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

 

                                   *산행일자:2010. 1. 30일(토)

                                   *소재지 :경남 통영

                                   *산높이 :461m

                                   *산행코스:금평마을-현금산-미륵치-미륵산-미래사-띠밭등

                                                  -도남동체육공원-150봉-수륙마을

                                   *산행시간:8시56분-15시25분(6시간29분)

                                   *동행 :나홀로

 

 

  제가 통영 땅을 처음 밟은 것이 1975년 일이니 그새 35년이 지났습니다.

반평생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딱 떼고 내달리는 세월이 밉살스러워 그간의 변화를 몇 건 적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나폴리라는 별명을 얻은 충무시가 통영군에 통합되면서 본래 이름을 버리고 통영으로 바뀌었습니다. 미륵도의 미륵산에 케이블가가 설치되어 연세 든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도 이 산 정상에 올라 그림 같은 남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백림사건으로 경원시 했던 세계적인 음악가인 고 윤이상 선생을 기리는 음악제가 그의 고향인 여기 통영에서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5년 전 충무시의 해저터너널을 같이 걸은 당시는 연인이었던 집사람이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세월과 사람들이 각기 한 축씩 맡아 해온 일인데 아무리 생명이 없는 세월이라 해도 35년 전의 추억을 쫓아 통영을 다시 찾은 저를 보고 나 몰라라 하고 앞으로 내닫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970년-72년 세 해 여름을 지리산 종주로 보냈던 제가 1973년 여름 척추수술을 받아 한동안 지리산을 잊고 지내야 했습니다.

1974년 겨울 새로 부임한 경기도의 광주중학교에서 동료교사인 집사람을 만나 그 이듬해 여름방학 때 그녀의 지인 몇 분과 함께 지리산을 올랐습니다. 서울을 출발해 여수를 거쳐 한려수도에 난 뱃길로 우리나라 최고의 미항인 충무에서 하선했습니다. 일행 네 명이 해저터널을 함께 걸은 후 한산도를 다녀와 여관에서 묵었는데 굴을 잘 못 따먹어 초죽음이 된 저를 정성스레 보살핀 여인이 몇 년 후 결혼한 바로 집사람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직 회복이 덜된 몸을 이끌고 진주를 경유하여 중산리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법계사를 거쳐 된비알 길을 올라 다다른 지리산의 천왕봉이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오른 산이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이 어떠했는지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으니, 지리산 등정이 저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석단에서 하루를 야영한 후 백무동으로 내려가 서울로 올라온 35년 전의 여정을 이번에는 그 일부를 거꾸로 했습니다. 지리산의 주능선을 종주해 다다른 천왕봉에서 법계사를 거쳐 중산리로 하산 한 후 진주로 옮겨 일박했습니다. 아침 일찍 당시의 충무시인 통영으로 옮겨 이번에는 가슴어린 추억들이 자리하고 있는 해저터널과 한산도 대신에 명산100산에 들어가는 미륵산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진주에서 직행버스로 50분이 걸려 도착한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산양면의 금평마을로 향했습니다. 이동 도중 박경리선생의 묘지 안내판을 보고 기사분에 부탁해 먼저 선생의 묘지를 들렀습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불후의 명작 “토지”를 남기신 선생은 재작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시고 향리인 여기 통영에 묻히셨습니다. 묘소 앞에서 큰 절을 올린 후 서둘러 금평마을로 옮겼습니다.

 

 

  아침 8시56분 금평마을에서 미륵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금평교를 막 지나 마을 어귀의 첫 번 째 집 앞에서 하차해 산행채비를 했습니다. 고향마을에 내려온 것처럼 안온한 느낌이 드는 이 마을 어귀에서 비닐하우스 옆으로 가 묘지로 올라서자 새빨간 동백꽃과 푸른 대나무가 이 산이 따뜻한 남해바다에 면해 있음을 일러주었습니다. 묘지 한 곳을 더 지나 올라선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가팔라지는 능선 길을 이어갔습니다. 커다란 암봉을 왼쪽으로 에돌아 돌탑이 세워진 넓은 암반에 올라섰습니다. 수직암벽이 받쳐주는 이 암반은 전망바위로 손색이 없어 부산일보가 작성한 개념도에 전망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남쪽 방향으로 해안선이 분명하게 보였고 박경리선생의 묘지에서 바라다 본 바다가 더 분명하게 보였으며 동쪽에 자리한 미륵산의 남사면이 잘 보였습니다.

 

 

  10시30분 해발330m의 현금산을 올랐습니다.

전망대 위 270봉에서 깊숙한 안부로 급하게 내려갔다가 꾸준하게 올라가 다다른 봉우리가 303봉으로 여기서부터 현금산까지는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 걸을 만 했습니다. 315봉을 지나 왼쪽으로 세포고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를 보았는데 미륵산 정상까지 거리가 2.1Km로 적혀 있었습니다. 삼거리에서 직진해 조금 오르자 바위 몇 개가 박혀 있는 현금산에 이르러 짐을 내려놓고 쉬었습니다. 날씨가 흐리고 해가 나지 않아 등 뒤의 땀이 식어 으스스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쉬지 못하고 10분 만에 일어나 조금 내려가 "미륵산1.6Km"의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를 지나자 한 두 방울 비가 내리다가 이내 멈췄습니다. 341봉에 오르자 왼쪽 아래로 아침에 택시로 건넌 통영대교와 바닷물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날렵한 쾌속정(?)이 보였지만 여전히 날씨가 흐려 섬들이 수놓은 아름다운 바다가 선명하지 못했습니다. 오른 쪽 아래 올망졸망한 다랑논들이 개간지의 네모반듯한 넓은 논보다 훨씬 가지런해 보이는 것은 인위적인 질서가 아니고 자연적인 질서를 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송신탑을 지나 만난 암봉을 왼쪽으로 에돌아 올라선 고개마루에서 한참을 내려가 11시18분에 안부사거리인 미륵치에 이르렀습니다.

 

 

  11시58분 해발461m의 미륵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오른 쪽 야소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미륵치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0.8Km의 길지 않은 코스가 이번 산행의 깔딱 길이었습니다. 연 이틀을 지리산 종주에 전력투구한 탓인지 두 다리가 힘들어 해 가다 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내려가는 사람들에 길을 비켜주려 쉬고,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려 쉬다보니 반시간도 안 걸릴 길을 40분이 걸렸습니다. 금평마을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반달모양의 주능선이 그려낸 곡선이 아름다워 오름 길에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 한 그루와 다른 암반 위에 쌓아놓은 작은 돌탑이 주변 정경과 잘 어울려 모두 다 훌륭한 사진감이었습니다. 이 둘의 큰 차이는 하나는 생명체이고 또 하나는 사물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생명체는 능동적이고 물질은 피동적이라고 언명하신 박경리선생의 말씀대로 작은 돌탑은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꼼짝없이 그 모양새를 계속 할 수밖에 없지만 저 소나무는 뿌리를 점점 암반 깊숙이 박고 비바람과 싸워가며 이 산을 지켜낼 것 같았습니다. 정상 바로 밑의 계단을 오르자 이 산의 북사면 위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들이 보였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로 정상이 많이 붐볐습니다. 회화를 전공해 미술을 가르쳤던 집사람이 함께 올랐다면 코스를 줄여서라도 그림 같은 바다풍경을 스케취해갔을 텐데 그런 재주가 없는 저로서는 연신해서 셔터만 눌러댔습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이  해 질 무렵 이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흘렸다고 해  나이답지 않게 참으로 감성이 풍부하다 했는데 과연 정상에서 조망한 남해바다는 우리네 여인들을 시인으로 바꿔놓을 만 했습니다. 정상에 오르자 사방으로 바다가 보였고 특히 동쪽과 북쪽 아래 바다에 옹기종기 들어선 올망졸망한 섬들이 빚어낸 정경은 신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연출할 수 있겠나 싶었습니다. 진작 글짓기를 공부했다면 시 한 수가 절로 읊어졌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승전에 관해 해설을 들었습니다. 조선군이 한산대첩에서 패해 저토록 아름다운 남해바다가 5백여 년 전에 일본으로 넘어갔다면 일본강점기에 잠시 점유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강변하는 일본이 남해바다가 몽땅 자기네 영토라고 우길 것이 자명한데 이를 막아준 것만으로도 이순신 장군은 성웅으로 받들어 모실만 한 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청명한 날에는 여기 미륵산 정상에서 잘 보인다는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 조선조 세종 때의 일로 우리나라는 그것을 가지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겨우 몇 십 년 강점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속 좁음을 버리지 않는 한 일본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3시9분 미륵산의 남사면에 자리한 미래사(彌來寺)를 둘러보았습니다.

정상에서 10분 남짓 머무른 후 12시9분에 데크계단으로 내려서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향한 것은 시원한 맥주가 생각나서였는데 승강장 매점에서 주류는 팔지 않는다고 해 정상 쪽으로 되올라가다 왼쪽 샛길로 빠져 한갓진 곳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는 삼거리 길을 만나 왼 쪽의 돌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다 커다란 묘지 앞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부터 미래사까지는 그 거리가 400m로 길이 넓고 평평한데다 편백나무가 잘 조림(?)되어 운치 있어보였습니다. 산 밑에서 올라갔다면 당연히 지났을 부도를 보지 못하고 곧바로 미륵사의 삼회도인문(三會度人門) 안으로 들어서 대웅전 앞에 섰습니다. 삼회도인이란 미래에 오실 미륵불이 세 번에 걸쳐 중생을 제도함을 뜻한다하니 삼회도인문이 바로 미륵불도량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입니다. 효봉문중(曉峰門中)의 발상지로 알려진 미래사는 효봉선사의 제자인 구산선사가 1954년에 지은 암자로 시작됐습니다. “무소유”라는 수필집을 내신 법정(法頂)스님이 출가하신 절이기도 한데 고색을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단청과 세월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석탑에서 이 절의 역사가 일천함을 보았습니다.

 

 

  14시 정상에서 수륙마을까지 북동쪽으로 뻗어나가는 주능선의 안부삼거리를 지났습니다.

미래사를 나와 100m를 되올라가 만난 삼거리에서 오른쪽의 용화사광장 길로 들어서 미륵산 정상봉을 오른쪽 밑으로 크게 우회했습니다. 돌로 쌓은 축대 아래로 에돌아 올라선 띠밭등은 안부의 광장으로 약수터가 가까이 있고 화장실 및 벤치 등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어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입니다. 잔디밭이 깔끔한 띠밭등 쉼터에서 북쪽으로 진행해 다다른주능선의 안부삼거리에서 직진 길의 용화사광장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꺾어 케이블카 철탑 옆으로 지나는 도남동 길로 갔습니다. 운동설비들이 갖춰진 도남동체육공원에서 직진해 올라선 165봉에서 온 길을 뒤돌아보자 쉴 새 없이 손님들을 정상으로 실어 나르는 케이블카가 꽤 여러 대 보였습니다.

 

 

  명산에 케이블카를 운행하는 것을 갖고 자연을 망친다고 성토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만 그분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자연경관을 즐깁니다. 무슨 일이든 명과 암이 같이 존재하기에 케이블카 운행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 단점을 지적하는 환경단체들을 비난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두운 면과 더불어 밝은 면도 같이 보아야 후손에 물려줄 미래가치와 연세든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 자연을 찾고 즐기는 현재가치를 제대로 계량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두 다리가 튼튼한 청장년층만 아름다운 이 산하를 두루 섭렵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보면, 점점 늘어나는 노인들이 보다 쉽게 산에 오를 수 있도록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을 가지고 죽자 사자 반대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미래가치가 현재가치와 상쟁적인 것이 아니고 상보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전향적으로 노력만 한다면 그 접점을 찾아낼 수 있는 지식과 지혜는 전문가들이 얼마든지 제공할 것이기에 말입니다.

 

 

  15시25분 수륙마을로 내려가 미륵산 산행을 끝냈습니다.

까마귀들이 상공을 배회하는 165봉에서 125봉과 오른쪽으로 담안마을 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직진 길은 군부대로 향하는 길이고 왼쪽으로 오르면 수륙마을로 하산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이정표 앞에 다다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닷가에 인접한 수륙마을로 가는 길이 조망이 더 좋을 것 같아 왼쪽 길로 올라섰습니다. 삼각점이 박혀 있는 150봉에서 짐을 벗어놓고 10분여 쉬면서 점심으로 먹고도 남은 잣과 대추 및 밤이 들어간 영양만점의 약식을 마저 들었습니다. 이 약식은 이틀 간 지리산을 같이 종주한 한 동문이 집에서 준비해온 것이어서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이 있고 실해 산행용으로 딱 좋았습니다. 150봉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은 통나무계단 길이어서 걷기에 불편했고 나무들이 앞을 가려 생각보다 조망도 좋지 않았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99.6봉을 거쳐 “팬션 파도소리” 앞 차도로 내려섰습니다. 수륙 정류장에서 지나가는 한 아주머니에 버스시간을 물었더니 찻길 따라 10분만 내려가면 도남관광단지로 그곳은 버스종점이어서 차가 많다며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습니다.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중 종종 오른 쪽으로 눈을 돌려 바다 풍경을 감상하면서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로 충분히 부를만하다 했습니다.

 

 

  도남관광단지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하는 중 주일미사를 보고자 중앙시장에서 하차해 태평성당을 들렀습니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오후4시 미사가 어떤 이유인지 집전되지 않아 허탕을 쳤습니다. 불가피한 경우는 현지에서 미사를 보더라도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으려고 저 나름대로 애써왔지만 일 년에 서 너 차례는 미사를 드리지 못해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산을 다녀도 주일미사만은 어떻게든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등산과 종교를 대립적인 관계로 악화시켜 종국에는 택일해야하는 상황으로 몰릴까 두려워서입니다.

 

 

  이번 명산순례는 사찰탐방보다는 산행에 더 무게를 두었기에 산행코스를 길게 잡았습니다.

덕분에 능선을 오르내리며 집사람과 같이한 시간은 길었지만, 절에 머무른 시간이 짧았고 용화사는 들르지도 못했습니다. 도솔천에서 사시다가 56억7천만 년 후에 나타나시어 중생을 제도하실 미륵불께서 아직 이 미륵산에 나타나셨다는 소식이 없는 것이 제게 다행이었던 것은 이번에는 그분이 머무르실 용화사를 들러볼 시간이 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이 산을 찾아와 이 산의 명찰인 용화사도 둘러보고 통영의 명품인 케이블카도 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륵불께서 작정하고 빚어낸 통영과 미륵산, 그리고 바다를 단 한 번 찾아와 사진 몇 장 찍고 가는 것으로 이들의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는 없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때는 내달리는 세월도 붙잡아다 앉혀놓아 얼마만이라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때 쓸 글감을 아껴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이번에는 이만 산행기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