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청산장은 21시에 소등한다.
출입구 쪽 2층 끝 가장자리에 지정된 자리로 올라가 침낭 속에 몸을 넣고 잠을 청한다.
간헐적으로 드나드는 인기척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말똥거리던 정신은 저녁을 먹으면서 한 잔 마신 더덕주의 취기가 이제야 효험을 발휘 하는지,
아니면 피곤한 육체의 생리적 욕구인지는 몰라도 슬며시 잠이 몰려온다.

갑갑함에 잠이 깬다.
벽시계는 새벽1시를 가르치고 있다.

무덥다.
침낭을 활짝 열어 재켜도 갑갑하면서 후텁지근하다.
윗옷과 바지를 벗고 셔츠와 팬츠 차림의 알몸으로 침낭 위에 누웠지만 다시 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남방셔츠만 걸치고 화장실로 가기 위하여 산장 밖으로 나오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대여섯 명은 아직도 서서 대화를 나누면서 술을 마시고 있다.
별빛이 내리는 산장에서 한 잔의 술로 추억을 쌓아가는 젊음은 건강함이다.

하늘엔 별이 총총 박혀있고 바람은 조금 불고 있다.
한참을 서성인 탓으로 시원함은 이내 사라지고 추위를 느끼므로
서둘러 산장 안으로 들어가서 침낭 위에 누워서 잠을 청하지만 한 번 깬 잠은 쉽게 올 것 같이 않다.
잠 못 이루는 긴 밤에 찬란한 일출을 기대 하면서 이리 저리 뒤척이다 마침내 잠이 든다.

05:30분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하여 장시간의 기다림을 각오 해야 하므로 추위에 대비한 완전 무장한 복장으로 산장을 나선다.
밖은 캄캄한 허공 속에 거센 눈보라가 세차게 불고 있다.

몸이 날리어 갈 것 같아 서둘러 산장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 일출은 볼 수 없는 것이 확실 하므로 다시 침낭 위에 누워서 시간을 보낸다.
일찍 기상한 산꾼들도 일출 보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어간다.

안내산악회를 따라 야간산행을 한 등산객들이 몰려 내려오니 산장 안이 소란스럽다.
일출은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대청봉에는 올라 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다시 복장을 점검하고 초속16m의 강풍 속으로 출발한다.(06:30)

가벼운 몸이지만 바람에 날리지 않기 위하여 바람을 등지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강풍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고 숨도 쉬지 못할 것 같다.
등산로 밧줄을 잡고 버틴다.

전진을 못하고 잠시 바람이 잦아지기를 기다린다.
숨을 가다듬고 한 걸음 전진한다. 또 한 걸음 …….

드디어 대청봉(1708m)이다.(06:50)
텅 빈 정상에는 표지석만 눈보라에 얼어 붙었다.  
바람이 거이 없는 동쪽 바위 뒤에서 30여분 기다리지만 온 천지는 구름뿐이다.











이미 일출시간이 지났으므로 더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 한 것 같아
광풍이 휘몰아치는 구름 속을 뚫고 다시 중청산장으로 내려간다.(07:30)

악천후를 뚫고 중청산장에 도착하자마자 500cc생수를 한 병 구입하여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 먹고 기다리지만
날씨는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기상악화로 공룡능선 산행은 위험하니 삼가라”는 안내방송이 계속하여 되풀이 된다.

중청산장은 9시에 전원 퇴실하여야 한다는 안내방송도 나온다.
눈 덮인 빙판길을 따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공룡능선을 가는 것은 위험도 하겠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아 그냥 오색으로 하산 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출발한다.(08:40)

세찬 바람 때문에 옆으로만 자라는 설악산 눈측벽나무 군락지를 지나 대청봉에 오늘 2번 오른다.(08:55)
배낭을 메고도 바람에 몸이 날린다.

기다려도 날씨가 맑아질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오색으로 하산한다.(09:20)


이따금씩 나타나는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려간다.
상고대 핀 가문비나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름다운 풍경을 넋 놓아 바라보면서 천천히 천천히 내려간다.



















내려 갈수록 주목과 가문비나무와 소나무가 바위와 하늘과 어울려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데 구름이 흩어진다.
파란 하늘이 보인다.
날씨가 몰라보게 빠르게 개이고 있다.













다시 올라 가서 공룡능선으로 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육체는 무거운 배낭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묻고 있다.
망설인다.
갈등. 또 갈등.

다시 구름이 몰려온다.
마음과는 달리 몸은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

다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이제는 너무 많이 하산한 것 같다.

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눈부시게 시린 하늘이 나를 서럽게 만든다.





다시 대청봉으로 올라가야 하나?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비워라! 그리고 겸허 하라!
“모든 것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라는 신의 뜻을 기억하라.

다음을 기약 하면서 오늘은 이만 내려 가라는 신의 뜻(?)을 따르련다.
-사실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름 길을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간사한 마음을 숨기기 위하여
자기 합리화를 위한 신의 뜻을 빙자한 견강부회임.-

“…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 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천천히 내려 가면서 주변 풍경과 변화하는 날씨의 깊은 의미를 생각 하면서 걷는다.
뒤돌아보면 중청의 하얀 안테나와 중청산장이 보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대청봉도 보인다.









아름답다!
하얀 겨울에 머물고 싶다!
간사스러운 마음은 또 다시 갈등을 일으킨다.

“…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 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 오면서 바라보이는 점봉산이 우람하게 다가온다.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를 쪼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리어 온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생각보다 작은 딱따구리를 사진에 담아본다.



설악폭포를 지나(11:20)
독주골입구에서 점심을 먹는다.(12:50)
몇 년 전 레네와 같이 단풍산행을 마치고 몸을 깨끗이 씻던 그곳이다.

이 골짝 저 능선에 맺힌 땀의 흔적을 기억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어울린 사연을 생각한다.
온 천지를 감싸는 포근하고 따뜻한 사랑을 기원한다.

반주로 더덕주 한 컵을 마시고 아직도 남은 100cc정도는 그대로 배낭에 넣고
추억을 상기 하면서 주변을 휘돌아 보고 출발한다.(13:37)
오색매표소를 지나 시외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14:00)
주전골이 한 눈에 들어온다.




14:35분에 도착하는 동서울 행 버스를 타고 한계령을 넘어간다.

♪♫♬ ~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 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 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