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바위산 (충북, 772.1m) 산행 Photo 에세이
(2007. 7. 3 충북 북바위산: 물레방아-북바위산- 사시리곡- 물레방아/ 고양시한뫼산악회 따라)

*. 북바위산을 찾아서
메일의 벨이 울려 핸드폰을 열어보니 반가운 산행 안내였다.
-한뫼산악회알림충북 바위산선착순45명
요즈음 나의 산행은 그동안 쓰지 못하고 지나쳤거나 새로 가보는 산의 산행기를 주로 쓰기 위한 등산이라서, 가 본 것보다 안 가본 산에 관심이 많았는데 바위산은 듣기도 처음인 산이다.
반가운 마음에 인터넷과 나의 적지 않은 등산 서적을 찾아보았지만 '바위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위산'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건 춘천 소양 호변에 있는 857.7m산이다. 대형 서점에 가서 찾아보아도 충북의 바위산은 없었다.
아는 것만큼 본다는 말처럼 사전에 아무런 지식 없이 다녀온 산은 항상 중요한 그 산의 Point를 놓치기 일쑤라서 은근히 걱정을 하면서 등산회를 따라나섰다.
그래서 오늘은 놀이 삼아 가는 등산으로 반가운 사람들이나 만나려고 충북 바위산을 향하다 보니 '바위산'이 아니라 충북 월악산의 한 자락 '북바위산'이었다. 
그 산 이름은 수안보에서 미륵리 가는 길에 지릅재 북쪽에 위치한 바위산이라서 북바위산이라 하는 모양이다.
우리들의 산행은 제1진은 '물레방아휴게소- 북바위-꼬부랑재-민박집- 송계교- 물레방아휴게소'이지만 제2진은 '북바위 -골뫼- 송계교- 물레방아휴게소' 였다.



일산에서 3시간, 수안보를 거쳐 등산의 들머리가 되는 물레방아 휴게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장마 중이라 주위 산들은 연무에 싸여 있고 날씨는 잔뜩 찌푸리고 아주 가는 가랑비가 오는 날씨였다.

물레방아란 물이 떨어지는 힘이나 흘러가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곡식을 찧던 방아다. 그러나 오늘날은 물레방아란 흘러간 옛 추억의 발자취다. 물레방아는 남 몰래 사랑하는 이들의 밀회의 장소요, 숙박을 거절당한 나그네의 하룻밤 머무르는 장소이기도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북바위산 들머리 물레방아는 옛날처럼 곡식을 찧던 물레방아가 아니라, 지금은 멋을 찧는 방아였다.
그 앞 시내가 유명한 제천10경 중 7곡이라는 송계계곡 중 '와룡대'가 있는 곳이다.

*. 북바위산으로 가는 길
  물레방아휴게소를 끼고 막 오르는 왼쪽에 멋있는 화장실이 있고, 거기서부터 간밤 비에 촉촉이 젖은 잘 다듬어진 통나무 길이 시작된다. 길은 산의 이름답지 않게 바위산이 아닌 육산의 완만한 오름길이다.
우리 고양한뫼산악회는 나이가 지긋한 분이 많아서 쉴만한 터가 있을 때마다 항상 쉬고 있어서 젊은 산꾼과 함께하던 산행보다 여유가 작작하다.
수석(壽石)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탐낼 평원석(平原石) 바로 위 너럭바위에서 우리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먹고 있다. 어느 고마운 부인이 엊저녁에 만들었다는 도토리묵을 가지고와서 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가장 맛있게 먹어보는 도토리묵을 아쉽게도 뒤로 하고 오르는데 얼마 안가서 드디어 능선이 시작된다.
여름이 익어가는 계절이라서 양 옆으로 소나무와 잡목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낙엽과 솔잎이 쌓인 촉촉이 젖은 길이다.
한 30분 갔을까 하는데 길은 육산을 버리고 능선 바위길이 시작된다.
그 바위는 어느 산에서나 보는 바위가 아니다. 오랜 세월 풍상에 잘 연마된 바위다운 크기의 바위다.
그 능선길에서는 흐리던 날씨는 말끔히 개이고 시원한 전망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은 장마 때라도 벼 익는 맑은 햇볕을 주는 모양이다.



북바위산의 매력은 멋진 바위에도 있지만, 그보다 그 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자란 소나무를 보는 것이다.
척박한 돌 틈에 뿌리를 두고도 낙락장송으로 자라서 그 위용을 뽐내는 소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역경을 디디고 자기를 꽃 피운 작은 영웅을 보는 감격을 경험하게 된다.

*. 북(北)바위인가, 북[鼓]바위인가
  능선이 막 내리막길을 시작하려고 하는 곳에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기이한 산의 봉우리가 시야를 막아선다.
산은 산인데 대패로 한쪽 면을 싹둑 잘라낸 듯한 산이었다.
조물주가 바위에다 무엇을 새기려고 깎아놓은 것 같은 저 바위는 어찌 보면 사람의 얼굴 같고, 어찌 보면 누런 색깔의 어떤 물건의 형상 같은데 둥근 얼굴 같은 그 위에 소나무가 머리 같이 무성하다. 북바위였다.
여기서의 북은 北(북)이 아니라 북[鼓, drum]이다. 그러니까 북[鼓]처럼 생긴 바위란 말이다.
이정표를 보니 여기가 해발 480km로 물레방아휴게소에서 0.8km를 온 지점이요, 북바위산이 2.2km 더 가야하는 지점이다.
이 바위가 '북바위'인가 하던 사람들은 이 이정표를 보고서 '북바위는 더 가야 하는구나!' 하면서 이 북바위를 무심히 지나치게 된다.
'2.2km→북바위'라는 이정표 때문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이 북바위와 정상 북바위를 해석하여 보았다.
모양이 둥근 북 같고 그 색깔이 가죽 같다 해서 해발 480m의 이 바위를 북[鼓, drum]바위라 하는 것이요, 여기서 북쪽으로 2.2km 더 가서 있는 해발 772.1m의 산이니까 북[鼓,]바위 북쪽에 있는 북(北)바위산라고 하였다고.
  북과 장구를 혼동하는 이가 있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북과 장구의 구별을 말하여 둔다.
북은 둥근 나무나 쇠붙이 통의 양쪽 마구리에 가죽을 팽팽하게 메워 비교적 큰 채로 두드려 울게 하는 악기이고, 장구는 오동나무로 허리를 잘록하게 만든 악기로 오른 쪽은 말가죽을 대고, 왼쪽은 쇠가죽을 대어서 왼쪽은 손으로 오른쪽은 작은 채로 앉아서나 메고 다니면서 치는 악기다.
기회에 제천시 관계당국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정표에 해발 높이만 써놓을 것이 아니라 '북[鼓]바위란' 6자를 써 놓아서 모르고 지나치게 하지 말게 하여야 할 것이다. 정상인 772.1m의 북바위도 있고, 여기에도 '북[鼓]바위'가 있으니 이 멋진 자연 유산을 누구나 지나치게 되니 말이다. 

*. 북바위 정상에서
  첫 번째 이정표에 이어, 첫 번째 쇠층계로 산을 오르고 있다.
이 튼튼한 쇠층계는 쇠난간에 나무로 디딤 목을 하고 손잡이는 둥근 통나무로 하여서 잡고 오르는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한 발 두 발 오르면서 헤아려 보니 94개의 층계다.
'이 층계만큼 내가 산다면 앞으로 23년이 남았는데, 나는 지금부터 몇 살까지나 살다가 갈 것인가. 이삼년 내에 등산은 마감하여야 할 것 같은데-' 하는 우울한 생각에 이르니 오늘 하루가 갑자기 소중하게 생각된다.

그 다음 길에서 만난 봉분도 없는 무덤을 보고 한 생각이었다.
 등산을 하다 보면 천신만고 끝에 오른 능선이 반갑고, 그 능선에서 멀리나마 보게 되는 그 산의 정상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드문드문이기는 하지만 참나리가 화사한 잎을 위로 말고 땅을 향하여 머리를 숙여 피어있었다.
이 북바위산은 험하지는 않았지만 로프를 타고 올라야 할 곳도 있고, 좌측을 보면 시원한 월악산 능선이 중천을 가르고 있기도 하고, 꼬불꼬불 돌아가는 도로와 산길도 굽어보며 갈 수 있는 전망이 빼어난 것이 특히 좋았다.
정상 못 미쳐 있는 마지막 쇠층계는 위로 오르다가 좌로 꺾여 가더니 다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는 것이어서 혼자이면서도 심심한 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장마 중이라서 날씨는 무더운데다가 바람 한 줌 없어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땀수건뿐이로구나!' 할 지경으로.

 먼 산이 다가와
저 산이 그 산 되고
그 산이 요 산 되는
한여름 능선 길
시장한
까마귀 소리 보니 
정상이 가깝구나


  한국의 깊은 산에 가면 큰 소나무에 V 자형으로 깊게 패인 상처가 있어 그동안 이상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게 하여주는 표지가 있다.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군수물자인 항공기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상처에 의해 생장이 어려워진 소나무 중에는 이 나무처럼 꿋꿋하게 자란 것도 있지만 솔잎흑파리 등의 병충해에 약하여 쉽게 죽기도 하였답니다.
  이 글을 보니 옛날 어린 시절의 생각이 난다. 일제 시절, 탄환을 만드는데 구리가 필요하다고 절의 종은 물론 집집마다 구리로 만든 놋대야, 놋그릇, 놋숟갈을 거두어 가고 대신 사기 그릇를 주던 일이.



정상에서는 우리 일행들이 막 점심 식사를 막 끝내고 일어서고 있었다.
  "점심 식사는 하였습니까?"
  "예, 이것이 나의 행동식입니다."
하고 가방의 누룽지를 한 줌 주며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도 뒤 따라 좇을 수 없을 만큼 느리고 힘들어서 산악회와 함께 한 등산은 이렇게 항상 점심을 굶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정상은 북바위산이란 그 이름으로 생각하던 것만큼의 돌이 많은 산은 아니었지만 널찍한 것이 탁 트여서 전망이 좋았다. 그런데 오는 도중 층계는 그렇게 우람하고 좋더니만 오석을 깎아 세워 놓은 정상석은 왜 그렇게 초라한지. 조그만 아이의 묘소에 서 있는 비석 같았다.
  일행은 왔던 길로 도로 내려갈 모양이다. 올라오기 전 물레방아휴게소 주인의 말이 직진하거나 골뫼로 하산하면 개울이 불어 건너기 어렵다는 말 때문이었다.
'부득이 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렇게 시간도 많은데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산행이 어찌 있을 수가 있겠는가. 계곡이 지리산 계곡 같이 크지 않은데 그게 무슨 걱정거리겠는가.'하고 고집하는 나의 말대로 우리 12명은 직진은 포기하되 골뫼로의 하산길을 택하였다. 
그런데 직진하면서 우측으로 하산길을 찾아보아도 통행금지의 팻말뿐 지도에 있는 하산길이 없다.
우리는 대충 길로 보이는 곳을 따라 계곡을 향하였다.
길은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낙엽이 수북한 것이 끊어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다시 끊어지는 길이었다.
더럭 겁이 난다. 이러다가 한 사람에게라도 경미한 부상을 당하면 그 원망을 어떻게 듣나 해서였다.
오랫동안 다니지 않은 길이라서 나뭇가지가 길을 막고 있었고 이정표로 삼을 리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중 도중 꺾인 나뭇가지가 사람의 지나간 흔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았어도 연이어 계속되는 나무가 빗겨 있는 오솔길은 오랜 산행의 경험이 그리 어렵지 않고도 찾게 하였다.
되돌아가자는 분들도 너무 많이 내려와서 그 불평이 멈출 즈음 멀지 않은 곳에 도로가 보이고 계류소리가 들리더니 절집이 보인다. 나보다 앞선 부부가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먹고 있었다.
물레방아휴게소 주민의 말처럼 건너기 위험하다는 냇가는 폭이 1m가 넘지 않은 개울일 뿐이었다. 길을 가다가 이런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여행은 낭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물을 때는 사람을 가려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절집에서부터 우리들의 들머리 물레방아휴게소까지는 동산계곡을 끼고 가는 1시간이 조금 못 미치는 차가 다닐 수 있는 한길이었다. 동산계곡은 그 유명한 제천의 동산(東山, 896.2m)이 있는 곳이다.
그 길을 내려와서 있는 외딴 민가 상가의 할머니에게 그 절집에 대하여 물어 보았더니 한 스님이 있다가 신도가 모이지 않아서 폐찰한 후로는 어떤 민간인이 사서 별장으로 쓴다고 한다.
그 길의 끝인 송계교가 있는 곳이 '수안보 덕주골' 가는 중간의 '골뫼' 버스 정류소였는데 거기 큰길가에 '보물 94호 사자비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200m'란 표지판이 있다. 
사전에 알고 와야 할 것을 소홀히 할 때 중요한 것을 지나치게 된다는 우려가 현실화 된 것이다. 
되돌가 가서 보면 될 수도 있지만 단체 산행에서 그것도 쉬윈 일이 아니었다.
                                                                                                      - 이 탑은 고려 현종13년에 건립한 보물 94호의 고려 9층 석탑으로 지금은 4층만 남아 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네 귀에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고 그 중심에 '비로자나불좌상'을 안치한 것이다.

  등산을 오면 항상 뒤에 남는 아쉬움이 있다.
이 길은 덕주골 가는 길이라서 더 멀리는 아니라도 이 근처에 있는 송계계곡의 자연대, 월광폭포, 수경대, 학소대, 망폭대, 팔랑소도 보고 싶고, 미륵사지에 가서 야외 석조미술전시장 같은 돌거북, 돌여의주, 석등 석탑 등도 보고 싶으니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혼자서라도 차를 몰고 와서 두루 두루 살피고도 싶지만 언제나 마음뿐이던데 그런 여유가 생길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