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신록이 짙기 전 남덕유를 왔으니 근 육개월만이다. 삿갓재대피소에 전화를 하니 50센
티 정도 눈이 쌓였다고 하여 은근히 걱정이다. 심설 산행에 익숙치 않으니 각오를 단
단히 하였다. 산행을 초반부터 너무나 더디게 진행된다. 누군가 럿셀을 잘 해놓아 참
으로 고마웠다.
혹한이라던 추위도 계곡은 이상하리 만치 춥지 않았다. 하지만 영각사 쪽은 남사면의
계곡이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였다. 예측한대로, 고도를 높혀가자 방향을 가리지 않
는 광풍이 눈보라를 날리며 불어대기 시작하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서 1미터 아래
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 집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아이젠도 4번이
나 벗겨져 곤혹스러웠다. 여분의 아이젠으로 바꾸어도 이상하리만치 매사가 순조롭지
못하다. 참샘이 있는 안부에서 좀 쉴려고 했더니 본격적인 눈보라가 몰아친다. 한낮인
데도 해가 가리워지고 어두운 눈보라가 치니 그 음산함과 스산함이 마치 초저녁의 위
협과도 같이 느껴진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철계단을 오르고 정상 가까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작년
남덕유 눈산행 때도 이 정도의 눈보라와 심설이 쌓였지만 기분만 좋았는데 오늘은 왜
이리 음산하고 기분이 안좋은 지 자꾸만 맘에 걸린다. ....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까?? 뒤에서 대답이 없다. 자기 때문에 포기했다는 원망을 들을 일이 보통 부담이 아
니겠지... 정상까지 사진도 몇 장 못 찍고 올라왔다. 눈보라 속의 사진들은 대개 뿌
연 흑백 사진 같기에 맘에 들지도 않는다.
<남덕유 정상 : 오늘 따라 일찍 지친 집사람의 컨디션과 눈보라로 인해 이곳에 온 걸
만족하고 돌아갈까 생각하였습니다. 아마 평소보다 무거워진 배낭무게가 가파른 경
사에 한몫 부담을 주었을 겝니다.>
월성치로 내려가는 심설의 경삿길은 집사람의 행보를 더욱 곤란하게 하였다. 엉덩방아
를 감수하고 즐겁게 미끄러져도 될 터인데 둘 뿐인 심산에서 요조숙녀의 품위를 지키
려는 지 한발 한발 참으로 이쁘게도 내디딘다. 안전산행도 저 정도면 경지에 이르렀
다. 월성치까지는 도달하여서는 눈산행의 긴장감을 가지지 말고 늦어도 좋으니 천천
히 가자고 다시 다짐을 하였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는 기어
가도 삿갓재 대피소에는 들어간다고 독려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삿갓재 대피소까
지의 길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길이 약간 위험하다고도 알고 있었기에 불안
한 표정이 역력했다.
<심설 : 삿갓재 향하는 숲속 길입니다. 능선길 보다 의외로 사면을 돌아가는 숲속 길
이 많더군요. 간혹 어두운 눈보라가 칠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오가는 산행객
도 별로 없고 휘휘거리는 골짜기의 음산한 바람이 더해서 고독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 고독감의 근원에 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홀로 산행도 자주
하지만 눈 속에서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푸른 하늘도 이따금 드러나고 그 하늘 아래에 삿갓봉이 미소짓
습니다. 살짝 쳐든 삿갓 아래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짓는 도인의 얼굴이 있는 듯
합니다.>
<삿갓재로 향하는 굴곡은 생각보다 길고 지루하였습니다. 저렇게 많은 삿갓들을 지나
왔는데 진짜 삿갓은 아직도 안나온다고 집사람이 푸념을 하였습니다. 농을 치는 것을
보니 긴장이 풀린 듯합니다. 남덕유 정상에서 이어지는 월성치, 그리고 이곳까지의 산
릉이 뚜렷합니다.>
<남덕유-서봉을 봅니다. 서봉은 이번에 못 가본 곳이지만 잘 생겼습니다. 약간 역광
이지만 대비된 칼라가 맘에 듭니다. 여기서는 비교적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피
소가 가까웠다는 안도감에 사진도 맘껏 찍고 집사람과 저도 요리조리 사진도 찍어 두
었습니다. 이제서야 산행의 즐거움이 샘솟아 오릅니다.>
5시 10분.
대피소에 도착하였다. 과연 시간적 여유를 사용할 수 있는 대로 실컷 다 쓰고 제 시간
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몰려오는 허기를 달래려고 취사장에서 허겁지겁 먹어댔더
니 배가 불러서 일어나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대피소의 초저녁은 안락하였다. 거기
서 만나 담소를 즐긴 모든 인연들에게 새해의 안녕과 행운의 충만을 진심으로 바란다.
둘째날
밤새 뒤척이며 고민을 하였다. 온몸이 아프다는 집사람을 데리고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그래도 내일 길은 무룡산만 올라서면 완만한 육산의 안락감이
보장된다고 위로하고 위로하였다. 오늘 아침은 매우 특별한 날이다. 이번 산행의 근
본 취지(?)가 베어 있는 뜻깊은 날인 것이다.
메뉴는 인스턴트 미역국밥. 우연일까. 별로 의식하지 않고 다만 북어 국보다 나을 것
같아 마트에서 두 개 집어들었는데.... 국밥을 먹기 전에 조용히 나지막히 축하를 하
기 시작했다. 주위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해피 버얼써 데이 투유~ 해피 버얼... 집
사람이 화들짝 놀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태어날 때부터 나보다 일년반 먼저 태어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도 나보다 한 살 빨리
먹고 사는 아내의 마흔 일곱 번째 생일이 바로 오늘이다. 매년 잊어 먹고 살아왔는데
이번에는 생일 선물로 덕유산 종주를 한다했으니 잊을 리가 없다. 덕유산이라는 큼지
막한 걸루다 선물을 안겼으니 금년 한해는 헛기침하며 폼도 잴 수 있게 되었다.
<일출 : 그럭저럭 준비를 마치고 일곱시 30분에 대피소를 나서는데 아침해가 뜨고 있
을 무렵이었습니다. 몸이 가뿐해졌다는 집사람의 말에 나는 덩달아 기분이 좋았습니
다. 헬기장 안부에서 사진 촬영을 즐겼습니다.>
<몽매에도 그리던 무룡산 : 저는 어떤 연유인지 무룡산이 특히 맘에 들었습니다. 그런
한번도 밟지를 못하였는데 기어코 직접 오르게 됩니다.>
<무룡산의 정상이 가까워집니다.>
무룡산에 오른 시간이 정확히 9시. 한시간 반 걸렸다. 여기까지 사진 찍으려고 배낭
을 풀은 횟수가 네 번. 그렇다면 밤새 누워서 시간 계산하고 향적봉까지 최대소요시간
을 10시간을 잡았는데 이런 고무적인 일이.... 여기서부터는 그렇게 경사진 비탈이 없
는데. 갑자기 화들짝 반가왔다. 집사람을 격려하고 고무찬양하기를 수차례. 이젠 의기
양양하게 내려선다.
빨리 가면 콘도라 탈수 있죠?..... 에잉..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니 뒤에서 미소발린 야유가 등을 찌른다. 콘도라 탔다면 산행기 쓰기가
쪽팔린다 이거죠?? 황급히 몸을 돌려 "무슨 소리! 내가 언제 산행기에 쓸려고 산행하
냐.. 집에도 빨리 가야하고... 두 번째 생일선물로 콘도라 여행을 선물하지. 사실 내
가 더 타보고 싶은 걸." 진심인지 거짓인지 나도 모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백련사-삼
공리 코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팍팍한 코스를 저녁과 밤나절에 걸쳐 두시간 정도 걷
고나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나.
<백암봉부터 눈구름에 뒤덮혀 중봉과 향적봉이 완전히 가려집니다.>
<동엽령에 도착하니 카메라를 바로 잡을 수 없는 강풍이 몰아칩니다. 눈썹과 머릿결
과 마스크 주위로 하얗게 얼음이 맺히니 한겨울 산행의 묘미가 절로 샘솟습니
다. ......거짓말입니다. 과거의 왜곡이고 미화이며 글쓰기에서 자주 반복되는 오류입
니다. 정말 추웠고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고 좋아하던 조망도 가늠하고 싶지 않았
으며 무엇보다도 사진 찍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록의 중요성 때문에 할 수 없
이 찍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하지만 즐거운 고통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거닐어 온 능선 길 : 멀리 남덕유... 그 앞에 삿갓봉이 남덕유의 품에 흐릿하게 안
겨 있고...왼쪽으로 단연 무룡산 정상이 우뚝하며.... 그리고 능선이 꼬불꼬불 확연합
니다. 너무나 정겹습니다.>
<중봉이 잠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두시 삼십분에 향적봉에 도착하니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오늘 이 시간 겨울 덕유산은
온전히 당신 것이야하며 낯간지러운 소리를 천연덕스레 해댔다. 사람을 적절히 흥분되
게 만드는 걸 보니 혈중 엔돌핀의 농도가 무척 높아진 모양이다. 의기양양하게 콘도
라 타는 곳으로 가보았다. 폼잡고 쿵쾅거리며 내려섰지만 비까번쩍한 스키어들의 행색
에 비해 무장공비 같은 몰골이 좀 꿀린다. 곤도라와 리프트를 직접 보니 눈이 휘둥그
레진다. 스키라는 것도 제법 복잡한 구조를 가진 것도 처음 알았다. 곤도라 타고 향적
봉에 눈꽃구경 온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피차 마찬가지다.
<드디어 향적봉 정상에>
산행을 완료했다는 기쁨에 곤도라의 바깥 구경도 못하고 내려서니 이번에는 갈길이 막
막해졌다. 주차장에서 삼공리 가는 버스가 있는데 바깥이 차가 밀려 두시간 더 기다려
야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택시를 연락하니 길이 막혀 곤란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
이 1.5 킬로를 걸어 나오는 톡톡한 대가를 치렀다. 거기서 다시 산장에 연락하여 산
장 주인과 인근 아는 이의 차를 얻어 타고 산장으로 돌아왔다.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귀가길 차량에 뒤섞여 부산에 도착하니 밤 11시다. 산장주인 아저씨가 집사람에게 진
지한 표정으로 한 말이 압권이었다. "종주하신 것을 경축드립니다." 경축이라.... 나
는 시청 앞 아치에나 쓰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말로해도 즐거운 단어인 줄 처음 알았
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