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13년3월24일

산행지:서천 鳳林山(346m),千房山(310m)

산행코스:수암리-작은재-鳳林山-능선-千房山-솔숲-千房樓-와촌

산행시간:約3시간

 

 

오늘 찾은 서천의 靈山,千房山은 未踏의 산으로써,

서울 某 산악회 始山祭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새벽(04시)에 잠에서 깨어,

重病을 앓고 계신 老母(87歲)를 생각하며 간절히 108拜를 올리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윗몸 일으키기등 운동으로 새벽을 여는데,

허리가 좋지 않음을 느꼈으나,

시산제에 참석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양재역으로 출발하는데 허리가 아파옴이 그치질 않았다.

 

7시20분쯤 말죽거리(양재驛)를 출발한 차량은,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암휴게소에서 잠시 쉰후,

산행 들머리인 수암리에는 오전 9시30분쯤 도착하여,

단체 사진 인증 샷 한장 남기고 곧바로 산행에 드는데,

허리가 좋지 않은 관계로 후미에 쳐져,

사진을 찍으며 도로를 따라 작은재까지 걸어가,

선두에서 길잡이를 잘못 잡아 약간 헤매다,

정상 登路를 찾아 올라 갔으나,

개념도에는 없는 이름이 거창(?)한 鳳林山 정상을 登頂한후,

능선을 따라 앞에 보이는 千房山으로 향했다.

 

결과적으로는 오늘 산행이 짧은 코스였기에,

뜻하지 않은 鳳林山까지 연계 산행을 한 것이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korkim도 선두 隊長을 맡는 입장이지만,

선두에서 길잡이를 잘못할수도 있으므로 이해는 하지만,

오늘같은 始山祭 올리는 날에는 시간을 지켜줘야 하기에,

웬만하면 실수를 하지 말았어야 했고,

또한,

사전 踏査까지 했음에도 알바(길을 잘못 가는 것)를 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잘못 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찌됐건 아무탈 없이 山行을 잘 마치고,

정성스레 준비한 祭需로 山中에서 始山祭를 올리고 하산을 마친후,

함께 한 岳友들과 식당에서 맛난 점심에 穀茶 몇잔 마시고,

잠시 市場에 들러 해산물을 몇가지씩 산후,

이른 歸京길에 올라 양재역에 빨리 도착하여,

저녁 7시쯤 집에 도착할수 있었다.

함께 했던 岳友들도 오늘 하루 즐거운 山行이 됐으리라 보며,

모두들 幸福한 山行길 이어 가길~~`

 

-korkim-

 

 

 

 

 

 

천방산은 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등 3개면에 걸칠만큼 산자락이 넓고,

 서천 제일의 산으로 산이 험하거나 거칠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가 둘러쳐져 있으며,

 동남북 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靈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인듯 천방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봉우리들은 남으로 가면서 5개의 봉우리를 더하며,

 마치 병풍인듯 둘러쳐진 모습이 있어 아늑한 감이 있는 천방산은,

 서북에서 동북방향(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펼쳐진,

 시원한 풍광이 함께 하고 있어 좋은 곳이다.

발치에 잡히는 낮은 산과 그 아래와 너머로 펼쳐지는 논밭과,

 아득한 마을의 풍경이 저수지와 함께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정상에 올라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마져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천방산은 산이름과 관련한 전설>

천방산의 전설은 백제 말기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기벌포(현재의 서천군 장항읍)에 진입하면서 시작되는데,

 멀쩡했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소정방은 풍랑이 자기를 기다렸으나 풍랑은 좀처럼 그칠줄을 몰랐다.

그때 그들의 앞을 어느 도승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정방은 너무 답답하던 참이라 그를 붙들고 그곳의 지세를 물어보았다.

"도승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우리들이 이곳에 오자마자 이렇게 풍랑이 심하오?",

도승은 소정방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길이 험한 곳이오.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오.

 더구나 멀리서 원정군로서는 이곳을 통과하기가 어려우니,

 이 산에 하룻 저녁에 천칸의 집을 짓고 천일제를 지내어,

 산신의 보호를 받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개선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소"

 "그렇다면 우리 군사가 무사하겠소?"

 "그렇소이다"

도승의 확답을 듣고 소정방은 군사들을 시켜,

 단번에 천칸의 방이 있는 큰집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군사들은 정신없이 소정방의 말에 따라 집을 지었다.

 

소정방은 그날 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군대가 무사히 부여에 입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후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튿날 날씨가 씻은 듯이 개이고 풍랑도 가라 앉았다.

소정방은 군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진격하여 백제군을 꺾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뒤 소정방이 지은 천칸의 집은 절이 되어 천방사라고 하였으며,

 산 이름도 이때부터 천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千房寺>

소정방이 남겨 놓은 천방사는 사찰로서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다,

 1664년에 승려들의 반란으로 불타버린다.

그때도 천방산은 검은 연기로 뒤덮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千房寺는 宮家의 願堂이었다.

宮家란 왕족이 사는 궁전으로 대군, 왕자, 공주, 옹주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願堂은 대군, 왕자, 공주, 옹주들 중에 한 가족의 소원을 빌기 위해,

 그들이 세운 사찰이다.

따라서 千房寺는 중앙의 권력과 밀착된 사찰이었으며,

 [효종실록] 효종 3년 12월 7일조에 서천군수 이무가,

 왕의 분부에 의해 상소한 것을 살펴보면,

「고을 경내에 千房寺가 있는데 이제 또한 궁가의 願堂이 되었으므로,

 중들이 기세를 부려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淸明한 세상에서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千房寺라는 것은 어느 궁가에 속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고을의 사세가 매우 절박한 듯하니,

 그 고을에 도로 붙이게 하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千房寺는 기세를 부려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중앙 권력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후 현종 5년(1664년)12월 13일조에는,

 충청도 千房寺 승려가 관아의 命을 따르지 않자 감사 李翊漢이,

 겸임 한산군수 申嵩耉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러자 절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험지에 웅거하여 저항하였다.

그뒤 화약으로 그 절을 불사르고 또 침노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질러,

 그 분을 풀었다라고 하여 千房寺 승려의 사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송준길의 알현으로 千房寺의 승려의 변고는 일단락을 짓고,

 千房寺는 다시 중건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행길잡이>

천방산은 서천 사람들의 삶의 밑거름으로,

서천 사람들이라면 천방산을 한두번 정도는 등산 하였을 것이다.

그 추억을 간직하고 서천 사람들은 살아가며,

또한 천방산은 서천 사람들의 마음에 고향으로,

판교, 문산, 시초, 3개 면에 자리 잡고 있는 천방산은,

 서천 사람들이 바라볼 때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산자락이 넓어 서천 사람들을 감싸주며,

산이 험하거나 거칠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산이다.

그리고 천방산은 서천 사람들에게 생산의 근원인 논과 밭,

 그리고 물을 제공하고 있다.

그 천방산을 시인은 詩로 화가는 그림으로 늘 노래하였고,

그래서 천방산은 서천 사람들의 삶의 원천이다.


천방산에는 음적사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그 암자에는 老僧이 살고 계시며 세월의 무상함을 간직한체 암자를 지키고 계시다.

 

舒川郡은 차령산맥의 말단부가 군 중앙부까지 미치고,

 남쪽은 준평원화된 평탄한 內浦,호남평야와 연결되며,

遠進山에서 발원한 席馬川이,

 鳳仙池에서 韓山川과 합류하여 郡의 중앙을 관통하면서,

 남류하여 吉山川을 이루고 금강으로 흘러든다.

비인면의 비인해수욕장과 성북리의 비인 5층석탑(보물 224),

한산면의 乾芝山城(사적 60)과 한산 세모시짜기(충남무형문화재 1),

서면 마량리의 동백 나무숲(천연기념물 169) 등이 대표적이다.

그밖에도 장항읍의 廣德寺, 마서면의 南山寺, 문산면의 隱寂寺, 한산면의 鳳棲寺,

 종천면의 永守庵등의 사찰도 있다.

서천읍내에는 서천향교·서천읍성지등 많은 사적지가 분포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특히 마량 동백숲과 해돋이, 금강하구둑 철새도래지, 한산 모시마을, 신성리 갈대밭,

 춘장대 해수욕장, 문헌서원, 희리산 휴양림, 천방산 風光은 서천 8景으로 유명하다.

서면 도둔리 일원에는 29만 9000㎡ 면적의 춘장대 해수욕장 관광지 개발사업이,

 2006년 완공돼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문화재는 국가 지정문화재로 보물 1점, 사적 1점, 천연기념물 2점,

중요 민속자료 1점이 있으며 道 지정 문화재로 유형문화재 1점,

 무형문화재 5점, 기념물 7점, 문화재자료 12점 등이 있다.

乾芝山城: 산봉우리의 지형은 말 안장 모양인데,

이곳을 중심으로 약 300m의 城 둘레를 먼저 흙으로 쌓아 올린 뒤에,

 산성의 북쪽 산봉우리를 기점으로 서북쪽 계곡을 包谷式으로,

 약 1,200m를 둘러싸서 증축하였다.

무너진 斷面層으로 보아 성벽의 구조는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연적인 지형이 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므로,

 水口와 주문격인 동문 터가 동쪽 계곡 입구에 있다.

성내에는 鳳棲寺가 있는데 軍倉址로 보이는 곳에서는 炭化米가 나왔다.

백제가 망한 뒤 그 遺民이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는 周留城을,

 이 山城이라고 추정하는 說이 있다.

 

 

 수암리 들머리에서 산행 준비중인 隊員들

 천주교 대 박해가 있을때 이곳에서 敎友村을 이뤄 살았던 곳이랍니다,

 성모마리아像 앞에서 기도를 잠시 드리고

 이런 도로를 따라

 이렇게 돼 있지만 통제는 하지 않네요.

 순교자분들의 줄무덤이 있는 작은재(고개)

 작은재에서 이 표시를 따라 가야 하는데

 視野는 깨끗합니다.

 다른 길을 따라  가다가 알바(?)길 같아 다시 돌아와

 능선으로 붙기 위해 올라가지만

 생강나무 꽃도 제법 피었네요.

 도대체 너는 무엇인고?

 ㅎㅎㅎ~

자연적으로 생긴게 이상해서리

 오늘 산행 개념도에도 없는 이름만 거창한 鳳林山에 올랐네요.

 鳳林山 정상의 삼각점

 鳳林山 삼각점에 대한 설명

서천(306) 삼각점 3등급중 여섯번째 삼각점이라는 뜻이구요,

참고로,

11부터 19까지는 1등 삼각점(대삼각본점)으로 우리나라 남한에 總14개,

22부터 29까지는 2등 삼각점(대삼각보점)으로 總1,102개,

301부터 399까지 3등 삼각점(소삼각1등점) 總3,045개,

401부터 499까지 4등 삼각점(소삼각2등점) 總11,753개가 있으나,

2004년부터는 3등급으로 구분하여,

1등급-상시 관측소 운영 하는 14곳,

2등급-세계 측지계를 기준으로 2007년에 194곳 지정,

3등급-1,2등급外의 삼각점을 말하며,

삼각점에는 경도,위도 표시가 돼 있기 때문에,

나침반이나 GPS를 이용하는 산꾼들에게는 정확한 좌표를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표시(삼각점)라 할수 있다.

+표시는 방향을 뜻하며 윗쪽이 북쪽(N)으로,

東西南北을 구분할수 있으며,

이외에도 표고점,수준점,수준원점등이 있다.

 鳳林山에서 바라본 千房山

 저 아래 천용사가 보이네요.

 앞에 보이는 능선따라 千房山으로 가야 합니다.

 鳳林山은 거의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登路가 이렇구요

 

 천방산으로 가다 뒤 돌아본 鳳林山

 천방산 정상의 岳友들

 천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용사

 춘장대 방향의 서해

 

 저 멀리 서해가

千房山에서 바라본 鳳林山

 千房山 정상에서도 단체 인증 샷 하나 남겨야쥬~~~

 korkim은 허리 통증땜에 자세가 영~

 千房樓로 가는 登路는 아주 좋습니다.

 

 솔숲엔 쉬어가라고 나무벤치까지 만들어 놨네요.

 

  千房山 정상(右)

 솔香이 그득합니다.

 이런 登路는 피톤치드香 맡으며 걷기가 아주 좋습니다.

 천방산,봉림산 산행 안내도

 정성을 들여 祭를 올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경건한 마음으로

 癸巳年에도 안산길,즐산길 되길 祈願하며

 始山祭를 잘 올렸습니다.

 시산제를 마치고 홀로 千房樓에 올라

 이쁜 야생화도 만나고

 

千房樓에 올라와 문산저수지를 바라본후,

저 아래 빨간색 버스로 하산해야 하는데,

곧바로 천방루에서 산길을 만들어 가며 내려가는데,

가시 덩쿨들이 많아 꼬까옷에 상처를 내며,

20여분 동안 고생을 많이 하고 하산을 마쳤습니다.

어느산을 가든 낮고 높음을 떠나 얕잡아보면,

큰코 다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 하는 산행이였습니다.

 

-korkim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