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 사백년의 로망 - 미륵산 ★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之 / 夜矣卵乙抱遺去如 >

<선화공주님은/ 남몰래얼려두고/ 맛둥서방님을/ 밤에몰래품으러가네 >

                     -삼국유사에 수록된 ‘서동요’-


십 몇년 전 내가 미륵산엘 오르다보면 마주치는 사람이 어쩌다 한 두 사람이기 십상 이였다. 나는 그때  등산하러 오른 게 아니라 한참 분재에 눈떠 산야를 휘젓고 다니던 터였고, 미륵산 등산로도 고작 풀숲에 묻힌 긴가민가한 숲길 이였다. 암튼 난 등산이 뭔지도 모르고 이따금씩 미륵산엘 올랐었고, 그 미륵산은 나에게 요것저것을 안겨주면서 친해지게 됨이다.

내가 배낭을 짊어짐은 10년 전쯤일 것 같고, 본격 산악회에 끼어든 건 불과 수년 전이라.

 

내게 늦게나마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하는 매력을 발산하는 미륵산은 높지 않은 품새치곤 명산이 품고 있는 요소를 골고루 가추고 있어 등산 왕초보에겐 최적의 산이란 생각을 하게 되였다. 미륵산(430m)은 골이 깊어 등산로가 적당한 완급을 유지하며 바위와 제각기 비뚤어진 육송이 군데군데 어우러져 시야를 즐겁게 해 준다. 나아가선 등산로가 많아서 원하는 시간만큼 산행을 마칠 수가 있어 또한 좋다.


등산은 대게 미륵사지 주차장이나 연수원 앞, 아님 서쪽의 찜질방 쪽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정상까진 해찰을 해도 한 시간이면 족하다. 미륵사지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이란 걸 방대한 터가 증명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미륵사지탑(국보11호) 복원공사를 하느라 거푸집으로 보호하고 있고 당간지주와 동석탑이 복원되어 맞는다. 허나 미륵사지에 얽힌 설화는 우리나라 어떤 설화완 비교될 수 없는 품격과 시사성이 내재한다.  위 ‘서동요(薯童謠)’가 1400여년의 시간 속에서 미륵산과 익산인들이 품고 있는 로망이요 자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동요 없는 미륵산은 폐허가 돼버린 큰 사찰을 안고 있는 평범한 야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서동요가 존재했기에 미륵산은 요원한 생명을 얻고, 익산은 꿈과 기개를 갖게 됨이라 난 생각한다.

서동(薯童:마를 먹고사는 아이)은 백제왕손이였다. 권력다툼 땜 이였던지 서동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단둘이 익산(금마)에서 살았는데,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접하고 안달을 하게 된다. 그는 승복으로 변장을 하고 신라에 잠입하여 마침내 대궐안의 선화공주를 보고 홀딱 반해 궁리에 궁리를 하다 위 서동요를 지어 서라벌에 퍼뜨린다.



갖고 간 마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노래[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소문을 퍼뜨린 거였다.

“공주는 서동을 남몰래 숨겨두고 밤에 몰래 안기러간다”고 서라벌에 소문이 쫙 퍼졌으니  공주는 진짜로 서동을 안 품을 수가 없게 됐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결혼을 한다.

때는 삼국(三國)의 말기라 백제와 신라는 견원지간 이였다. 원수지간에 국제적인혼인이 성사됨이다. 그리고 서동은 무왕에 등극하여 미륵산에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고 천도를 할참 이였다.

 

서동요는 스케일이나 극적인 로망에 있어 비련으로 끝난 ‘로미오와 주리엣’보다도 사랑을 뛰어넘는 국제적인 사건 이였던 것이다. 1400년전의 백제·신라의 화합이란 로망이 지금에서도 절실함은 어떤 연유에선가? 영호남의 갈등의 골이 상존하는 지금에서도 서동요의 화합은 어젠다가 됨이라. 하여 매년 10월엔 익산에서 서동요축제가 열린다.

모름지기 서동요를 사랑하고 가꿔서 세계적인 로망스로 거듭나게 해야 함이다.

 

백제의 중흥, 라제(羅濟)의 화해, 국내제일의 가람터를 안고 있는 미륵산을 주산(主山)인양 배알하는 익산인들의 심저를 헤아리기란 어렵잖음이라.  미륵사지를 출발하여 반시간쯤 오르면 사자암이란 암자가 오른편에 있다.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지명은 앞 암벽에 새긴 ‘獅子洞天’이외 오랜 때깔이 쉬이 눈에 띄질 않는다. 다시 반시간을 오르면 정상이라.


동쪽 바로 밑엔 미륵산성(전북기념물12호)이 위용을 선뵈고 있고, 그 앞엔 금마저수지가 우리나라모형을 빼닮았다. 저 멀리 전주시가지가 고개를 내밀고 그 뒤로 모악산이 우람한 둥치로 하늘을 막아섰다. 남쪽으론 익산시가지가 선연하고 서쪽엔 군산이 신기루처럼 가물거린다. 지척인 북쪽의 산정엔 kbs중계탑이 하늘을 꽂고 있다.

미륵산은 익산인은 물론 인근의 주민들에게 있어 허파요 삶의 재충전 장소인 것이다.

 

미륵산이 없는 익산을 생각할 수가 없으리라. 미륵산은 익산의 상징이요 희망의 샘이라 할 것이다. 나 아니, 산을 좋아하는 익산인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반드시 찾는, 그래 미륵산에서 생에 대한 위안과 삶에 필요한 에너지의 재충전을 보충 받지 않나 싶다. 다만 탐방인구가 갈수록 늘어 등산로가 새로이 생겨나고 있어 숲이 황폐화 되어가는 안타까움이다.

 

참으로 통탄스런 일은 등산로를 정비 확장한답시고 거대한 철재계단으로 등산로를 만들어 놔 탐방객들은 오히려 불편해지자 그 옆에 다시 길을 내어 두서너 개의 길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자연보호 개념이 마비된 시공무원들이 탁상행정으로 집행한 공공사업이 얼마나 극심한 자연훼손을 야기하며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는가를 미륵산의 등산로는 증명하고 있다. 

전시행정의 폐해의 본보기로 미륵산의 등산로를 공복들이 귀감 삼는다면 흉측해가는 미륵산은 그나마 좀은 위안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07.  10.

                       

#. 09.01.19일에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舍利莊嚴)과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발견됐다. 그 중 사리봉안기의 판독으로 학계와 익산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봉안기엔 무왕40년(서기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무왕의 왕후인 좌평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고 명기 됐으니 지금까지 선화공주가 창건한 줄로만 안 우린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산화공주가 왕후가 아니고 나아가 미륵사완 무관타면 허구의 인물인가? 허나 꼭이 실망할 것 까진 없잖은가? 역사란 진실에 웬 만큼의 살[野史]이 붙기 일 수고, 특히 격동기의 역사는 펙션(팩트+픽션)이 심하질 않던가? 가늠하건데 왕후가 딱 사택적덕의 딸 한분이며 언제 혼인 했다는 기록도 불명하고, 무왕은 제위 42년에 40년간 미륵사를 창건했으니 선화공주가 또 다른 왕후가 되어 미륵사 창건에 관여하지 말란 법도 없겠다. 

하여 서동요가 반드시 허구라고 단정할 순 없으리라. 사리봉안기의 사실은 사실로, 서동요는 또 하나의 야사로 자리매김하여 화합의 상징으로 갈고 닦아 발전시켜야 함이라,

                             09.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