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기

ㅇ 일시 : 2004. 11. 6(토)
ㅇ 코스 : 백무동-장터목-제석봉-천왕봉-제석봉-장터목-연하봉-삼신봉-촛대봉-세석산장-영신봉- 칠선봉-덕평봉-벽소령-음정
ㅇ 찾아간 길 : 대진고속도로-생초I.C-마천방향-백무동


   살아가다가 하늘이 보고 싶은 날에는 지리에 안기리라. 살아가다가 바다가 보고 싶은 날에도 지리에 안기리라. 살아가다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질 때에도, 살아가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 질 때에도, 살아가다가 갑자기 뜨겁고 진한 바람이 불어와 몸부림치며 울어 댈 때에도----
   그의 품에 안기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으리라. 그의 품에 안기어 가만히 숨결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순결해 지리라. 그의 품에 안기어 가만히 가슴을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밝아지리라. 
 
  백무동 발끝만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지리산 가을 속을 관우, 장비, 지리선녀, 나 넷이서 오른다. 어느 산이고 1시간 30분 이내면 능선을 탈 수 있었는데, 2시간 40분이 지나서야 능선에 오른다. 그나마도 산행지도에는 4시간 코스라고 적혀 있는데 엄청난 속도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지루하다.
 
   장터목 산장을 1km정도 남겨놓은 지점. 일몰이 시작되고 있다. 노고단, 반야봉을 배경으로 휘몰아쳐 오는 지리의 능선. 그 위에서 한쪽 하늘을 불태우고 있는 붉디붉은 태양. 장엄하다. 숨이 막힌다. 얼른 배낭을 내동댕이치고 바위에 걸터앉아 풍경 속으로 빠져든다. 첫 풍경부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지리. 소주를 꺼내어 한 잔씩 나누어 마시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회원들. 좋---다. 이 한 마디밖에는 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아니 달리 말이 필요 없다. 저 황홀한 공간과 그저 함께 할뿐이다. 산과 노을과 풍경과 시간과 그리고 떨리는 감동이 지금 이 순간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 속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모든 것이 숨을 죽인 듯하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 하다. 어쩜 이런 것이 절/대/공/간/이란 것인가--- 황홀함에 젖어 장터목으로 스며든다.
  
   장터목에서의 일박. 흥분과 기대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안개에 대한 우려 속에 잠이 든다. 산장이 날아 갈 듯한 바람과 안개. 아무래도 일출에 대한 기대가 무리인 것 같아 잠이 쉬 청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랴! 살아온 날이 부끄럽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보여주시겠지----
 
   신 새벽. 복장을 단단히 고쳐 매고 실낱같은 기대 속에 제석봉을 오른다. 산행에 적응되지 않은 몸이 힘에 겨워하는 제석봉. 어둠 속에서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라는 고사목들이 보인다. 잠시 전율을 느낀다. 육신의 덧없음과 욕망의 허망함을 모두 떨쳐버리고 저 무욕의 끝에서 풍화한 화석들의 모습. 서늘하도록 허연 뼈대들. 속세를 등지고 허허로이 산 속으로 향하던 스님의 모습이 저와 같았을까? 떨쳐버리자 세상에서의 잡다했던 이기와 질투. 그 알량했던 아집. 나의 것이라고, 나만의 것이라고 움켜쥐었던 허욕의 잎새들이 저 고사목 앞에서 한낱 낙엽으로 흩어지는 것을---- 

  

    통천문 좁은 통로에서 몸을 더욱 낮추고 ,바위 벼랑길에서 조신스럽게 발을 내딛기를 얼마나 하였을까?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아! 드디어 천왕봉이다. 거대한 바위 위에 미끈하게 서 있는 지리산 천왕봉 표석비. 아! 내 드디어 너를 안아 보는구나! 얼마나 와 보고 싶었고, 얼마나 안아 보고 싶었고, 남들이 들려주는 전언에 얼마나 그리워했던 지리였던가? 이곳이 지리산 천왕봉이구나! 지리산 천왕봉이 이렇게 생겼구나----

  

   한참동안 표석비를 어루만지다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방을 둘러본다. 온통 안개뿐이다. 사방이 안개에 쌓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땅을 딛고 오를 수 있는 세상의 끝. 저 장엄했던 능선이 일으켜 세운 세상의 끝. 이곳에 오르면 무한한 풍경이 펼쳐지고 형언할 수 없이 많은 산과 길들이 보일 줄 알았는데,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안개뿐이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고 바람이 거세다. 이 무슨 상징이란 말인가? 길은 이제 세상 속으로 회귀하는 비탈길뿐일텐데---어디로들 갈거나? 세상의 끝에까지 길을 나섰던 나무들은---제석봉 고사목들이 단호한 결심을 한 것은 이 부근 어디쯤이겠지---먼저 세상과 절별하고 떠나신 지인들이 생각나 일순간 가슴이 저려온다.

  

   안개 속에서 한참을 기다리자 일출이 시작된다. 옅어진 안개 속에서 눈앞이 갑자기 불타오르더니 환하고 뜨거운 태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와---소리를 지르며 흥분과 감동으로 불타오르려는데 무심하게도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초조함 속에서 잠시 숨을 죽이자 또다시 들끓어 오르다. 와---하고 또다시 흥분하는 사람들. 그러기를 몇 차례. 마치 우주 쇼를 보는 듯하다. 설레임과 아쉬움이 반복된다. 일출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흥분되게 할 줄은 미처 몰랐는데---기대하지 않았던 일출을 보게 되어 더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신기한 세상을 처음 접하듯 해가 나타날 때마다 마음도 함께 들끓어 오른다. 한참을 그 속에 묻혀 있다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총총히 발길을 돌린다.

  

   천왕봉을 내려오기 시작하자 안개도 차차 걷힌다. 천왕봉 부근의 바위와 운해, 천길 낭떠러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절경이다.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새벽안개가 마구 휘젓고 다니는 풍경. 신선하고도 묘하다. 변화가 무쌍하다. 여러 번 지리에 안겨 보았지만 오늘 같은 절경은 처음이라는 관우. 깊고, 높고, 큰, 지리의 풍경이다. 발 내딛을 때마다 한참씩 정신을 빼앗기며, 천천히, 오르던 시간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을 소비하며 장터목산장에 이른다.  

  

    장터목산장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후, 잠시 숨을 돌려 이제 능선 길로 들어선다. 연하봉, 삼신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안개 뒤의 날씨인지라 어느 봉우리에서건 조망이 좋다. 멀리 덕유산의 봉우리들이 조그마한 몇 점 섬으로 다가서고, 부드러우면서도 우뚝 솟은 천왕봉이 능선 길을 내내 지켜보고 있다. 능선 아래로는 뿌리 없이 떠도는 그리움들이 마음 쓸리는데로 뻗어나가며 몇 겹 물결을 이룬 채 늘어선다. 한 점 섬이 되거나, 우렁찬 한줄기 능선으로 서거나, 아예 뚝 떨어져 팔짱을 끼고 지켜보거나  모두가 지리가 그리워 떠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저 속에 이 땅 후미진 구석을 돌아 이 곳에서 최후를 맞았던 영혼들도 있을텐데---관우에게 몇 번을 물어보아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편안히들 계시라. 혼란스런 세상의 바람이 터벅터벅 밟히는 능선 길에서 잠시 안부나 물어 봅니다.

 

    아무리 보아도 천왕봉에서 세석까지의 능선은 지리산 산행의 백미인 것 같다. 능선 내내 가능한 조망과, 봉우리마다의 바위들과, 산허리마다의 구름. 걸어도 걸어도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에 힘든지를 모르겠다. 흔히들 세석에서 일박을 하게되면 이 절경을 어둠 속에서 걷게 되는데, 천왕봉 일출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 코스를 어둠 속에 지나친다는 것은 분명 억울한 일일 것 같다. 일출은 그냥 촛대봉에서 마치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지리의 백미 속을 걸어볼 일이다. 지리를 몇 번씩 종주하였지만 천왕봉 근처만 생각난다는 제갈량. 능선 길 내내 동정의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어쩌다 이 절경을 놓쳤을고---

   

    이제 하산이다. 벽소령 조금 못미쳐에서 음정으로 내려선다. 넓은 임도다. 빨치산 토벌 때 낸 길이라고도 하는데 지루하고 지루하다. 이쪽으로의 하산은 웬만해서는 권하고 싶지 않다. 음정에서 고마우신 산님의 차를 얻어 타고 백무동으로 이동하며 가만히 산행을 마감한다. 두부와 파전 한 조각, 동동주를 한 잔씩 나누며, 오늘의 산행대장 관우에게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부럽다. 이 좋은 산을 이팔청춘의 시절부터 다녀갔었다니---선이 굵은 그의 성품이 아마 지리에서 연유했음은 아니었을까!  지리산을 돌아보고 돌아보며 조만간 가족을 데리고 다시 올 계획에 머리가 복잡한 귀가 길.   
   
  
 

   (일몰-장터목을 오르며)
  
 

(천왕봉 바위와 운해)
   
 
   (천왕봉 및 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