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반에 일어나 거실로 나와 습관적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좋은 날씨다. 여유를 부리며 아침밥을 먹고나서 도시락과 물통을 배낭에 챙겼다. 상쾌한 아침이다. 불현듯 나옹선사 선시로 알려진 '청산은 나를 보고' 가 떠오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아니하고 / 세월은 나를 보고 때없다 아니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 바람 같이 물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오늘 산행은 황매산이다. 황매산(黃梅山 1,108m)은 경남 합천군 가회면과 대병면, 산청군 차황면 등에 걸쳐있다. 이 산은 상중하로 된 산봉우리 그림자가 합천호 푸른 물에 잠기면 세 송이 매화꽃처럼 보인다고 하여 '수중매(水中梅)'라고도 부른다. 여기 안부 고산 평원에 철쭉꽃이 만개할 때면 황매평전에 진분홍 바람이 불어와 온 몸에 물감이 묻어난다. 산바람이 불면 진분홍 비단 물결이 일렁이는 곳이다. 그리고 누룩덤이나 모산재 순결바위 쪽으로 펼쳐진 멋진 기암 괴석 틈새엔 늘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그 멋진 경관에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우리 일행은 중촌리 한밭에서 들머리를 찾아 산행을 시작했다. 묵방사 갈림길에서 산길을 조금 걷다보면 초입 갈림길에 여러 무늬의 산악회 리본이 매달려 있다. 본격적으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어쩐 일인지 여느 때보다 몸이 가볍다. 파아란 하늘에 맑은 날씨다. 산행하기에 좋은 날씨다. 아직 무덥진 않지만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산바람 솔바람이 불어오자 상쾌한 기분이다. 그 삽상한 바람을 폐부 깊숙히 들이마시며 산의 정기와 기운을 느낀다. 매바위를 넘어 암릉 능선길을 오르다보면 여기나 저쪽이나 바위 틈에서 묵묵히 자란 몇 그루 소나무가 멋지다.


 그렇게 암릉을 기어오르다 보면 누룩더미 같은 암릉에 이른다. 황매산 남부 능선 쪽에 이렇게 멋진 누룩덤 바위가 누룩처럼 부풀어 오른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윗덩어리인 누룩덤과 감암산 모산재는 어느 동양화가 한 폭의 산수화를 화폭에 그렸을만도 하다. 앞선 일행은 누룩덤을 버리고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나는 누룩덤 위로 올라섰다. 엄청나게 크게 부풀어오른 누룩 바윗덩어리를 기어오르며 암봉에 올라섰다. 산바람이 시원하다. 잠시 선 채로 시원한 녹차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속이 시원하다. 발아래 펼쳐진 마을과 들판 풍경에 가슴이 확 트인다. 저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사방을 둘러보면 기괴한 형태의 바위와 그 틈에서 헤집고 살아가는 소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할 뿐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고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스님의 '거산시(巨山詩)'가 제격이다.


  日日看山山不足 날마다 산을 봐도 볼수록 좋고


  時時聽水聽無厭 물소리 늘상 들어도 들을수록 좋구나.


  自然耳目皆晴快 저절로 귀와 눈이 맑게 트이니


  聲色中間好養恬 소리와 빛 가운데 평안이 있구나.


 바위를 휘돌아 내려갈 길을 찾는다. 눈비가 올 때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아랫쪽은 절벽이요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바위다.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며 긴장이 된다. 우측으로 돌아가자 한더미 누룩 바윗덩어리에는 소나무에 묶여진 밧줄이 놓여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비스듬한 슬랩의 로프를 부여잡고 내려섰다.


 이제 쉬운 산길이다. 얼마쯤 가면 천황재에 이른다. 저 앞쪽으로 철쭉군락지가 보인다. 아아 아쉽게도 철쭉은 모두 꽃봉오리가 터지지 않은 채 열여섯 처녀의 모습으로 자신을 굳게 닫고 있다. 역시 철쭉꽃은 오월이 되어야 부푼 가슴을 터트리는가 보다. 일렁이는 진분홍 물결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평탄한 구릉은 베틀봉이다. 감암산(828m)에서 천황재로 베틀봉(946.3m)을 거쳐 모산재(767m)로 연결되는 산길은 산세와 경관도 좋고 걷기도 지루하지 않다. 산행의 재미를 흠뻑 맛볼 수 있는 코스다. 소나무 그늘진 솔향을 맡으며 숲길을 걷는 맛도 좋지만 암릉을 조심스럽게 오르내리다 보면 바위 사잇길로 넘나드는 맛도 있다. 30m가 넘는 절벽에 설치된 철제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짜릿한 감각도 좋다. 우측은 모산재로 가는 길로 그 곳 길목에는 산성터와 정상에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동쪽으로 내려서면 암릉의 절경과 국사당을 지나 영암사로 내려간다. 서쪽은 무지개터를 지나 철제계단을 거쳐 영암사 주차장에 이르는 곳이다.


 우리 일행은 모산재 쪽을 버리고 황매산 정상을 향했다. 베틀봉에서 북으로 곧장 가면 황매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사생활이 순결치 못하면 바위 틈새에 물려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순결바위가 있다는 모산재 쪽 경관과 암릉이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산에 오면 정상에 올라야 산에 왔다는 성취감이 이뤄지기 때문에 정상을 택했다. 좌측은 영화 찰영지로 내려서는 길이다. 이 곳 산기슭인 경남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산 1번지에는 '단적비연수'로 잘 알려진 '은행나무 침대2' 영화 촬영지가 있다. 총 4억원을 들여 세트장을 지었다는데 군에서 관광명소로 활용하기 위해 1억원을 지원했단다.


 주말이라 산행 인구가 많다. 정상을 향해 오르내리는 통나무 계단은 사람들로 붐빈다. 허우적거리며 오른다. 정상에 올랐으나 아니다. 저 뒤로 진짜 정상이 우뚝 솟아있다. 예서 그만둘 수는 없다. 정상석을 부여잡고 사위를 휘휘 둘러보며 물을 마신다. 정상 암봉 아랫쪽 산자락 황매평전에는 젖소 목장이 들어서 있다. 이 곳은 고산 철쭉이 자생하며 가을에는 들국화와 억새꽃이 피어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이 황매산은 일반적으로 둔내리를 출발하여 황매정사-무지개터-모산재정상-황매산성터-순결바위-국사당-영암사지 코스로 많이 잡는다. 그러나 우리는 매표소가 없는 중촌리 새터를 지나 한밭에서 시작하여 묵방사입구갈림길-매바위-누룩덤-감암산-천황재-철쭉군락지-베틀봉-황매봉-목장-둔내리주차장으로 4시간여 정도로 약속된 시간에 내려와야 했다. 시간에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모산재와 순결바위를 거쳐 영암사지로 갈 수 있었을 텐데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다른 일행은 정상 쪽을 버리고 모산재를 택했다. 그나저나 산행의 기분은 만끽한 셈이다.(40424)




▣ 김성기 - 5월4일 산행예정인데 미리 가보는 느낌입니다.항상 건강한산행 즐기십시요.
▣ 본인 - 그때쯤이면 철쭉꽃이 많이 피었겠네요. 좋은 산행-꽃구경 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