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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바다, 영축산에서 신불산까지

여행지 : 통도사, 영축산(영취산, 취서산), 신불산
여행일 : 2004/10/17


친구들과의 거나-했던 취기가 체 가시지도 않은 다음날, 미식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길을 떠난다.
양산, 신평에 내려 통도사로 이어진 상쾌한 숲길을 걸으며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려는데 한 할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스쳐간다. 성큼성큼 옮기는 발걸음에서 술에 찌든 나(?)와는 대조되는 건강함이 묻어나는 듯 하다.

통도사로 이어진 숲길     통도사 부도원     <킬빌II>의 파이 메이

나 역시 미디어의 노예인가? 신성해야할 선사들의 부도원을 지나는데 문득 <킬빌II>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여주인공을 가르치는 사부, 파이 메이가 생각나는 게 아닌가. 일격필살의 무술을 선보이며 비석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난감한 상상에 괜히 죄스러워진다.
하여튼 요즘 것들이란... ㅠ.ㅠ

통도사를 역사와 유물을 기록, 전시한 성보박물관에 들른다. 불교유물에 대한 나의 무지함은 2000원이라는 입장요금이 조금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감하기 힘든 전시물을 건성으로 훑고 나온다.

박물관을 지나 조금 더 걷자 우리나라 삼보사찰(통도사가 불(佛), 해인사가 법(法), 송광사가 승(僧)에 해당) 중의 하나인 통도사에 도착한다. 마침 개산대제(통도사 창건기념일)를 기념하는 연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또한 시간을 머금은 은은한 빛깔의 적멸보궁(대웅전)과 외줄로 장식된 새빨간 연등의 극명한 대비는 수양의 깊이와 깨어있음의 화려함처럼 이채롭다.

연등     적멸보궁의 연등

통도사를 둘러보고 그 옆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극락암까지 걷는다.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영축산은 입체형의 산이 아니라 거대하게 세워진 평면 광고판처럼 보인다. 마치 이 ‘산 판’의 뒷면에 받쳐진 버팀목을 걷어차 버리면 내 앞으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져버릴 것만 같다.
계속해서 풍요의 계절을 장식하는 누런 황금들판을 지난다.

황금들판 너머의 영축산     백운암 가는 길     참선중인 백운암

극락암에서 목을 축인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꼭짓점을 향해 모여드는 개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기적어기적 하지만 천천히...
영축산 중턱에 조그맣게 위치한 백운암은 수많은 등산객에 비해 상당히 경건한 분위기다. 참선중인 법당 안은 물론이려니와 그 밖에서 일렬로 선 체 잠깐수행에 동참하는 등산객들로 어느 사찰 못지않은 진지하다. 조용한 걸음으로 물을 마시고 긴 길을 떠난다.

수묵화를 그려나가듯 발아래 산봉우리를 하나씩 채워나가길 몇 시간, 사계가 공존하는 탁 트인 능선길에 올라선다.
구름이 걷히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쬘 때면 봄, 봉을 넘으려 비지땀을 흘리며 오를 땐 여름, 낙엽을 밟으며 붉은 단풍을 올려다볼 땐 가을, 구름에 휩싸인 체 매서운 바람이 몰아칠 땐 겨울인가 싶다.

영축산(오른쪽 중간)으로 이어진 능선길

능선을 오르내리며 마침내 올라선 영축산 정상(1092m). 옛 이름인 취서산과 영취산이라 적힌 자그마한 표지석은 아래에서 봤던 거대한 바위절벽의 이미지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마치 거인의 머리에 씌어진 난쟁이 모자처럼 앙증맞아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은 건 신불산으로 이어진 완만한 능선의 억새가 아닐까. 잘 짜여진 양탄자처럼 포근해 보이고 바다에 몸을 맡긴 수초처럼 하늘거린다. 눈을 감고 뒤로 돌아선 채 스르르 넘어진데도 사뿐히 받아줄 것 같다.
또한 양산시와 함께 맞은편의 천성산을 경계로 뻗은 경부고속도로가 희미하게 보인다. 싫든 좋든 경제발전의 상징이자 거품경제의 졸속공사라는 양면성을 고루 겸비한(?) 박통(박정희대통령)시절의 유산이 아니던가...

영축산(옛 영취산)에서 본 신불산(멀리 보이는 오른쪽 봉우리)     억새물결 속 사람들

절벽과 평원의 경계     신불산 가는 길

억새의 바다를 헤엄치며 북쪽 등선을 탄다. 왼편으로는 억새의 바다라지만 오른편으로는 마치 해안 절벽 같은 낭떠러지! 그 경계를 따라 걷는다. 거대한 봉분처럼 우둑 커니 서있는 신불산을 향해...

신불산(1209m)에 오르자 사람들이 바글바글 한데 정상을 알리는 큼지막한 돌탑은 마치 지리산의 노고단을 연상케 한다. 저 돌멩이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테고 또 그만큼의 추억을 담아갔으리라 생각하니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저 멀리로는 가지산, 운문산, 간월산으로 이어진 영남알프스의 모습이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오히려 오후의 은은한 햇살과 어우러져 정말 알프스 설산 같이 기묘하게 느껴진다. 언제고 저 능선위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진다.

신불산 정상     신불산에서     신불산 지도

해질 무렵이 되자 부쩍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은 더욱 매섭다. 하산길은 언제나 멀지만 언제나 끝은 있는 법, 삼남면으로 이어진 긴 등산로를 내려오자 기분 좋게 휘갈겨진 등산안내판을 보인다. 인근 마을사람이 서툴게 적어 놓은 듯하지만 그 꼼꼼함과 운치가 예사롭지가 않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뽀-너스’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한다. 붉은 저녁노을과 검게 그늘져가는 영축, 신불산의 모습에서 오늘을 회상해본다.
영남알프스의 끝자락에 위치한 영축산과 신불산의 가장 큰 화두는 두 산을 잇는 3Km에 달하는 억새능선이 아닐까. 그 드넓은 평원과 억새의 하늘거림 속에서 가을날을 즐겨보는 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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