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와 잔치하며 이룬 [예봉산-운길산]종주 산행
 
(1) 산행계획
지난 번 [검단-용마-남한산성] 종주시
검단산에서 바라본 예봉산, 운길산 마루금이 항상 그리웠다.
자료를 보니 중앙선 전철이 개통되어
종주자들의 최대난제인 回歸문제가 해결되어
서울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진중리를 중심으로
말발굽형으로 감싸 안은 형세가 마치
내장산 환상형 종주나 계룡산 환상 종주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계룡산이나 내장산은 때론 암릉과 너덜이 있지만
예봉, 운길산은 육산인 점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그리고 예봉산은 팔당역과 운길산역이 많이 떨어져 있어
도보 이동이 가능한 진정한 원점회귀 산행은 아닐 것이다.
 
2009/05/10(일) 나 홀로
집에서 출발하여 남부터미널역에서 3호선 전철을 탄 시각은 06:40,
30분 후 옥수역에서 중앙선 국수행을 07:10 승차,
팔당역에 50분 후인 08:10 도착.
팔당역에 도착하니 역 뒤로
예봉산 상봉이 급경사를 자랑하며 어서 오라는 듯 굽어보고 있다.
 
 
팔당댐 [八堂]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泉峴洞:윗배알미)과 남양주시 조안면(鳥安面)을 잇는 높이 29m, 제방길이 510m, 총저수량 2억 4400만t인 한강 본류의 다목적댐이다. 댐의 높이 29m. 제방길이 510m. 총저수량 2억 4400만t. 북한강과 남한강의 합류점에서 하류로 7km 떨어진 곳에 있다. 1966년에 착공하여 1973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이 댐의 완공으로 연간 2억 5600kW의 전력생산이 가능해졌으며, 서울 및 수도권 지역에 하루 260만t의 물을 공급하는 취수원으로서 큰 몫을 하게 되었다. 그밖에도 유량조절에 의한 한강의 범람방지에 기여하고 있다. 댐 하류의 양안(아래배알미와 팔당리)에는 음식점, 카페 등이 즐비하고, 1995년 4월 개통된 팔당대교가 있다.
 
(2) 들머리 찾기
팔당역에서 바로 예봉산에 오르자면 쉽기는 한데
진정한 종주는 아닐 듯싶어
천주교 묘역이 있는 곳으로 도보 이동하려 함.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검단산 아래 한강을 끼고 차량들만 살벌하게 질주한다.
때론 싸이클족들이 무리지어 지나간다.
 
그렇게 몸 푸는 셈으로 40여분 걷다보니
불현듯 왼편 산자락에 연등이 이어지며
암자로 향하는 듯 한 오솔길이 나타나 산자락으로 달라붙었다.(08:50)
산행 경험으로 보건데 암자에서 수도하는 스님이라면
당연히 예봉산 줄기로 오르는 길을 개척해 놓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3) 암자 - 338봉
(08:50-10:00, +70=70분, +1=1km)
암자엔 인기척이 전혀 없다.
늦잠을 주무시는지 연등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채전엔 푸성귀가 자라고 있다.
어느 기도처에 다다르니 커다란 바위에
부처님을 음각하여 놓았는데
면을 다듬지 않고 자연석에 새긴 부처님의 음각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어디에고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없었다.
 
이럴 때 나의 특기. -무조건 산마루에 달라붙기-
경험으로 보건데 그러면 반드시 오솔길이나 옛길이라도 나온다.
그러나 급경사의 낙엽이 푹푹 빠지는 된비알을 겨우 오르니
어디에고 길의 흔적은 없다. - 끝없는 파르란 密林 뿐-
 
겨우 푹푹 빠지는 낙엽을 견디며 나아가니
길은 길인데 인위적인 게 아니고 짐승들이 다니는 길인 듯 폭이 좁다.
헤쳐진 흙 색깔을 보건데 지난밤에도 짐승들이 지나간 것 같다.
때론 나뭇가지가 늘어져 있고
그 밑으로 지나간 흔적으로 보건데 멧돼지들의 이동 루트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길이 아주 유용했다.
 
짐승의 길이건 사람의 길이건 산행을 해 본 사람들은
길인 곳을 가는 것과 길이 아닌 곳을 가는 것이
그 난이도가 천지차이임을 잘 알 것이다.
길의 고마움 - 인생에 있어서도 선행자의 길이 있기에
후행자들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럼 여기선 先行者가 멧돼지란 말인가?
그렇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을 터. 미물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지...“
가며 보니 우산나물이 커다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데
이제 육산은 끝나고 바위들이 갈 길을 막는다.
멧돼지들은 어디로 돌아갔는지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사투를 거듭하며 나아가니
그제야 천주교 공동묘지와 연결되리라 짐작되는 산마루 길이 나타난다.
오솔길 한편에서 지쳐 앉아 쉬는데 어느 부부 산객이 올라오신다.
그 분들을 통하여 바로 지도상의 338봉 근처임을 알게 되었다.
제대로 예봉산 마루금을 탄 것이다.
바로 능내리에 사시던 다산 정약용 선생 형제들이
철문봉까지 6봉우리를 넘어 산책하며 학문을 닦은
바로 그 마루금을 타게 된 것이다.
세월에 그 흔적이 지워졌다지만
정약용 선생이 짚신신고 타고 바람을 가르며 넘던 그 길을
지금 나도 바람을 가르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가고 있는 것이다.
 
 
다산유적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정약용선생의 유적지이다. 다산정약용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오랜 유배생활 끝에 고향인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많은 저서를 남겨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선생의 묘,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이 있다. 다산문화관에는 많은 저서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며, 다산기념관에는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 그리고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초당의 축소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정약용 [丁若鏞, 1762.6.16~1836.2.22]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 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안드레아.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아래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나온 인물들을 정리한 것이다.
어찌 한 집안이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는지...
글을 읽는 이조차 가슴이 찢어진다.
<책의 서두에서 발췌...>
 
정재원(1973~92)
정약용 형제의 부친. 영조 38년(1762) 생원시에 급제했고, 대과는 보지 않았으나 음보로 지방관에 나가 진주목사로 있던 중 사망했다. 첫 부인 남씨가 장남 약현을, 후취 윤씨가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의 부인이 된 딸을 낳았다.
정약현(1751~1821)
정약용의 이복 맏형으로 정조 19년(1795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자신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으나 첫 부인이 이벽의 누이였으며, 딸 명련은 황사영과 혼인한 관계로 고초를 겪었다.
정약전(1758~1816)
정약용의 둘째형으로 정조 14년(1790)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정조 사후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 [논어난], [자산역간] [송정사의]등의 저술을 남겼다.
정약종(1760~1801)
정약용의 막내형으로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다른 양반들이 천주교를 버릴 때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정조 사후 국문을 받고 참수당했다.
이승훈
정조 7년(1783) 말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서양인 선부에게 영세를 받고 이듬해 돌아옴으로써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이때 그가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은 여러 차례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약용 형제의 매형이기도 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다.
이가환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당대 제일의 천재 학자로 정조와 서양의 과학문명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채제공 사후 남인 영수가 되었으나 천주교라는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천주교를 버렸음을 언행으로 입증했으나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다. 저서로 [금대관집]이 있다.
이벽
정약현의 처남으로 정약용에게 처음으로 천주교를 가르쳐 주었다. 박식했으나 천주교를 접한 후 벼슬을 포기했다. 문중으로부터 강한 배교 압력을 받아오다가 병사했는데, 일각에는 독살설도 있다. 체제공 정조 때의 남인 영수로 좌의정을 지냈다. 정조 때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했다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죽고 나서 남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홍화보
정약용의 장인. 영조 47년(1771) 훈련초관으로 국자시에 1등했으며 무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동부승지에 발탁되기도 했다. 정조 15년(1791)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있을때 사망했다.
정학연
정약용의 맏아들로 시문과 의술에 밝았다. [종축회통]이란 저서가 있다.
정학유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의 작자이기도 하다.
정학초
정약전의 아들로 학문에 뛰어나 정약용이 학문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17세에 요절했다.
목만중
남인으로 정약용 집안과 가까웠으나 천주교에 반대해 벽파로 돌아서면서 정적이 된다. 정약용을 죽이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다.
서용보
노론 벽파로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이 공격한다. 영조때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순조 때 우의정으로서 신해박해를 주도하면서 정약용의 석방을 방해했다. 1819년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심환지
영조 47년(1771)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온 이후 정조 때 벽파의 영수가 된다. 정조 사후 영의정을 맡아 신유박해를 주도했다.
혜장
젊어서 대둔사의 주지가 되었다. [주역]을 공부하다가 정약용을 만난 후 다산을 사실상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일찍 죽가 정약용이 [아암장공탑명]을 써주었다.
황사영
서울 출신으로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한다. 정조 14년(1790) 사마시에 급제한 후 정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전교에만 전념한다. 은둔지 배론에서 신유박해의 전말을 담은 [백서]를 작성해 베이징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사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귀양 갔으며 그의 집에는 우물이 만들어졌다.
주문모
중국 장쑤성 쑤저우 출신으로 베이징 신학교 졸업 후 정조 18년(1974) 지황 등의 안내로 입국했다. 이후 7년 동안 숨어 다니면서 천주교를 전파했는데, 신유박해때 국경 부근까지 도망갔다가 되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했다. 1801년 새남터에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최필공 궁중 전의 집안에서 태어난 중인으로 배교를 거부해 사형당할 뻔했으나 정조의 배려로 목숨을 건졌다. 정조가 평안도 심약관으로 임명했으나 다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최인길
중국어 역관 출신으로서 주문모의 거처를 마련했으며 정조 19년(1795) 주문모를 체포하려 오자 주문모 행세를 하다가 포도청에 잡혀가 장살당했다.
권철신
이익의 학통을 이었는데 많은 제자들이 따라서 녹암계를 형성했다. 양명학과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열린 가슴을 갖고 있었고, 정조 때 천주교를 버렸다고 주장했으나 1801년 천주교 신자라는 이류로 체포되어 옥사했으며, 시신은 이가환과 함께 기시되었다.
권일신
권철신의 아우이자 안정복의 사위이다.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 입교하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진산사건 때에 체포되자 80세 노모로 인해 마음이 흔들려 회오문을 지어 올렸는데, 유배 도중 고문에 의한 상처로 객사하였다.
최창현
서울 출신으로 중인 역관이다.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791년 신해옥사로 양반들이 배교하자 조선천주교회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하다가 신유옥사 때 사형당했다.
 
(4) 338봉 - 승원봉(475m)
(10:00-10:15, +15=85분, +0.5=1.5km)
갑자기 어느 조망처에 다다르니
발아래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갈라져 나온 아리수가 보이고
그 수면 위로 웅장하게 솟은 검단산이 당당하게 보인다.
허리에 新綠을 휘감아 자못 웅장하다.
승원봉에 다다르니 이정목은 예봉산2.9, 능내천주교묘역0.86km을 가리킨다.
 
 
두물머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兩水里)에 있는 관광명소. 두물머리[兩水里]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한자로는 '兩水里'를 쓰는데, 이곳은 양수리에서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예전에는 이곳의 나루터가 남한강 최상류의 물길이 있는 강원도 정선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그리고 물길의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를 이어주던 마지막 정착지인 탓에 매우 번창하였다. 그러다가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육로가 신설되자 쇠퇴하기 시작하여,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고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어로행위 및 선박건조가 금지되면서 나루터 기능이 정지되었다. 사유지이지만,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옛 영화가 얽힌 나루터, 강으로 늘어진 많은 수양버들 등 강가마을 특유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웨딩·영화·광고·드라마 촬영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또 사진동호인들의 최고 인기 촬영장이기도 한데, 특히 겨울 설경과 일몰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이나 되었다. 인근에는 한음 이덕형 선생 묘 및 신도비(경기기념물 89), 이준경선생묘(경기기념물 96), 정창손묘역 석물(경기문화재자료 85), 익원공 김사형 묘역(경기문화재자료 107) 등 여러 문화재가 있다. 문호리에는 카페촌이 형성되어 데이트족이나 가족들이 많이 찾고, 금남리 국도변에는 서울종합촬영소가 있다. 서울종합촬영소와 양주골프장 사이에는 복합문화 공간인 두물워크샵이 자리잡고 있는데, 음악회·건축전·미술전·퍼포먼스 등 문화행사가 연중 내내 열린다.
 
(5) 승원봉(475m) - 견우봉(590m)
(10:15-10:45, +30=105분, +0.71=2.21km)
길가에 각시붓꽃이 무더기로 웃고 있고
붉은 병꽃 가지 사이로 견우봉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대부분 팔당역에서 바로 상봉으로 오르는지 산객은 많지 않다.
오솔길도 청계산이나 수락산등
서울 인근의 산처럼 닯고 닯은 것이 아니고 고즈넉한 맛을 지녔다.
 
(6) 견우봉(590m) - 직녀봉(589M)
(10:45-10:55, +10=115분, +0.24=2.45km)
견우봉이 있으니 직녀봉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지도를 보니 바로 240m에 직녀봉이 있다.
 
그런데 둥글레며 애기나리는 지천이고
노린재나무가 한창 滿開하고 있고
그 가지 사이로 멀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두물머리가 시야에 나타난다.
그런데 오늘 시야는 만족스럽지는 않아
주변 산야의 윤곽은 보이지는 않지만 50여km까지 어슴푸레 잡힌다.
직녀봉에 있는 이정목은 예봉산2.46, 팔당역2.1, 능내천주묘역2.0km라 한다.
 
(7) 직녀봉(589M) - 율리고개
(10:55-11:20, +25=140분, +0.86=3.31km)
예봉산은 키 큰 얀철쭉이 좋다더니
역시 터널을 이루고 있다.
길바닥은 洛花로 어지럽다.
율리 고개에 다다르니 이정목은 예봉1.6, 팔당역2.6, 조동마을3.6km라 손짓한다.
 
(8) 율리고개 - 예봉산(683m)
(11:20-12:20, +60=200분, +1.6=4.91km)
율리고개에서 율리봉(587M) 오르는 길과
율리봉을 우회하는 갈래길이 나타나 잠시 생각하다가
머나먼 운길산까지의 산행과 초입에서
헤매인 점을 고려하여 우회키로 한다.
 
우회길에 보니 시원한 샘이 보이고
샘 주변에 벌깨덩굴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육십령 깃대봉 참샘에서 본 벌깨덩굴 이래
처음 보는 벌깨덩굴의 거대한 군락이다.
자세히 보니 족두리풀도 사이사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회길을 올라서니 율리봉을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벚나무 쉼터” 명명한 이정목이 서 있다.
 
 
예봉산 [禮峯山]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읍 팔당리와 조안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는 683.2m로, 능선길로 1.5km 정도 떨어져 적갑산과 마주보고 이어져 있다. 인근 주민들은 사랑산이라고 불러왔고, 옛 문헌에는 예빈산(禮賓山), 예봉산(禮蜂山)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이 조선총독부 《조선지지자료》에 예봉산(禮峯山)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 오늘의 이름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수림이 울창하여 조선시대 때는 인근과 서울에 땔감을 대주던 연료공급지였다. 등산코스는 팔당리, 조안리와 조곡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팔당리에서는 팔당 2리 버스정류장(한일관)에서 철로 쪽 골목길을 따라 굴다리 밑을 지나 마을 회관 앞길로 올라간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 오른쪽 사슴목장에서 숲길로 접어들어 조동으로 넘어가는 갈림길이 나오면 가파른 길로 다시 올라가 쉼터에서 능선을 올라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에 오르면 팔당교와 한강, 검단산, 운길산 등이 바라보인다. 정상에서 북서쪽 안부로 내려서 팔당과 세광사로 가는 큰 길을 따라 630m봉에 올라 잡목림 길을 나아가면 적갑산에 오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산은 적갑산을 올라 도곡리로 내려간다. 예봉산만 등산하면 3시간, 적갑산까지 곁들이면 하산까지 3시간 40분이 걸린다.
 
(9) 예봉산(683m) - 철문봉(632m)-점심
(12:20-12:35-13:00, +15=215분, +0.68=5.59km)
예봉산 상봉은 인산인해.
상봉에서 바라보는 맞은 편 운길산이 너무 멀어 까마득한데
初入에서 힘을 쏟아 부어 메마를듯했던 에너지는
오면서 사귄 야생화들로 다시 회복되었는지
운길산까지의 여정이 두렵지는 않다.
 
상봉의 키 큰 얀철쭉은 이제야 절정인가보다.
화사한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훌훌 벗고 있다.
소란스런 상봉을 뒤로 하고 철문봉으로 向.
정약용, 약전, 약종 형제들은 어떻게 능내리에서 이 철문봉까지와
학문을 밝혔(喆)을까?
당시에는 등산 장비도 없었을 것인데
짚신에 신갈나무잎이라도 깔고 올랐던 것은 아닐까?
옛 선인들의 산행 요령이 궁금타.
 
(10) 철문봉(632m) - 적갑산(564m)
(13:00-13:30, +30=245분, +1.2=6.79km)
철문봉에서 적갑산으로 가려니
중간에 행글라이더 활공장이 나타났다.
발아래 하남을 지나 서울로 들어가는 아리수가
고속도로처럼 쭈욱 펼쳐져 있다.
그런데 문득 길옆을 보니 “참꽃마리” 두 송이가 보였다.
야생에서 처음으로 보는 참꽃마리였다.
꽃마리의 세 배 정도의 크기로 웃어주는 웃음이 좋았다.
 
(11) 적갑산(564m) - 새재고개
(13:30-13:55, +25=270분, +0.79=7.58km)
그렇게 적갑산을 내려와 걷노라니
온통 “은방울”과 “애기나리”의 군락이다.
은방울은 이제 마악 꽃망울을 맺고 있다.
육십령에서 영취산을 갈 때 은방울밭을 보았지만
이렇게 낮은 산에서 群落을 본 것은 처음이다.
은방울이 고산식물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
 
살펴보니 덕유평전에 군락을 이루어 살아가는
원추리가 또한 밭을 이루고 있다.
8월에 다시 한 번 와 달라는 원추리의 부름인가?
 
또한 각시붓꽃이며, 홀아비꽃대가 보인다.
홀아비꽃대는 야생화원에서는 보았지만 자연에서는 처음 본다.
감격이다. 예봉, 운길산은 자연의 寶庫임을 다시 알겠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니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터지며
멀리 휘달려가는 운길산의 허리가 보이는데
운길산 근처의 가파름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가야하는 운명.
그리고 이렇게 야생화들이 반겨주는데 포기할 수는 없지.
그래! 즐거운 마음으로 가야지. 아암! 암!“ 독백해 본다.
새재 고개의 이정목에 예봉산3.7, 운길산3.5km라 하였으니
예봉에서 운길까지가 총 7.2km이고
여기 새재고개가 바로 중간 지점임을 알겠다.
 
(12) 새재고개 - 안내판
(13:55-14:10, +15=285분, +0.85=9.54km)
새재고개를 지나자 길은 우측으로 길게 휘어져 내린다.
저 아래 다시 고개가 보이는데
거기가 마치 새재고개일듯이 보이지만
지도를 보니 안내판이라 명명한 곳이다.
운길산에서 오는 이,
예봉산에서 가는 이,
그리고 아이스께끼 장수로 북적인다.
이정목에는 적갑산1.64, 운길산 2.65, 운길산역5.2km로 표시되어 있다.
 
(13) 안내판 - 운길산(610m) - 휴식
(14:10-15:40-15:50, +90=375분, +2.65=12.19km)
안내판에서 운길산 방향으로 가자니
예상과는 달리 밋밋한 길이다.
숲의 식생은 예봉산과 비슷한데 어느 기슭에 관중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아까 예봉산부터 보아왔지만
광주 백계남씨의 표지기가 군데군데 붙어있다.
반가운 분이다.
대전의 향적산 능선, 식장산 능선, 진안 마이산 능선,
아차산 능선에서도 씨의 표지기를 보았거니와
주로 얕은 육산, 그 중에서도 장거리 산행을 즐기는 분같다.
5/6일 통과 했으니 바로 며칠 전 다녀가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바로 나타날 걸 기대한 운길산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또 봉우리,
그리고 또 봉우리의 연속이다.
지도를 보니 과연 449봉, 482봉, 368봉, 485봉이
운길산까지 길게 연이어 있다.
 
드디어 몇 개의 암릉을 넘으니
운길산 급경사의 사다리 앞에 도착.
얀철쭉이 활짝 핀 사이로 나무계단의 마지막 단을 올라서니 一望無際.
근사한 老松이 암반에 버티고 섯는데
 
거기서 쉴 틈도 없이 상봉이 보고파 한숨에 내달으니 거기도 인산인해.
그러나 구름이 가다 산에 걸려 멈춘다하여 명명했다는
운길산 상봉에서 둘러보는 조망은 후회 없슴.
12km를 걸어온 다리는 피곤하지만
정상의 쉼터에서 두 다리를 뻗고 먹어보는 아이스께끼는 달콤.
 
 
운길산 [雲吉山]
높이 610.2m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 북서쪽 지점에 솟아 있다. 1890년(고종 27)에 지은 《수종사중수기》에는 운길로 나오고, 그보다 오래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곡산이라고 적혀 있다. 산수가 수려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가족산행이나 가벼운 주말산행지로 널리 알려졌다. 주변에 정다산마을·팔당호·서울종합영화촬영소·금남유원지 등의 관광지가 있고 산중턱에 수종사(水鐘寺)가 있어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특히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의 모습은 일찍이 서거정이 동방의 사찰 중 전망이 제일이라고 격찬했을 정도이다. 서쪽의 적갑산(561m)과 예봉산(683m)을 함께 종주할 때 기준점이 되는 산이기도 하다. 산행은 송촌리나 진중리에서 시작한다. 송촌리에서 송성골마을로 들어가 수종사(水鐘寺)에 들른 뒤 산신각 옆으로 500봉을 거쳐 정상에 오르거나, 요사채 앞에서 200m를 내려가 오른쪽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 서면 예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적갑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행 시간은 4시간 정도 걸린다.
 
(14) 운길산(610m) - 수종사 - 운길산역
(15:40-17:00, +80=455분, +3.0=15.19km)
정상에서 내려오다 보니
수종사방향과 운길산역으로 가는 방향으로 나뉘는데
여기까지 와 수종사를 보지 않을 수 없어 수종사 방향으로 잡는다.
절상봉(522m)는 後日을 기약하다.
그런데 끝없는 급경사의 계단길은 장딴지의 근육을 긴장시킨다.
 
 
수종사(水鍾寺)
수종사(水鍾寺)는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한 봉선사의 말사이다. 광주산맥이 남서로 내려오면서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운길산은 웅장하지 않지만 그윽함이 감도는 명산이다. 특히 수종사에서 바라본 풍광은 빼어난데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한 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북한강의 물길이 장관이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세조가 이 절에 친히 행차하여 땅을 파서 샘을 찾고, 혹은 종을 발견했다고 해서 수종사라 하였다고 전하며 1939년 석조 부도를 중수하면서 1439년(세종 21)에 조성된 부도로 확인되어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종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세조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용선(龍船)을 타고 양수만(兩水灣 : 현재 양수리)에서 하룻밤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밤에 홀연히 어디에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그 출처를 찾게 했더니 그곳에는 바위굴이 있었고 내부에 18나한상이 있었다. 종소리는 굴속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울려나온 소리로 청아하고도 명징하게 들렸던 것이다. 세조는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이곳에 축대를 쌓고 장인(匠人)들을 불러 절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전답을 하사하고 승려를 거처하게 하였으며 절 이름을 수종사라 하였다 한다. 수종사는 여러 해를 거치면서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오랜 세월로 인해 대웅전과 요사채가 무너지고 불상 또한 그 사정이 참담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풍계혜일(楓溪慧一)화상이 고종에게서 내탕금 8000냥을 받아 3월 27일에 중창을 시작해서 6월 28일에 마쳤고, 이듬해 3월에는 4000냥을 더 받아 불상 4존(尊)과 탱화 3축(軸)을 새로 봉안하였으며, 대법당· 나한전·어향각(御香閣), 그리고 산왕각(山王閣)을 단청하였다. 1939년에는 주지 일조태욱(日照泰旭)이 대웅전·선루(禪樓)를 1940년에는 영산전(靈山殿)·독성각(獨聖閣)· 산신각·어영각(御影閣) 등을 중건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1975년 혜광(慧光)스님이 대웅보전을 복원하여 사세를 확장해오며 1999년 주시 동산(東山)이 선불장과 삼정헌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2년 팔각오층석탑(제22호)과 1995년 부도(제157호)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보존되어 오고 있다.
 
 
내려오다 보니
미륵보살상의 인자한 미소아래
하산길이 산능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진중리와 조안리를 지나노라니
너른 평야는 봄의 채소로 가득하고
물많은 동네답게 기름진 산야에 윤기가 넘쳐난다.
 
(15) 에필로그
처음 가본 예봉산, 운길산의 所感을 정리하면
1) 陣中里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원형의 성채 형식으로 진을 친 형국.
2) 수원성을 쌓은 정약용이 왜 그의 고향인 이 천혜의 요새에 성을 쌓자고
3) 정조 이산에게 건의하지 않았는지 의아.
4)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육산길로 환종주형태의 높낮이가 평이한 코스임.
5) 다만 예봉산 초입, 운길산 상봉 쪽이 상당히 가파르고
6) 수많은 봉우리를 극복하여야하나 구비마다 운치가 있어 피곤하지 않음.
7) 북한강, 남한강, 경안천등이 합수하는 양수리 두물머리에 위치하여
8) 680m정도의 높이지만 해발고도에서 출발하므로 결코 만만치는 않음.
9) 전구간에 키큰 얀철쭉이 분포하나 예봉산근처, 적갑산 근처에 群落이룸.
10) 예봉산 쪽과 운길산 정상 근처에 매화말발도리 군락.
11) 새재고개 근처에는 은방울과 원추리가 군락.
12) 참꽃마리와 홀아비꽃대는 처음으로 야생에서 관찰.
 
총 15.2km, 7시간 반(사진 찍기 포함)소요
운길산역에서 17:27 용산행 열차, 18:10옥수, 18:30남부터미널 도착
 
 
배달9206/개천5907/단기4342/서기2009/05/10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산행계획 1-1) 안내도
 
(2) 들머리 찾기
 
2-1) 팔당2리 안내도
 
(3) 암자 - 338봉 (08:50-10:00, +70=70분, +1=1km) 3-2) 무명암자의 마애불
 
 
3-3) 밀림의 우산나물 군락
 
(4) 338봉 - 승원봉(475m) (10:00-10:15, +15=85분, +0.5=1.5km) 4-1) 338봉에서 본 검단산
 
 
4-2) 승원봉
 
(5) 승원봉(475m) - 견우봉(590m) (10:15-10:45, +30=105분, +0.71=2.21km) 5-1) 각시붓꽃
 
 
5-2) 승원봉에서 본 견우봉
 
 
 
5-3) 노린재나무꽃
 
 
5-4) 둥글레
 
 
5-6) 조망처에서 본 능내리
 
(6) 견우봉(590m) - 직녀봉(589M) (10:45-10:55, +10=115분, +0.24=2.45km) 6-1) 견우봉의 붉은병꽃
 
6-2) 견우봉에서 본 예봉산
 
(7) 직녀봉(589M) - 율리고개 (10:55-11:20, +25=140분, +0.86=3.31km) 7-1) 낙화
 
(8) 율리고개 - 예봉산(683m) (11:20-12:20, +60=200분, +1.6=4.91km)
 
8-1) 벌깨덩굴
 
(9) 예봉산(683m) - 철문봉(632m) - 점심 (12:20-12:35-13:00, +15=215분, +0.68=5.59km)
9-1) 예봉산
 
9-2) 예봉산서 바라본 운길산
 
 
 
9-3) 정상의 얀철쭉
 
 
9-5) 뒤돌아 본 예봉산
 
 
9-6) 반가운 백계남씨 표지기
 
 
9-7) 족두리풀
 
(10) 철문봉(632m) - 적갑산(564m) (13:00-13:30, +30=245분, +1.2=6.79km) 10-2) 행글라이더장에서 본 덕소, 하남
 
 
10-3) 둥글레
 
 
10-4) 처음 본 참꽃마리
 
 
10-6) 적갑산
 
(11) 적갑산(564m) - 새재고개 (13:30-13:55, +25=270분, +0.79=7.58km) 11-1) 각시붓꽃
 
11-2) 머나먼 운길산
 
 
 
11-3) 처음 본 홀아비꽃대
 
(12) 새재고개 - 안내판 (13:55-14:10, +15=285분, +0.85=9.54km) 12-1) 노린재나무꽃
 
 
12-2) 은방울 군락
 
 
12-3) 새우젓고개
 
(13) 안내판 - 운길산(610m) - 휴식 (14:10-15:40-15:50, +90=375분, +2.65=12.19km)
13-1) 관중 군락
 
 
13-2) 백계남씨는 팔당역서 여기까지 6시간 걸림
 
 
 
 
 
 
13-3) 정상을 향하여
 
(14) 운길산(610m) - 수종사 - 운길산역 (15:40-17:00, +80=455분, +3.0=15.19km) 14-1) 운길산
 
14-2) 수종사
 
14-3) 조운리에서 본 [예봉-운길]연봉
 
14-4) 양수리 들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