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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수원화성 관광안내도,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군사지휘소)-


팔달산(八達山)&수원화성(水原華城)<화성행궁 역사문화 체험>
2136023025호       2023-03-15()

자리한 곳   경기도 수원시
지나온 길  수원역-도청오거리-수성약수-성곽(서장대-장안문-동장대-팔달문-서남암문)-효원의종-화성행궁-수원역
거리및시간: 4시간28(11:01~15:29)         도상거리    :  13.2km      <보행수(步行數)    :  21,773>
함께한 이  계백 혼자서
산행 날씨  강풍에 구름 많음 <해 뜸 06:45     해 짐 18:39    /    ‘최저 5,     최고 14>

주중인데 뜬금없이 수원 화성을 찾은 까닭은?
춘삼월 봄 햇살이 힘을 발휘하여 온화하고 부드러운 날씨를 기대했는데 흐리고 바람까지 강하게 몰아친 궂은날이라 그냥 쉬려고 자리에 누워있는데 허리도 아프고 따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1에 내려가 우편함에 얌전하게 담겨있는 조간신문을 챙겨와 건성건성 헤드라인만 살피며 페이지를 넘겨나가다, 중국 구이린 여행 기사에 홀려 차분하게 읽어내다 뜬금없이 정조대왕과 화성행궁이 생각났다. 조선국의 군주로는 드물게 애민정신과 사명감이 투철했던 정조임금은 진정한 위민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높은 이상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2의 세종대왕이라 할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군왕이나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안타깝기만 하지만과연 정조대왕께서 20년을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그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군주였나? 등으로 해석에는 이견도 없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군주인기 때문에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수원화성과 팔달산을 다녀오기로, 즉석에서 결정하고 우선 조반부터 챙겨먹고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선다.(09:15)

팔달산과 화성만으론 양이 차지 않아 길이를 늘리려고 고심
6호선 지하철에 승차해 구석자리에서 지도를 살펴보니 수원화성 성곽길이가 약5.7km에 불과하므로 3시간미만의 산행거리란 단순계산에 연계 가능한 산행지를 찾았으나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2호선 경유, 서동탄행 1호선 전철로 환승하니 빈자리가 많아 한갓진 자리를 골라 앉아서, 지도를 펼쳐들고 산행거리를 늘려내려는 잔머리쓰기에 착수해 다음 코스를 확정한다수원역에서 하차해서 도를 따르다가 경기도청오거리에서 팔달산자락으로 진입, 착실하게 성곽돌기를 완성하고 행궁으로 이동해 1차 복원공사가 완료된 화성행군을 돌아보고 귀갓길은 팔달로타리중동사거리교동사거리여성회관도청오거리수원역 코스를 확정했다도청오거리에서 팔달산로 삼거리(서장대관광안내소)에서 관광안내소에 들려서 봉사자에게 주요정보를 얻어 담았고 안내지도를 챙긴다.  순전히 산행거리를 늘려는 목적으로 성곽바깥쪽 산책로따라 서남암문에서 오솔길 따라 삼거리에 내려서 도로를 따르다 수성약수에서 산책로와 작별하고 계단길에 올라서 서암문을 통과해 서장대 성곽길에 올라서 본격적인 성곽탐사에 돌입한다.(11:57)
img.jpg-팔달산 정상에서 바라본 수원시가지와 광교산능선-
팔달산(八達山)    :  경기도 수원시 중심에 있는 수원의 주산으로 높이는 145.4m 이다.
옛 이름은 광교산 남쪽에 있는 탑 모양의 산이라 하여 탑산으로 불렸다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탑산에 은거해 있는데 고려 말 3학사 중 한 분이 조정에 내려올 것을 누차 권고했으나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그래서 화공을 시켜 탑산을 그려오라 했다 한다그림을 본 이태조는 "역시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라고 하며 산 이름을 팔달산이라 명명하였다팔달산에 오르면 수원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수원성곽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1948년 8월 15일 한국의 독립을 기념해 일제 순사 노구 찌의 순국비를 부순 자리(중포산)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세웠다. 1969년 3월 1일 삼일동지회는 삼일독립기념탑을 팔달산에 세우고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새 기념탑 옆으로 옮겼다.                -위키 백과 글 편집-

화성어차   :  연무대 출발(순환형) : 4,000화성행궁 출발(관광형) : 6,000화성어차는 주된 관광 포인트를 순환하는 관광열차로순종이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의 가마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되었다.

국궁체험장   :  220여 년 전 정조대왕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하던 곳인 수원화성 연무대(동장대)에서 국궁 활쏘기를 체험하며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다조선시대 지존이신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곰 과녁을 겨냥하며 <사용료 1회 10발 2,000>

효원의 종 타종   :  팔달산 정상에 있는 효원의 종은 유서 깊은 효원(孝園)의 도시이자 날로 발전하는 수원의 모습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그 동안 주요 행사 때 마다 타종 하였다. <사용료 1~2명 1,000(1회 3) / 3~4명 2,000(1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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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서장대의 서노대(망루, 기계식  활터), 수원화성 서문인 화서문-
서장대(西將臺)    :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와 시문 현판은 모두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식이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짓고 글씨를 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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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수원화성 북문인  장안문, 북동치 대포-
장안문(長安門)    :  1794(정조 18) 창건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1975년 문루 복원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문루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목재를 짜 맞췄는데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 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서울의 숭례문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하였다석축에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img.jpg-일곱 칸의 홍예문(수문) 위의 아름다운 누각 화홍문-
북수문화홍문(北水門華虹門)    :  1795(정조 19) 창건 1848(헌종 14) 홍수로 유실 후 재건 1922년 홍수로 유실 1932년 복원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화홍문은 조선 헌종 14(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존회를 주축으로 수원시민이 힘을 모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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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군사들의 훈련 지휘소인 동장대, 지존께서 사용하던 곰 과녁 활터-
동장대연무대(東將臺鍊武臺)    :  1795(정조 19) 창건 1976년 주변 부속건물 복원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린다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玲瓏墻)이 있다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犒饋)행사를 베풀었다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img.jpg-수원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창룡문(蒼龍門)    :  1795(정조 19) 창건 한국전쟁 때 문루파괴 1976년 문루복원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조선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다창룡문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한국 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img.jpg-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연락하는 봉돈(봉수대)-
봉돈(烽墩)    :  1796(정조 20)창건 1971년 수리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다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봉돈은 외벽과 내부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이다높게 쌓은 대()위에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다섯 개가 있다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 봉수제도(烽燧制度): 변방에서 일어난 위급한 일을 낮에는 연기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 서울로 연락하는 군사통신제도.

남수문(南水門)    :  1796(정조 20) 창건 1848(헌종 14) 홍수로 무너져 재건 1922년 홍수로 유실 2012년 복원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를 만든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 칸의 홍예를 두었다홍예란 무지개같이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높이 쌓아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다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대비했다. 1922년 큰 홍수로 유실되어 2012년에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다복원한 남수문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하부에 수로를 별도로 설치했다.
img.jpg-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팔달문(八達門) : 수원 화성의 남문이다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팔달문 주변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규모와 형식은 장안문과 같다. 1794년 2월 28일 장안문과 같은 날에 터 닦는 일을 시작했지만 대체로 장안문보다 공정별로 약1주일 늦게 완성하였다강원도 출신 목수 윤사범이 다포를 짜 맞추는 일을 담당했는데이 목수는 훗날 창덕궁 인정전을 짓는 공사를 담당해 근 100년 만에 화성에서 재현했던 다포 건축 기술을 이어 나갔다팔축성 당시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공사감독과 석공의 이름을 새긴 실명판현판까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2013년 처음으로 문루 전체를 수리했는데 훼손된 목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였다부재에 남겨져 있는 전통 기술의 흔적까지 보존한 사례로 손꼽힌다.

수원 남문시장    :  오감(五感만족다시 찾고 싶은 수원 남문시장은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상인들을 불러 모아 만든 유상(柳商)시장이자 220년 전통과 역사를 가진 전통시장으로특화된 상품과 "왕의 시장 투어"라는 3종 체험 (금박 체험교실지동순대학교대장간 체험)을 할 수 있는 준비된 글로벌 명품시장이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화성행궁(華城行宮)    :  조선 정조 13(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의주행궁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화성행궁은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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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jpg-정조대왕의 새로운 고향 신풍문, 봉수당(正堂) 혜경궁 홍씨 회갑연-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출처 수원 문화재단 홈 페이지-

수원 팔달산과 화성성곽행궁탐방을 마감하며
조선시대 성곽 건축의 백미인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장헌세자)가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지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부친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 완공된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유비무환(有備無患 "편안하게 지낼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여야 하고위기에 대비 잘 생각하고 대비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근심과 재난이 없다.“는 나라님의 통치철학을 들려다보는 유쾌한 시간들이였다지난(23.02.09) 남한산성 답사 때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사실들로 가슴 뿌듯하고도 기분 좋은 역사문화기행을 편안하게 마감한다.           -끝-.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 찾아서~

2023-03-17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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