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일요일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학심이골을 기어코 구경하고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던 얼음굴이 있다는 다른 길로 들어서서 운문산을 해마다 한두 번 씩
올랐지만 그 비경을 오늘에사 보았으니 오늘은 참으로 복받은 날이다.


간밤에 어딜 갈까 망설이다가 산내면 원서리 석골사 계곡으로 운문산을 올라 아랫재를 거쳐
원시림으로 유명한 학심이골을 타고 대가람 운문사를 찾기로 작정했다.
집에서 운문사 공영주차장에 전화를 걸어보니 오후7시 15분에 청도행 막차가 있단다.
따라서 오늘은 승용차를 밀양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 주차해두고 완행버스를 탔다.

표를 끊으니 2,100원이다.
완행 버스에는 예순 중반 정도 시골 노인 두엇이서 목소리를 있는 대로 높여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남의 이야기를 듣기싫어도 들어야 하는 것은 고통이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그들
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보았다.

차는 털털거리면서 새로 확포장된 국도24호선을 놓아두고 꾸불꾸불한 구 도로를 따라 달리
는데 차창이 덜컹거리고 시끄러우니 두 영감님 목소리는 갈수록 더 커진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 지난 태풍에 거의 전멸해버린 긴늪솔밭을 지날 즈음엔 족보이야기를
하더니 금곡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하루 이만이천원을 벌러 남의 들일하러 다니는 할멈을
위해서 맥주병과 음료수 병을 주워서 팔아 소주를 사준다는 이야기로 바뀌고 임고마을 앞
다리를 지나면서 팔풍장이 가까워오니 담배끊는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는데 담배를 피운다고
빨리 죽는 것은 절대 아니라며 스스로는 얼마든지 끊을 수 있지만 담배를 피워도 팔십 넘게
사는 사람이 흔하니 담배를 끊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산내면소재지가 있는 팔풍에서 영감님들은 내리고
길 좌측으로 봉의 저수지며 구만산 자락이 보인다.
날은 더없이 맑고 좋은데 버스는 마침내 웅장한 운문산이 바라보이는 원서리 정류장에 우릴
내려주고는 석남사를 향해 사라진다.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 두 명
내가 아닌 다른 한 명은 창원에서 온 이십대 중반 쯤 되어뵈는 갓 제대한 정도의 젊은이
고글을 낀 나를 보고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며 듣기 좋은 소릴 한다.

같이 이야기하며 대경가든 앞 다리를 지나면서 시계를 보니 아홉시 사십오분이다.
하차하고 출발 시각이 아홉시 사십분 경
가든 쪽을 보니 제수씨가 짚 앞에서 무언가 하고 있다.
대경가든은 나의 모교 후배가 경영하는 음식점인데 염소 육회며 불고기가 전문이고 오리불
고기도 취급하고 염소도 키우고 오리도 집 앞 개울에서 키우는 것을 잡아 요리하니 단체
산행 후 미식가들의 보양식 뒷풀이로 기가 막히다.

염소 육회를 먹는데 산야의 풀을 먹이는 갓 잡은 건강하고 싱싱한 염소 간이며 천엽을 챙
겨 두었다 고소한 참기름에 먹도록 주기도 하고, 육회며 간을 싫컷 먹고 나면 단맛이 감치
는 염소국에다 마지막엔 구수하고 뽀얀 곰탕까지 풀코스로 맛을 보게 해준다. 그의 말을 들
어보면 사료를 먹인 염소의 간은 희끄므레하고 기름이 차서 깨끗하지 못한데 비해 풀을 먹
인 건강한 염소는 간이 새빨갛게 기름끼라곤 없이 조직이 깨끗하고 탄력이 있다면서 성심껏
권한다.

게다가 가을이면 후배님이 직접 억산이며 운문산을 오르내리며 채취한 송이버섯까지 맛 뵈
주니 향그러운 솔내음 은은한 송이를 날로 참기름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송이 술에다 죽까
지 끓여서 먹었는데 어느 해인가는 함께 송이 채취 산행을 한 적도 있다.

기억에 그날 열여섯송이의 송이를 캐어 산에서 송이에 흙이 묻은 채로 금방 딴 생송이를 그
냥 날로 송이 째 먹기도 하고 먹다 남은 송이는 가든에 가져와서 죽도 끓여 먹었다.
그 중 몇 개가 거시키가 하도 크고 굵은지 후배들이 그놈을 잡고 장난을 하여 허리가 아프
도록 웃기도 하였고

누구든지 한번 가본 사람이면 이 집주인의 꾸밈없이 투박하고 우직한 인간미에 반하기도 하
고 제수씨의 넉넉한 손품에 반드시 또 찾게 된다.
거기다 넓은 방도 방이지만 지하에는 훌륭한 노래방도 완비되어 있다.
(대경가든 광고하고 있나?)

잠깐 들르고 싶었지만 산행 거리가 만만찮아 그냥 지나친다.
가든 옆을 지나면서 보니 장사로 그렇게 바쁜데도 길 가장자리 쪽에 들깨 한 골, 그 다음엔
수박 두 줄, 그 다음엔 고추 두어 골, 오이 한 줄, 그 다음엔 실파 두 세 고랑, 그 다음엔 상
추 서너 골, 마지막엔..... (기억 안 남.) 여하튼 후배님과 제수씨의 부지런함이 스무평 가량
너비 남새밭에 가득하다.

조그만 남새밭에 심은 채소들을 외우며 가느라 여념이 없는데 외부에서 차량이 쉬임 없이
들어오고 지나면서 매연을 풍기고 지나간다.
많은 산꾼들이 산행을 하면서 컴컴한 어두운 겨울밤에도 수첩과 볼펜으로 언 손을 불어가며
산행 기록을 적고 있는데 게을러터진 나는 그 짓이 싫어서 모든 것을 머릿속에 입력한다.
비록 출력할 때 엉터리 자료가 나올지라도

석골사
신라 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천년 고찰 서기 560년 진평왕 21년에 창건하였다는 절이지만 지
금의 건물은 1958년도에 지었다고 하고 내 기억으론 요 근년에 또다시 중창한 석골사를 바
라보면서 개울 쪽 수도꼭지로 되어 있는 샘물 앞에 서서 젊은이와 작별하고는 2리터 물병을
가득 채우고 시원한 물을 퍼서 머리에 뒤집어 썼다. 그 옆에는 두 평이 될까 말까 한 재
래식 화장실이 조용히 서 있는데
산행 준비를 대강하고 산을 오르노라니 가족 팀이며 산악회 팀들이 줄을 서서 올라간다.
석골사 계곡은 자갈이 많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보니 아홉시 45분이었는데 삼십분 쯤에 한번 그리고 또 삼십분도 안되어
한번 자꾸 쉬며 올라간다.
학교 선생님들이 스무 명 정도 떼를 지어 올라가고
나보다는 연식이 한참 더 되어 뵈는 오척 세치 정도의 자그마한 초로의 남자 한 분이 모양
도 단단하게 배낭을 바투끼고 산을 오르는데 그 뒤를 늘씬한 육등신 정도의 몸짱 아주머니
아무 것도 아예 물병 하나도 안 가지고 함께 오른다.

아무리 보아도 짝은 아닌데 다른 일행이 또 있는 모양이다.
산행에서 자기가 마실 물병조차도 갖지 않고 산을 오르는 것은 얌체족이라 비난받아야 한
다. 자신은 무겁다고 빈 몸으로 올라가지만 목이 마를 때 마실 물이며 도시락 등 모든 준비
물은 바로 생명과 직결된다. 특히 영남 7대 명산 중의 하나이며 영남알프스 산군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이런 거대한 산을 오르는데 빈 몸으로 오른 다는 것은 산을 모욕하는 것이
다. 그리고 그렇게 산을 오르면서 정작 필요한 음식물은 타인의 힘을 빌어 덕을 보자는 것
이니 이런 사람들은 산을 오를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

세 번 째 고비를 올라서니 제법 널찍한 공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가 우리가 올
라서니 다들 출발한다. 그 곳에 앉아 산을 둘러보니 울울창창 하늘도 보이지 않고 그저 계
곡과 수풀이 있을 뿐, 해마다 오르면서 느낀 것이지만 여름에 오면 거의 보이는 게 없다.

보니 빈몸 여자분과 초로의 이 분, 그리고 보디빌딩으로 제법 팔에 근육이 오른 내 또래의
남자 한사람 셋이 둘러앉았다. 쉬어 가기 알맞은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아침에 내자가 마
련해 준 오렌지 하나를 꺼내 사등분하여 그 중 세 개를 옆에 앉은 초로의 남자분께 권하니
무겁게 지고 올라와서 준다며 사례의 말이 온다.

그리고 보디빌딩 남자분 담배를 피우면서 날 더러 왜 혼자 왔냐고 묻는데 마누라가 땀을 하
도 흘려서라고 하니 이해를 못한다. 그것은 아내의 변명이고
사실은 내가 걷는 거리가 너무 멀어 따라오질 못함이 진짜 이유건만
이런 소리 안들으려면 하루빨리 등산 갈 때 함께 갈 파트너를 구해야 할 판이다.
조금 더 있자니 여자분 일행 둘이 더 나타나는데 다들 보니 오십초반 정도로 기력이 약한
편이다.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나서 한참을 가다보니 개울가에 아까 먼저 떠났던 삼사십대의 남녀
선생님들이 계곡이 소란하도록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직업이 그렇게 만든다지만 선생님들은 목소리로 먹고사는 이들이라 자신들은 모르지만 듣는
쪽에서는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볼륨이 높다. 아이들은 떠들지요 옛날처럼 두들겨 패서 공
포분위기 연출도 못 하지, 애를 쓰며 소리를 높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정한 이치

나도 목소리 크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데도 어딜가나 조그맣게 이야기하려고 노
력한다. 직업이 선생님들인 분이나 시끄러운 난장판이나 기계 소음이 높은 작업장에서 일하
는 분들은 다중이 있는 공공장소에서 이야기할 때는 이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날이 무지하게 덥다.
수많은 사람들이 혼자이고 저희들과 다른 류의 이방인인 나를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얼음처럼 맑고 차가운 물에 엎드려 배낭을 멘 채로 얼굴과 목, 팔을 시원하게 식혔다.
그러면서 일행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 남자 분 가라대 계곡을 따라 죽 올라가는 것이 길이
편하다는 말을 한다. 나는 이 말을 무심하게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여기가 갈림길이었
던 모양이다. 운문산을 여러 번 왔었지만 항상 친구들이나 회원들과 와서 따라가기만 했던
고로 길이 두 갈래인 줄은 전혀 모르고 계곡 건너 표지기가 살랑살랑 손짓하는 오르막을 향
해 올랐다.

그리고 조금 가다보니 길이 꺾이는 곳에 집채만한 둥그런 바위가 있는데 흔들바위라고 하면
서 역시 선생님들이 시끄러운 목소리로 크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바위가 정구지 바위인지는 모르겠다.
운문산을 여러 번 올라갔고 어떤 때는 등산로 표기도 안되어 있는 석골사 건너편 능선을 따
라 내려오며 고생을 한 적도 있지만 항상 앞사람만 따라다닌 탓에 길을 알 수 없다.

쉬고 있는 저들을 지나 경사를 오르니 각도가 여간 센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오르다 보니 경사가 자꾸만 더 가팔라지는데 가만히 보니 반갑지 않은 노란 표지
기가 눈에 띈다.
"국제신문 다시찾은 근교산" 노랑색 리본에 검정글씨로 된 이 리본은 정말 반갑지 않다.
몇 해 전 지금 고속철 공사와 도롱뇽 소송으로 유명한 천성산 정상에서 내려오다 잘못 국
제신문 리본이 있는 데로 따라가서 고생 깨나 하였고, 지난 겨울엔 청도의 진산이라며 청도
남산을 오르는데 국제신문 안내대로 남산골을 따라 길도 없는 계곡과 솔숲을 오르기 네시
간, 내려오며 세시간을 고생한 경험하며, 말이 길이지 이들 국제신문 다시찾은 근교산 팀은
그들이 직접 길을 개척하며 다니므로 사실은 등산로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나의 경우는 국제신문 팀의 등산로는 가급적이면 피하는 쪽이다.
그런데 오늘 이 국제신문 리본이 눈에 들어오니 또 고생 좀 하리란 각오를 하고 올라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시당초 계획이 딱밭재를 거쳐 상운암 코스를 택하려 했지만 얼떨결에
들어선 이 국제신문 팀의 코스가 왜 이 운문산이 영남의 칠대 명산의 하나이며 영남알프스
산군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었다고 설명하면 이해가 갈런지

나중에는 경사가 하도 급해 네발로 기어올라야 할 곳이 차츰 더 많아지는데 마침내 한 곳에
이르니 운문산의 숨은 비경이 눈앞에 전개된다.
그 곳은 바위 아래로 절벽이어서 떨어지면 도저히 살아남기 힘들 것으로 추측되는 지점이면
서도 위로 올라가는 밧줄도 하나 매어져 있지 않은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지점인데
오르다 말고 북동쪽을 바라보니 이 쪽 절벽에서 건너편 절벽까지 거리가 삼백미터는 족히
됨직하고, 하늘 끝까지 닿도록 거의 오륙백미터에 달할 정도의 둥글고 장대한 절벽이 수직
으로 솟아 있고 그 절벽 전체가 바위 하나 드러나지 않고 새파랗게 빽빽한 숲이 밀생하고
있어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생각조차 못하게 만든다. 감탄을 거듭하며 넋을 빼았기다.

가까운 장래에 사진작가이기도 한 동생을 대동하고 이 아름다운 비경을 반드시 기록에 남기
리라 다짐하고 걸음을 옮긴다.
이 지점을 올라서는 곳이 아주 위험하다. 사진 찍으러 오면서 밧줄도 좀 가지고 와서 매어
두어 등산객의 안전을 도우리라.

거의 넋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정신을 수습하여 다시 산을 오르는데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돌아봐 지지만 이미 그 절벽은 숲에 가려지고 오르고 또 오르니 바위지대가 나타난
다. 거대한 바위 절벽 아래 널찍한 반석이 있어 앉아 보니 시원하고 편한데 위를 쳐다보니
위태롭다. 몇 주 전 암벽등반 하다 떨어지는 바위에 즉사한 시신을 보았기로 위에서 누군
가가 바위를 굴린다면 싶어 그만 일어나 또 올라간다. 한참 더 올라가니 길이 어디인지 구
분이 안되는데 오르다 보니 바위 틈새에서 시원한 냉기가 흘러나온다.

한길 높이의 바위 움푹한 곳을 또 기어올라가니 주변에 바위 구멍이 컴컴하게 여러 곳 보여
서 들여다보며 물한모금하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윗쪽에서 교감선생님 어쩌구 하는 목소리
가 들린다. 오늘 이산에 도대체 선생님들이 몇이나 올라왔나 하며 보니 예순 정도의 교감선
생님, 양복에 운동화 차림 그리고 다른 세사람도 전혀 등산복 차림이 아니다.
마주치며 인사하니 한 분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얼음굴이 있으니 가보라는데
한 곳은 들어가 보니 교실 반 정도의 넓이로 방처럼 되어 있더란다.

어딜가나 직업은 못 속인다 싶은 생각에 혼자 웃는다.
자기들이야 매일 들락거리는 곳이 그곳이니 그러지만 내가 교실을 떠난 지 몇 십년인데 교
실 반 정도라면 얼마나 되는지 우찌 짐작할 것인가
그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니 또 국제신문 표지기가 반긴다.

바위를 기어오르고 넘어 내리고 두어 번만에 지척에 굴이 나타난다.
먼저 나타난 굴은 위에 국제신문 팀이 타고 내려갔다 올라올 때 매어 둔 것으로 뵈는 표지
기가 달린 일미터 정도의 밧줄이 팔목 굵기의 나무에 매여 있는데 안에 들여다보니 어두컴
컴한 것이 영 찜찜하다. 어릴 때 이야기 속에 산 속 동굴 안엔 호랑이가 있고, 물 속 동굴
엔 이무기가 있고, 굴이란 곳에는 여러 괴물도 있다면서 온갖 이야기에 무서운 곳이 굴이라
사실 또 곰이나 호랑이, 늑대, 뱀, 박쥐 등 많은 동물들이 굴에 서식하므로 굴은 조심하고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대상이 아닐까.

내려갈 방도도 없고 들어갈 기분도 아니어서 다음 굴로 가보니 그곳은 대충 열평 정도의 크
기에 굴 안이 환하고 시원하지도 않으며 말이 얼음굴이지 그냥 움집 같다고 하면 어울릴 곳
으로 무속인들이 기거하면서 불을 지피고 바닥 돌을 고루어서 인공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곳을 나와 다시 산을 오르다 앉아 쉬노라니 몇 사람이 내 뒤를 따라 굴 위로 나타난다.
다시 일어서서 걸어 오르니 전망대가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주로 남명리 쪽의 마을이 내려다
보이거나 송백이나 임고리 방면이 바라보이는 전망대다.

그 중에서 한 곳은 전망바위 자체가 높이 이삼십미터 되는 위의 첫머리에 보이는 바위이다.
시원하게 치솟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건너편에 구천산과 정승봉 그리고 그 뒤로 정각산
이 보이고 구천산 좌로는 도래재 오르는 길이 구불구불하게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도래재
옆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이백만평의 국내 최대의 억새밭을 자랑하는 재악산 사자봉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 남쪽에 수미봉이 보이니, 남서쪽으로 탁 트인 일망무제의 푸른
산과 전형적인 새파란 여름 하늘에 하얀 구름을 바탕으로 봉우리들이 만들어 내는 원근과
농담의 빛의 축제는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엄습해 온다.

여기서 잠깐 산이름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많은 지도나 등산안내 사이트에서 밀양의 재악산(載嶽山)을 일러 재약산(在藥山)으로 기록
하고 있는데 사실상의 정확한 지명은 분명하게 載嶽山이 본래의 이름임을 밝혀둔다.
이것은 현재 통용되는 在藥山이란 산명이 처음 기록된 밀양 지역 향토 사료집인 密陽志를
펴낸이들의 오류임을 수많은 역사적인 문헌을 고증하고 密陽志 저술인과의 대담을 통해 거
의 일천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수집하여 밝혀낸 도재국님의 노력의 산물이
다.

수년 전 추운 겨울에 이 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표충사 경내에서 도재국님을 만났다.
마침 그는 그날 載嶽山이란 산명이 기록되어 있는 17세기에 세워진 경내의 비석을 탁본하기
위해 왔는데 날이 너무 추워 먹이 얼어 탁본을 하지 못했다며 나를 안내해 그 비석 앞에 세
워 두고는 비문을 읽었다. 그 비석에 나오는 이 산의 이름은 분명히 載嶽山으로 되어 있었
고 그것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의 하단에서 나온 바위판에도 뚜렷하게 재악산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 돌판은 당시에 경내 기념물 판매소 내에 아무렇게나 방치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在藥山이란 산명은 원래가 재악산인데 사람들이 재약산이라 잘못 발음하면서
(모음동화 현상이 일어난 듯) 산에 약초가 많이 난다는 의미의 재약산으로 오해하여 부른다
는 그럴듯한 해석까지 곁들여서 산명이 틀리게 알려지고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조선시대의 모든 문헌이나 표충사 경내의 17세기 당시의 비석 혹은 석탑 하단에서 나
온 돌판 등에서 분명하게 재악산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큰산이름 嶽"자가 우리나라
의 거대한 산에 고루 나타나는 설악산, 치악산, 월악산 등의 경우에서 같이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한 산에 붙는 글자인 것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추측인데 재악산을 국립지리원 홈페이지에서는 天皇山으
로 표기하고 있는데 재악산의 천왕봉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많은 산이름은 불교의 문헌에 나오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지리산의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반야봉, 설악산의 세존봉, 나한봉, 달마봉을, 오대산의 비
로봉, 상왕봉, 가야산에서는 칠불봉을, 계룡산에선 삼불봉, 속리산에선 문수봉, 천황봉(천왕
봉), 주왕산의 관음봉, 내장산의 연지봉, 불출봉, 사자봉, 상왕봉, 소백산의 연화봉, 비로봉,
월출산의 향로봉, 천황봉(천왕봉), 사자봉, 치악산의 향로봉, 비로봉, 태백산의 문수봉, 장군
봉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불교사전을 검색해 보면 천황이란 단어는 쓰이지 않는 용어이며 사천왕이란 말에서 따온 천
왕산이 맞을 것으로 사료되고 천황산이란 이름은 기존의 천왕산 혹은 천왕봉이란 본명이 있
는 산을 일제의 잔재로 인해 그 이름이 잘못 불려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갑자기 산행기 쓰다말고 웬 식당이며 산이름 타령인가?

거의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한번 쉬면서 물과 소금을 섭취하고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네 시간이 가까워진다. 물 2리터를 거의 다 마셔 버렸는데 당초 억산 방면의 딱밭재를 올라
능선을 타고 정상을 향하다 보면 정상 바로 아래 오백미터 지점에서 상운암을 만나게 되는
데 여기서 물을 재충전하려 했던 계획이 틀어 지고 말았다. 상운암은 이름 그대로 구름위에
있는 암자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나는 샘물은 시원하고 입에 착 달라
붙는 감칠맛에 산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허나 오늘은 상운암 샘물 맛은 틀린 일.
내려갔다 돌아올 수도 있지만 7시까지 운문사에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빡빡하다.

아랫재에서 물을 재충전하기로 작정하고 다시 길을 오르니 거의 정상에 가까워지는데 햇볕
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다.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가뿐숨을 쉬며 올라가니 길가에 도열
한 산 수국들의 나뭇잎에 물끼가 배어 있다. 빗물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뭇잎에서
땀이 흐르고 있다. 산 수국 뿐 아니라 정상에 가까운 도토리 나무며 잎이 제법 넓은 모든
나무들이 한낮의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못 이겨 잎에서 진액을 송송 내어놓고 있다. 날이 더
우면 개를 제외한 모든 짐승이 땀을 흘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식물이 땀을 흘린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잎에서 나뭇진을 내어놓아 열을 식히는 모양이다. 허허 참!

운문산 정상!



영남지방에 해발 1000m가 넘는 운문산, 고헌산, 가지산, 천황산, 간월산, 신불산, 취서산, 문복산 등의 준봉이 일대 산군을 이루며 솟아 있는데 이 산군을 알프스에 비길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영남알프스라 한다.

영남알프스 산군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운문산(1,188)은 영남 7산의 하나인 명산으로 웅장한 암봉과, 기암괴석, 울창한 수풀이 심산유곡을 이루고 있다.


거찰 운문사와 폭포로 이어지는 학심이골 계곡이 있고 남쪽에는 석골사를 중심으로 한 사운암 계곡과 호박소를 중심으로 한 쇠정골 계곡, 그리고 찌는 듯이 더운 복중에 얼음이 어는 2군데의 얼음골이 있다.

동쪽으로는 유명한 석남사가 있다. 고찰인 운문사에 4백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처진 소나무 (반송 : 천연기념물 180호)가 경내에 있다.



오늘 내가 운문산을 오르게 유혹한 안내문이다.

산 정상에서 눈을 들어 뒤돌아보니 석골사가 아득하게 보이고 북쪽으로 억산, 구만산과 멀
리 산아래 대가람 운문사가 보이고, 동으로 가지산, 쌍두봉, 상운산, 남쪽으로는 사자봉과 동
남쪽의 능동산, 간월산, 신불산, 멀리 취서산과 시살등까지, 남쪽으론 향로산, 서쪽으론 앞서
언급한 구천산, 정승봉, 정각산이 시야에 잡힌다.

날은 더할 수 없이 맑고 쾌청하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한시 사십분, 출발한지 네 시간 만이다.
올라오면서 비경에 넋이 빠져 구경하며 쉬엄쉬엄 올라온 것이 딱밭재로 올 때보다 한시간이
더 걸린 모양.

산 정상에는 사람 키만하고 둘레가 두 아름은 됨직한 거대한 누런 빛의 둥그스름한 바위에
검은 글씨의 음각으로 雲門山이라 뚜렷이 파여있다.
정상석을 한바퀴돌아보고 주변에는 동쪽이 나무가 좀 있으나 숲이 시원치 않아 바로 아랫재
를 향해 길을 내려선다.

오분 가량 내려오다 길 가운데에 줄을 매어 놓은 남쪽으로 탁 트인 시원한 곳이 있어 그 곳
길 한가운데 배낭을 벗고 김밥을 내어 먹었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김밥 한 줄을 다 먹었지만 올라오면서 이동식을 많이 먹었던 관계로 밥맛이 없다.
바람을 즐기면서 앉아 쉬노라니 전남 여수에서 왔다는 산울림이란 명찰을 단 단체 산악회원
들이 줄을 지어 올라오는데 시계가 세시가 가까운데도 밥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파 죽겠다며
올라오는 남도 사투리가 구수하다.

늙수레한 아저씨 한분을 불러 물어보니 여수에서 8시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하니 열두시
밥도 먹지않고 산을 올라오는 중이란다.
즐기기 위해 산을 오르면서 밥을 굶어가며 오를 일은 아닌데 이동식도 준비하지 않았던가.

정상에서 아랫재까지는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삼십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아랫재에는 혼자서 통나무 움막을 지어놓고 장사를 하며 사는 떠꺼머리 총각이 하나 있었는
데 이태 전에 시내 동문고개 아래 횟집에서 영남알프스 산행팀 가이드하는 친구 소개로 인
사하고 함께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작년 여름 아들녀석하고 같이 가지산을 종주할 때 만났는데 일년만에 보리라 생각하며 도착
하니 통나무집이 박살이 나 있다.
산림내 불법건물로 철거팀이 와서 부순 모양이다.
언젠가 산림과 직원의 말에 그 통나무집을 부수려하니 주인이 눈물을 무수히 흘리면서 사정
하더란 이야기가 생각나 그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든다.

숲 그늘에 앉아 쉬다가 학심이골을 향해 내려갔다.
국내에 몇 남지않은 원시림이 있는 학심이골은 운문댐 상수원보호구역이어서 출입을 통제하
고 있는 계곡이라 지도에 등산로도 표시되어있지 않지만 많은 산꾼들은 학심이골을 통해 대
찰 운문사로 하산길을 잡는다.
지난해에도 한 산행팀이 단체로 붙들려서 운문사 스님들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고 나오는 것
을 본 경험이 있는지라 조심스런 마음에 계곡을 들어서는데 굵은 팔뚝만한 다래나무가 마치
보아뱀처럼 하늘 끝까지 굴참나무며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 있는 모양은 장관이다.
머루며 다래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넓은 계곡은 컴컴하게 빽빽한 숲으로 꽉 차있다.

계곡을 들어서자마자 샘물이 보인다.
아랫재에서 장사를 하며 살던 그 총각이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생각하며 텅 비어버린 2리터
물병을 가득 채웠다. 해마다 여름 산행에서 그랬듯이 앞으로는 아예 물병을 두 개 준비하여
4리터를 메고 다녀야 물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산그늘에 가리워진 계곡을 내려오면서 정신없이 속력을 내어 달리다시피 하며
오는데

한시간 이십오분 가량 비몽사몽 헛된 꿈을 꾸며 내려오다 보니 사리암 앞이다.
이젠 제법 넓어진 개울을 건너니 많은 사람들이 개울가에 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있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가 가깝다.
버스 시간이 마음에 걸렸지만 불이 나는 발바닥을 식히고자 그들 곁에 앉아 등산화와 양말
을 벗고 막 발을 담그려는데 단속하는 양반 둘이 나타나 벌금 오백만원~~~~~ 하며 협박이
다.

다시 일어나 울타리를 넘어 사리암 주차장을 휘적휘적 걸어 화장실을 방문하고는
길을 나서니 운문사 대가람이 눈에 들어온다.
운문사도 석골사 처럼 신라 진평왕 21년에 신승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일요일이라 많은 신도들과 관광객들이 대찰에 들어서면서 공손히 두 손을 모아 합장 삼배를
하고 들어간다.

이 운문사는 조계종의 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수많은 보물이 있으며 홍길동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들어서면서 당장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처진 소나무인데 둘레가 이삼십미터는 됨직한 사오
백년 수령의 웅장한 수세는 발길을 붙잡는데 해마다 막걸리를 준다는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萬歲樓는 올 때마다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세루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작은 규화목이 있고 그 옆에는 명부전이 있다.

발길을 돌려 게시판을 보니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한지에 한글로 씌어 있다.
말 구절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불굴의 용기로 정진하는 당신의 모습을 한없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지켜본다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정진하는 스님들에 대한 격려의 말
인 모양이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없이 들린다.

그 게시판 뒤에는 내가 알고 있는 스님이 한 분 살고 있다.
이십대 초반에 같은 직장에 함께 근무했던 그녀는 출가하여 이 사찰에서 정진 중이라고 들
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말미에 반야경을 올린다.
반드시 마하반야를 체득하여 바라밀다를 이루기를 빈다.

초여름 오후의 햇살은 서산에 기울어 비스듬히 비추이는데 운문사 입구 표파는 청년에게 버
스매표소를 물으니 주차장 안 쪽을 가리킨다.
빠르게 다가가서 매표하는 아저씨께 물으니 5시 40분에 차가 있다는데 마침 그 시각이라 막
버스가 문을 닫고 출발하려는데 손을 흔들어 기다리게 하고 표를 끊어 차에 오른다. 3,700원
아침 아홉시 사십분에 석골사 입구 원서리 정류장을 출발하여 운문사 주차장 매표소 까지
정확히 여덟시간이 걸렸다.

냉방이 잘된 텅 빈 버스에 올라 시원한 냉기를 느끼면서 몸을 내맡기니 차창가에 흐르는 운
문댐이 아름답다. 요 몇 주 새 운문댐을 자주 보는 것 같다.
운문댐의 맑은 물을 감상하다 스르르 눈을 감고 몸을 기대는데
386세대에 맞는 70년대 유행가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데 한시간에 걸쳐 달릴 차라 잠을 청
한다.

7시 십오분 전
청도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매표소에 들러 표를 끊으니 2,200원, 저녁 7시 5분에 밀양발 버스가 있다.
표를 끊어 대합실 밖 화단가에 앉아 서산에 기우는 해를 보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밀양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김밥 두 줄과 약간의 과일, 차비 8천원으로 자유로운 종주 산행을 한 날이다.

여러분 모두 마하반야를 깨우쳐 성불하시길 바란다.






반야심경(般若心經)


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오묘한 반야바라밀다를 닦으실 때 몸과 마음의 욕망이 모두 비어있음을 비추
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의 바다를 건너셨느니라.
Homage to the Perfection of Wisdom, the lovely, the Holy! Avalokita Bodhisattva was
moving in the deep course of the wisdom which has gone beyond. He looked down
from on high and saw but five skandhas which, in their own being, were empty.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삼라만상은 빈 것이며 공한 그 모습이 삼라만상이니, 감정이나 생각 욕망 의식 등
마음의 작용도 또한 빈 것이니라.
"Here, O Sariputra,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whatever is Empty, that is Form,
whatever is Form that is Empty. The same is true of feelings, perceptions, impulses and
consciousness.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모든 비어있는 모습에는 나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웁거나 깨끗함도 없
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듬도 없느니라.
O Sariputra,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they have no beginning and no
end, they are neither imperfect nor perfect, neither deficient nor complete.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
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그러므로 비어있는 세계에는 이렇다 할 실체도 없고 감정도 생각도 욕망도 의식도 없고 감
각의 주체도 없으며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의 관념도 없으며 그러한 것들의
모든 상대 또한 없느니라. 그러므로 미혹된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
으며 늙고 죽음도 없으며 끝내 늙고 죽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나니
Therefore, O Sariputra, in emptiness there is no form, no feeling, no perception, no
name, no concepts, no knowledge. No eye, no ear, no nose, no tongue, no body, no
mind; no forms, no sounds, smells, tastes, touchables or objects of the mind, no sight
organ, no hearing organ and so forth to no mind consciousness element; no ignorance or
extinction of ignorance or extinction of ignorance, no decay and death, no extinction of
decay and death.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蜜多 故 心無 無 故 無有恐怖 遠
離顚倒夢想究竟涅槃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도 없고 괴로움을 없애는 일도 없으며 팔정도의 길도 없느니
라. 지혜가 따로이 있을 수 없으며 아무런 얻음과 잃을 것이 없으므로 모든 보살은 이 반야
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닦아가나니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
어 잘못된 망상을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르느니라.
There is no suffering, no origination, no stopping, no path, no cognition, no attainment,
nor anything to attain. There is nothing to accomplish and so Bodhisattvas can rely on
the Perfection of Wisdom without trouble. Being without trouble, they are not afraid,
having overcome anything upsetting, they attain Nirvana.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 多羅三 三菩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으

All Buddhas who appear in the three periods, fully Awake to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 because they have relied on the Perfection of Wisdom.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진언이고 가장 밝은 진언이고 가장 뛰어난 진언이며 비길
데 없는 진언이니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참으로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느니라.
Therefore, one should know the Perfection of Wisdom is the great mantra, is the
unequaled mantra, the destroyer of suffering.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
이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라.
Because of this Truth, listen to the mantra: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 Samgate Bohisvaha Gone, Gone, Gone beyond, Gone utterly
beyond Oh, what an Awakening!.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반야부경전 중 하나로 원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이 경
은 불교의 모든경전중 짧으면서도(260글자) 그 품은 뜻은 여타의 다른경전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어 불교의 모든 의식에서 반드시 독송되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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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옮 김

위대한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길




풀 이

지혜의 완성 - 삶의 완성, 성공적인 인생이란 모든 고난과 불행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진정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삶을 말한다. 그 길은 오로지 위대한 지혜로써 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로써 모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보람과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
이라고 한다.




해 설

《반야심경》은 아주 짧은 경전입니다.《 천수경》《예불문》등과 함께 의식을 행할 때 반
드시 독송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불자들은 잘 외우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이 비록 짧은 경전에 속한다고 해도 내용면으로 볼 때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
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지만 그 이치를 제대로 깨닫기는 매우 어려운 경
전에 속합니다

팔만대장경 안에는 일곱 종류의《반야심경》번역본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
는 것이 중국 현장(玄奬) 법사의 번역본 입니다. 여기에 강술하는《반야심경》또한 현장 법
사의 번역본입니다.

《반야심경》의 일곱 가지 번역 중에는 간단히 해놓은 것과 체계적으로 된 번역이 있습니
다. 간단한 번역을 약본(略本)이라 하고, 구체적으로 된 번역을 광본(廣本)이라고 말합니다.

광본에는 서론, 본론, 결론이 다 갖추어져 있으나 약본에는 서론과 결론은 모두 생략되고 본
론 부분만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고있는 것이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는 약본《반야심
경》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경의 제목은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경전의 제목
에는 그 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원래 제목은《반야바라밀다심경》인데 그것을 줄여서《반야심경》, 혹은 그
냥《심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맨 앞의 "마하"는 원래 없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붙여
진 것입니다.

맨 앞의 "마하"는 범어로 마하(Maha)라고 하는데 그것은 '크다(大), 수승하다(勝), 많다(多)'
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하"는 우리가 단순히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마하"의 크기는 어떤 한계나 제한이 없는 무한대의 크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하의
크기 속에는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 적으로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 "마하"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절대적인 크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번역해서 쓰지 않고 그냥 "마하"라는 말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반야"라는 말은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인도 말로 프라야나라고 합니다. 그 뜻
은 '지혜, 명혜'등이 있습니다. 흔히 "반야"를 지혜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야"는 법의 실다운 이치를 깨달은 최상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래서 "반야"
를 얻은 사람은 성불하여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 念), 무분별(無分別)의 경지
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야"는 한 마디로 깨달음의 지혜를 말합니다. "반야"는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의 지혜는 우리의 참 모습에 대
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잠자는 동안에도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죽음이 눈 앞에 닥쳐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고 애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깨고 나면 자기 자신은 따뜻한 이불
속에 편안히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꿈을 깨고 나면 꿈 속에서 몸부림쳤던 것은
현실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불 속에 편안히 누워 있는 모습이 현실임을 깨닫는 것이 바
로 지혜입니다.

지혜는 꿈 속에서 살기 위해서 꾀를 부리고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 헤매고 있
는 모습은 자신의 실상이 아닙니다. 꿈을 깬 모습이 바로 자신의 참 모습임을 깨닫는 일, 그
것이 여기서 말하는 "반야" 곧 지혜입니다. 우리는 꿈속의 것이 현실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
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
다.

"반야"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문제 해결이 "반야"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문제, 감정적인
문제, 사회문제, 정치문제, 노사문제 등 그 어떤 문제라도 "반야"의 지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야"를 얻기만 하면 그것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습니다. 또 "반
야"는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반야"는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되는 소중한 도구입니다. 누구나
수행을 통해서 "반야"의 지혜가 구체화 될 수 있으며,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반야"를 통해 삼세제불은 정각(正覺)을 이루
고, 보살은 열반을 얻고, 중생은 당면한 문제와 나아가서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반야심경》을 지혜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라밀다"는 "반야"와 함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범어로는 파라미타(Paramita)
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도피안(到彼岸 ),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다"는 도피안이니 '저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저 언덕이란 바로 지혜의 열쇠
로서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도피안이라고 해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안
은 궁극적으로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상적 경지인 깨달음의 세계를 피안이라고 하는 반면에 미혹의 중생 세계는 차안(此岸)이
라고 합니다. 차안은 곧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피안, 곧 "바라밀다"는 결국 꿈을 깨고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자신의 실상을 올
바로 관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편안함과 안락함이 항상 깃든 곳입니
다. 그것은 곧 우리가 꿈꾸는 극락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경"은 '핵심되는 경전'이란 뜻입니다. 범어로 흐릿 다야 수트라(Hrdaya -
Sutra)라고 하는데, 그 뜻은 '마음의 경'.' 진수(眞髓)의 경'.'심장의 경'이라고 풀이할 수 있
습니다.

"심경"이라고 해서 단순히 마음의 경전이란 뜻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마음의
경전인 까닭에《반야심경》에서 굳이 마음의 경전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경"이란 반야부의 가장 중심되는 경전이 바로《반야심경》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체 반야부의 경전 중에서 심장과 같이 핵심적인 진수만을 요약한 것이 바로《반야
심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전체 제목이 담고있는 뜻은 곧 '큰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도리를 밝힌 중심 되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흔히 '지혜의 완성'이란 말
로 압축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경의 제목에서 가장 중심되는 말은 역시 "반야"입니다. 왜
냐하면 모든 것은 "반야"를 얻음으로써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열반을 얻고, 정각을 이루는 것입니다.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열쇠가 곧 "반야"이며, 그 열쇠로써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바로 "바라밀다"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큰 지혜로써 우리에게 당면한 문
제를 해결하는 중심 되는 말씀'이라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경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반야심경》은 공의 도리를 밝히고 지혜로써 깨달음을 이루
는 이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옮 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보고 일체 고액을 건넜
다.




풀 이

우리들이 선망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완성자다. 그 지혜를 통하여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모든 현상계와 온갖 감정의 세계를 텅 빈 것으로 깨달아 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었기에 일체 고난과 불행과 문제들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이니, 불행이니, 문제
니 하는 것은 결국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내 몸을 중심하여 나라는 것, 나
의 것이라는 것 등 많고 많은 감정들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의 삶을 통
하여 모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였다.




해 설

여기서부터 경문의 시작입니다.《반야심경》은 다른 경전에 비해 그 구조가 약간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구절이 맨 먼
저 나옵니다. 그런데《반야심경》에서는 경전 성립의 배경 설명이 생략되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야"의 진수를 뽑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독송 되고 있는《반야심경》의 본문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범서로 된《반야심경》에는 경의 맨 처음에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 귀의합니다'라
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체지자'란 바로 지혜를 완성한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반야심경》
은 지혜의 완성을 가르친 경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지자에게 귀의한다'는 구절은《반
야심경》이 지혜의 경전임을 잘 나타내주는 귀중한 말입니다.

"관자재보살"에서 "관자재"는 범어의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 svara)를 번역한 말입니
다. 이 말은 아바로키타의 '관(觀)'과 이스바라의 '자재(自在)'를 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보는 것에 있어서 자유자재한 분'이란 뜻 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
살"은 지혜에 의한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는 분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괴로운 마음을 그
직관지(直觀智)로 투시하는 보살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자비가 인격화된 분입니
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것을 두루 살피고, 알고, 듣기 때문에 우리를 고난에서 구해주는 분입니
다.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부
를 때만 보살펴 주는 것이 아니라 부르지 않아도 항상 어머니의 관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다"의 실천자입니다. 반야의 힘으로 우주와 인간의 근본
실상을 확연히 보는 것입니다. 반야의 실천 내용은 곧 자비행입니다. 자비를 통한 반야의 실
천을 완성하는 자로서 "관자재보살"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궁극적으로 진리
를 실현하고 반야의 완성을 통해 피안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에서 보살의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 말 입
니다. 보리살타는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 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
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것으로 불교의 이상적인 구도자상을 상징
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가진 자가 바로
보살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
천하는 분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넓은 의미로 볼 때 보살은 올바른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며
꿈꾸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살이란 보다 낳은 인생을 위해 꿈과 희망과 포부를 갖고
향상을 꾀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잠깐 "관자재보살"의 여섯 가지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첫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보시는 주는 행위를 말하는데,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재물을 주는 행위를 재보시(財布
施)라 하며, 진리를 일러주는 행위를 법보시(法布施)라 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행위를
무외시(無畏施) 라 합니다.

2 둘째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입니다.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곧 행도을 절제할 줄 아는 것
을 가리킵니다.

3 셋째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입니다.

인욕이란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4 넷째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은 진리의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5 다섯째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입니다.

선정은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안정시키며, 사념(思念)의 근원을 투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
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선정바라밀입니
다.

6 여섯째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앞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최고의 지
혜를 획득하는 일입니다. 또 최고의 지혜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말합니다.

이상의 여섯 가지는 보살이 이상적인 경지인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바라밀은 생각만 갖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밀은
그것을 닦는 자만이 그 진가를 알고 성불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관자재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
다를 행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반야를 실천에 옮기는 일을 말
합니다. "심반야 "는 깊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공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
니다. "바라밀다"는 경의 제목에서 살펴 보았듯이 도피안, 즉 '저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입
니다.

그래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도리를 실천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깊은 지혜로써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뜻
합니다.

"관자재보살"은 깨달은 분이기 때문에 중생의 삶처럼 고뇌와 문제가 가득한 삶이 아닙니다.
지혜로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인생이며, 저 언덕에 건너간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이어지는 "조견오온개공"에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이 모두 공한 것으로 비춰본다'는 뜻입니다. "조견"의 뜻을 좀 더 선
명히 번역하면 '밝히 본다' 또는 '저 먼곳으로부터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
다.

"오온"은 범어로 판챠 스칸다(Panca Skadha)인데 그 뜻은 '다섯 가지 쌓임'이란 말입니다.
"온"은 화합하여 모인 것을 뜻합니다. ' 오온"은 곧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으로는 색온(色蘊).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 蘊).식온(識蘊)의 다섯 가지
를 말합니다.

색온은 스스로 변화하고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위시해서 눈
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색온에 해당됩니다 색온의 본래 의미는 '무너진다'는 뜻을 갖고 있
습니다. 물질의 특성은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것이며, 인간의 육신 또한 지(地).수( 水).화
(火).풍(風)의 사대(四大)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입니다.

수온은 고(苦)와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온은 괴롭다 즐겁다, 좋다 나쁘다, 달다 쓰다 등의 감각을 느끼는 일차적인 마음의 감수
작용인 것입니다.

상온은 외부로부터의 사물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해 보는 마음의 요소를 말합
니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배척하는 등의 마음 작용을 상온이라 합니다.
상온은 일종의 지각(知覺) 작용을 말합니다 느낌이나 감각의 인상을 머리 속에서 정리하는
표상(表象) 작용을 일컫는 것입니다.

행온은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즉, 앞에서 받아들인
마음의 작용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행온이라 합니다. 행온은 분별한 감정을 생각으로 굴
려서 마음의 행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의지와 행동 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잠재적이고 무의
식적인 충동력을 행온이라 합니다.

식온은 의식하고 분별해서 아는 마음의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식온은 모든 인식의 주
체가 되는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을 한꺼번에 일컫는 것이
식온입니다.

"오온"의 다섯 가지 중에서 수.상.행.식의 네 가지 정신작용은 아주 미묘해서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오온"에서 색온은 인간의 육신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나머지 수온.상온.행온.식온은 인간의
정식적인 면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육체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세분되어 나
누는 것입니다.

"오온"을 쉽게 풀이하면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작용 때문에 인
간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오온" 중
에서 수.상.행.식의 작용은 복잡하고 연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산다고 했을 때 먼저 좋다, 나쁘다의 수온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
상상의 끝에 가면 물건을 사게 되는데, 그것은 행온작용입니다. 이어서 식온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물건에 대해 관찰하고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등의 구상작용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개공"은 '텅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도 잠깐 살펴 보았지
만 여기서 "공"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부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변성(不變性)과 가변성(可變性)입니다. 불변성
은 그대로 진(眞)의 차원이고, 가변성은 여(如)의 차원입니다.

예를 들어 꿈을 꾼다고 했을 때, 꿈을 깨고 나면 꿈 속에서 일어났던 일은 온데 간데 없고
그대로 이불 속에서 편안히 누워있는 상태는 진의 차원입니다. 반대로 꿈 속에서 꿈을 꾸는
동안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여의 차원입니다.

본문의 "오온개공"도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온" 그 자
체가 그대로 "공"이며 진이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온"은 영원불변한 것의 한 표현
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온'은 가변적이어서 환영적(幻影的)이며 비실재적(非實在
的)인 것이라는 차원입니다. 이것은 여의 입장입니다. 대부분 "오온개공"을 가변적인 입장에
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
다.

존재의 실상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에 "공"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자면 "공"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
는 것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의 실상이 바로 "공" 입니다.

"조견오온개공" 즉,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비춰본다'는 것은 현상적으로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자아(自我)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를 한꺼풀 벗겨놓고 보면 몸과 마음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꼭두각시 인형 놀음을 보고 있으면 온갖 희노애락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
니다. 그러나 장막을 걷어 버리면 인형들의 희노애락은 한낱 손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그대로 텅 빈 것인데
도 불구하고 집착과 아집에 가려 인형들의 놀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움에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이라고 한다면 괴로움은 존재하
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게 될 때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존재의 실체를 텅 빈 것으로 바로 아는 일이 곧 반야입니다. 근본이 텅 빈 것이라고 해서
허무하거나 무상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무한히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
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비었을 뿐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감정이 그 현상에 집착하
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정이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여 탐.진.치 삼독
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입니다.

흔히 자존심을 건드려서 감정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자존심이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자존심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이 습관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독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그 안에 들어갈 틈이 없게 되어버
린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아집으로 꽉 막혀 있을 때에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가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존재
의 법칙은 텅 빈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텅 빈 것
이라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의 접시가 있다고 할 때 겉모양으로 보면 빈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접시의
구성을 물리학적으로 관찰하면 분자와 분자가 결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자
와 분자 사이의 공간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거리입니다.

분자와 분자 사이의 거리를 쉽게 이해하자면 그것은 지구와 태양의 거리보다 훨씬 더 길고
넓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 거리를 분자와 분자의 인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
니다.

우리의 안목은 분자와 분자 사이의 인력 때문에 마치 접시가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물을 들 수 있습니다. 물이야말로 아무런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람
이 불면 부는 대로 출렁거립니다. 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꽉 차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는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마시는 청량음료는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 탄소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병 뚜껑을
열면 탄소 거품이 물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정한 물의 양 속에 탄소를
집어넣어도 물의 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즈음의 과학에서는 분자를 나누어서 미립자, 소립자까지도 분리 합니다. 어떤 물질이든지
아무리 작게 나누어도 또 나눌 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정신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저마다 다릅니다. 자기 자신의 안목대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자만과 아집으로 가득찬 인생은 시시각각으로 문제를 일으킵니
다.

"조견오온개공"의 안목으로 볼 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
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생겨날 때 삶은 더욱 발전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꿈꾼다면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열반의 경
지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작은 나에 집착 하지 말고 큰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
다. 그럴려면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결국 공한 것으로 비춰봐야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조견오온개공"의 결과가 "도일체고액"입니다. "도일체고액"의 뜻은 '일체의 괴로
움을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은 결국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
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도"라는 말은 '건넌다'.'초우 한다'.'제도한다'는 뜻으로 번역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
란 괴로움의 세계에서 즐거움의 세계로 건너가는 도피안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을 건진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도"의 의미는 일체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체"라는 말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라는 말을 잘 씁니다. "일체"의 의미를 보다 선명히 이해할 수 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
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부부싸움 하는 것을 목격 했습니다. 그런데 그 스
님은 갑자기 싸우는 부부 앞에 나아가 자기가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들 부부
는 생전 처음 보는 알지도 못하는 스님이 잘못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스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문제 속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은 "일체"라고 하는 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고액"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바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서 문제는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나서 아픈 것도 문제이며, 남편의 승진도 문제이며, 자녀의 진학도 문
제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마음은 늘 괴롭고 어두운 상태가 되는 것
입니다. 문제란 우리에게 아프고 쓰라린 강물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액"은 넘고 또 넘어야 할 거대한 산과 같으며, 건너고 또 건너
야 할 엄청난 강입니다. 또 "고액'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뇌리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는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이
라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없다고 한
다면 그것은 이미 괴로움이 아닌 것입니다. 즉 괴로움의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
이 공하다는 인식에서는 일체의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반야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되는 상처로 얼룩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캄캄한 밤길에 혼자 집으로 가려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상
처뿐인 캄캄한 밤길이 아닌 밝은 태양이 빛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실상이
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반야의 길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지혜의 눈으로 환히 꿰뚫어 볼 때 비로소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못할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반야에 있음을 잊
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반야는 곧 공에 대한 확실한 인식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불교의 존재 목적은 보다 나은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있습니다.《반야심경.의 공사상은 이론
적인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육신과 정신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온"
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합니다.《반야심경》은 그 문제에 대
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온"의 존재 양상이 바로 "개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빈 모양
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텅 빈 모양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곧 지혜이며, 그
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없는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있는 괴로움을 소멸
하는 데서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면 괴로
움은 저절로 사라지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매달려 잘못된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러나《반야심경》에서는 존재의 실상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늘은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무수한 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하늘이 텅 비
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도 꽉 차 있는 것으로 모만 볼 것
이 아니라 텅 빈 것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
입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인연의 끈에 의해 잠시 있을 뿐입니다. 인
연에 의해 잠시 존재하게 되는 이유 또 한 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이나 기쁨, 미움이나 성냄 등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감정들도 인연에
의해 잠시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의 실체는 텅 비어서 없는 것입니다. 한순간 감정을
만나면 영원히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현자로 장자(莊子)가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 속에 "유인( 遊刃)"이라는 말이 있습니
다. 그 말뜻은 '칼을 가지고 자유자재하게 매우 잘 쓴다'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
니다.

옛날에 소를 아주 잘 잡는 백정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를 잘 잡기로 칭찬이 자자했
습니다. 어느날 왕에게 까지 그 소문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왕은 어떻게 하여 그가 소를 잘 잡는지를 보려고 푸줏간으로 갔습니다. 그 백정은 소를 잡
아 살을 뜨고 뼈를 가르는데 마치 곡조에 맞추어 춤추듯 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의 예
술로 승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왕은 감탄한 나머지 그에게 칼을 멈추게 하고 어떻게 하여 소 한 마리를 그렇게 잘 가르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백정이 되었을 때는 소가 한 덩어리로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 한 마리가 살과 뼈로 완전히 분해되어 보이 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소 한 마리를 잡을 때 완전히 분해된 상태에서 텅 빈 공간과 공간 사이를 지
나면서 칼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완전한 음악의 동작에 맞추어 텅 빈 공간을 딸 춤추
듯 칼질한다고 해서 "유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인"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 한 마리의 진짜 모습은 무수히 많은 공간을 갖고 있
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실상은 꽉 차 있어서 아무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
무수히 많은 것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백정은 소 한 마리를 볼 때 뼈와 살을 완전히 분해하여 텅 빈 공간까지를 보는 것입니다.
텅 빈 것을 분해하기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계속되는 훈련을 통해 도의 경지에 도달한 백
정은 소 한 마리를 볼 때 처음부터 텅 빈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날 하나
상하지 않고 쇠고기를 자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인생 자체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체의 것이 있다고 하는 데서 괴로운 것입니다. 자의식(自意識)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한
다, 미워한다, 나는 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등등의 소유 의식은 그 연장선상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하루 아침에 이런 일체의 감정을 다 지워버리기는 어렵겠지만 존재의 실상이 본래 텅 빈 공
의 상태임을 확인하고 실천에 옮길 때 언젠가는 지혜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태양보다 밝은 광명으로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게 되어 더 이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
입니다.

봄이 되면 잎이 무성하게 피는 듯 보이지만 곧 가을이 되면 하나 둘 잎이 지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들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 어
떤 가르침보다 공의 가르침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최상의 약이 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은 바로 불교의 목적이며, 우리 인생의 길잡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진수를 깨닫는 것이며, 불교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
다. 그 나머지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이 구절
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반야심경》의 주된 안목은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육신과 정신 세계를 텅 빈 것으로
관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또 명심
해야 할 것입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옮 김

사리자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



풀 이

사리자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여, 이 몸을 위시한 모든 형상계는 텅 빈 공과 다르지 않다.
텅 빈 공 또한 이 몸, 이 현상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몸, 이 현상계는 그대로 텅 빈
공이고, 텅 빈 공 그대로 이 몸, 이 현상계인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
의 작용들,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생각을 발전시켜 가는 일과 모든 인식의 근본까지도
또한 텅 빈 공이요, 텅 빈 공 그대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의 작용들 그대로다.





해 설

첫 구절의 "사리자"는 관자재보살과 함께《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관자재보살
이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주체자라면 "사리자"는 반야바라밀에 대한 설법을 듣는 사람입니
다. 이것은 곧 " 사리자"로 하여금 관자재보살의 차원이란 바로 완전한 지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경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리자"는 범어로 사아리푸트라(Sariputra)라고 하는데 취자(鷲子)라고 번역합니다. 음을 그
대로 옮겨서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도 말합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사리자"는 그냥 막연하게 부
처님의 제자이니까 부른 것은 아닙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지혜가 제일 높은 제자입니다. "사리자"는 직관지(直觀智)
가 가장 뛰어난 제자인 것입니다.《반야심경》은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혜 제일의 "사
리자"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전의 중심 내용과 등장 인물이 일치되도록 구성되
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앞의 "조견오온개공"의 내용
과 연관 지워 한 번 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첫 구절인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
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상인 색과 존재의 본질인 공과의 관계를 사상적으로
표현한 대목입니다. 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유한한 현상인 색과 무한의 본질인 공은 별개가
아닌 것입니다.

"색"은 오온 가운데서 첫번째에 해당됩니다. 이는 곧 육신에 대한 바른 견해가 우선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텅 빈 것은 둘이 아니란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색"이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와 몸 밖의 현상계 일체를 구
성하고 있는 지.수.화.풍의 네 가지를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이든 바깥 현상계이든
모두가 인연에 의하여 거짓 화합하여 잠깐 있는 듯이 보이는 까닭에 고정불변 하는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본질상으로 볼 때 텅 비어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은 '섹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 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현상인 색과 본질인 공에
대한 그 체험적 결과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즉 현상인 색과 본질인 공은 서로 상반적(相
反的)이며 동시에 상사적(相似的)인 것입니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은 인생과 우주를 더 넓게 바라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입
니다. 색과 공의 관계는 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이 공이라
면 파도는 색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식을 다른 비유로 대비시켜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 비유하면, '하늘은 텅 빈 것이다. 그 텅 빈 것은 하늘의 구름과 별과 해와
다르지 않고 똑같다'라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공간 속에는 구름과 해와 달
과 별들이 모두 한 덩어리라는 말입니다. 텅 빈 공간 속에 없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얽혀 있는 것입니다.

공의 본질을 명확히 밝힌 이 대목은 현실에 있으면서 현실에 집착 되지 않고, 현실에 집착
되지 않으면서 현실을 중요하게 인식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단순한 현실 부정이나 현실 집
착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되 자유자재한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식에는 다른 어떤 현상을 대입시켜도 모두 성
립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을 대입시켜 보면, "애불이공 공불이애 애즉시공 공즉시애
(愛不異空 空不異愛 愛卽是空 空卽是愛)"가 됩니다.

이것은 '사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사랑과 다르지 않다. 사랑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사
랑이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랑과 공은 결국 하나인 것입니다.

이어서 "수상행식 역부여시"는 '느낌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도 그와 같이 실체가 없다'
는 뜻입니다. "수상행식"은 오온 가운데 정신적인 네 가지 양식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시해서 정신작용 또한 텅 빈 것이며, 텅 빈 것 또한 마음의 작용인 것입니
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은 " 수상행식"의 영역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
다하게 일어나는 감정을 텅 빈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결국 공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지혜의 눈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의 눈만 뜬다면 사물 하나 하나, 사건 하나 하나가 그대로 진리화 될 수 있습니다. 또
지혜는 그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 바로 지혜에 있습니다. 지혜는 곧 모든 것을 텅 빈
것으로 보는 일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돈이나 명예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의
실체를 파악하여 반야의 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옮 김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은 것이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이며,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은 것이다.



풀 이

사리자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여, 앞서 말한 몸도 마음도 텅 비어 일체가 공하다는 것은
새롭게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생기는 일이 없으므로 소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더럽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아예 생기고 소멸
하는 법이 없는데 무엇이 불어나고 줄어드는 일이 있겠는가. 우리가 보아온 모든 불어나고
줄어들고, 더럽고 깨끗하고, 생기고 소멸하는 일체의 현상은 실은 환상인 것이다. 우리의 진
실 생명에게 그런 일은 본래로 없는 것이다.





해 설

이 대목은 공에 대한 참모습을 밝히는 부분입니다. 지혜 제일 "사리자"를 불러 주위를 환기
시키며 공상(空相)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법"이란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제법" 속에는 광물, 식물, 생물, 무생물을
비롯하여 인간까지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서 형상을 가졌거나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켜 "제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법"이란 진리라는 뜻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사물을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법"의 본질이 곧 "공상"입니다. 즉 "제법"은 공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텅 빈 것입니다. 공의 본질 속에는 모든 것을 흡수함
과 동시에 표상( 表相)으로 확산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한 모양은 바로 다음으로 이어 지는 "불생불멸"이며, "불
구부정"이며, "부증불감"입니다. 이것은 곧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
함도 아니며, 더함도 아니고 덜함도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상대 개념은 이 세상의 모든 상대를 대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속에는 남.녀, 남.북, 밤.낮, 좌.우, 노.소, 노.사 등 온갖 상대 개념이 다 포함됩니다.

일체법(一切法)이 존재하는 모양은 바로 공이기 때문에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깨끗함도
아니고 더러움도 아니며, 더함도 아니고 덜함도 아닌 것입니다.

우선 "불생불멸"의 의미를 새겨보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생성과 소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현상은 생할 수도 있고, 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면에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입니다. 곧 "불생불멸"은 "역생역멸 (亦生亦滅)"과
도 통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불생불멸"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승 경전의 대표되는 가르침
이라 불리우는《화엄경》.《법화경》.《반야심경》에서 공통적으로 존재의 실상에 대해 밝히
고 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법불생 일체법불멸(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
니다. 이 말은 곧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 또한 '이 세
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그 자체로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현상계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이 세간에 늘 그대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야심경》의 "제법공상 불생불멸"도 같은 맥락에서 존재의 본질을 명확히 밝힌 대목입니
다. 존재의 본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 과학의 이론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
다.

과학에서는 물질에 대한 세 가지 해결하지 못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질량은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 한울타리 -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운무 자욱한 운문산을 얼마전에 갔다왔지만 수박 겉핥기식이었다는 걸 느낍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쭈고자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랫재쪽의 골짜기는 심심이골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학심이골은 가지산에서 내려가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갸우뚱???
▣ 솔향 - 배만식님...무엇하시는 분이십니까..불교문화에 매우박식한 분 같아서...그리고 산행기를 구체적으로 재미있게 잘쓰셨군요...
▣ 서디카 - 배만식님 장문의 산행기와 반야바라밀다 심경 ...... 풀이.. 정말 유익한 자료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 산거북이 - 세밀, 조밀한 산행기는 흥미롭게 잘 보았습니다. 첨부하신 자료는 산행기를 읽는 이로 하여금 당황스럽게하는군요.
▣ 김정길 - 운문산박사이신(영남알프스박사는 아니신지요) 배만식님의 후배가 직접 길러서 조달하며 경영하는 대경가든의 염소육회, 불고기, 오리불고기, 억산송이버섯요리, 꾸밈없이 투박하고 우직한 인간미의 주인장을 찾아가보고 싶습니다. 많은 공부를 하고 가며 감사합니다. 근데요? 고글을 낀 모습으로 삼십대 중반으로 보인다면 실지는 사십대 중반이신지요. 나도 고글과 친해야 할까봐요. ^^
▣ 이우원 - 산행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설법하시던 일타스님(해인사)이 생각납니다. 반야란 지혜를 집중하다. 지혜를 끌어모은다고 설법하시던 스님.... 바라란 곧 파라다이스라는 말이 어원인것으로 아는데 이상향, 천국으로 해석하던데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