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은  태안반도로 갔는가?

 

지난번 금남정맥에 이어 금북정맥 산줄기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금강 북쪽에 자리한 산줄기로서 금북정맥은 금강 하구의 북단으로 이어지지 않고 태안반도의 지령산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곳은 금강 하구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과연 산경표가 제대로 작성되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위 ‘금북기맥이라 이름 지어진 산줄기,  [백월산~성태산~월명산~옥녀봉~봉림산~장항의 용당] 금북정맥에 대체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산경표의 여러 정맥에서   있듯이 우리 고유의 산맥 체계는 도상의 산줄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생활권(강으로 치면 유역) 아울러 고려한 것입니다. 이를 고려하더라도 금북정맥 종단이 너무 북방으로 치우친 느낌은 어쩔  없습니다.

 

다음에 제가 적은 견해는 현재로서는 극히 私見이오니 독자 여러분의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며, 好惡를 떠나서 많은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三面이 바다입니다. 바로 동해, 남해, 서해입니다.  견해로서, 산경표에는 바다를 권역별로 나누려 하는 시도도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해는 장백정간과 낙동정맥의 끝을 연결하면  것이고 서해는 청북정맥과 영산북기맥(혹은 땅끝기맥, … ?) 끝이 되어야  것인데,  산줄기는 호남정맥에서 따로 분기해야 하고,  길이도 짧으므로 정맥의 지위를 부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해는 영산북기맥(혹은 땅끝기맥, … ?) 끝에서 낙동정맥의 끝까지라 생각됩니다.

 

한편 남한의 영토만 기준으로 하여 서해의 지도를 보면 경기와 충청의 바다를 가르는 것이 바로 태안반도입니다. 특히 京畿灣이라 이름 붙은 해역은 백령도에서 당진 앞바다까지를 지칭합니다. 태안읍에서  끝이 대산읍으로 이어갔으면 확실하겠지만,  산줄기는 너무 미미하고 일대가 같은 생활권이므로 산경표의 금북정맥 만큼은 가치를 부여하기 어렵다 하겠습니다. 금강 북쪽에서 가장  산줄기를 이어가서 금북정맥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하면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정맥을 부여했으리라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가지 견해를 내어 놓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년전 KBS에서 방영된 ‘역사스페셜 내용입니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의 산물을 서해를 통하여 서울로 날랐는데, 바다의 높은 파랑에 의하여 산물이 수장되는 경우가 빈번하였습니다. 고려와 조선 왕조는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서산 ‘천수만’(지금의 서산B지구간척지) ‘가로림만 연결할 시도를  번이나 하였습니다. 태종 때는 현재의 ‘파나마 운하같은 계획도 세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굴포지역에 수로를 개통하고 인근에  저수지를 확보하는  관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굴포지역의 땅을 파다가 보니 단단한 기반암이 나와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결국 공사를 중단하게 됩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최대 토목공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시도가  얕은 구릉에 의하여 좌절된 것입니다.  수로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흔적은 정맥 산행꾼을 헷갈리게도 합니다.

 

얕은 구릉이어서 사람은 쉽게 넘어갈  있지만 배는 절대로 넘기가 불가능했던 , ‘굴포 조선시대 지리학자에게 난공불락의 고개로 각인되었던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현재 금강유역이라고 하면 태안반도에서 금강 하구까지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장항 지역은 편평한 지역으로서 생활권이 보령이나 부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옛날에는 대부분의 교류가 금북기맥의 존재 여부에 관계 없이 해안과 강변을 따라 쉽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만일 정맥을  하구의 북단이나 남단으로 이어지게 한다면 하구에 자리잡은 마을은 생활권이 같은데도 산줄기에 의하여 분리되어 버립니다. 금북정맥의 끝이 장항쪽으로 간다면 서천, 보령, 태안지방은 어느 유역에 속해야 합니까? 산경표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산줄기 끝이  하구에 가지 않도록 배려한 듯합니다.

 

산경표의 금북정맥은 이러한(아직 모르는 것들이 훨씬 많이 있겠지만)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설정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