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04.8.1일)  성삼재를 출발하여 천왕봉에 오른 후 중산리로 하산, 35키로를 걸어 네 번째 지리산 종주를  
마쳤습니다. 1972년 세 번째 종주를 마친 후 허리를 다쳐 디스크수술을 받고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32년만에
또 다시 지리산 종주를 성공리에 끝냈습니다. 지난 6월 이틀간 산행을 예정으로 네 번째 종주에 도전했으나 때 마침
지나가는 태풍권에 들어간 지리산에 폭우가 쏟아져 연하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음정으로 퇴각해 아쉬움이
컸었지만, 조금만 훈련하여 몸을 다진다면 하루에도 종주를 해 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읽었기에 한북정맥을
종주하며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습니다.

1970년 6월 저는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주 능선을 밟겠다고 혼자서 지리산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경남 마천에서
시작하여 천왕봉을 오른 후 장장 45키로의 능선 길을 걸어 노고단에 이르러 구례 화엄사로 하산하는 지리산 종주 길은
산에서 2박을 해야 했기에 짐 무게가 적지 않아 산행길이 더뎠고,  벽소령에서 길을 잃어 군사도로변에서 비박을
하기도 했습니다.(당시의 자료에는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거리가 45키로이고 마천-천왕봉-노고단-화엄사의 종주
코스는 전장 75키로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만난 지리산은 제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로웠습니다.
제석당은 그 샘물이 한 여름에도 오싹함을 느끼게 한 시원한 생명수였기에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지리산 상단에서 그 산자락들에 호령하는 암벽의 천왕봉은 바위만큼이나 단단하고 단호해 보였고, 천왕봉에서 내려다본
산자락은 운무에 가려 진면목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그 속에 제우스신을 숨겨 놓지 않았겠나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장터목의 고사목은 무슨 한이 남아 있어 죽어서도 눕지 못하는 것일까 안타까웠으며, 지리산이 세석에  넓은 넓은 평전을 숨겨둔
참 뜻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어느 선비의 소원대로 살아 생전 자손들로부터 받지 못한 절을 산을 오르내리는 산 꾼 들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선비샘 샘터 바로 위에 산소를 모시도록 허용한 지리산에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꼈기에, 벽소령을 지키는 우리
군인들을 이 지리산이 지켜주겠지 하고 안심했습니다. 등산객에 샘물과 넓은 공터를 제공해온 최적의 캠프사이트인 연하천에서
헤어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지리산의 밤 친구임에 틀림없고, 종주 길의 마지막에 자리잡은 노고단에 펼쳐진 지리산의 낮 친구인
야생화들에 종주를 무사히 끝냈음을 일러 주었습니다.

지리산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근엄하면서도 모든 것을 어우르는 자리 높은 산이고, 인자하면서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는 속이  깊은 산이며, 몸을 맡겨 살아가는
뭇 생명들을 산자락으로 받아들이는 가슴 넓은 산이 지리산의 참 모습임을 배웠습니다. 그리도 높고 깊고 넓은 지리산을 어찌
한번의 종주로 끝낼 수 있겠는가 싶어 연이어 두 해 여름을 지리산 종주로 더 보냈습니다.

어제는 서울의 산울림산악회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제 밤 서울 서초동을 출발하여 밤을 가르며 달린 버스가 어제 새벽 2시 20분에 해발 1,350미터의 성삼재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려 도시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별들과 꽉 찬 보름달이 빛을 발해 어둠을 뚫고 길을 밝혀주었고, 싸늘한 밤 공기가 복중의
더위를 다스려 야간 산행을 하기에 최적의 새벽이었습니다.

2시 25분 성삼재를 출발하여 선두그룹을 이루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30분 후에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노고단
고개에 올라서 3시 8분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25.5키로의 마루 금을  밟으며 임걸령으로 내 달렸습니다. 지난 6월에는 출발부터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느라 속도를 낼 수 없었는데  어제는 달랐습니다. 우선 선두그룹이 빠른 산행을 주도했고 날씨가 한 부주하여
성삼재를 출발한지 1시간 35분만인 4시에 임걸령에 다다라, 6월의 산행보다 1시간20분을 당겼습니다.

4시 28분 반야봉에 오르는 노루목에서 2시간 남짓한 산행을 잠시 멈추고 숨을 돌렸습니다.
삼도봉을 지나 잘 다듬어진 제법 긴 나무계단을 내려서 뱀사골 대피소로 갈라지는 화개재에 도착한 5시 11분에도 지리산은 아직
밤이었습니다. 노고단에서 6.3키로를 뛰어 다다른 화개재에서 그 세배를 더 뛰어  25.5키로의 주 능선이 끝나는 천왕봉에 이르게 될
때의 환희를 생각하며 쉬지 않고 토끼봉으로 내달렸습니다.

5시 25분 헤드라이트를 끄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5시 43분 지난 해발 1,533미터의 토끼봉에서 20분 남짓 더 나아가 작은 고개에서 두 번 째 쉼을 가지며 사과를 까먹었는데, 아직 제
철이 아니어서인지 제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6월 산행보다 2시간이상을 단축한 7시 3분에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습니다. 다시 식수를 갈아 채우고 세 조각의
떡을 들어 영양을 보충한 후 카메라를 꺼내들고 주위의 야생화들을 근접촬영을 했는데, 집에 돌아가 도감을 찾아  그 이름을 확인할
생각입니다. 이름을 모른다고 야생화의 청초함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사람도 제 이름을 불러주면 쉽게 친해지듯이 야생화도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면 고마워 할 것 같기에 부지런히 도감을 찾아봅니다.

아직도 천왕봉까지 15키로가 남아 있어 갈 길이 요원하기에 서둘러 벽소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주목 군락지를 보호하고자
쳐 놓은 울타리를 따라 얼마고 걸으니 지난번 탈출로였던 음정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이 길이 바로 종주산행의 성공과
실패를 갈라놓은 갈림길이었습니다. 지난 번에는 실패해  음정 길로 내려섰지만 어제는 성공의 길인 천왕봉 길로 올라섰습니다.

8시 10분 형제봉의 기암을 배경으로 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바위로야 설악산을 당해낼 산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지리산도 워낙 넓은 산이라 흙으로 빚은  육봉으로만 채울 수 없었기에 곳곳에다
여러 형상들의 바위들을 세워 놓은 것 같았습니다. 벽소령에 다다르기까지 바위사이를 지나는 몇 군데의 작은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
너머 산밑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 하도 시원하여 이 바람을 서울에 옮겨 놓으면 에어컨 사업이 요절날 것이라는 어느 분의 익살이
조금도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8시 47분 3.6키로의 거리를 한 숨에 내달려 도착한 벽소령에서 7-8분간  숨을 골랐습니다.
천왕봉까지 11.5키로밖에 안 남아 반은 넘게 온 셈이니 이제는 오기로라도 천왕봉에 오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선비
샘으로 출발했습니다. 자전거를 걸머메고 천왕봉에 오르겠다는 젊은이들은  남아 있는 10키로가  문제될 게 없다며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몇 몇 곳의 낙석 요주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흙 길을 걸어 발바닥도 편안했습니다. 낙석은
길을 내느라 깎아 낸 절개지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문명의 부산물로만
여겨온 낙석이 이 오지에서도 발생하는 것을 보고 자연의 힘이 대단함을 배웠습니다.

9시 47분 도착한 선비샘에서 물 순서를 기다리는 두 젊은이들에 선비샘에 얽혀 있는 효에 관한 비화를 전해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효는 인간의 근본임에도 지키기가 그리 쉽지 않기에 배우고 익혀야 하는데 많이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고 그래서 제 얘기를 경청한 두 젊은이들이 고마웠습니다.

천왕봉을 7.2키로 남겨 둔 해발 1,558미터의 칠선봉을 지나 11시 정각에 선비샘에서 출발하여 오르내림이 심한 산길을
1시간 가량 걷느라 지친 몸을 추스리고자 배낭을 풀고 떡과 빵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날이 흐리고 간헐적으로 비가
뿌려서인지 그 동안 새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영신봉을 못 미쳐서 어제 처음으로 새가 우는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면 야생화보다  더욱 고마워 할 생물이 새일 터인데 몸을 숨긴 새들을 그 소리만으로 이름을 알아 낼
길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11시 47분 세석평전에서 후미를 기다려온 산울림산악회의 가이드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미리 알려준 대로
11시를 넘겨 늦게 도착했으니 하산했으면 하기에 저는 진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겠으니  기다리지 말라며
천왕봉에 오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양해를 해주어 바로 장터목으로 내달렸습니다. 5.1 키로밖에 안 남은 지척에
천왕봉을 두고 포기하기 보다 좀 불편하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차라리 산악회버스 승차를 포기하겠다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고집을 부렸는데 무례한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12시 11분 해발 1,703미터의 촛대봉에서 지리산의 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잠시 얼굴을 내보인 햇님의 배려에 답하고자 이름 모를 새들이 짖어댔고 이를 시샘하는 바람이 구름을 몰고와 해를
가리곤 했습니다. 촛대봉에서 내려다 본 세석평전은 역시 넓었습니다. 그 넓은 평원을 관목들이 꽉 채웠고, 꾸준히
훼손지를 복원해온 노력으로 되살아난 구상나무가 숲을 뚫고 삐죽이 서 있어 눈을 끌었습니다. 촛대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늪지대의 풀들은 냇가에서 쉽게 만난 것들이어서 반가웠습니다.

13시 15분 해발 1,730미터의 연하봉에서 가족과 함께 지리산을 찾은 한 아버지와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릴 적에
강제로 산에 끌고 가서인지 커서는 산과 담을 쌓고 있는 다 큰자식들과 함께 산에 오를 수 없는 제게는 그 분이
부러웠습니다.

13시 40분 장터목에서 페트병에 식수를 가득 채우고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천왕봉으로 출발했습니다. 해발 1,808미터의
제석봉에서 내려다 본 고사목 들이 여태껏 그 자리를 지켜왔기에 산을 찾은 이들은 그 사람들이 아니고 매섭게 몰아
쳐온 비바람도 그때의 비바람이 아니지만 산만은 그 산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5시10분 하늘에로 이른다는 통천문을 지나 지리산 정상인 해발 1,950미터의 천왕봉에 올라 표지석 옆에 세워 놓은
배낭을 카메라에 담고 나니, 1975년에 같이 올랐던 먼저 간 집사람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슬픔을 같이 나눌
사람만큼이나 기쁨을 전해줄 , 그래서 같이 기뻐할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제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저를 만나 산을 처음 오르게 된 그녀가 저와 처음 오른 산이 바로 이 지리산이었기에 더욱 더
그랬습니다.

15시 16분 산악회대장 분에 천왕봉등정을 알려주고 먼저 출발하라 했는데  버스가 대기중이니 빨리 내려오라는 요청에
서둘러 중산리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29년 전에는 그녀와 함께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이번에는 그 길로
하산하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만, 오랜 시간을 돌각 길을 걸어서인지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하산 속도는 느려져 2 키로를 걸어 내려와 법계사에 도착한 시각은 출발 한시간 후인16시 20분이었습니다.
아직도 중산리까지 3.4 키로가 남아 있어 저녁 5시까지 내려가 대기중인 버스에 오르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5시 정각에 전화를 해온 산행대장에 저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하라고 말하고 나서 하산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마침 정상을 함께 오른 고마운 분이 맨소래담을 발라주어 그 진통효과로 중산리까지 해지기 전에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18시 20분 중산리에 도착, 16시간의 길고 긴 지리산 종주산행을 전부 마쳤습니다.
택시를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산행대장 분이 버스의 선반에 올려놓은  갈아입을 저의 옷 보따리를 찾아 맡겨둔
기사식당을 들렀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32년만의 종주를 자축했습니다. 저녁을 들고  진주로
이동해 밤 11시 출발하는 심야고속버스에 몸을 실어 오늘 새벽 3시에 과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시간 고통을 잘도 참아준 두 다리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저를 붙잡은 곳곳의 야생화들도 고마웠습니다. 귀경 길의 버스 안에서도 제가
무사히 하산했는가를 물어온 산행대장의 배려 또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고마워해야 할 것은 어디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며 저를 반겨 준
지리산입니다. 저는 지리산이 이래 저래해서 좋다는 표현을 즐기지 않습니다. 지리산이 그 자리에 있어, 그래서
제가 원할 때 찾아가 곁에 있을 수 있기에 좋아합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이는 것만큼 어렵게 잡은 고기도 크게 보임을
어제 성공한 지리산 종주에서 터득했음을  기록하며 지리산종주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