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신불 억새


  

그렇게 가을은 또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신불평원의 억새를 보기 위해 배내고개를 지나 간월재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 차는 엉켜서 오갈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겨우 간월재에 도착하니 억새보다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가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허접한 기억력을 한탄하며 가져오지 못한 디카와 필름이 다 떨어진 필카를 보며 한숨짓지만 이미 때는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폰카와 두 눈과 시린 가슴만 남아 있습니다.

억새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가을에 흠뻑 빠져있는 간월재

 

신불산 능선에는 가끔 산을 즐기는 님들만 보이고 건너편 신불평원에는 하양 억새가 물결을 치고 있었습니다. 간월재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붐비더니 여기는 다행히(?) 사람보다 억새가 더 많이 보입니다. 신불능선에는 벌써 억새가 기력을 다해가고 있지만 저 건너편에는 온산이 억새로 뒤덮여 가을 햇살을 쬐고 있나 봅니다. 저 아래 신불재에도 억새가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역시 신불억새는 오후에 늦게 간월재 방향에서 영축산 쪽으로 보면서 걸어야 석양에 비치는 순백의 억새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불산 정상에서 발걸음은 제자리인데 마음만 먼저 저 건너 억새평원을 향합니다. 석양은 오라는 이 없어도 서쪽으로 기울고 신불재 억새는 바람에 일렁입니다. 하얀 억새꽃 하나하나는 석양을 받으며 뽀얀 속살을 부끄러운 듯 내보여주었다가 한편으로 기울어지면 아직 푸른빛이 도는 억새대도 미끈한 재 몸매를 드러냈다가는 금새 감추어 버립니다.

 

신불재에는 사람과 억새가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모두 긴 인연처럼 가을에 취해 가고 있습니다.

  

저렇게 유혹하는 억새의 향연을 보고 누가 감히 발을 옮겨 저 너머로 갈 수 있을까요. 저 너머에는 더 아름다운 억새가 있다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달래며 신불재를 겨우겨우 넘어섭니다.

내가 억새가 되고 억새가 석양이 되어 가을이 물들어 갑니다.

  

  

작년에도 여기서 밝은 달빛에 취해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설레는 가슴을 쓸어내렸었는데 또 오늘 이곳에서 그대를 생각합니다. 이미 해는 서녘으로 기울어지고 억새를 햇빛에 취해 일렁이고 있습니다. 저 억새도 하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늘씬한 몸매를 어쩔 줄 몰라 석양에 기대어 깊어가는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을까요.

몰래 감춰둔 사진처럼 신불의 억새는 긴 머리를 풀어헤지고 우리를 반기고 있을까요?

 

언제나 그리운, 언제나 가슴에 파묻고 남몰래 꺼내 보는 곳.

드디어 신불평원입니다. 몇 사람이 사진촬영에 정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서둘러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리며 가슴을 채우고 있나 봅니다.

커다란 사진기 속에는 더 큰 억새의 가을 추억이  담길까요. 

  


저 건너편에 누워있는 신불 여신은 석양에 나신을 드러내 놓고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글로써 이 신불억새를 노래할 수 있을까요. 신불평원에는 하얀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억새가 서로의 살을 비비고 있습니다. 그 위에 여린 듯 슬픈 능선은 어여쁜 여인이 누워있는 듯 부드러운 다리곡선이 석양을 받아 흰 속살을 드러내놓고 유혹의 손길을 흔들고 있습니다. 정신을 놓고 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해는 차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서산 너머로 몸을 숨기려 하고 있습니다.

차마 말하지 못한 사랑을 붉게 토해내고 있는 노을처럼 가을 사랑도 깊어갑니다.

 

너무도 부끄러워 이젠 억새마저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하얀 속살은 먼저 부끄러워 어느덧 붉은 빛을 띠며 서로 먼저 고개를 숙여 숨어들고, 고마운 어둠은 아랫도리를 먼저 감싸주고 있습니다. 저 붉게 타는 석양은 어쩌면 나같이 억새에게 못다 한 사랑을 토해내고 있을까요.

 

붉게 타는 노을에 물들어가는 억새가 슬픔처럼 다가섭니다.

  

어둠이 먼저 내려와서 부끄러운 아랫도리를 감춰주고 있는 신불평원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어둠보다 먼저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신불평원 능선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육체의 허기를 때우노라니 아직도 못다 한 사랑처럼 서글픔으로 배를 채웁니다.

  

불현듯 울산 앞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보름달은 석양을 닮아 붉은 기운을 띠고 아직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덧옷을 입었건만 찬 바람은 못다 한 사랑처럼 가슴을 파고 듭니다. 사방은 어둠으로 깔리고 저 아래 인간의 세상에는 온갖 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발아래에 서성이고 있는 달빛에 억새는 어둠에 잠시 몸을 맡기고 어둠이 나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가야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다고 했습니까.불도 밝히지 않고 억새사이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희미하게 얼굴을 드러내는 억새를 차마 보내지 못하는 발걸음은 무거움에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드디어 달빛도 허허로이 제 색깔을 되찾고 있습니다. 비록 투명한 유리 같지는 않지만 이젠 석양의 눈치를 보지 않을 만큼 성숙해 가고 있나 봅니다.  노란 달빛 아래 하얀 억새는 새색시마냥 얼굴을 쉽사리 보여주지 않습니다.

  

보일 듯 보여주지 않으면서 또 어느새 보여줄 듯 술렁이며 이 내 가슴을 훑어내고 있습니다. 석양에 비치는 억새가 미끈한 긴 다리를 뽐내는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라면 달빛에 숨어있는 억새는 수줍은 새색시의 첫날 밤같은 모습이라고 할까요.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하면 어느새 감춰버리고 안 보는 척 고개를 돌리면 또 얼굴을 먼저 드러내놓습니다.

새색시의 첫날밤 같은 억새, 보일 듯......보이지 않을 듯 .......나를 유혹합니다


오늘밤 어찌 그대를 두고 내 그냥 내려갈 수 있으리이까?  내 그대를 품에 넣지 못할지라도 달빛에 묻혀 가슴을 풀어헤치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렵니다. 차마 부끄러워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달빛으로 시린 가슴으로 그대를 부르겠습니다.

  

드디어 신불재에 이르렀나 봅니다. 신불재에는 남녀의 술에 취한 웃음소리로 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신불재 중턱에서 밤이 되면 산신령처럼 산다는 두 분을 만습니다. 땀을 닦으며 달빛에 취했는지 억새에 취했는지 구수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냅니다. 젊은 시절 날마다 신불에 취해 예쁜 아가씨들과 억새에 흠뻑 빠졌다고 하며 허허 웃으십니다.

달빛은 더욱 교교히 흐르고 저 멀리 손짓하는 억새도 눈이 온 듯 능선을 감싸 안고 기억 저편의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봅니다.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 것.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어도 그 사랑은 남는 것.

오늘 이 달빛에 취한 억새처럼 차마 부르지 못한 사랑 노래를 달빛에 묻어두렵니다.

밤깊은 간월재에는 몇 개의 텐트만 보이고 오랜만에 들어보는 통기타 소리에 가을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