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산 산행기(26)

 

‘십 년 간 백 군데 산 찾아다니기 그 스물여섯 번째’


 

1. 달마산


 

  야간 산행 경험이 없는 나는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종로에 나가 아쉬운 대로 인조 반딧불(헤드렌턴)을 구입했다. 발에 맞지 않았던 구두 때문에 외반모지가 생긴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엄지발가락 좌측으로 뼈가 불거져 나오는 외반모지는 제법 아픈데다가 수술을 해도 시원찮다고 한다. 약간 걱정은 됐다. 다행인 것은 등산화를 신으면 편안했다. 궁전예식장 앞에서 열 시가 넘어 출발했다. 세월이 흘러 일 년 만에 온 셈이다. 장거리 산행을 좋아하는 나는 기대가 컸다. 달마대사가 그려진 사진을 걸어두면 돈복이 생긴다는 말에 책상 옆에 붙여두고 지내기 때문에 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남도의 끝 해남에 있는 달마산으로 향했다. 정겨운 달마대사의 얼굴은 늘 넉넉한 마음을 갖게 했다. 안된 것은 막걸리를 마니아라고 할 만큼 좋아하는 내가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던 옆구리 피지가 애기 주먹만 하게 크더니 곪아 터지는 바람에 한 달 전 칼로 짜개어 꿰맸다. 괴팍한 탓인지 항생제 주사도 안 받고 마취제도 안 들어 생살을 뜯겼다. 이런 환자 처음이라는 말을 들으며 실밥 푼 게 며칠 안 돼 가능하면 금주하도록 의사의 주의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월초에 있던 우리 기 주최 중학체육대회에 가서도 한 잔 마시지 못했다.


 

2. 인공위성과 봉수대 돌탑 그리고 후미 8인조 


 

  새벽에 세시에 도착해 네 시에 산에 올라가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어두운 밤중에 정상을 헤매다가 날이 새기 전에 내려올까 봐 달마산을 못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네 시에 미황사에 도착하여 맛있는 내장 탕을 아침으로 먹고 다섯 시에 오르기 시작했다. 선뜻한 공기와 이마에서 비추는 좁은 불빛이 밝은 대낮과 달리 집중력을 길러주어 힘든 줄 몰랐다. 하긴 아침마다 하루건너 개운산 뒷산 3.5킬로미터를 걷고 양쪽 십 킬로미터 무게의 역기를 스무 차례씩 들었다놨다하니 다소 운동은 됐을 것이다. 아름답다는 미황사를 어둠속에 묻어두고 올라온 지 한 시간 뒤인 여섯 시에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아 민망한 사백팔십구 미터의 달마산 정상 불썬봉 봉수대 돌탑 주위에 둘러섰다. 날이 새자마자 시원한 기운을 가슴에 안고 다도해의 여러 섬을 바라보니 꽤 즐겁다. 하늘도 얼룩진 호박무늬만큼이나 구름에 비친 붉은 광선 무리가 해돋이를 준비하느라 열심히 달구어 댔다. 고개를 들고 봉수대에서 바라 본 하늘에 움직이지 않는 별 하나가 있었다. 일행 중 여자 한 분 말하기를 자기 방에 누워 그 별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인공위성이더라는 것이다. 좀 있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다. 

 크게 뭉그적거리지도 않았는데 앞서가는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지만 전국을 스물다섯 번 거의 혼자 다녀도 길을 잃어 애먹은 적 없던 나는 걱정 없이 앞장 서서 걸었다. 모두 아무말 없이 내 뒤를 따라오니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멋진 일출광경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환성을 지르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자주색 구름 사이로 삐죽이 얼굴을 내밀던 붉은 태양이 제법 큰 모습으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아름다움에 모두 정신이 나갔다. 그런데도 멋있어 좋아 죽겠단다.

 먼저 앞서 걷던 나는 나무 계단 모퉁이 난간에 앉아 사과 몇 개를 꺼내 칼끝으로 조각내 깎아 잘라놓은 다음 일행이 오기를 기다렷다. 사과를 한 조각씩 먹고 옆에서 들으니 활발한 무선 교신 끝 애기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고 설왕설래 떠들면서 북쪽을 찾아 다시 걸었다. 나중에는 이렇게 가다가 아무데가 되던 차 다니는 길이 나오면 차로 이동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때부터 후미 여덟 명은 일출 본 것을 위안 삼으면서 얼굴도 익히고 이야기도 많아지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한참을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부지런히 가고 있는데 말소리가 들려 한 여자 일행과 함께 가서 자초지종 말한 후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서울 북가좌동에서 온 산악회원들 하는 말이 자기들은 지금 미황사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올라올 때 모두 기다렸다가 올라간 장소였다.

 조금 내려가자 미황사 건물이 보였다. 안내도를 보니 봉수대에서 송천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갔어야 하는데 우리는 문바위재 쪽으로 내려와 미황사 쪽으로 직진해 내려 온 것이다. 다시 무선교신을 통해 이런 곡절을 이야기하면서 걸어서 송천까지 가려면 한 시간이나 걸리므로 버스를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밤새 차를 몰고 온 기사 분이 잠을 못 자 졸음운전이 될까 걱정돼 망설였다. 

 후미 여덟 명은 도토리를 줍고 떠들며 내려가다가 길가에 늘어앉아 등 짐 무거운 순서대로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김밥, 막걸리, 감식초 술, 과일 등. 그 중 감식초의 효능은 여러번 들어도 신비한 것 같아 연구과제인 것 같았다.  우리가 졸음운전이 걱정돼 잠 깰까 걱정했던 정 기사 님은 화장실에 급한 볼일이 있어 아예 차를 몰고 우리가 기다리던 곳으로 왔다.   


 

3. 유달산


 

 내가 유달산에 처음 온 것은 지금부터 13,155일 전인 1973년 10월 6일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갈 때였다. 이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바다다. 떠오르는 태양과 수면의 물빛이 황홀하도록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따뜻하고 평온하고 싱싱한 기운이 사방에 번져 있다. 군함, 쾌속정, 유조선이 인상적이었다. 유달산 오르는 길은 골목이 많았고 계단이 인상적이었다. 유달산에서 바라 본 바다와 섬들, 그리고 시내가 멋있었다. 시내에는 바위가 많았고 무슨 말인지 모르나 이런 글도 새겨 있었다.

 王明動不 大師 弘法


 

 수학여행 가던 다음 다음해 혼자서 제주도 가는 길에 또 들렀다. 1975년 1월 9일로 12,694일 전이다. 그날은 이렇게 적었다. 


 

 소란하여 눈을 뜨고 보니 낯선 광경이 보였다. 초저녁 놀음이 원인이 되어 싸움이 난 것이다. 인간의 도리를 생각하는 해병대원이 그렇지 못한 타올 장수의 목을 잡고 몇 대 때리더니 이어서 소주병으로 다시 때리려다가 그만 뒀다. 방안의 싸움 때문에 전깃불마저 흐려지는 것 같더니 싸움이 끝나자 비로소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노름하던 타올 장수 한 사람의 인간답지 못한 처신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폭풍주의보는 계속 발효 중이어서 묵고 또 묵었다. 그러는 동안에 덕수상고에 다니는 학생과 유달산에도 다녀오고 해변가로 나가 걷기도 했다.


 

 열 시에 송천에서 목포로 떠났다. 오늘이 유달산에 온 지 세 번째다. 해발 228 미터의 유달산 중 일등 바위에 올랐을 때가 열 시 오십분이었다. 야산에 올라 온 기분이 들었다. 용머리 등 섬들이 여전히 멋있는데 목포의 눈물 노래 소리가 없다. 예전에는 이곳에 올때 선착장에서 걸어 오르곤 해서 꽤 멀었는데 지금은 달성공원까지 차가 들어와 중턱에 내린 기분이다. 시가지가 꽤 넓어 보였지만 전국이 비슷한 고층 아파트 군이라 아쉽다. 어딘가 우중충하고 허름하면서 끈적끈적한 흔적이 널리 깔려 가수 이난영의 눈물이 묻어 나는 그런 목포가 아니었다. 열 두시가 되자  예약한 횟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일행 넷이 바닷가 공원까지 걸어가서 그늘에 누워 한 숨 잤다. 하늘에는 잠자리가 수없이 나는데 곤충 잡는 모습이 날렵했다. 다시 되돌아오는 길 좌측 도로에는 장사가 안 되는지 게임기며 횟집 수족관이며 집기가 다 부서져 있다.

“장사가 안 되면 집기라도 활용하지 왜 다 때려 부수지?”

내 물음에 옆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불이라도 나면 큰일 나요. 그래서 수억 원은 들였을 텐데 다 부수는 거죠.”


 

5. 귀경


 

 두 시 반에 서울로 떠나 군산휴게소 등을 들러 들러 오는데 긴 여행에 비해 지루하지 않았다. 네 시쯤 창밖에 보인 승용차량 충돌 사고는 인명 피해가 꽤 커보였다. 패대기쳐진 운전자가 뒹굴고 있었고 곁에 젊은 아내가 창백한 모습으로 쪼그리고 앉아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이 노래질 불행이 덮쳤다. 조심할 일이다. 그들도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행복하건 불행하던 기대를 걸고 나왔을 텐데 이 순간부터 기약 없는 걱정의 늪에 빠졌다.

  이번 산행에 같이 가자고 권하고 싶은 여자가 한 사람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는데 블로그가 인연이 되어 전화도 가끔 하곤 해서 연락하려고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여러 달 소식이 없어 관심이 줄었는가 생각했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이 쓰기를 하늘나라로 가서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사십 대 중반에 연극을 하면서 불우한 아이들을 도우며 살던 독신여로 자주 아팠다. 그 소식에 마음이 아팠고 멍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을 쓸 것을. 

  다음 산행은 경남이나 전북으로 가야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우리 산악회는 충청, 강원 이후 북쪽을 주로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갑게도 옆에 계신 분이 동대문에는 주말마다 전국으로 나가는 산악회가 많다고 말했다. 충청 이후에 갈 때는 우리 산악회로 가고 장거리 이동 때는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오늘 많이 웃고 재미있었다. 여러 사람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회장, 남녀 총무, 이야기 잘하는 회원, 춤 잘 추는 회원, 그리고 특히 후미 8인조.

 다음에는 단양 태화산에서 볼 수 있기를! 


 

o. 네이버 블로그 ‘정갑용의 직업여행’; http://blog.naver.com/doloomul/

o. 다음 블로그 ‘GRM’ http://blog.daum.net/cnilter/

o. 한국의 산하.http://www.koreasanh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