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락산

 

 

                                   *산행일자:2010. 4. 4일(일)

                                   *소재지 :충북단양

                                   *산높이 :도락산 964m

                                   *산행코스:상선암주차장-상선암-제봉-신선봉-도락산-채운봉

                                                  -큰선바위-작은선바위-상선암주차장

                                   *산행시간:10시40분-16시55분(6시간15분)

                                   *동행 :나 홀로

 

                    

 

  어제는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깨달음을 얻는 데는 나름대로 길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또한 즐거움이 따라야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충북 단양의 도락산(道樂山)을 올랐습니다. 제 블로그에 산행기와 사진을 올리고자 다시 오른 도락산은 웬만한 악산 못지않은 바위산이어서 산위의 눈이 다 녹기를 기다리느라 3월을 그냥 보내고 4월 들어 서둘러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9년 전 과천 분들과 함께 이 산을 한 번 오른 적이 있어 산과 길이 모두 눈에 익었습니다.

 

 

  제 본적(本籍)은 경기도 파주이지만 본관(本貫)은 도락산이 자리한 충북의 단양입니다. 단양의 산들이 다른 산들보다 더 정감이 가는 것은 저희 성 우(禹)씨는 모두 본관이 단양인 단성단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왕이면 역동(易東) 우 탁(禹 倬)선조께서 이 산의 이름을 먼저 지었더라면 조상의 빛난 얼을 여기 저기 자랑하며 방을 낼 터인데 그리하지 못해 아쉽기도 합니다. 설사 이 산에서 도(道)와 낙(樂)을 구하지 못한 다 해도 제가 이 산을 다시 찾아 오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파평윤씨들이 파주의 용연(龍淵)을 찾는 심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단양을 처음 찾은 것은 1985년 여름으로 지금은 수몰된 단양에서 집사람과 함께 하룻밤을 묵은 후 도담삼봉과 고수동굴을 둘러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단양에 도착해 도락산 입구를 지나는 벌천행 버스를 50분 가까이 기다렸습니다. 남는 시간을 인근의 남한강과 같이 보내고자 수변로 아래 강변으로 내려갔습니다.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을 서해로 실어 나르는 이 강의 물 흐름이 얼마나 빨랐던지 강변의 돌들이 하나같이 둥글둥글했습니다. 납작한 돌을 골라 물수제비를 떠봤으나 어렸을 때의 묘기를 되살리지 못해 몇 번을 반복한 끝에 겨우 두 서 너 번 물 위에 띄웠을 뿐 이내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습니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난 강변의 풀밭에서 태동하는 봄을 감지한 후 이 봄과 더불어 수변로를 걸었습니다. 오전 10시경 신단양에서 승차한 버스가 남한강을 건너 단양역과 구단양을 경유한 뒤 선암계곡을 따라 벌천으로 내달리는 동안 내내 창밖을 내다보며 모처럼 산 속에서 벗어나 계곡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봄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선암과 중선암을 거쳐 상선암(上仙岩)으로 이어지는 선암계곡의 저 청정한 계류가 한강에 합류해 서해에 이르는 동안 엮어낸 전설들이 바로 우리 삶의 원형이기에 문화사학자 신정일님께서 천 삼 백리 한강의 물길을 따라 걷고 “한강역사문화탐사”라는 역저를 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0시37분 상선암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동서울터미널을 아침 6시59분에 출발하는 구인사행 첫 버스에 올랐습니다. 9시10분 경 단양터미널에 도착해 10시경 벌천행 버스에 올랐고 반시간 남짓 지나 상선암에 조금 못 미친 도락산입구에서 하차했습니다. 이름이 보이지 않는 다리를 건너 상선암마을을 지키는 거목의 느티나무에 도락산 산행을 신고했습니다. 상선암주차장을 지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암자인 상선암을 들렀습니다. 이 암자에 대웅전이 들어선 것은 먼 훗날 어엿한 가람으로 커질 것을 꿈꾸어서일 텐데 온 몸이 바위로 만들어진 도락산의 산자락에 그만한 터가 남아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상선암을 일별하고 “도락산3.0Km/상선암주차장0.3Km"의 이정표가 세워진 오른 쪽 삼거리로 옮겨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갔습니다. 편안한 산길은 산행시작 반시간이 지나 만난 통나무계단 앞에서 끝났고, 이 계단을 따라 올라선 능선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암릉 길은 경사가 제법 가팔라 쇠줄을 잡고 오르고 철 계단을 걸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계속해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조심해 걸으며 이 산이 바위덩어리로 만들어진 골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철 계단을 걸어올라 ”상선암주차장1.1Km/도락산2.2Km”지점을 다다른 시각이 11시42분이었습니다.

 

 

  12시34분 해발818m의 제봉에 올랐습니다. 해발고도가 700m를 넘어서자 얼었던 땅이 녹아 길이 질퍽했고 바짓가랑이가 금세 더러워졌습니다. 딱 한 봉우리만 왼쪽 길로 우회했을 뿐 나머지 여러 암봉들을 빼놓지 않고 넘느라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선암계곡 건너편의 용두산보다 산 높이가 30m 낮은 이 산이 “명산100산”으로 선정된 데는 바로 준수한 암봉들이 한 역할을 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웬 암봉이 이리도 많으냐고 드러내고 투정부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 산이 건너 편 용두산처럼 그저 그런 육산이었다면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도 이 산을 보고 도(道)와 낙(樂)을 논하지 않았을 것이고, 퇴계 이황선생께서도 과연 비경이라며 감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상을 1.5Km 남겨 놓은 무명봉에서 사과를 까먹으며 10분여 쉬었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 지 10분도 채 안되어 제봉에 다다랐습니다. 제봉에서 정상가는 길은 오른 쪽으로 꺾여 형봉에 이르기까지 정남쪽으로 이어졌습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며 형봉에서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13시42분 도락산 정상에 섰습니다.

동쪽으로 채운봉 가는 길이 갈리는 안부삼거리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0.6Km 남은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길바닥에 살짝 깔린 얼음과 왼쪽 북사면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잔설 등 추해 보이는 겨울의 잔해들을 보자 꽃들이 열흘을 넘기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목제계단을 올라 다다른 신선봉은 과연 이 산 최고의 쉼터였습니다. 몇 십 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넓은 암반의 신선봉에 올라 5년 전에 지났던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줄기를 가늠해보자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습니다. 철쭉나무 길을 지나 올라선 도락산 정상은 나뭇가지 들이 시야를 가려 조망이 신선봉보다 영 못했습니다. 빗재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포진한 도락산과 황정산 모두 암릉 길이 만만치 않은 악산이어서인지 이 두산을 이어주는 길을 나있지 않았습니다. 단체로 오른 분들이 많아 붐비는 정상에서 바람을 피할 만한 가까운 곳으로 옮겨 점심을 들은 후 채운봉 갈림길로 되돌아갔습니다. 왼쪽 아래로 내궁기 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물이 반쯤 찬 커다란 웅덩이가 암반 한 가운데 자리한 신선봉에서 잠시 머무르며 매끈한 암벽과 채운봉 산줄기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14시23분에 채운봉 갈림길로 되돌아가 동쪽으로 형봉-채운봉-검봉을 잇는 암릉길로 들어섰습니다.

 

 

  15시21분 암릉 길이 끝나는 “상선암주차장2.0Km/도락산1.5Km"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릿지산행을 즐기는 분들에는 환상의 코스였을 형봉-채운봉-검봉의 칼바위 능선 길이 바위공포증에 시달리는 제게는 최고로 힘든 코스였습니다. 재작년 가을 용화산을 오르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친 후 새로 생긴 바위공포증을 아직도 치유하지 못해 이런 암릉 길을 통과하는 것이 제게는 큰일이어서 산위의 눈이 다 녹기를 기다렸다가 이번에 오른 것입니다. 능선 길에 만만치 않은 암봉이 몇 봉 도사리고 있었지만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철책 난간과 철제다리, 그리고 로프를 걸어놓아 위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술 한 잔 걸치고 흥에 겨워하는 아주머니들이 노래 가락을 뽑으며 걸을만한 길도 분명 아니었습니다. 철제다리를 건너 오른 봉우리가 채운봉인 듯싶은데 안전하게 통과하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채운봉을 가리키는 표지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봉우리를 넘어 “상선암주차장2.0Km/도락산1.5Km"의 표지목 앞에 이르러 저봉으로 보이는 암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함으로써 암릉길 전부를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15시41분 큰선바위에서 10분여 쉬었습니다.

이제껏 지나온 암릉길과는 달리 큰선바위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주로 흙길이어서 걷기가 한결 편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형봉-채운봉- 저봉을 잇는 암능길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사진을 찍는 것만도 제게는 분에 넘치는 낙(樂)이기에, 이 산에 올라 도(道)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하산한다고 자책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 밑동의 줄기가 “ㄴ"자로 휘어져 많은 사람이 걸터앉아 쉬다 갔을 적송 한그루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2-3분을 내려가자 허우대가 날카로우면서도 허여멀건 큰 바위의 상체가 눈에 들어와 이 또한 같이 담았습니다. 5분을 더 내려가 이 바위를 가까이에서 사진 찍은 후 이 바위 이름이 “큰선바위”임을 알았습니다. 도(道)와 낙(樂)에 바탕을 둔 도락산의 현학적인 산 이름이 무색하게 이 바위에는 생긴 대로 “큰선바위”라는 투박한 이름을 갖다 붙인 이들은 아는 것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유학자들은 아닐 것이고 개똥이와 쇠똥이로 불렸을 이 곳 백성들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시57분상암사주차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큰선바위에서 십 수분을 내려가 작은선바위를 지났습니다. 시민골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그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바짓가랑이에 묻은 흙들을 깨끗이 씻어낸 후 올 들어 처음으로 탁족을 즐겼습니다. 다시 올라가 다리를 건넌 후 아무 것도 심지 않아 아직은 텅 비어 있는 넓은 밭가를 지나 산수유가 활짝 핀 동리로 내려섰습니다. 바위산인 도락산이 봄꽃을 피우는 데는 너무 인색해 6시간 넘게 산행을 하면서도 그 흔한 진달래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생강나무 꽃보다 노랑 색상이 조금 탁해 보이는 산수유 꽃이 봄의 전령이다 싶어 반가웠습니다. 오른 쪽의 상선암주차장으로 옮겨 출발 시에 무사산행을 빌었던 느티나무에 감사를 표한 후 다리를 건넜고  곧바로 단양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단양역에서 50분여 기다렸다가 올라탄 기차보다 더 빨리 상상의 나래를 펴나간 제 생각이 도락산이라는 이름을 지은 우암 송시열 선생에 머무르자 이 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과연 어떠한지 궁금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문헌을 확인해본 즉 우리 역사상 이분만큼 찬양과 폄하가 엇갈린 분이 또 있을 까 싶을 정도로 호평과 악평이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이덕일 선생이 지은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에 따르면 중국에서 공구(孔丘)를 공자(孔子)로 그리고 맹가(孟軻)를 맹자(孟子)로 성(姓)뒤에 자(子)자를 붙여 부른 것은 그들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자는 뜻에서였다 합니다. 우리나라 선현 중에서 성 뒤에 자(子)를 붙여 높여 부르는 딱 한 분이 바로 송자(宋子)로 불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라 합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나 율곡 이이선생에도 붙이지 못하는 높임말을 혼자서 듣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그 반대당파인 남인들은 그냥 “시열”이라 불렀다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인들의 본거지인 영남지방에서는 자기 집에서 기르는 견공의 이름을 “시열”이라 불렀다 하니 우암 선생은 이들에게서 성현은커녕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 받은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유일하게 그 이름이 3천 번 이상 등장하는 우암송시열 선생께서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 것에 반해 선생께서 이름을 지은 도락산은 세인들이 한결같이 좋게 평가해 산림청에서 선정한 명산100산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금언에 “자연은 영구하다”라고 한 꼭지를 덧붙이면서 도락산 산행기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