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산행기 < 2004년 2월 10일~12일/성판악등산로 출발 원점회귀 등반/한뫼산악회 따라/ 일산 출발>

 

1. 한라산 산행기 

 

 2. 제주도 자투리 여행

 

 1 한라산 산행기 창밖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라산 등반이 시작되는 날 제주도의 아침이었다. 간밤 낯선 고장에서, 낯선 다섯 사람과 비좁은 방에서 어울려 잠을 설쳐가며 오히려 새벽을 기다려서인가. 떠오르는 태양이 더욱 반가웠다.

 

우리는 성판악휴게소(750m)에서 한라산 등반을 시작한다. 그러나 따라 간 곳이 전문산악회가 아니라서 정상에서 관음사 코스로 하산하는 것이 아닌(12월~2월까지는 해제) 섭섭하게도 온 길을 되돌아와야 하는 원점회귀(原点廻歸) 산행이다.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에는 이외에도 세 가지가 더 있다. 어리목(920m)코스, 영실(910m)코스, 관음사코스(570m)다. 이 세 코스는 2005년까지 자연휴식제로 묶여서 윗세오름까지만 오를 수밖에 없지만, 입산통제가 풀린다면 영실서부터가 6.3km라서 가장 가까운 최단 코스고, 우리가 오르고 있는 성판악코스는 9.6km로 가장 길지만 대신 끈기가 있다면 초보자라도 오를 수 있다는 제일로 완만한 코스다.

 

 

 

전에 왔을 때는 계속되는 울퉁불퉁한 돌길이라 몹시 힘들었는데 오늘은 눈이 덮여서 아이젠을 하고 가는 길이어서 아주 편하였다.

 

 나의 산행은 미음완보(味吟緩步)하는 식으로 언제나 뒤쳐져 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속도를 내어 걸었다.

 

 서두르다 다녀오지 못한 화장실이 아무리 가도 나타나지 않아서였다. 등산 초입인데다가 가는 길이 계곡하나 없는 평지의 완만한 연속길이라서 몸을 숨겨 실례할 수도 없는데다가 다져진 길을 벗어나면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이었다.

 

 옛날 치질 수술을 해준 의사가 항문의 관략근을 잘못 잘라낸 그 책임을 평생 내가 지고 살고 있게 된 것이다. 다음을 가로로 세로로 읽어 보라. 나는 개똥이의 이 마지막 대답을 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똥쌀 놈'이란 욕이 그래서 생겼구나. 개똥아 똥쌌니 아니요

 

* 등산은 왜 하는 거지 까옥까옥 까마귀 소리를 들으며 건강한 산행을 하고 있었다. 해우(解憂)를 비록 해우소(解憂所)가 아닌 곳에서나마 근심을 풀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막다른 곳에 서면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를 실천한 셈이다.

 

여유를 비로소 찾아 혼자서 깊은 산 속을 거닐다 보니 갖가지 생각이 되살아난다. 나는 왜 제주도에 와서도 그 많은 볼거리를 생략하고 다시 또 백록담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일까. 건강을 위한 등산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벗어난다면 등산에는 더 큰 뜻이 있는 것 같다. 등산을 왜하는 거지-. 그 이야기를 등산가의 어록에서 찾아보았다.

 

 ‘등산을 실천하는 속에는 단순한 야심과는 다른 어떤 정신이 있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정열을 산에 바치는 대가로,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하던 가장 귀한 보수를 산에서 받았다.’(기도 레이),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있는 오늘날,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의 하나가 등산이다.’(폴베이사르) 그렇다.

 

아름다운 정열을 산에게 바쳐 받는 보수와, 완전한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기 전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등산은 선행처럼 후회하지 않는 나를 위한 지고의 몸짓의 하나가 등산인 것에 동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원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글로라도 전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카메라를 메고 이렇게 달려와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어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까옥까옥 까마귀가 밥 달라고 좇는 아침 땀 뻘뻘 숨 헉헉- 백록담 길입니다. 도보로 계속 되고 있는 체중과 싸움이지요.

 

 성판악에서 정상까지의 오름길은 완만한데다가 나무가 빽빽하여 아무런 전망도 없는 눈길이 지루하기 그지없다. 그래 그런지 3~400m 간격으로 친절한 거리 이정표와 표고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보며 올라가는 재미만이 쏠쏠하다.

 

그런데 가는 도중 곳곳에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12시 이후부터는 입산을 통제한다는 이정표가 있어 발길을 재촉하게 한다. 그런 길을 9.6km나 걸어 백록담에 가야 한다.

 

 

사라대피소(1,230m)는 눈 속에 깊숙이 묻혀 잠들어 있는데 들어가 보니 무인대피소로 방 두개가 모두 시멘트 바닥으로 썰렁하다. 까마귀는 등산객들을 따라 까옥까옥 계속 좇아온다. 이제는 점심을 달라는 소리 같다.

 

 

진달래밭 대피소부터는 전망이 천지사방으로 뻥 뚫리기 시작하더니 지금부터는 눈 덮인 한라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에서 내려서부터 지금까지 흙 한점 보지도 밟아보지도 못하고, 뽀드득 뽀드득 눈길만 밟고 왔다. 걸터앉을 의자도 바위도 하나도 없었다.

 

그냥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그런 멋없는 등산이었다. 그렇게 가느라 백록담 다음으로 물이 있다는 화산구 사라오름도 지나쳐 온 것이다.

 

그렇게 시나브로 오른 것이 매점이 있는 진달래밭 대피소에 이르니 확 트인 세상인데 6.3km를 온 것으로 2.3km만 더 가면 백록담이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눈 속에 마련된 나무 공터에 많은 사람들이 점심이 한창이다. 그 주위에 까마귀 수십 마리가 던져주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 진달래꽃으로 불타고 있다는 비슬산을 가다가 비 때문에 되돌아왔는데, 이곳은 진달래가 얼마나 무성하고 아름답기에 그 이름조차 진달래밭이란 말인가. 눈으로 묻혀있는 이 하얀 나라에 연분홍 꽃이 어떻게 만발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12시 전에 넉넉히 도착했다고 느긋한 마음으로 이정표를 보니 요번에는 아직 오르지도 않은 정상 하산 경고다. 어서어서 올라가자.

 

식사는 다녀와서 할 것이고. 신도시 일산에서 떠나오면서 유난이 눈이 많이 내렸다는 한라산의 설경과 설화를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에 담는 행복을 꿈꾸었는데, 와서 보니 눈은 많으나 나무에 달라붙는 습설(濕雪)이 아니라 건설(乾雪)로 나무에 붙은 눈 한 조각을 볼 수 없더니 여기서부터는 제법 눈에 기울어진 적송이 눈 속에 묻혀있다.

 

길은 눈이 1.5m 내외로 다져진 눈이라서 가지가 모자를 자주 벗기고 있다. 깊고 높은 산이라 무슨 공해가 있으랴 하고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을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가니 겨울에 겨울을 잘라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는 것 같은 그 별미라니-.

 

 

 

드디어 정상이 시작되는 층계다. 해발 1,900m라는 표고석이 왼쪽에 서있고 통나무로 만든 손잡이와 함께 나무 층계가 위로 계속 오르고 있다. 여름이 아니라서인가.

 

 유난히 맑은 하늘에 보이는 우유 빛 전망, 그 숱한 오름도 바다도 제 빛을 잃었고, 하늘 중간 이상 떠 있는 것이 수평선이라고 생각하고 보아야 수평선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면 수평선이 시선 위에 있어 푸른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제주도요, 한라산에 우리가 서있는 것 같아 놀라게 된다.

 

 

굽어보는 백록담은 녹색 빛 물도 아니었고, 호수 위에 하얗게 눈이 덮인 그런 호수도 아닌 건천(乾川)처럼 물 하나도 없는 드문드문 눈이 보이는 비정한 호수였다. 그러나 커다랗게 성산포 일출봉처럼 움푹하게 패인 모습으로 나의 카메라에 다가왔다.

 

백록담의 둘레는 약 3km, 직경이 약 500m로 크기가 9만평에 달한다. 그 둘레 모습이 제주도와 비슷한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방문선(訪仙門) 살던 신선 선녀의 목욕 보다 들켰네 옥황상제 크게 노하셔 흰 사슴으로 변하게 하였더니 복날엔 흰 사슴으로 나타나 울부짖어 백록담(白鹿潭)이라네

 

 

 

그러나 우리가 성판악 코스로(혹은 관음사 코스) 올라와 정상이라고 환호작약하던 곳은 알고 보니 한라산 제2의 1,933m 정상(동릉)였다.

 

백록담은 분화구라서 둥근 원형으로 둘려 싸여 있는데, 제주 쪽에 있는 곳을 북벽이라 하고, 서귀포 쪽의 곳을 남벽이라 한다.

 

영실이나 어리목코스로 올라서 북벽 쪽으로 붙어야 1,950m의 한라산 정상(서릉)을 만날 수 있는데 그 곳은 자연 휴식년제로 입산통제 구역이었다. 남한의 산을 그 높이 순서로 따져 보면 한라산 다음의 제2의 산이 1,915m 천황봉, 제3이 설악산 1707.9m 대청봉, 제4가 덕유산 1614m 향적봉이다.

 

 그러니 나는 남한 제일로 높은 한라산 정상에다 내 키를 더한 위치에 서서 천하를 조망하면서 봉래 양사언의 시조를 이렇게 고쳐 낭송해 보았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한라산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백록담에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공자가 올라갔다 해서 유명한 태산이(泰山)의 높이가 겨우 1,450m이기에 하는 말이다. 적지 않은 나이의 나에게 아름다운 정열을 한라산 오르는 일로 하루를 바치고 받는 이 즐거움은 시인묵객들이 말하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아닌가.

 

 등산이란 많은 산 버리고 하나의 산 되는 거다 여러 봉 지나서 하나의 봉이 되는 거고 정상에 내 키를 더하여 조망(眺望) 하루 되는 거다

 

 

저녁에는 등산 대신 제주관광을 다녀온 아내와 함께 신제주의 '누릉지식당'에 갔다. 지금은 어른이 된 옛날 제자 왕득영 군이 주선해준 그의 동서 김기준 사장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제주 흑돼지, 고등어 졸임, 근래에 먹어보지 못한 왕갈치 구이 등에 제주 막걸리-. 아내와 나는 활홀하였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무엇으로 보답할까. 나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성 일만이나 될까 보다.

 

*. 2 제주도 자투리 여행 *.제주도 설화 옛날 이 섬의 삼성혈에서 솟아나서 사냥하며 살던 제주도의 양, 고, 부씨의 세 시조(始祖)가 있었다.

 

 어느 날 바닷가에 갔더니 나무로 만든 함이 있어 열어보니 오곡과 육축(肉畜)의 종자를 가지고 온 세 여인이 있어 기뻐하며 맞아 아내를 삼아 이로부터 농업과 목축업을 하며 살게 되었다.

 

 三姓穴의 三乙那가 사냥하며 살아가다 木函 을 타고 온 벽랑국 공주와 혼인하고 그후부터 농 목축하며 제주도를 살았답니다. 그 후 신라에 입조(入朝)하니 신라왕이 크게 기뻐하며 국호를 탐라(耽羅)라 지어주었다. 제주도은 고려 숙종 때에는 아예 탐라군으로 예속되었다가 제주군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한반도에 속하게 되었다.

 

제주란 이름은 그때 생긴 말로 한자말로 건널 濟(제), 고을 州(주) 자이니 뭍에서 건너오기 힘든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생긴 것 같다. *. ‘濟州道’인가, 아니면 ‘濟州島’인가 제주도라고 한자를 쓸 때 ‘濟州道’인가, 아니면 ‘濟州島’로 써야 하는가?

 

 '한 팔이오'(1825제곱키로미터)라는 한국에서 제일 큰 섬이니 제주도(濟州島)’가 맞을 테고, 한국에서 제일 적은 道(도)이니 제주도(濟州道)로 쓰는 것도 맞지만, 道(도)는 島(도)보다 상위 개념이라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濟州道(제주도)가 맞는다고 생각된다.

 

 

제주도의 위치 거리 목포와의 141.6㎞의 거리에 있고, 부산과는 그 두 배인 286.5㎞나 떨어져 있는 제주도는 8개의 유인도( 우도·상추자도·하추자도·비양도·횡간도·추포도·가파도·마라도)와 5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다.

 

남북이 80 리에 동서가 약 180 리, 해안선의 길이가 60리가 조금 넘는 253km로인 이 섬은 동서로 가로 누워있는 타원형의 고구마 같이 생겼다.

 

그 모양을 프라이팬의 계란 모양 같다고 재미있게 말하기도 한다. 노른자가 한라산이라면, 흰자가 흘러내린 산맥, 기름이 바다와 같다는 것이다

 

. *. 제주도의 삼다, 삼무, 삼보 제주도의 삼다(三多)란 이 섬의 특성을 말함이지만, 삼무(三無), 삼보(三寶)는 이 섬의 자랑이요, 이 섬 주민의 자존심을 말함이다.

 

제주도를 '三多'(삼다)라 하여 풍다(風多), 석다(石多), 여다(女多) 섬이라고 한다. 태풍의 길목에 있는 섬이니 풍다(風多)일 것이고, 한라산이 형성한 한라산과 그 아래 수많은 오름을 만든 기생화산(寄生火山)들이 바다와 접하여 다공(多空)의 돌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석다(石多)란 말이 생겼을 것이다.

 

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천지가 돌이다. 울타리도 돌이요, 밭의 경계도 돌이요, 무덤에도 돌담을 둘렀다. 이 돌담들은 해풍을 피해를 막아주기도 하고 방목하던 마소의 피해를 막아주었던 것이다.

 

지금은 남자가 여자보다 많은 섬으로 바뀌었지만, 일기 예보가 없거나 빈약하던 옛날에는 먼 바다에 고기잡이 간 수많은 남정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여자도 활동해야 살 수 있었던 자연 조건이 밖에서 활동하는 많은 여자를 볼 수 있어서 여다(女多)의 섬이라 말하게 되었을 것이리라. 불행했던 1948년 4.3폭동 사건을 그 원인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 희생된 남정네가 무려 6만이 넘게 죽었기 때문이다.

 

제주도를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 '三無'(삼무)의 섬이라고도 한다. 거지는 남에게 아무것도 주는 것 없이 얻어만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거지는 남이 먹다 남는 것, 쓰다 남거나 버리는 조그마한 것들을 탐하는 사람으로 도둑과는 다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은 도둑으로라도 돌변할 수 있는 부류다. 제주도에는 그런 거지가 없으니 도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둑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일하여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것을 몰래 훔치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하는 파렴치한이다. 그런데 세대나 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있는 그런 도둑이 왜 제주도에는 없는가.

 

 그것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를 극복하여 살기 위해서는 근면이나 절약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어서도 그렇지만, 누구나 일할 수 있는 바다가 있어서 그러했을 것도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살아가려면 이웃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가장 두려운 일이라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까지 유배되어 귀양 온 사람들은 높은 관리였고, 옛날에는 학자가 정치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들은 지조 높은 선비들이라. 그들의 그 후예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러하였던 것도 같다.

 

그런 도둑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 울타리나 담이고, 그 때문에 있어야 하는 것이 대문이었다.

 

 

옛날 제주도의 전통적인 대문에 해당하는 것에 '정낭'이란 것이 있다. 정랑이란 한길에서 집으로 드나드는 골목길 올레라는 곳을 지나 대문에 해당하는 곳에 가로 걸치는 나무 막대기를 말한다.

 

 

 

이 나무는 나무나 돌로 만든 주목낭에 걸었는데 이는 주인의 있고 없음을 말하면서 한편 방목하던 마소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 자세히 구별하여 말하는 것은 일반화 되지 않았던 이야기니 귀 기울 일이 아니다.

 

 삼보(三寶)란 언어와 식물과 바다를 말한다. 관광버스 출입문에 "한('ㅏ'는 아래 아)자 옵세예"라 쓰여 있는데 제주도 말로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이란다.

 

 방언은 옛말과 가장 가까운 말이라서 고어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요, 표준어를 보충해 주는 역할도 있어 어느 고장보다 제주도 말은 그 가치가 높이 평가 되어왔다.

 

"맨도 롱 또똣한 때 호로록 드리싸붑서"(따뜻한 때 어서 먹어 버리세요) "어서 옵서. 왕 방 제주가 조커들랑 강 조텡 하영 고라줍서"(어서 오세요. 와서 보고 제주가 좋거든 가서 좋더라고 많이 전해 주세요.) "말은 요구려 똥은 싸구려(이론은 좋으나 실천은 형편없다.) 처녀를 '비바리'라고 하는 것은 제주도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가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보고 날 飛(비), 머리카락 발(髮)이라 해서 비바리고 했다는 말도 전한다.

 

둘째로 제주도의 보배로 꼽는 것은 식물이다. 식물 종류가 백두산에 500여종, 금강산에 800여종, 일본 후지산(富士山)이 1,000여 종이라는데 우리 한라산에는 한대, 온대, 아열대에서 생장하는 식물이 무려 140여종과(餘種科) 에 1,700여종으로 동양 제일이란다. *. 돌하르방

 

 

제주도 기념품에 돌하르방이 있다. 원래는 옹중석(翁仲石)이니 무석목(無石木) 벅수머리 우석목 돌부처 등으로 불리던 것을 아이들이 할아버지 같이 생겼다고 '하르방, 하르방-' 해서 돌하르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하르방이란 할아버지의 제주도 사투리로 지금은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도 현무암으로 만든 돌장승을 말하고 있다. 머리에 몽고풍의 이국적인 둥근 감투를 쓰고 만화 속의 주인공 같이 툭 튀어나온 부리부리한 눈에, 주먹코, 쭉 째진 큼직한 입은 굳게 다물었다.

 

 두 어깨를 힘주어 올리고, 양손을 가슴 가까이 올리고 있는 해학적인 모습의 돌장승이다. 원래는 관아 입구에 세웠던 평균 크기1.8m 되는 것으로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45기 전해 온다. *. 서귀포 전설 어즈버 생각하니 徐市 等이 已甚(이심)하다 人臣(인신)이 되야셔 亡命(망명)도 하는 것가. 神仙을 못 보거든 수이나 도라오면, 舟師(주사) 이 시럼은 전혀 업게 삼길럿다. 선조 때 노계 박인로가 지은 선상탄(船上嘆)이란 가사이다.

 

임진왜란 때 노계가 선주사란 벼슬을 띠고 선상에 서서 진시황의 신하 서불(徐市)을 원망하는 가사(歌辭)다. 서불이란 지시황의 신하로 동남동녀 500명을 거느리고 삼신산(三神山)에 있다는 불로초를 캐러 한라산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가서 일본의 조상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 서불(徐市)이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일명 瀛州山)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서(西)쪽으로 돌아간(歸) 물가(浦)라 하여 서귀포(西歸浦)라 하였다. 서귀포는 교통의 종점이요, 제주도 제2의 도시이고 물 좋고, 풍치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 여기 들러 천지연폭포나, 28m 낙차로 직접 바다로 떨어지는 정방폭포와, 최영 장군이 몽고족을 마지막으로 섬멸했다는 범섬과, 옥황상제가 한라산의 봉우리를 뽑아 던져 되었다(?)는 문섬과 바다낚시의 명소라는 섭섬을 바라보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런 일정은 없는 모양, 우리는 이를 생략하고 삼방산으로 향하였다

 

. *. 영주(瀛州) 9경 산방굴사(山房窟寺)

 

 

옛날 한라산 사냥꾼이 사슴을 쏜다는 것이 오발로 낮잠 자는 옥황상제의 궁둥이를 맞히고 말았다. 옥황상제가 대노하여 베고 자던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이곳에 내려와 암산 삼방산이 되고, 그 봉우리가 빠진 곳이 백록담이 되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서로의 둘레가 거의 같다고 한다. 노산 이은상이 이 산방석굴을 보고 '탐라기행'에다가 이런 시를 남겼다.

 

 

어여쁜 山房德이 굴속에 들어 바위 되고 님 그려 솟는 눈물 바위틈에 샘이 되어 밤낮에 울고 우나니 相思泉이라 불를 꺼나

 

 

천상 선녀 산방덕(山房德)이 있어 이곳 경치가 하도 좋아서, 인간 세계에 내려와 고승(高升)과 백년가약을 맺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이곳에 주관(州官)으로 온 자가 산방덕의 미모를 탐하여 남편에게 누명을 씌우고 가산을 몰수함에 이를 피해 산방굴속에 들어와 화석(化石)이 되었는데 높은 천정에서 지금도 떨어져 내린다는 물방울이 산방덕의 눈물이라는 애틋한 사랑의 애화가 전하여 온다.

 

 삼방굴 부처 뒤 암벽을 자세히 보면 여인의 음각된 모습이 있다. 이것이 영주 10경중에 9경인 산방굴사(山房窟寺)다.

 

천정의 암반에서 방울방울 뚝뚝 떨어지는 아래에 약수터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약수 한 구기를 마실 때마다 10년씩 오래 산다지만 ,석 3잔 이상 마시면 반대로 한 잔에 10년씩 수명이 단축된다니 유념할 일이다.

 

 

삼방굴사의 경치 중에는 굽어보는 전망이 특히 일품인데 무슨 뜻인가 노송 한 그루가 시야를 막아 서 있다.

 

 

저 바닷가가 화순해수욕장이고 그 바다 가운데 수석 같이 보이는 두 섬이 형제 섬이다. 형제 섬을 바라보는 위치에 악어 머리 같이 길게 나온 곶이 송악산이고, 그 넘어 보일 듯 말 듯한 것이 '갚아도 고만 말아도 고만'이라는 가파도와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 마라도다.

 

가파도는 1653년(효종4년) 네덜란드 선박 스펠웰호가 표류해온 곳이다. 그때 그 선장 하멜의 부하 선원 64명 중 28명은 익사하고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14년 간 억류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여 최초로서구에 당시의 한국의 모습을 서양에 알린 사람이 하멜이다.

 

 

삼방산 소나무 사이로 자세히 보면 복원된 당시의 배가 보이고 그 근처에 하멜표류기념비가 서 있다.

*. 용두암(龍頭岩) 전설

 

백록담 용 한 마리, 옥구슬 훔쳐 물고 용연에 이르러 하늘로 승천하다가 산신령 노여움으로 활에 맞은 용두암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리는 곳이 용두암이다.

 

제주시에서 가장 가까운 탓도 있지만, 맑은 날이면 여기서 보이는 낚시꾼의 천국으로, 추자10경으로도 유명한 추자도 전망도 일품이다.

 

 

그것보다 공짜가 하나도 없다는 제주도에서 입장료 없이 볼 수 있는 용두암과 그 푸른 바다도 그렇지만, 용두암 서쪽의 바닷가에서 해녀들이 팔고 있는 멍게와 돌같이 단단한 해삼에 소주 한잔의 추억 때문이기도 하리라.

 

* . 도깨비 도로 물 부어도 올라가고 병 굴려도 올라가는 믿거나 말거나 한 불가사의 고개길 신비한 저 도깨비 길 즐거운 착시 현상 제주에서 어승생오름 쪽 길 1,100도로를 가다 보면 신비의 도로라는 도깨비 도로가 100m쯤 계속된다.

 

어느 운전사가 이 도로에 차를 세워 두고 소피를 보고 와서 보니 차가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더란다. 그렇게 도깨비 도로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제주도에 이런 길이 하나 더 있다는데 나의 중국 여행길에서도 본 경험이 있다.

 

 

 

 

叢石亭 海金剛이 제주에도 있었구나 두고 혼 山河를 두고두고 그리더니 그 기둥 그 바위 보며 우리 서로 반긴다 제주도에 와서 보니 옛날의 제주도가 아니라 새로운 곳이 수없이 개발되어 있었듯이,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작년에 스위스에 가서 깨달은 것은, 자연미에 인공미가 어울릴 때 자연은 더욱 아름다워지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제주도의 해안선은 하와이나 대마도보다는 단순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풍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지나친 말일까?

 

그러나 제주도에 와서 보니 옛날에 다녀 보셨겠지요. 하는 식으로 관광버스 가이드는 몇 군데만 구경을 시키고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상황버섯이나 한라산 닮았다는 한라봉을 파는 곳을 구경시키는데 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 얄팍한 상술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다보니 떠나올 때에는 허전한 마음이 씁쓸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어제 한라산을 오르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관광을 했으니 오늘은 그분들과 함께 하는 관광이라고 오늘은 자투리 여행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구나.

 

 울며 왔다 울며 간다던 제주 다시 와야겠다 보아도 또 보아도 서운한 게 남는 마음 자투리 여행한 것 같아 고향처럼 또 와야것다 한산라산 제주도의 옛이름이 탐라(耽羅)이니 즐거울 '耽('탐), 나라 '羅('라) 말 그대로 '즐거운 나라', '탐나는 나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