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5월 16일 ~ 18일(2박 3일)
누가 : 홀로
어디서 :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총 45.8km)

 

5월 16일
09:00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하동행 버스 승차
11:00 하동 도착
11:10 화엄사행 버스 승차
11:55 화엄사 주차장 도착, 점심식사 및 화엄사 구경
13:50 화엄사 출발
15:15 국수등, 휴식
16:30 눈섭바위, 휴식
16:40 무넹기
16:50 노고단 대피소(1박)

 

5월 17일
06:00 노고단 대피소 출발
07:00 임걸령, 휴식
07:35 노루목
07:50 삼도봉
08:40 토끼봉, 휴식
09:45 연하천 대피소, 휴식
10:50 형제봉
11:15 벽소령 대피소, 점심식사
12:30 선비샘, 휴식
13:10 칠선봉
13:50 영신봉
14:00 세석 대피소, 휴식
14.30 촛대봉
15:20 연하봉
15:35 장터목 대피소(2박)


5월 18일
05:00 장터목 대피소 출발
05:37 천왕봉, 조망
06:00 천왕봉 출발
06:20 중봉
07:10 써리봉
07:45 치밭목 대피소
08:10 작은소, 휴식
08:30 새재 갈림길
09:50 유평리
10:10 대원사 도착

 


그리움으로 간다
봄철 입산통제가 5월말까지 예정되어 있었으나 5월 15일부터 통제가 풀린다는 반가운 소식에
아껴두었던 휴가를 내고 지리산으로 가기로 한다. 갈 수 없는 아쉬움이 클수록 그리움은 깊어지는 법,
봄 한철 인내한 그리움이기에 더욱 가슴 설렌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는 해보았지만 1100미터의 성삼재까지 차를 타고 올랐다는
부끄러움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에는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원조종주(?)를
하기로 하고 16일 아침 집사람과 아들의 배웅 속에 한시(漢詩) 한수를 떠올리며 집을 나선다.

 

來從千山萬山裏  천산만산 속에서 찾아온 사람
歸向千山萬山去  천산만산 속으로 돌아간 사람
山中白雲千萬重  깊은 산 첩첩히 쌓인 흰 구름
却望人間不知處  그 사람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 없어라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듯, 내가 읊으면 풍류(風流)요, 남이 읊으면 감상(感傷)이다.
푸른 오월에 홀로 가는 풍류객(風流客)이 되어 천산만산(千山萬山)의 지리산으로 간다.

 


화엄사로 들어가며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9시 00분 버스를 타고 하동에 내려 11시 10분 버스를 타고 화엄사 앞에
도착하니 11시 55분이다. 주차장 앞 식당에서 콩나물 국밥 한 그릇 먹고 화엄사로 향한다.

 

화엄사(華嚴寺)는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의 3대사찰과 금정산 범어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5대사찰 중의 하나로서 신라 진흥왕 5년(54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전한다.
각황전, 각황전 앞 석등 등 유명한 사적이 많이 있으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4사자삼층석탑과 석등이다.

 

4사자석탑은 네 마리의 사자가 석탑의 모서리를 받치고 중앙에 합창한 승상(僧像)이 머리로
석탑을 받들고 있다. 이 승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라 하며 석탑 앞의 석등에 앉아 있는
승상은 연기조사라 한다.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이고
차공양(茶供養)을 올리는 모습이라 한다.

 

출가한 승려 또한 부모에게 지성으로 효도를 바치거늘 고속전철 타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3시간이면
달려가는 시대에 멀리계신 부모님께 안부전화 한통이라도 제대로 드리고 있는가? 반성해야 할 일이다.
화엄사를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마음도 가다듬는다. 불자(佛子)는 아니지만 조용한 산사를 즐겨 찾는 편이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1시 50분 일주문을 나와 왼쪽의 계곡을 타고 돌 포장길을 걸으며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동행(同行) 없이 혼자 걷는 산길, 때로는 외롭지만 마음대로 갈 수 있고 혼자만의 사색을 즐길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2박 3일 동안 어떤 상념(想念)이 머릿속을 지나갈지 궁금하다.

 

어제 내린 비로 계곡이 요란하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계곡은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에 바쁘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같을지라도 바위의 형상과 크기에 따라 그 울리는 소리는 각기 다르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젊은 친구가 내려오기에 어디서 오냐고 물었더니 로타리 산장부터
종주했다고 한다. 어제 산길이 열린다고 산에 들었겠지만 비 때문에 고생했겠다.

 

일요일, 월요일 비 온다는 소식에 여벌 옷 등 잡동사니를 많이 넣어가다 보니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
오늘 밤은 노고단 대피소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급할 것 없이 느긋하게 걷는다. 코재 가파른 오르막길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올라서니 성삼재에서 대피소로 가는 넓은 길이 나온다. 여기는 산책길이다.
대피소에 도착하니 4시 50분이다.

 


깊어가는 노고단의 밤
배정받은 자리에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는다. 노고단을 탐방하고
내려오는 팀들도 보이고 성삼재에서 산보삼아 올라온 가족들도 많다. 취사도구를 지고 무겁게 다니는 것을
싫어하여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컵라면과 빵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서울, 대전, 창원에서 오신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산이 좋아 멀리서 혼자 온 사람들의
애기거리는 자연스레 산 이야기이다. 고교시절 지리산 종주할 때의 추억, 천왕봉에서 일출을 본 이야기
등이 오간다. 수면제로 가져간 팩 소주 한 병을 창원에서 오신 분과 나누어 먹고 잠자리에 든다.

 

오월의 지리산 저녁 기온이 서늘하다. 산에서 밤을 보내는 것 흔치않은 경험이다. 일년에 몇 번이나 될까?
바쁜 일상과 격리된 적막한 고독이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지리산의 밤은 깊어가고
대피소 안 코고는 소리도 높아져 간다.

 

山深禽語冷  산이 깊으니 짐승 소리가 차갑고
詩成夜色蒼  시를 이루니 밤빛이 푸르다

 


노고단에서 연하천까지
새벽 4시 조금 넘어 몇 사람이 짐 싸들고 대피소를 나가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5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보니 사방이 구름속에 갇혀 보이지 않고 이름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소리만 요란하다.
옆 사람들이 안 일어나 누워서 기다려 본다. 더 이상 늦을 수 없어 6시에 출발한다.
천왕봉까지 25.5km라고 적힌 이정표를 보고 노고단 안부를 향해 올라간다

 

돌탑이 서 있는 노고단 안부에서 후덕(厚德)한 반야봉(般若峯)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돼지령까지는 노고단 옆을 도는 7부 능선 길이라 길이 좁다. 산나물을 캐는 노부부를 만나 잠깐 동안 동행한다.
아저씨는 44년 전 스무 살 때 상봉(천왕봉)에 올랐다고. 인적이 희미한 길을 군화 싣고 발바닥에 물집
생겨가며 걸었다고, 먼 옛날 애기다.

 

돼지령에 오니 구름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가까운 노고단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산행에
노고운해(老姑雲海)를 보고 싶었으나 날씨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노고운해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 멋진 작품을 만들었으니 작년 가을 경기도 화야산(和也山)에서 멋진 운해를 본 적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지리산에 미치지 못한다.

 

노고단대피소를 출발한지 1시간 만에 임걸령에 이른다. 임걸령 샘물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다.
간식과 함께 물을 마시며 잠깐 쉰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 조망을 즐기기는 힘들 것 같다.
봉우리 하나 넘을 때 마다 사방을 둘러보며 조망을 즐기는 것이 지리종주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중의 하나이다.

 

반야봉과 주능선의 갈림길인 노루목이다. 왼쪽의 반야봉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내일 천왕봉 일출을
보기위해 오늘 장터목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아쉬움 속에 오른쪽 길을 택하여 삼도봉으로 간다.

삼도봉 또한 구름 속에 잠겨있다. 삼도봉(三道峯)은 전북, 전남, 경남이 만나는 봉우리이다.
그 정상을 삼도가 갈라지는 지점(地點)으로 보았는지 삼각형의 뾰족한 철제 기념비가 날카롭다.
차라리 두루뭉술한 돌비석이 좋겠다.

 

삼도봉에서 5분 내려가니 화개재로 향하는 유명한 551개 목제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등산화로 계단 높이를
재어보니 대략 20cm 이다. 그러면 20 x 551은 11,000cm 즉 110m 정도 아파트 한 층을 2.6m로 보면 42층이다.
42층을 배낭 메고 올라오려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화개재에서 뱀사골로 내려가는 길을 한번 쳐다보고 30분을 열심히 땀 흘리며 오르니 토끼봉이다.
토끼봉은 반야봉의 정동향(正東向), 즉 묘방(卯方)에 있다하여 토끼봉(卯峯)이라 한다.
묘(卯)는 방위로 동(東), 색으로 청(靑), 오행으로 목(木), 짐승으로는 토끼를 의미한다.
그러면 서울의 정동향에 있다는 정동진(正東津)은 토끼진(卯津)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토끼봉에서 보는 주능선 조망도 멋있으나 흘러가는 구름사이로 파란 하늘이 잠깐 보일 뿐 멀리 볼 수는 없다.

평일이라 산행하는 사람이 없다. 임걸령에서 서울에서 왔다는 두 사람을 만나고 토끼봉을 넘을 때까지
한사람을 보질 못했다. 지리산에 이런 날도 있는지 호젓한 산행길이다. 마치 평일에 서울 근교산행하는 것 같다.
명선봉을 넘으니 한 사람이 쉬고 있는 것이 보인다.  09시 45분 연하천대피소에 왔다.


연하천(煙霞川), 그 이름처럼 구상나무, 분비나무에 둘러싸여 동양화에서 봄직한 별천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에서 원두커피 한잔을 마신다. 대피소 앞에 흐르는 샘물에 캔 맥주가 있더니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한 잔하고 싶었다.

 

淸明時節雨粉粉  청명한 시절 비가 내리니
路上行人欲斷魂  길가는 나그네의 마음은 무겁다
借問酒家何處有  주막이 어디 있느냐 물으니
牧童遙指杏花寸  목동은 멀리 살구꽃 마을을 가리킨다

 


연하천에서 세석까지
도를 닦던 두 형제가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서 있다가 굳어버렸다는
형제바위, 곧 형제봉(兄弟峰)에 도착한다. 바위에 붙은 작은 소나무와 어울려 바위가 제법 멋있다.
산 이름에서 형제봉, 의상봉과 원효봉을 곧잘 볼 수 있는데 비숫한 크기의 두 봉우리가 서있으면 형제봉이라
부르고 그것이 보다 규모가 커지면 의상봉과 원효봉이 되는가 싶다. 이것은 단지 혼자만의 추측이다.

 

가야할 방향으로 바라보니 천왕봉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저 턱밑까지 가야하는데 더욱
멀게만 느껴진다. 형제봉에서 내리막길로 벽소령대피소로 가지만 너덜을 타고 오르내리는 길이 쉽지 않다.

11시 15분 주능선의 중간지점인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한다. 대피소에서 파는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는다.
전투식량처럼 뜨거운 물만 붓고 6분 기다리면 밥이 된다. 빨간 우체통을 보니 아들 생각이 나서 엽서 한 장을
보냈다. 올 여름에 같이 지리산에 오자고 했다.

 

벽소령을 출발하여 50분 만에 선비샘에 도착한다. 평소에는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도 아무도 없다.
선비샘의 시원한 물을 마시고 과일, 초콜릿을 먹는다. 먹기 위해 산에 온 사람처럼 쉴 때마다 계속 먹는다.
먹은 만큼 간다나? 산행 할 때 걸음이 빠른지는 않지만 꾸준히 가는 편이라 5분 이상을 쉬지 않는다.
지리종주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가되 쉬는 시간을 적게 하고 꾸준히 걷는다.

 

선비샘에서 칠선봉을 거쳐 영신봉 가는 길이 힘들다. 출발한지 시간도 꽤 되가니 체력도 떨어지고 오르내림이
심한 암릉이 많기 때문이다. 일곱 개의 바위가 신선처럼 보인다는 칠선봉에 오른다. 작년 가을 암봉들이
저녁 구름 속에서 보일 듯 말 듯하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었다. 목제 계단과 철제 계단 넘어 13시 50분
드디어 영신봉이다. 저 아래에 세석고원(細石高原)이 펼쳐져 있다. 멀리 산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가까운 촛대봉에 구름이 몰려다니며 촛대봉을 보여주었다 숨겼다 하고 있다.

 


화상사(花相似)와 인부동(人不同)
세석은 30만평에 달하는 넓은 평원이다. 일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서 보기 힘든 지형이다. 기대를 했던
세석 철쭉들이 벌써 졌는지 연분홍색은 찾아보기 힘들다.  당(唐) 시인 유희이(劉希夷)의 “늙은이를 대신하여
슬퍼함(代悲白頭翁)”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피는 꽃은 똑같지만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네

 

시인은 해마다 똑같게 피어나는 꽃에 비하여 꽃이 필 때 마다 변해가는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나 가만히 생각하면
그렇게 슬퍼할 일만 아니다. 지리산 철쭉이 한번 피었다 질 때마다 흰 머리가 늘고 주름살은 한 줄 더 생기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딸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장강(長江)의 뒤물결은 앞물결을 밀어 내며 흐르니 당연한
자연의 순리 아닌가?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튼튼하게 자라 같이 지리산 종주할 날을 기다린다.
가족이 땀 흘리며 함께하는 지리종주는 아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 되리라.

 

세석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촛대봉으로 올라간다. 촛대봉으로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촛대봉에 올라서니
바람이 심하게 분다. 가만히 서있기 힘들 정도이다. 제석봉과 천왕봉을 바라보니 이제는 손에 잡힐 듯하다.
오늘의 목적지 장터목까지는 1시간이면 갈 수 있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바윗길을 힘들게 넘어간다.


연하선경(煙霞仙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바위와 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적당한 오르내림은 있으되 그렇게
힘든 구간은 아니다. 장터목 가기 직전에 동네 뒷산의 오솔길 같은 평탄한 구간이 있다. 산길을 걷다가 이런 길을
만나면 기분이 무척 좋다. 장터목이 보인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까지 왔구나. 기쁜 마음에 노래를 부르며
장터목으로 내려온다. 

 

장터목에 도착하니 3시 35분이다. 여기서 오늘 산행을 접으려니 약간 아쉬워서 치밭목까지 갈까 하고 생각해본다.
‘치밭목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면 7시경이면 갈 수 있는데, 그러면 천왕봉 일출은 안보고? 대피소에서 내일
새벽 4시까지 있기는 너무 시간이 긴데...‘ 고민하다가 공단직원에게 치밭목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았다.
요즘 내부수리중이라 숙박은 안된다고 한다. 장터목에서 자기로 한다. 고민 끝이다.

 

탈의실에서 물휴지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노고단대피소에서 만났던 창원 아저씨가 앉아있다.
아침에 자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도중에 본 적도 없는데. 코고는 소리에 한잠도 못자고
4시 40분에 출발했고 오후 2시 30분에 장터목에 도착하여 천왕봉에 올라갔다 왔다고 한다. 바람심한 천왕봉에
빈 몸으로 올라가 배가 고파 혼났다고 하면서 천왕봉은 먹을 것 짊어지고 가야 된다고 해서 사람들과 웃었다.
그러나 반바지에 입고 천왕봉에 올랐으니 얼마나 추웠을꼬? 버스 끊어지기 전에 빨리 중산리로 내려간다기에
악수하면서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했다.

 

저녁은 비빔밥과 참치 캔으로 먹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밖에 나가니 하얀 운무위에
해가 지고 있다. 하얀 색과 붉은 색이 조화를 이루어 보기 좋다. 오늘 하루의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다.
사진 찍는 사람들도 많다.

 

평일이지만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장터목에서 하룻밤을 자는 사람들은 천왕봉 일출을 기대하고 있겠지 내일
날씨가 좋아서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을까? 바람이 심하게 불고, 별이 반짝이기 때문에 일출을 볼 것 같다.

 

 

천왕봉 가는 길
4시 40분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5시 15분경이 일출 예정시간인데 늦었다. 서울에서 온 사람이
같이 가지고 해서 준비하고 출발하니 5시이다. 구름이 낮게 끼어있지만 일출은 볼 것 같다. 여러 사람들과 같이
천왕봉으로 출발한다.

 

제석봉으로 올라가는 걸음, 초반이라 천천히 오른다. 불타고 남은 고사목 사이로 걸으며 마음은 편치 않다.
탐욕스런 인간들이 남긴 자취이다. 시인 이성부는 고사목을 “뼈다귀 나무”라고 했던가! 저 고사목들도 몇 년
이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석봉을 내려오니 촛대봉에 햇빛이 비치는 것 같다. 이럴 수가, 일출보기 위해
14시간을 걸어왔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게을러서 타이밍을 놓치다니 마음이 급해져 속력을 낸다.

 

천왕봉으로 가는 통천문(通天門)에 선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통천문을 오르지 못한다 했건만 요즘은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도록 철제 사다리가 놓여있다. 그러나 통천문을 오른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 통천문을 오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천왕봉, 그 절정(絶頂)에 서서
5시 37분, 천왕봉(天王峯, 1915m)에 선다.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다. 고요하다. 해는 떠올라 환히 빛나고 있다.
아쉽지만 천왕봉에서 방금 떠오른 해를 보는 것도 일출을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위한다.

 

사방 몇 백리가 보이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우뚝 솟아올라 거칠 것 없는 조망이다. 높은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는
기쁨은 아는 사람은 안다. 멀리 노고단과 반야봉도 보인다. 어제와 달리 맑게 갠 날이다. 천왕봉, 그 절정(絶頂)에
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를 떠올리며 인생지사를 되새긴다.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가네“ 이것은 조맹덕(曹孟德)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이 푸른데, 맹덕이 주랑(周郞)에게
곤욕(困辱)을 받은 곳이 아니던가?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깨뜨리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갈 제,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감에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어라. 술을 걸러 강물을 굽어보며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이러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조조, 주유, 유비, 제갈량 등 옛날의 중국(中國)의 영웅들이 아니라 마이클 잭슨, 마라도나, 타이슨 등 젊은 나이에
절정(絶頂)에 서서 천문학적 돈과 인기를 한 손에 감싸 쥐었던 이국(異國)의 스타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팝의 황제라는던 마이클 잭슨, 축구의 신동이라던 마라도라, 핵주먹이라던 타이슨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마이클 잭슨은 성형수술한 얼굴로 성추행범이 되어 법정에 서고 마라도나는 온갖 기행 끝에 병원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으며 타이슨은 돈을 벌기 위해 이종격투기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니 젊은 사람의 성공은 함부로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 중산리에서 몇 시간 만에 천왕봉에 오르는 것 보다
화엄사에서 시작하여 머나먼 길을 걸어와 천왕봉에 서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 또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어내고 맛보는 중년 이후의 절정(絶頂)이 훨씬 가치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위 틈 사이에 몸을 낮추고 아침 대신으로 사과 하나를 먹는다. 10분 정도 지나자 같이
출발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올라온다. 대원사까지 같이 가자던 서울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걸음걸이로
보아서 동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먼저 간다고 인사나 하려고 기다리지만 6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할 수 없이
중봉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
중봉까지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다. 오르내리는 길이 가파르다. 20분 만에 중봉에 선다. 중봉(中峰)은
지리산에서 2번째로 높지만 천왕봉의 그늘에 가려 시선을 끌지 못하는 봉우리다. 높기는 하나 별 다른 특징
없으니 그렇게 되나 보다. 그러나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키듯 하봉(下峰)과 중봉이 있으므로 천왕봉이 더욱 돋보인다.

 

써리봉을 통과하는 길 무척 험하다. 산의 옆구리를 돌다가 머리에 올라섰다가 수많은 철계단을 오르내리며 간다.
써리봉 정상에서 천왕봉과 중봉을 보니 손을 잡고 있는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인다. 써리봉에서 보는 오월의 하늘이
무척 푸르고 청명하다. 계절의 여왕인 오월에 지리산에 올 수 있는 것에 행복해하고 산으로 보내준 집사람과
아들에게 고마워한다.

 

치밭목대피소에 도착하니 내외부 수리중이다. 이것도 모르고 어제 왔으면 야간산행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치밭목에서 유평리까지 계곡을 끼고 내려간다. 이 길도 보통 험한 것이 아니다.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고
투박한 길이다. 눈 쌓인 겨울철이나 야간에 산행하기 어려운 구간이다.

 

유평리에 내려서니 기분이 무척 좋다. 이틀 전 내린 비로 물이 불어 대원사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다.
계곡의 바위들이 붉은 색이다. 참나무들이 가득한 계곡 양편 숲에 간간히 보이는 붉은 소나무와 잘 어울린다.

 

10시 10분, 드디어 대원사에 도착하여 머나먼 종주를 끝내고 사찰 경내를 구경한다. 대원사는 비국니 스님들이 있는
도량(道場)이라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정갈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96년 8월에 집사람과 아들을 데리고 대원사에
온 적이 있다. 그 때 찍었던 사진들을 생각하며 그 장소에 가 본다. 아쉽게도 대웅전 석축 앞에 있던 파초는 보이지
않지만 일주문 앞 샘물,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장독들은 여전하다. 그러나 당시 2살이던 아들은 훌쩍 자라 10살이 되었다.

 

이로서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지리산 종주는 끝났다. 대원사를 떠나며 지리산과 이별 한다. 허나, 곧 다시 만나리라.

 

下馬飮君酒  말에서 내려 술을 권하며
問君何所之  그대에게 묻노니 어디로 가려 하는가
君言不得意  세상일 뜻대로 되지 않아
歸臥南山睡  남산으로 돌아가 은거하려네
但去莫復問  그러면 가시게 다시 묻지 않으리
白雲無盡時  그곳에 흰구름 한이 없으리

 

 

 

 

▣ 산모퉁이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리산종주기가 올라왔네요... 종주 축하드립니다. 님 덕분에 멋진 한시에 곁들여 우리의 명산 지리산 잘 감상했네요. 그곳에 언젠가 또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이는군요... 감사합니다.
▣ 지리산에 살고싶?- 오늘 처음으로 종주를 해내요. 구례식당에서 서울에서 온신분과 만나 같이 동행을 하기로하고 산행을시작했어요. 산행중 노고단버스에 타신분들중에 광주에서 오신분과 3명이서 지리산종주를 했내요. 벽소령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구경하고 중산리로 하산하여 지리산종주를 하여내요. 광주에서 오신분이 무릎이 아파 산행을 잘 했는지 ....
▣ 미시령 - 으~~ 지리산... 임걸령 샘물도 여전하군요... 혼자 머언 길... 애쓰신 만큼 기쁨도 크셨겠군요. 가슴 가득할 뿌듯함과 그리움... 짐작이 갑니다. "그러면 가시게 다시 묻지 않으리 그곳에 흰구름 한이 없으리" 한시까지 즐감했네요.
▣ 山용호 - 슬슬 지리산 조식이 나오는군요..종주 축하드리며..늘 건강산행하세요..
▣ 한울타리 - 고생하셨구요, 종주 축하드립니다. 지리 종주를 꿈꾸고 있는데 님의 산행기를 교과서 삼아 다녀오면 되겠군요. 감사드립니다.
▣ 산노을 - 먼저 종주를 축하드리며 몇달만에 읽어보는 지리산 종주 산행기 잘 읽고 지나갑니다. 님의 길을 따라 곧 떠날까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산행 바라겠습니다.
▣ 孤江 -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키듯,하봉(下峰)과 중봉이 있으므로 천왕봉이 더욱 돋보인다...하 이 대목이 마음에 듭니다...원조 오리지날 종주를 하셨네요...적절한 한시를 많이 아는 풍류객입니다...그려...저는 노고단-중산리의 가리지날 종주를 했는데..언제가 한번 혼자서 화엄사...대원사코스를 가고 싶습니다...그리고 하봉과 중봉의 빛나는 2인자를 보고 싶습니다...종주 축하드립니다
▣ 불암산 - 먼거리, 거침없는 님의 행보에 축하를 보내드립니다. 1주일 간격으로 먼저 지리를 종주하셨군요. 저는 이번주로 예정을 잡아 놓았는데..... 산뜻한 지리 종주의 테잎을 끊으신것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즐산하십시요.
▣ 산거북이 - 천왕봉에서 동파거사의 적벽부를 떠올리시는 품새에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경방해제 후 첫 종주기에 격조있는 걸음걸이를 보게 되어서 기쁩니다.
▣ 김학준 - 노고단에서 장터목까지 엄청시리 빨리 가신것같군요. 저같으면 그시간이면 아마 벽소령이나 세석정도 갔을것 같은데... 지리산을 무척 사랑하시는군요!!! 잘보고 갑니다.
▣ 똘배 - 지리에서 조용하면서 유유자적하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종주 축하드리며 저도 빨리 가보고 싶어집니다.
▣ 운해 - 아! 내는 언제나 천황봉의 일출을 볼꺼나? 한 시와 어울려 진 산행길 참으로 좋습니다. 지리산의 종주가 저에게는 야간산행으로 이루어 져 중간 중간 필름 끊기듯 한데 산세한 산행기에서 줄감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 삼포친구 -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올 여름에 청학동에서 한번 올라볼까 하는데요..
▣ 구름 - 올해초 큼맘먹고 오르다 중도하차한 기억이 나는군여...^^그러나 다시 도전할껍니다...님의 글이 나에게 힘을 주는군여...^^잘봤읍니다..
▣ 코스모스 - 지리산 종주 ~~~ 올해도 지리 종주를 꿈꾸는 많은 산님들의 희망을 첫 스타트로 다녀오셨군요. 저도 올해는 성삼재가 아닌 화엄사부터 해보고싶은데....산행기 고맙습니다..항상 안산.즐상 하시길....^^*
▣ 조송훈 -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네~~산행기를 읽는 내내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혼자서 유유자적하게 산행을 하신 님의 모습인가 십습니다. 완벽한 지리산 종주 축하드리고 생생한 그리고 포근한 산행기 잘 읽고 갑니다.
▣ 산사랑방 - 지리 종주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상 당일로 곧 떠나리라 마음 먹고 있었는데 님의 종주기를 보니 마치 제가 다녀온 것 처럼 흐믓해집니다. 깔금한 산행기와 사진 .. 2박3일의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대장정이면서도 여유로운 일정.. 부럽습니다. 건강하세요~~^^*
▣ 김석기 - 산행기를 읽으며 올 연초에 다녀온 길을 따라가봤습니다. 종주 축하합니다.
▣ 하늘산 - 그때..한없이 오르던 그길...헉헉...또..가고싶네요...
▣ 풀&별 - 지리산은 사계절 어느때 보더라도 마음의 고향같이 푸근한것 같아요
▣ 유달 - 종주축하드립니다.저도 15~16일 화엄사 세석 대원사길 다녀왔읍니다^^*
▣ 初者 -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는구먼! 언제 또 지리산엘 다녀오셨는가..같아가자더니 못참고 혼자 가셨어~! 후기 읽으며 마음으로 동행했네..그려..
▣ 무이심 - 저도 지리산 종주를 같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건강하세요...()...
▣ 새내기 - 저도 그길로 22~24일까지 완주했는데 선생님의 한시와 종주기 많은 도움과 감동이었습니다.저는 촛대봉에서 일출을 맞이하여 지금도 그 황홀함에 가슴벅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