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 (1241) 雪景

 

2007. 12. 30.

 

홀로

 

 

석남사 버스종점 건너편 전적기념비 - 795m 능선 이정표 - 중봉(1165m) - 가지산 (1241m) - 

 

쌀바위 - 임도 - 740 m 안부 이정표 - 석남사 경내   

 

 

 

 

부산은 비, 가지산엔 눈이 왔으리.

 

 

비록 쌓이지는 않더라도 하얗게 내리는 첫 눈의 소식이 아직은 없는 이곳 부산. 이틀간 차가운 겨울 비가

계절의 시린 맛을 대신하더니 마침내 엄동의 한파를 몰고 온다고 한다. 지난 주만해도 봄날 같이 따뜻한

날씨였는데 오늘은 겨울 장비를 단단히 하고 45L 배낭으로 다시 돌아간다. 가지산에는 그래도 눈이 좀 쌓

였겠지...... 적어도 질척거리며 녹지는 않을 날씨라 잔설의 풍경일지라도 내심 괜찮을 설경을 기대했다. 

 

 

내가 사는 엄광산 자락에서 영남알프스 가지산까지의 위도차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덕유산 향적봉까지의

직선거리의 위도 차이와 거의 비슷하다. 결코 짧지 않는 거리지만 교통의 편리로 인해 앞산이나 뒷산처럼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언양 땅에 들어서니 하얀 눈이 길에 덮혔고, 마침내 궁근정리 고헌산 입구에서 차

량통제를 하고 있다. 운문령이나 석남터널 방향을 회차시키는 것이라 짐작이 간다.

 

 

고헌산 배경으로 들판에 선 두그루 감나무가 멈춰선 차량들의 느긋한 시선에 들어온다. 살포시 내린 눈의

아침을 맞이하던 어릴 적 설레임이 희미하게 되살아난다.

 

 

 

 

 

 

 

 정상(頂上)의 오름에 쉬움이 따로 있으랴.

 

 

중봉까지는 두번의 된비알이 있다. 초반 석남고개 능선 만남길까지의 오름길이 고도를 급상승시키고, 이어 능선을

편하게 휘돌아 숨넘어가는 중봉 오름길 두 곳이다. 두군데의 급경사가 끝나면 중봉에서 가지산 정상까지 꺼졌다가

다시 오르는 마지막 정상부 경사가 기다리고 있다. 중봉 오름길에는 어느새 대대적인 목책계단이 설치되었다. 아직

짙은 원목색이 하얀 눈 속에서 어울리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퇴색이 되면 자연스런 모습이 될 것이고, 이 부근의 등

로 패임이 어느정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산님들이 목계단 이전의 등로로 따라 오른다. 운치도 있을 뿐 아니라 목계단의 팍팍함이 주는 피로가

부담스러워 그러할 것이다. 목계단 수를 세면서 올라가다가 한순간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숫자를 놓쳐버렸다. 

 

 

 

 

어느 산님의 부상 사고

 

여성 분이 팔을 다친 모양이었다. 그렇게 난이한 경사도 아닌데 한순간의 방심이 탈골이나 골절을 초래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취약하고 유약한 지는 항상 유념해야한다. 체력을 단련하고 순발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순간 정신을 떨구거나 판단이 흐려지면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세심한 주의력과 판단이 훈련된 근

력과 순발력을 통제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불가항력의 사고가 존재함을 안다면 산 속에서는 자만할 여지라고는 털

끝만치도 없는 것이다. 구조헬기를 요청한 것은 적절한 결정이었다.

 

 

 

 

 

 

중봉에서 설경 가지산 정상을 바라보다.

 

 

2006년도에는 단체산행을 안내하는 행사가 있어 네번 올랐지만, 2007년도에는 두번째 가지산 산행이다.

그사이 '가지산 철쭉나무 군락지 정비사업'이 2007년 11월부터 2008년 1월까지 행해지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쌀바위 샘 부근에도 목책설치 공사가 완료되었다. 산행의 발길이 워낙 잦아지니 등로의 보존은

불가피하다. 거칠었던 등산로를 다녔던 옛 발길들은 추억이 되어가고 가지산 북릉과 북사면의 여러 산길

로 옛 걸음들이 빈번히 찾아드는 현실이다.

 

 

앞으로 십년 후면 중봉 - 가지산 정상부 사면에도 나무계단이 설치될까? 미관 손상없는 자연친화적인 등

로보존 방법도 함께 발전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건너편 재약산-천황산 배경으로 용수골 전경>

 

 

 

 

<가지산 남동릉의 암릉미>

 

 

 

<정상 오름길에 쉬임없이  눈바람이 강하게 몰아친다.>

 

 

 

<사계절 언제나 아름다운 정상 아래 헬기장 방면>

 

 

 

<중봉 사면의 부상자를 구조하기 위한 2차 시도>

 

 

 

 

가지산 정상에서

 

 

봄날 같던 겨울, 온난화의 우려 따위가 언제 있었던가. 한순간에 모든 잡념을 날려버리는 엄청난 한풍이

가지산 정상에 몰아치고 있다. 카메라를 잡고 바로 설 수가 없을 지경이다. LCD 로 촬영확인은 고사하고

흔들림에 제대로 찍기나 하였는 지 의심스럽다. 잠시 바위 아래로 내려와 조리개를 열고 셔트타임을 줄여

다시 촬영에 임했다. 두 발로 버티고 섰는데 그 떨림이라는 것이 아예 기계음을 내는 바이브레이션의 진동

과도 같다. 손가락의 감각이 없어진다.

 

 

 

 

<쌀바위 방면, 휘날리던 상고대도 짧은 셔트에 다행히 멈춰섰고 멀리 문복산까지 다가온다.>

 

 

 

<강풍 속에서 오히려 고요가 느껴진다.>

 

 

 

<가지산 북릉의 암봉>

 

 

 

<무채색의 경치에서 오히려 빛나는 대피소 천막의 청색>

 

 

 

<내가 좋아하는 곳>

 

 

 

 

<잠시 바람을 피하며 중봉 쪽 안부를 바라보며>

 

 

 

쌀바위로 향하는 길, 상고대와 설빙화

 

 

12월 한달 내내 체력은 바닥이었고, 업무에도 지치고 기진맥진이었다. 팔공산 - 대운산 이어지는 산행으로

그나마 생기를 연명을 해가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겨우 몸을 추스릴 지경이 되어 오늘 영남알프스의 가지산

에서 한겨울을 맞아 감회가 남다르다. 건강이 넘쳐 산에서 그 힘을 발산하는 것도 정도의 차이지 모두 한때

일 것이다. 산에서 힘을 얻어다 쓰고 건강을 얻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다만 감사할 따름이다.

 

 

언젠가 대간길을 홀로 종주하는 꿈을 가지고 살다보면, 어느날 아침 세면대 거울에서 멋진 삶을 종주해온

큰바위 얼굴을 먼저 대면할 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다행히 내가 얼굴도 적은 편이 아니니......^^ 

 

 

 

 

 

 

 

 

 

 

 

 

 

 

가지산 정상에서 칼바위로 향하는 작은 암봉들 중에는 양지바르고 전망좋은 곳이 몇군데 있다. 적설에 관계

없이 편안히 등 기댈 수 있는 자리를 잡고 점심을 챙기며 눈 앞의 시린 전경과 나름대로 따뜻한 햇살을 즐기

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역시 찐하고 뜨거운 원두커피의 맛이 최고다.

 

 

올 한해 그래도 부지런히 다닌 셈이다. 무난한 산행과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대운산, 팔공산, 거문-철마산, 정수산 율곡사, 상계-파리봉2, 지리산 천왕봉, 영축-신불산 야영,

월아산 청곡사, 신불산-간월산, 여항산2, 상계-파리봉, 여항산, 남덕유산, 의성 고운사, 팔공산

은혜사-백흥암, 밀양 위량지, 쇠점골2, 금강동천, 쇠점골, 한신계곡, 영남알프스환종주(실크로

드) 1차 - 6차, 천성산 내원사, 천마 야간산행, 벽방산2, 미륵산 용화사, 국립미술관, 우포, 조계

산선암사, 장복산-덕주봉, 토함산2, 벽방산, 토함산, 운제산, 가지산, 한라산, 도심산길(암남공

원-꽃마을 ......

 

 

그 중에 6차에 걸친 환종주를 해낸 것이 2007년의 가장 행복한 추억이 될 것 같다. 

 

 

 

 쌀바위를 다시보다.

 

 

 도대체 이곳 쌀바위를 사진으로 담은 것이 필름시대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되는 지....... 그래도 사진기의

개선과 컴퓨터 기술과 힘으로 과거 필름인화물을 스캔할 때와는 천양지차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질

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모습은 과거가 되었을 때도 훌륭하고 요긴한 자료가 된다.

 

 

 

<쌀바위 샘터까지 목재데크가 설치되었다.>

 

 

 

 <쌀바위를 벗어나며 뒤돌아보며>

 

 

 

 <임도로 걸어보는 것도 실로 몇 년만인지......>

 

 

상운산- 귀바위 능선이 임도에 내려서는 곳에서 석남사 산길로 내려섰다. 이런 고요한 산길도 무척 편하다.

초반에는 경사가 급하지만 지그재그로 조절되고 두터운 낙엽과 적설이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발빠른

산님들은 내 앞을 지나쳐 서둘러 가 버리고, 서넛이 무리진 산님들은 내가 멀찌기 앞서가니 고요함을 잃지

않는다. 석남사 외곽 까지 2 Km 의 경사길을 쉬임없이 내려서니 3시 정각. 오늘 산행은 6시간 30분을 조금

넘겼다.   

 

 

 

석남사

 

 

석남사 돌담을 돌아서면 그 옛날 처녀 적 아내를 만날 것만 같다.

석남사, 내원사, 운문사, 통도사는 즐겨찿던 속삭임의 장소였다.

 

 

대개의 남녀들 처럼, 나는 대체로 지식을 떠벌이는 편이었고 그녀는 색깔과 모양을 즐겨 이야기했다.

 점차 절의 풍경은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았다. 대웅전 마당 바라보이는 요사의 마루에 나란히

앉아 풍경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풍에 맑은 울림이 몇차례 울리는듯 귀를 기울이니 

잦아드는 목탁소리 끝에 사방이 고요해진다.

 

 

.....!

 

 

어느새 25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山門을 나서면서

 

 

산문을 나서면서, 얼어붙은 바윗길과 눈 비탈에도 무겁지 않던 뒷짐의 무게를 문득 느낀다.

저 문을 지나면, 이제부터는 세상의 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랫배까지 심호흡을 한다.

 

 

진리로 들어서는 경건함과 마음의 삭발로 무명을 거두어 결연히 이 문으로 들어서야지만, 오늘

중생은 털가죽 걸친 포수 마냥 거칠게 산에 들었다가 황송하게도 안거를 마친 스님네가 남긴 자

취따라 산문을 나서게 된다. 원래 절의 인연이 내겐 그랬지만...... 그래도 사찰의 고요로, 가져가

야할 마음의 짐은 등짐으로 잘 챙길 수 있었다. 버릴 수 없을 때는 잘 정리해두면 된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그 노랫말처럼, 오로지 그대의 헌신과 사랑이

나를 저 높고 먼 산길과 산정으로 이끌었음에 감사한다. 산문 밖에서 이제막 도착해 기다리는 내 님. 

묵은 그 인연을 지척에 두고도 새삼 그리워지는 발걸음도 빨라지는데, 그런 감정과 무관하게 그 놈의

세월은 겨울바람처럼 더더욱 차갑고 빠르다는 느낌에 눈꼬리가 조금 더 쳐지는 것 같다.

 

 

 <2007년 최종 산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