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jpgimg.jpg-검단산 중덕 쉼터가는길, 백상 장기영 한국일보 창간사주 묘지-


검단산<유명인사 묘지엔 철조망이 높기만 하더라!!!>
2021044039호       2021-07-21()

자리한 곳 :경기도 하남시
지나온 길 월남참전기념비-현충탑-호국사갈림길-쉼터-산불감시초소-마을회관입구-장기영묘지-애니메이션고교
거리및시간: 2시간 39(10:30~13:09)     ※ 도상거리 : 5.0km     소요시간 의미 없음
함께한 이 민선배님과 둘이서
산행 날씨 대체로 맑음 대단한 무더위 <해 뜸 05:27 해 짐 19:50       ‘최저 26최고 36>

본의 아니게 검단산에 영면하신 유명인사 묘역에 선다.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에 선배님을 모시고 무더위가 기승인 중복(721)날 다녀왔다지난 4월 봄볕이 화사하던 목요일 불암산행을 다녀오며 기회를 만들어 근교산행을 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안부전화를 겸해 주중일정을 여쭤보니 평소와 다르게 발목상태가 좋지 않음을 걱정하신다. 연세(79)를 고려해 부담이 덜한 육산이며 교통(지하철)편이 편리한 청계산과 검단산을 말씀드렸더니 주저 없이 검단산을 지명하시며 장사주(社主묘소부터 참배하고 산행하는 것으로 하자는 대선배(고교10회사입사11)님의 뜬금없는 제안에 얼떨결에 동의하고 풍수지리에 관심이 별로나 검단산은 명당지로 유명인사들이 많이 영면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니 산행과는 무관한 풍수 공부에 돌입한다.
검단산행 코스는 다양하나 우리는 일반적인 코스인 월남참전기념비-유길준묘-전망바위-정상-쉼터-현충탑-장기영묘소-애니메이션고교 7.7km 코스로 정했는데 선배님의 발목상태를 감안해 급하게 단축 월남참전기념비-현충탑-호국사갈림길-쉼터-산불감시초소-마을회관입구-장기영묘지-애니메이션고교 5.1km 코스로 변경한다.
img.jpgimg.jpgimg.jpg-검단산 등산로 충혼탑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풍경-
검단산(鈐丹山) : 해발 657m의 높이로 하남시에 위치한 검단산은 하남시의 대표적인 명산입니다.
검단산이라는 명칭은 백제시대의 도인 검단선사가 은거했다고 하여 "검단산"이라 불려오는데요
산중턱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아서 쉬어가며 경치를 구경하기 매우 좋습니다.
검단산이라고 불리우는 일화를 한가지 소개하자면 ,,검단선사는 한 소년과 매일 바둑을 두며 친하게 지냈는데 이 소년의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어느 여름날 소년은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면 대추와 곶감을 달여서 먹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검단선사는 소년을 위해 축지법을 이용해 여름에도 대추와 곶감이 나는 묘향산에 다녀오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이미 소년의 어머니는 죽고 소년도 마을을 떠난 후였습니다상심한 검단선사는 소년을 떠올리며 검단산에 들어와 도를 닦다가 죽었구요 소년을 향한 검단선사의 지극한 마을 덕분인지 잃어버린 아이를 검단산에서 찾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남시홈페이지-
img.jpgimg.jpg-하산길 산불감시초소, 간벌하지 않아 소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
유명인사의 선영(先塋)들은 높은 철조망에 철문이 잠겨 있다.
구당 유길준(1856~1914)묘소가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코스변경으로 자연스럽게 생락했고 쉼터에서 능선 따라 내려오다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묘소를 만날 수 있었는데 높은 철조망이 앞길을 가로막아 아쉽게 발길을 돌렸는데 녹음이 짙어 하산길에 묘지로 직행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진입이 용이한 애니메이션고교로 하산한다. 사거리의 검단산으로 이어지는 산행분기점에서 직진해 묘지입구에 이르렀으나 높은 철조망에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참배가 불가했다. 무더위에 여기까지 왔다가 참배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야 하다니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굳게 닫친 철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 승합차가 들어오더니 철문 앞에 정차한다차에서 내려 열쇠로 출입문을 따고 들어가 철문을 열어놓고 승합차에 타려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장기영사주 묘지참배를 왔는데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는데 들어갈 수 없겠는가물으니 달갑지 않는 표정으로 어디서 왔냐고 물으며 자동차를  운전해 철문 안으로 들여놓고 정차한다혼자인줄 알았는데 뒷좌석에 사람이 타고 있었던지 뒷문까지 열리며 두 사람이 차에서 나왔고 뒷좌석에 타고있던 사람이 무슨 일로 어디서 왔는지? 물음에 우리는한국일보 전직 사우(社友)며 오래전 다녀간 기억을 더듬어 찾아왔는 답변에 음성이 부드럽게 바뀐다철문을 걸어 잠그며 참배하고 가실 때 출입문을 힘주어 닫으면 잠긴다 알려주며 참배하시고 가실 때 문단속을 부탁한 다음 자동차가 떠난다.
img.jpgimg.jpgimg.jpg-한국일보 창간사주 백상 장기영 묘역 초입-
한국일보 창간사주 장기영 전부총리 묘소
우리는 관리사무실 앞 묘지입구 백상 장기영 상(百想 張基榮 像)에 목례를 올리고 윗자리 장사주의 선친인 장동후(張東厚)의 무덤에 예를 갖추고가운데 장사주의 묘지로 옮겨가 약간의 과일과 음료를 제단에 올려놓고, 삼배(三拜)로 경의를 표하고 묘비문을 읽어본다.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백상인동장공기영지묘(副總理兼 經濟企劃院長官 百想仁同張公基榮之墓) 내가 입사전 서거하셨기에 직접 모신적은 없으나 100kg의 거구로 '왕초'란 별명에 걸맞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한국일보“ 를 만든 거인으로 장기영사주(張基榮社主)께서는 박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61(77)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검단산 선영에 묻힐 때의 일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로 운구(運柩)까지는 순조로웠으나, 그린벨트에 속한 장지(葬地)가 문제였다. 그린벨트는 개발제한구역으로 훼손하거나 허가 없이는 묘지조성이 불법이라 관할지 담당 공무원이 허가(그린벨트 일부 해제)없이는 신문사사주며 전직 부총리라도 공무원은 법을 어길 수 없다며 강력저지 예정대로 안장하지 못하고, 이튿날 박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후에야 영면의 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전해 들었던 기억을 되뇌며, 발걸음을 아래쪽 장강재회장님 묘지로 향한다파묘(破墓)로 무덤이 없는데 서 있는 묘비(한국일보사 會長 仁同張公康在之墓)앞에 서니 생전의 모습이 떠오르며 만간이 교차한다.

유명인사 묘지와 철조망이 어떻게 어울리는 문장일까?
안내소근무자와 지역주민에게 유명인사(장기영전부총리정주영회장)묘지참배 왔는데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으니 철조망이 높아 어렵다고 귀띔했으나 어떻게 되겠지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직면하고보니 사실인데 어쩌겠는가월담을 강행하기도 뭐하고......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황제()()대통령 묘지도 개방되어 자유롭게 참배할 수 있었는데대한민국 유명인사 묘지는 국가주요 시설물처럼 철조망으로 출입을 원천봉쇄 하는지 모르겠다.  세계 경제10대국으로 끌어 올린 주역이라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분들의 묘지를 찾았으나 높은 울타리 때문에 참배조차 못한다니 애석하고 안타까운 현실이 답답하게만 느껴지며 유명인사 묘지와 철조망이 어떤면에서 같으며 어울리는 문장인지? ’유명 한글학자에게 유권해석이라도 받아 보고 싶어 진다.
img.jpgimg.jpg-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일보 창간주 장기영 지묘- 
장기영(張基榮) : 1916년 5월 2일 서울 용산 출신으로 호는 백상(百想)이다한남보통학교(漢南普通學校)를 거쳐,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광복 후 1948년에는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한국은행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고 경영난에조선일보취체역 사장이 되었다.조선일보의 지사와 지국을 정비하고 편집진을 보강하고 1954년 4월 방일영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1953년 한일회담 대표단원으로 일본과 교섭하였다.
1954년 5월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발행하다 제호를한국일보로 바꾸어 창간했고 자매지로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주간스포츠를창간했다. 1957년 황태영(黃泰永)에게서 KORCAD-TV를 인수하여 대한방송주식회사(DBC-TV)를 설립하고 3시간여의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했다. 1959년 사옥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AFKN-TV의 지원으로 방송을 이어가다가 1961년 10월 군사 정권이 DBC-TV의 채널을 회수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1960년에는 서울경제신문과 소년한국일보, 1969년에는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고이어 주간한국과 주간여성』 등 여섯 개의 자매지를 발행하였다군사정변 이후인 11월 한국일보가 군사정변세력의 사회노동당 주비설을 보도했다가 이 때문에 사장으로 책임을 지고 구속되고한국일보의 자진휴간 후 석방되었다한편, 1961년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같은 해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최초로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 우리 축구팀 단장으로 원정했다.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 및 아시아경기연맹 회장, 196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정일권(丁一權)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발탁되어 금리현실화와 유리창행정연탄의 흑백논쟁 등 일화를 남겼다한일회담에 막후에서 관여했으며, 1969년 한일간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대통령특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같은 해에 한일협력위원회를 창설창립총회 부의장이 되었다. 1971년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공동위원장대리로 활동했다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하여 청조 근정훈장국민훈장 무궁화장그리고 인권옹호상·체육공로상· 최고체육장을 받았다외국으로부터는 독일1등대십자공로훈장과 월남보국2등훈장중화민국1급 문화훈장을 받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img.jpgimg.jpg-비석과 묘지 흔적만 남아 있는 장강재 회장 묘지 터-
한국일보사 장강재회장님의 다정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글거리는 삼복(三伏)의 태양아래서 불편하신 선배님과 동행,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이란 단어가 적합한 100여분의 시간이 흘러가고, 나머지 60여분은 검단산에 영면(永眠)하고 계신 대단한 업적을 남기신 기업인의 묘지와 전부총리겸 한국일보창간사주 장기영 선생묘지 참배를 목표로 했으나, 정주영 회장 묘지는 참배하지 못해 아쉽다.
우리는 일생동안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인생관을 키워가며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자신도 나름의 방법으로 삶에 충실하고, 고민끝에 출근을 2시간 앞당겨 7시 출근을 시도해 습관(習慣)으로 굳어졌을 어느 날 출근길 본사 현관에서 출근하시던 장강재회장님과 마주쳐 인사올렸다. 회장님승강기(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만을 기다리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안내양이 나와 회장님께서 같이 타라하신다 전했다. 동승한 짧은 시간 이름과 근무처를 하문하신 이후 우연하게 지나칠 때도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셨음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장강재회장님 서거(逝去이 후 한국일보는 파란곡절(波瀾曲折)의 격랑(激浪)에 휩싸이나 했는데 결국엔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오늘따라 부불삼대(富不三代)란 글귀가 자꾸만 어른거린다.            --.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 찾아서 ~

2021-08-10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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