 선녀의 채취가 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조선조 정종때 성해응은 '동국명산기'에서 설악산 명소중에서 십이선녀탕을 첫손으로 꼽았다고 한다. 물은 탕안에서 소용돌이를 치며 맴돈다. 어지러운 세상 저물속에 담궈 돌리다보면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두문폭에서 복숭아탕까지 거대한 바위하나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남교리까지는 아직도 4km나 남았다.


비탈진 산길을 조심스레 내려오면 십이선녀탕이라는 안내 표시가 나온다. 철제 다리를 건너고 굽이굽이 돌아서면 응봉폭포다. 이제부터는 여유를 부려도 될 것 같다. 산속은 어두워지지 시작한다. 태풍 차바의 영향일까?
금방이라도 한줄기 비를 퍼 부을 것 같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철사다리를 지나면 오른편에 작은 비석하나가 지나는 산꾼의 발목을 잡았다. 카톨릭 의대 산악부원들이 급류에 휩쓸려 숨진 위령탑이다. 잠시 고개를 숙여 묵념한다. 나도 죽으면 산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돌아 간다면 십이선녀 품속에 갈 수 있었으면 하고 망상을 해보았다. 하산 길이 갑자기 부드러워지고 계곡에 몽돌이 뒹굴기 시작한다. 비경을 품고있는 계곡도 어느산의 계곡처럼 보통의 얼굴로 다가선다. 설악의 겸손일까?


남교리 매표소를 통과하여 십이선녀교 아래서 탁족을 하며 하루산행을 다시 한번 그려 보았다.
아! 설악산 십이선녀탕 ...그대 정녕 나의 넋을 앗아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