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단상 2>눈물 훔치는 산성을 다녀와서 (남한산)

 

                                                                                                        남한산성 서문

 

  

 아름드리 적송 군락지가 솔 향을 내 품는다. 간혹 실려온 바람을 타고 송진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남한산성 성곽을 산책하며 350여 년 전의 인조 임금 얼굴을 떠올린다. 청(淸)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한 병자호란 당시 임금은 이 산성을 나처럼 조용히 산책했을까?

  

 산성 둘레가 13km 정도로 성곽 군데군데가 비바람에 무너져 내린 채 후손들의 발길을 맞고 있다. 최근엔 수어장대도 보수 공사 중으로 푸른 장막으로 둘러 쳐 있다. 맑은 쪽 빛 하늘은 가을임을 자랑하는데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서쪽 하늘에서 산성 곳곳에 밝은 은빛 광선을 선사하고 있다. 저녁 햇살이 아직은 따사하다.

 

 남한산은 옛날부터 해가 가장 많이 길게 뜨는 산이라고 하여 일장산(日長山), 주장산(晝長山)이라고 불러왔다. 산성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확 트여서 해가 하루 종일 비친다. 서문 근처 성곽에서 바라본 인수봉은 백운대와 만경봉과 어깨동무를 하며 함께 우뚝 솟아있다. 아차산이 가깝게 보이고 그 앞을 한강물이 강북과 강남을 표시하며 상류와 하류가 어딘가도 모르게 운주사 와불처럼 길게 누워있다. 서울 시내 반쪽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빌딩과 아파트 숲들이 서로 도토리 키재기를 한다.

  

 눈을 들어 우측으로 바라보니 이제야 시야가 트인다. 초록과 푸른색의 자그마한 도시, 하남은 중심축에 아파트 숲이 덩그렇게 모여 있을 뿐, 사방이 푸르다. 하남시는 도시의 98%가 녹지라서인지 서울 근교 가운데 가장 아담한 위성도시다.

  

 전망대에서 눈을 돌려 산성을 바라보니 며칠 전 까지 산 능선마다 발갛게 불타던 단풍이 춘하추동 사시변환의 자연법칙을 따라 가을 옷을 막 벗고 있다. 산 그르매가 작은 능선마다 덮쳐가고 계곡은 물론 능선 일부까지 어둠이 몰려 있다. 산성 전망대에 서니 바람이 세차다.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바람이 인다.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녹차 향을 맡다가 문득 해남 대둔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생각한다. 초의선사가 정성들여 끓인 작설차(雀舌茶)가 이 맛이었을까. 물론 녹차는 백자에 따라 색(色)에 취하고, 향(香)에 취하고 맛에 취해야 제 맛이지만, 산 속 조용한 나무 그늘아래서 마시는 차 맛도 꽤 즐길만하다.

  

 석양을 바라보다 하산 길을 서두른다. 조용한 숲 속 샛길에 들어서니 나무들과 나 그리고 바람 소리 뿐이다. 이따금씩 한 줄기 석양빛이 나무 가지사이로 숨을 토할 뿐 새소리 마져 바람소리에 묻히고 만다. 숲 속 길에선 보는 것엔 무심할 뿐 귀만 열어 놓았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내 몸 속 깊숙이 파고들어 우주와 소우주(나)가 하나가 된 기분이다. 낙엽 밟는 소리도, 내 걸음 소리도, 새소리도 바람소리에 함몰되어 저 우주 속으로 실려 간다.

  

 서서히 어둠이 계곡을 차지하자 나는 이제야 발걸음을 재촉하며 작은 능선 여러 개를 파도 타듯 넘는다. 멀리 성불사에서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떠엉 엉 어 어...” 여운을 남기며 귓전을 맴돌다 이내 사라진다. 결코 뺏기고 싶지 않은 나만의 조용한 시간이었다. (200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