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晩秋) - 멈추어 서서 뒤돌아보기


 

                 낙동정맥 제12차 산행(경북 영천시 고경면, 경주시 안강읍)

             

                 2005. 11. 27  일요일

          오룡고개 - 삼성산 갈림길 - 521.5봉 - 시티재(안강휴게소) - 통신탑 - 호국봉(340m) - 3 83 봉 - 서낭단 - 어림산(510.4m) - 마치재 - 남사봉 - 한무당(청석골)재

                 구간거리 : 18km      7시간 20분 소요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중에서

 


 

 

 

우리에게도 저런 사랑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되고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사랑을 기억해 낼 수 있을 런지.

  그렇게 가버린 사랑너머로 옛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아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나뭇잎에 덮여서 나뭇잎의 따스한 온기 속에 숨쉬고 있을 거다.

  일상의 끊임없는 수레바퀴 속에서 움츠리며 살고 있는 우리가

  어느 날 아주 우연히도 그 옛날 사랑의 실핏줄 같은 흔적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그런 바람이라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이 지고 있는 가을 속에서도 외롭지 않을 거니까.


 

 

 

 

  이 시를 쓴 박 인환 시인의 그때 나이가 31세 이었던가

  어쩌면 젊은 날의 치기였겠지만 그보다 20년 이상 더 살아버린 우리의 가슴 속으로 잔잔히 물결져 밀려오는 것은 그 세월 동안 우리의 가슴이 너무 서늘해 진 걸 거란 생각,

  아직 더 깊은 관조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지난날의 우리에게 가슴이 젖을 만큼 환호의 날들이 있었는지.

  그래도 우린 지나왔었고 또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겠지.

  어디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그래서 그게 행복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다면...


 


 

 


 


 

 

 새벽 5시에 출발한 산악회 버스가 9시 30분에 오룡고개에서 우리를 내리자마자 선두가 부산하게 출발한다.

  하늘은 파랗게 차고 바람은 걱정한 만큼 춥지는 않다.

  오랜만의 구름 없는 하늘이 내게 미소 짓는 것 같다. 겉옷을 배낭에 넣은 게 잘한 일이라고 흐뭇해 한다.

  산행리더인 그리운산님이 뒤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다. 오늘은 맨 후미에 간다고 한다. 별 일이라고    웃고 같이 산을 오른다.

  낙남정맥 때부터 같이 산행을 했는데 요즘은 그리운산님과 같이 동행을 하면 괜히 휘파람이 나온    다.

  최근 산행에 게을러져서 오늘 산행도 망설이다가 금요일 회장님의 전화 한 방, “갈 거요 말거요. 안 오면 빼버릴 거다~” 에 놀래서 오긴 왔지만 그렇게 심신이 화동하지는 않았는데

  그걸 느끼기라도 한 듯이 그리운산님이 우리 낙남 동지들과 동행한다고 한다.

  나와 종고산님 구봉산님은 호남 금남호남 낙동을 항상 같이 하고 있으니 남들 눈에는 우애로운 한    팀처럼 보일 것이다.

  아주 기분이 좋다. 낙남 때의 4사람이 맨 후미에서 느긋하게 관조하는 산행이라니.


 

 


 


 
 

  이미 나뭇가지는 바람을 홀로 맞고 있다.

  가지를 떠난 잎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기도 하고 등로 오솔길에 엎드려 숨죽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발밑에 부스러지는 낙엽,  낙엽 소리,  떠나가는 소리...

  만나고 헤어지는 게 무어 그리 대수인가.

  엊그제 파란 웃음으로 만났지만 벌써 이렇게 떠나가는 것을.

  그러면서도 잎 떠난 자리에 다시 새싹이 돋아 다음 봄엔 반가운 미소로 또 만날 건데.


 


 


 


 

 

  그러나 뒤돌아보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기도 하다.

  이렇게 낙엽을 밟으며 속삭이는 듯한 낙엽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면

  시린 늦은 가을 햇살에 지나간 사람들이 실루엣으로 잡힌다.

  점심만 먹으면 양지바른 연못가에 나와 오후 강의를 빼먹으며 팔베개하고 가을의 오후를 느긋하게    보듬고

  니체와 헷세에 대해 또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걷는 법, 먹는 법, 말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아무도 사랑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독일인의 사랑에 대해 주고받던 J형,

  ‘인생은 아름답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하면 말없이 웃으면서 숙직실 온 방안에 넘치는 담배 연기와 함께 밤새도록 바둑만 두자는 K형,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시 차오르는 또 하나의 얼굴’이라던 그녀 땜에 무수히 한숨으로 지새운 많은    날들, K형의 도움.

  사소한 이유 땜에 지금은 소식도 모르고 떨어져 버렸지만 보고 싶어진다.

  빛바랜 사진처럼 그 사람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뜬다.

  그 실루엣에 대고 보고 싶다고 말해 본다.

  보고 싶다고 말한다는 것은 내가 정화되어 간다는 것일 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현명해지    고 있다는 것일 거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정맥 코스에서 벗어나 있는 삼성산 정상에서 제각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동료들의 모습을 살짝 찍고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이 45분, 다시 맨 후미가 되어버린다.

  열심히 쫒아가서 마티재에서 일행과 합류하고 호국봉의 부드럽게 깔린 낙엽 이불 위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그리운산님은 오늘 후미에 가면서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다고 차려온 음식이 진수성찬이다.

  최 교장선생님은 비파주라면서 아주 맛깔스럽게 향기 좋은 술을 꺼내서 권한다.

  난 요즘 너무 많이 마셔서 컨디션이 안 좋다고 사양을 한다. 술을 적게 먹어야지.


 


 


 
 
 


 

 

  점심 도중에 먼저 출발한 DS님을 가다가 만나 우리 팀에 합류시킨다.

  아마 오늘은 여기서부터 라도 최소 한 시간이 늦어질 것이다.

  50대 후반의 아줌마가 이 정맥 산행을 한다는 것도 놀랍고 또 끝까지 완주하려고 하는 모습에 우리가 감동을 먹는다.

  오르막에선 아주 힘들어한다. 종고산님이 자기의 스틱을 주면서 오르막에서 오르기 편하게 해준다.

  어림산 정상을 오를 때는 아주 쩔쩔매는 것을 보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기에

  그리운산님의 스틱을 붙잡고 뒤에서 구봉산님이 힙을 밀어주는 반동으로 겨우 오르기도 한다.

  뒤에 가는 우리는 괜히 실없는 농담도 하면서 싱글벙글이다~.

  힘들게 산행을 하면서도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왜인가.

  다른 편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저 산행을 왜 저렇게 고집할까.

  연민이 가슴 속으로 시리게 지나간다. 이런 생각도 늦가을의 계절 탓이겠지.

  나도 곧 나이 들어서 저렇게 될 건데 생각하니 세월에 부대끼면서도 지금 이 시간의 행복에 벅찬 희열을 느낀다.

  사랑한다는 것에 타산이 없어야하고 무엇이든지 그러한 마음으로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항상 그러다 말지만~.


 


 
 
 
 

  해가 서산에 걸렸다. 구봉산님이 탄성을 지른다. 만추에 낙조.  그대로 그림이다.

  DS님이랑 그리운산님 종고산님이 앞서 멀리 가든지 말든지 낙조를 바라보며 디카를 들이대 본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산행동료들이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니 조바심이 난다.

  그럴수록 다왔다는 느낌은 들지만 조그마한 봉우리를 여러 개 넘었어도 한무당재가 모습을 드러내    지 않는다.

  마지막 봉우리를 넘자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고 우리가 소리치자 화답을 해준다.

  짜증도 났겠지만 우리가 도착하자 웃음으로 반겨주면서 뜨끈한 수재비와 돼지 껍데기 볶음을 내어    놓으면서 술도 한 잔 나눠준다.

  늦가을 짧은 해는 한무당재에서도 이미 서산으로 지고 없다.


 

          11.30  에이허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