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2004년1월28일 (수)
산행지 :태백산
산행자 :단독산행 (교통편-안내산악회 버스)
산행코스:화방재-사길령매표소-산령각-유일사쉼터-주목군락-장군봉-
천제단-단종비각-만경사-당골갈림길-부쇠봉-문수봉-제당골-당골
이러저러한 일들 마무리 하고 창밖을 보니 날씨는 쾌청.
파란 하늘이 상큼하게 다가서니 또 발동을 합니다.
태백산을 가자! 혼자서 가버리자!
헌데 혼자 가자면 운전을 해야할텐데 핸들잡기가 번잡스러워집니다.
해서 이리저리 컴퓨터를 뒤져보니 마침 태백산행 안내산악회가 있어
전화를 하니 이미 예약만료랍니다.
통로에라도 앉아서 가겠다니 난처해 합니다.
그래도 고집을 피우니 예약을 펑크낸 분이 있다면 연락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받고 전화를 끊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약을 펑크낸 분이 없다면.....?
할 수 없죠. 하기 싫은 운전이라도 해서 태백산을 가기로 합니다.
지도를 보고, 대략의 소요시간도 체크하며 들머리를 결정하는데
전화가 옵니다.
"한자리가 비었습니다."
에구 반가워라.
오랜만에 운전 신경 안쓰고 홀가분하게 산행을 할 수
있게 되어 여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더욱이 안내산악회는 어떤 분위기일까하는 작은 호기심도
발동을 합니다.
다음날 어둑한 아침 7시
10분이나 지각하여 두 대의 산악회 버스가 도착을 합니다.
두 대씩이나.....? 그것도 평일에 태백산을.....놀랍습니다.
두 대씩이나 운행하며 자리가 없다고 퇴짜를 놓다니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한 차는 텅텅 비었을거다라고 생각하며 다가서니 호명을 합니다.
"뒷차에 타십시오."
차창을 통해 앞 차를 들여다 보니 좌석이 꽉차있는 듯합니다.
뒷차를 올라 탔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빈자리가 전혀 없는 것이 었습니다.
눈이 둥그레 집니다.
더욱 눈을 둥글게 만드는 것은 좌석에 앉아있는 분들이 몽땅
여인네들이라는 것입니다.
"저 뒤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세요"
산악회 총무라고 하나요. 뒷 쪽 의자를 가리키며 지시를 합니다.
80여개의 아름다운(?) 눈들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생글거리는 눈, 동그란 눈, 반쯤 감은 눈, 빤히 쳐다보는 눈, 곁눈질하는 눈,
새침한 눈등등등........
우와, 이렇게 많은 눈들이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봅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그 멀고 먼 의자사이의 좁은 통로 (정말 좁고도 긴 통로였습니다)를
옆걸음으로 지나자니 가도 가도 빈의자는 나오지 않고 다리는 휘청거립니다.
쑥맥이 따로 없습니다.
50년을 넘는 세월 중에 이렇게 많은 낮모르는 여인네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그 사이를
지나쳐본 경험이 없으니 정신이 아뜩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헛 살았나?
멀고 먼 항해를 겨우 끝내고 가장 뒤쪽 장의자 바로 앞의 반만 남은 빈의자가 있기에
배낭을 벗어 통로에 놓고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걸치니 옆 좌석의 여인네가 묻습니다.
"태백산에 가세요?:
"??????????????? 네, 태백산엘 갑니다"
우문현답과 선문답이 서로 어우러집니다.
드디어 태백산을 향해 버스 출발.
똑 바로 앉아 두 눈을 감습니다.
잠이 올리야 없겠지만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왼쪽의 차창을 보자니 옆자리 여인네의 얼굴을 보는 듯하고
오른쪽 통로를 보자니 여인네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허 참, 난감합니다. 신문이라도 갖고 올 것을...
두 눈은 감아 아무것도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두 귀는 막아 버릴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열어 놓습니다.
수 많은 대화들.....
수 많은 웃음소리들.....
버스 안이 온통 대화와 웃음소리로 가득 가득 넘쳐납니다.
여인네들 모두가 다 낭랑18세로 되돌아 간 듯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열어놓을 수밖에 없는 귀로 들어오는 각종 정보(!)를
종합해 보니 여인네들 모두가 한 곳에서 단체로 온 듯합니다.
언니, 동생해가며 서로를 부르는 폼이 처음엔 자매인줄 알았으나
얼마가지도 않아 깨닫습니다.
벌써 오래전에 끝낸 예비군 동원때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그 젊잖던 아저씨들이 푸른 예비군복만 걸치면 어김없이 " 무엇인가 "가
되어 버리던 묘한 군중심리말입니다.
이젠 죽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자니 어느 여인네가 한마디합니다.
"아저씨, <주무시는 척> 하지 마시고 이것 좀 잡수세요"
거 참, 남정네의 불편한 속내를 어찌 그리도 잘 알까?
눈을 떠 보니 노란 미에로**바 한 병입니다.
입으로는 괜찮습니다라고 했지만 손은 어느새 노란 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노는 손, 도로 걷워드릴 수도 없고 해서 받아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그 여인네의 눈과 입에도 미소가 가득채워져 있더군요.
이제부터 고난이 시작됩니다.
봇물이 터져 버렸으니 그 험한 물길을 뉘라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저씨 이 것도 잡수세요" 박*스 한 병입니다.
box체 버스에 실어놓았더군요.
그리고는 또 수많은 대화와 수 많은 웃음 속으로 빠져듭니다.
청일점 남정네의 입을 뇌물로 막아놓았으니 이젠 거칠 것이 없습니다.
낭랑18세, 전혀 뒤지지 않을 듯 싶습니다.
아니 낭랑18세 이후에는 전혀 세월이 흐르지 않은 듯 항상 낭랑18세인가
봅니다.
잠시후 이번에는 귤입니다.
"아저씨 이 귤 좀 잡숴보세요. 제주도에서 갖고 온 것이라 아주 싱싱해요"
딱 두알.
또 미소를 지으며 받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맘씨 좋은 아저씨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번엔 오징어 포가 나옵니다.
이번엔 곳감이 나오는 군요.
이번엔 백설기가 나왔습니다.
다음엔 또 무엇이 나올까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이제 눈을 감기는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그 놈의 아저씨소리가 듣기 싫어서......
기왕이면 "옵빠"라고 불러줄 일이지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은데
"아저씨"가 뭡니까.
자기네들은 낭랑18세이고 이 남정네는 그럼......뭐라는 말입니까.
여하튼 벼라별 것들을 다 먹어보며
다섯시간이 지나 12:00 태백산 들머리 화방재에 도착합니다.
흰 눈이 하얗게 덮혀 있습니다.
이제 여인네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달아날 궁리를 합니다.
여인네들께서는 알루미늄 냄비를 준비하셨더군요.
만경사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요리(!)를 비롯해 먹거리를 즐기실 작정이신가
봅니다.
와! 대단한 먹성.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자시고도 대부분 날씬 한 것을 보면 대단한 산님들인가 봅니다.
함께 올랐다간 머슴 노릇을 톡톡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버스 안에서 얻어먹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내빼기로 작정합니다.
해서 버스에서 내려 여인네들이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할 동안
그대로 들머리로 치고 올라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달아납니다.
엉차 엉차
사길령매표소를 지나 산령각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비로서 아이젠을
착용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뒤돌아 보며 유일사 갈림길을 지나고 주목군락지대를
통과 합니다. 눈 꽃은 이미 저 버리고 눈 길만 하얗습니다.
장군봉엘 오르니 바람이 무척 거셉니다. 천제단을 지나며 건너편 함백산을 보니
산정이 하얗습니다. 언젠가 한 번 오르고 싶은 산, 4륜구동으로 넘을 생각입니다.
그대로 부쇠봉을 지나 문수봉을 향하려 했으나 이미 2시경.
버스 안에서 여인네들께 많은 먹거리들을 얻어먹기는 했지만 뜨거운 라면 국물
생각이 간절합니다.
단종비각을 지나 만경사 용정 비석곁에 자리를 잡습니다.
추위에 코 끝과 볼과 손 끝이 얼얼합니다. 윈드쟈켓을 걸치고 귀막이도 합니다.
라면 후 커피도 한 잔하고 어슬렁거리며 행여 여인네들을 만날까 천제단 쪽을
힐끗거리지만 보이지를 않습니다.
당골갈림길에서 부쇠봉과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눈길은 발길이 적어 마치 신설이 쌓인
것과도 같아 기분이 한없이 고조됩니다.
발목을 넘는 쌓인 눈에 새로운 발자국도 찍을 수 있습니다.
숲 사이로 길게 뻗은 눈 쌓인 산 길은 혼자 걷기에 더할 나위없이 아늑합니다.
마주오는 이도 없고 뒤따라 오는 이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부쇠봉을 지나 문수봉까지 그렇게 혼자서 걷습니다. 눈 길을....
버스 안에서 있었던 여인네들의 대화소리도 몽땅 잊고 여인네들의 웃음소리도
몽땅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문수봉의 바람은 돌탑을 휘돌아 걸음이 휘청거리도록 매섭습니다.
태백산의 바람은 역시 태백산의 바람입니다.
제당골의 주목과 주목사이의 눈 쌓여 정다운 좁은 눈 길을 지나
가파른 경삿길을 거쳐 석탄박물관에 도착하니 4시경.
눈 축제가 끝난 어설픈 당골광장은 사람들의 소음으로 여전합니다.
버스에 올라타니 아무도 없습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젠 팔자에도 없는 여인네들을 기다립니다.
무려 한시간여를 기다리니 그제서야 나타나는 여인네들.
역시나 낭랑18세의 웃음소리가 앞장섭니다.
이제부터 다시 아저씨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아저씨는 어디에 계셨어요?
"아저씨 한 참을 찾았단 말이예요."
"아저씨 점심은 드셨어요?
"아저씨 이것좀 잡숴보세요"
또 시작입니다.
조껍데기술에 돼지고기 바비큐가 하얀 은박 접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하산 후 막걸리 한 잔 생각이 간절했는데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다니
역시나 대단한 산님들이었습니다.
여인네들 속에 청일점.
썩 괜찮은 위치인 듯도 싶습니다. 입만 갖고 다녀도 굶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내적, 외적으로 서너가지(?)가 받쳐져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저씨 여기 사과랑 배도 있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는 다행히도 소등을 했습니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를 않습니다.
태백산의 부드러운 능선과 천년전의 주목과 바람과 흰 눈이 눈에
가득 가득 합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좋은 하루였습니다."
커다란 웃음과 한 묶음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리니 10시 40분경
마음씨 푸근한 여인네들 덕분에 포식을 하며 다녀 온
태백산 산행이었습니다.
우리 여인네들의 참모습, 이렇게 허물없이 정답습니다.
다음에 또 갈까?
님의 심정을 너무도 솔직하고 재미있게 묘사해 주셔서 저도 그만 그곳에 함께 하는 듯한 착각에......
남정네들은 날이 갈수록 시들해져도 우리의 반쪽되시는 분들은 항상 소녀처럼 명랑하고 우리가 우울해하고 머뭇거릴 때 앞장서 용기를 불어주어 그래도 우리는 행복하다 할 수 있겠지요.
저에게도 님과 같은 행운이 올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