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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만남의 집'
나이 사십에 도전했던 백두대간무지원 단독종주 후기 
    
조령산 정상에서 신선암봉 가는 길은 험하다. 비까지 내려 암벽과 진흙이 흘러내려 줄을 잡고 내려가도 죽죽 미끄러진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끝이다. 문장대 이후 지금까지 암릉과 험한 경사 그리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지나면서 험한 경험은 다 했지만 오늘은 상황이 다르다.

▲ 천마산악회회원들
ⓒ 정성필
그동안 날이 좋았고 바위는 뜨거워 신발 밑창을 녹일 만큼 바위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미끄러운 경험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밟는 돌마다 빗물에 미끄러지고 흙물이 흘러내린 바위는 그야말로 미끄럼틀이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갈 신선암봉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린다.

밧줄을 잡고 내려서다 기어가다 미끄러져 넘어진다. 무릎이 시큰거리며 아프다. 비는 오락가락 한다. 몸이 젖었다. 배낭을 벗으면 땀과 체온이 뒤엉켜 김이 하얗게 피어난다. 신선암봉을 향해 가다 신선암봉 밑에서 당일 산행을 온 천마산악회 회원들과 만난다.

오늘은 사람들과 두 번째 만남이다. 당일 산행팀 중엔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산행을 하신 분도 있다. 그분들이 얼마나 빨리 걸으시는지 나는 위험한 길을 혼자가지 않으려고 그분들을 정신없이 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분들이 바위위에서 쉴 때 겨우 따라가 숨을 고르며 말을 나눈다. 나누어야 서로를 알 수 있다.

▲ 무릎에 붙인 파스(양쪽 합해 8장)
ⓒ 정성필
아무것도 나누지 않으면 인연이 될 수 없다. 말을 나누고 느낌을 나누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더 발전하는 인연이 될 수 있다. 산악회 대장이라고 하신 분은 이미 구간종주로 백두대간을 하셨던 모양이다. 백두대간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아신다. 신선암봉에서는 몸을 낮은 포복 자세로 해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나는 배낭이 커서 낮은 포복으로 가도 걸린다. 한참을 끙끙대니 산악회대장님이 내 배낭을 건너편에서 받아 준다. 배낭 없이 통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천마산악회 회원들이 걱정도 해주면서 부러워하기도 한다. 산악회분들이 나에게 참외와 사과 그리고 김밥과 행동식으로 먹을 수 있는 부식들을 배낭에서 꺼내 주신다. 감사하다.

▲ 밧줄잡고 가야하는 직벽구간
ⓒ 정성필
짧은 시간 함께 걸었어도 많이 친해진다. 상암사 갈림길에서 그분들은 상암사 쪽으로 하산하신다며 헤어진다. 만남과 헤어짐 흔한 일이지만 헤어지고 난 자리는 공허하다. 계속 혼자 있을 때 몰랐던 외로움과 고독이 뭉쳐서 몰려온다. 고독하게 걷는 사람은 고독이 친구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더 힘들기만 하다.

조령삼관문 가는 길 마음도 몸도 지쳐 바위에 걸터앉아 쉰다. 비는 잠시 그쳤다. 배낭을 풀어 버린 채 만냥 앉아 산 아래 세상을 본다. 한참을 앉아 있으려니 무릎이 아파온다. 그동안은 크게 아프지 않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마음이 허전해지는 순간 무릎도 통증이 심해진다. 파스를 꺼내 무릎에 붙인다. 마지막 장을 붙이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둔다. 카메라를 배낭에 넣다 바위에 손을 긁어 상처를 입는다.

▲ 조령삼관문
ⓒ 정성필
무릎도 아프고 마음도 허전해서 바위에서 더 쉬기로 한다. 멍하게 산 아래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솟는다. 까닭 없이 눈물이 난다. 왜 백두대간을 하고 있는지 회의가 일기도 한다. 그냥 저 산 아래로 내려가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바위에 긁혀 피가 굳어 검붉어진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낸다.

일어선다.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한다. 중간에 포기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야한다. 앉았던 자리를 박찬다. 성터를 지난다. 조령삼관문 도착한다. 몸은 간간히 내리던 비에 젖어 엉망이다. 조령삼관문은 넓은 잔디와 잘 다듬어진 성터가 있어 텐트 칠 장소를 찾으러 배낭을 놓고 주변을 탐색한다. 저녁에 비가 혹 내릴지도 몰라 기왕이면 지붕이 있는 막영지를 찾기 위해 성과 주변을 꼼꼼히 살피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다.

이미 해가 뉘엿해지는 시간이라 관광지인 이곳에는 오가는 사람이 전혀 없다. 성문을 꼼꼼히 살피다 성문 바로 위 망루 위가 막영지로 적당할 듯 보인다. 망루로 올라간다. 밖에서 보기에는 지붕이 있고 벽이 있고 바닥이 젖지 않아 오늘 저녁 잠자기에는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그런데 막상 망루에 올라가니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품고 있다. 눈빛이 "제발 이 보금자리만은 침범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망루를 포기한다.

"그래 나는 너희들의 보금자리를 망가뜨리지 않을 거야."
"나는 너희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이곳은 너희 집이야."
"나는 다만 지나가는 사람일 뿐, 나는 너희들에게 조금도 피해줄 이유가 없어."

▲ 백두대간 만남의 집
ⓒ 정성필
나는 망루를 내려서 다른 곳을 둘러본다. 비가 내린 땅은 곳곳이 젖어 텐트칠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삼관문을 넘어 수안보 쪽으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 제 1관문쪽으로 행한다. 내려가다 보니 높은 계단이 있고 계단 위에 집한 채 있었는데 집에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백두대간 만남의 집'

반가운 마음에 배낭을 둘러메고 만남의 집으로 간다. 집에는 중년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차와 식사를 팔고 있었다. 라면을 시켜 남은 밥을 말아 먹는다. 밥을 먹고 아주머니에게 부탁한다. 방이 있냐고? 비도 맞고 옷도 배낭도 젖고 해서 묵을 방이 있냐고 묻는다. 아주머니는 가게 뒤쪽으로 돌아 아들이 쓰던 조그마한 방을 내주신다.

빨래도 하라고 세탁기 있는 곳도 가르켜 주신다. 빨래를 하고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 샤워도 한다. 방에는 불도 들어와 방이 따스하다. 배낭의 물건을 죄다 방안에 꺼내 말린다. 몸이 따스한 방에서 눈 녹듯이 녹는다. 졸립다. 내일 아침이면 옷도 물건들도 몸까지도 뽀송뽀송해질 것이다. 눅눅한 것에서 해방된다 생각하니 흐뭇해진다.

▲ 배낭에서 꺼내 말리는 살림살이
ⓒ 정성필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 연속종주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