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산행기(9)


 

 ‘10년간 100군데 산 찾아다니기’


 

 이번에는 충북이나 경기도 산행이 원래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진달래 숲을 품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연분홍빛 진달래가 아련한 추억처럼 사라지기전 눈동자에 담기로 했다.


 

1. 겨울 털신을 신고 산행하다.


 

 실직과 취직의 곡예를 밥 먹듯 한 나는 금월 초 자의반 타의반 직장을 그만 뒀다. 그리고 직장 때보다 더 바쁜 일상을 보냈다. 월말로 다가오면서 이 달도 며칠 안 남았다는 초조감과 진달래철도 다 지나가고 있다는 조급함 때문에 사방으로 눈을 돌리다 보니 경북 달성군에 있는 비슬산이 눈에 띠었다. 전날 비슬산 산행기나 기사를 출력하고 산행에 필요한 간단한 옷을 챙겨 쇼핑백에 넣었다. 

 이어 안식구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전처럼 출근 차림으로 정장을 입고 마음속으로 출근을 기다렸지만 , 아직,  안식구는 실직을 모르고 있다. 안식구가 출근하고 나면 쇼핑백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갈 참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화장이 더딘데다가 오늘은 곧바로 나갈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매일 7사 30분이면 나가던 사람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를 수도 없다.

 쇼핑백이고 뭐고 내버려 두고 일단 나가자.

 쇼핑백을 들고나가면 투명해서 속이 보여 물어볼 게 뻔했다. 순간 다음 기회로 미룰까 생각했지만 실직자의 스케줄이 꽉 차있는데다가 다음 달로 넘기면 복잡해진다.

 가방을 들고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체 여동생이 준 한 장 남은 KTX 할인권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될 거야.

 등산에 필요한 등산화마저 없으니 답답하긴 했다. 평소처럼 전철을 탔다. 1호선은 출근길이라 복잡했다. 8시 40분경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 때 행선지를 챙기려고 출력한 산행기를  찾으니 빼놓고 그냥 왔다. 쇼핑백은 안식구 눈에 띄지 않게 옷장에 넣었는데 거기에 함께 들어간 모양이다.

 결국, 비슬산을 가려면 대구로 간다는 것 외에는 아는 정보가 없다.

 일단 9시 10분에 동대구로 출발하는 KTX를 이용키로 하고 표를 끊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있기에 역무원에게 물어 컴퓨터 검색 안내대를 물었다. 2층에 있다. 비슬산을 검색했다.

 일반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유가사 - 비슬산 정상 - 진달래 군락지 - 휴양림을 메모했다. 그리고, 진달래 축제와 관련된 달성군청의 전화번호 053-668-2171, 그리고, 휴양림 관리 사무소 전화번호 053-614-5482를 메모했다. 이어,  동생에게서 들은 ‘블로그’ 의 개념에 익숙해지고자 빌린 ‘블로그 마켓팅’ 책자를 들고 탑승햇다. 승차권은 50% 할인받아 19,300원에 구입했고, 동대구역에는 11시에 도착했다. 탑승한 시간 동안 블로그를 생각하면서 '내가 쓴 그 많은 일기도 다른 사람이 쉽게 볼 수 있고, 내가 만든 업무자료들도 많이 볼 수 있다면, 결국, 미래를 알고 준비한 결과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동안은 내 자료라는 것이 대책 없는 천덕꾸러기 자료들이었는데.

 내리자마자 바로 귀경 무궁화 열차를 예약했다. 서울로 마지막 1호선 열차를 물어 성북행 막차에 맞춰 에매했다. 오후 7시 28분 열차다.   

 그리고 물어물어 밖으로 나갔고 아래로 내려가 지하철 2호선(1호선인지 분명치 않다) 대곡가는 승차권을 구입했다. 요금은 1,100원이고 승무원 없이 발권기에서 뽑는데 티켓이 아니고 둥근 표찰이다. 대략 18개 내외의 역을 거쳤고 종점이다. 전철안에서 메모한 전화번호로 전화해서 점검했다. 그런데, 금일 하루에 다녀가기는 힘들 것처럼 말했다.   

 이어 12시에 대곡역에 도착했다.  

 유가사 가는 버스를 물었다. 군청직원 말대로 600번이 있는데 가는 버스가 없다. 몇 명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초조했다. 잃어버린 산행기에서 본 현풍이 생각나 물어보니 현풍에 가면 한 시간마다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단 현풍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누구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만은 다들 잘 알고 있다.  축제 주최측은 축제기간만이라도 교통 편의를 챙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축제가 있나 싶다.

  600번을 타고가면서 운전기사에게 현풍가면 유가사 가는 버스가 바로 있는지 시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웃으면서 시간은 모르는데 가자마자 있다면 로또에 당첨된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애태웠다. 대곡역 정거장 안내판 뒤에 하나만 달랑 쓰여 있던 달성 5가 유가사 가는 버스일거라는 느낌은 들었다. 

 현풍에는 1시 7분에 도착했다.

 내려서 어리버리 보내다가 걸어 다니는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다. 유가사 가는 버스가 있느냐고. 그러자 걸어 다니는 매표소 직원이 나를 데리고 더 걷더니 벽에 붙인 유가사행 버스 시간표를 보여줬다. 달성 5호 시간표였고 1시 20분이 크게 보였다. 그러면서

 “아저씨, 10분만 늦었어도 3시 20분(정확치 않은데 비슷하다)차를 탓어야 돼요.”

하면서 초행길로는 기막히게 재수 좋다는 표정이다. 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생각했다. 포기하고 집에 있었으면 찜찜했을 텐데, 일단 나서니 되는 일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가 드문 의문은 탑승하고 나자마자 시골 아낙네 말을 들으니 풀렸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600번 버스 두 대가 유가사까지 가는데 평일에는 손님이 적어 다니지 않는다는 거다. 

 일단 1시 20분에 출발한 달성 5호는 차창가로 유채밭, 감자밭, 마늘밭, 그리고 정겹고 추억이 서린 보리밭, 계단식 논 등을 아기자기하고 멋있게 보여주면서 유가사로 달렸다. 봄 꿈을 보는 것 같다. 가다보니 우측 아스팔트길에 비슬산 정상을 안내한 이정표가 있다. 산행 준비가 돼 있다면 여기서 내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1시 50분에 도착했다.

 그리고 산행 안내도를 봤다. 코스에 따라 최단 1시간 반에서 최장 5시간 넘기까지 음식점 메뉴처럼 널려 있다.

매표소 직원은 통상 3시간 반 걸린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진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이런 곳의 시간은 더 빠르다. 넥타이와 와이셔츠, 윗 양복은 그렇다 치고 구두를 신고 산에 갈 수는 없다. 헌 운동화라도 사서 신을 겸 식사도 할 겸 음식점을 찾았다. 일단 밑으로 내려갔다가 오름길로 가니 바로 위쪽에 만물식당이다. 아무도 없다. 어리바리하게 서 있으니 청력이 약한 젊은 아주머니가 올라오더니 용건을 물었다. 식사 좀 하겠다고 하니,

“원래 밥은 안 파는데”

 하더니, 들어와서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둘러댔다. 출장 왔다가 축제가 있다고 해서 한번 오기도 힘들고 해서 오다보니 산행 준비를 못했다면서 헌 운동화라도 있으면 싸게 팔라고 말했다. 그러자, 팔수는 없고 마침 하나가 있었는데 며칠 전 버렸다는 거다. 그렇다고 시킨 밥을 안 먹고 갈 수도 없고, 이 식당 저 식당 다니며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일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오면서 이것저것 살폈다. 마침 먼지가 앉은 겨울 털신 하나가 보였다. 반갑게 물었다.

“저거 신어도 되죠?”

“그걸 신으려구요. 그걸 신고 갈 수 있을까... 몇 문 신는데요?”

 신발 문수는 오래 전 잊었다. 245mm만 알고 있다. 말이 안 통했다. 나는 문수를 모르고, 그쪽은 mm를 모른다. 그런 건 가릴 게 아니다.

 신어보니 물론 헐렁헐렁할 정도로 컸다. 나는 발이 좀 작은 편이다.

“됐어요. 이거면 돼요. 여기 가방하고 양복 윗도리 좀 두고 갈게요.”

 넥타이는 끌러내 가방에 접어 넣었다.

“ 귀중 한 것 없지요?”

“ 지갑은 가지고 갑니다.”

결국, 이래서 겨울 털신을 신고 산행을 하게 되었다. 


 

2. 양반들의 산행 체험하다.


 

 말이 그렇지 털신을 신고 유가사 가는 오름 길을 걷는건 장난이 아니다. 털신 속에 발을 넣고 가니 몸체는 신발을 따라 가야했고 신발은 알아서 가지를 못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다리가 벌써 뻣뻣했다. 유가사에서 마령재 까지는 2.6km다. 1시간 10분 코스다. 대략 30분 동안 많이 힘들었다. 아마, 적응시간인가 보다. 제대로 맞는 등산화나 구두를 신고 걸을 때 편한 것이지, 얇은 털신을 끌고 가거나 모시고 가면서 돌길을 걷다보면 불편하고 발이 아팠다. 족통도 치통, 두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웃기도 했다.

 바지는 양복, 윗옷은 와이셔츠, 신발은 겨울 털신.  

 흉물스럽게 패여 나간 계곡 좌우의 등산로 주변은 산 벚나무 꽃이 싱싱했다. 서울의 진달래나 벚꽃은 흐물흐물 시들어 가는데 이곳 벚나무 꽃이나 진달래는 빴빴한 게 산뜻했다. 평일 날 등산로에 웬 짧은 머리가 많은가 했더니 장병들도 등산하는지,

“과장님!”, 

“대령님!”, 

“대령님!”

하면서 뛰어다녔다.


 

 30여분 지나자 많이 익숙해졌다. 이제는 겨울 털신이 사람을 따라왔다. 적응 한다는 것, 그리고,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크고작은 고통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발 바닥이 얇아 돌부리라도 밟으면, 고무신 신은 것처럼 아팠다. 그럴 때마다 짚신과 고무신이 생각났다. 신발은 발끝에 걸리고, 신발 바닥은 돌멩이에 받히고. 

 짚신, 고무신 생각 끝에 양반들 생각이 얹혀졌다.

 옛 양반들도 운동을 했을까.

 양반들은 무슨 신을 신었을까.

 서민들이야 일을 많이 하거나 걸으니까 운동도 했겠지만, 가마타고 다니는 양반들은 어떻게 운동 했을까. 개념이 없는데다가  양반이 할 짓이 아니라고 산 근처에 안 갔을 수도 있다. 적극적인 개념이 있어 운동을 했어도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은 채 돌산을 오르면 발병이 났을 거다. 나는 그 체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호기심을 참지 못한 군인하나가 물었다.  산 사람들끼리  인사하듯    씩씩하게 “안녕하세요!” 하더니,

“털신을 신고 운동하시네요?” 

“ 옛날 양반들 입장에서 산행 체험합니다.”


 

3. 진달래 군락지


 

 산을 오르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오르면 마령재까지 가게 된다. 거기까지 가도 진달래는 많지 않다. 그  빈자리에는 시원한 바람과 산벚꽃이 대신했다. 마령재에서 좌측으로 20분가면 비슬산 정상이 있고, 우측으로 2.5Km를 40분 정도 군락지를 지나가면 대건사지가 있다. 마령재에서 좌측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진달래 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경의 신비로움은 ‘이것이 진달래다’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그때 시간은 2시 20분.

 진달래는 친숙한 꽃이다. 마구 따서 잎에 넣지만 양이 차지 않았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때로는 문둥이가 창꽃(충청도에서는 창꽃이라 불럿다) 사이에 숨어 아이들 간을 쏙 빼먹는다는 말에 진달래 곁에 가는 것을 무서워하기도 했다. 찬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더욱 진달래는 아련했다.


 

빨갛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고

거기다 늘씬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빨갛게 물들다가 희나리가 되었고

키 좀 크려다가 눌려 주저 않았고

멋 좀 내려다가 회초리로 맞았는지

오솔길 가로수로도 쓸 수가 없다.

열매가 시원찮으면  

달기나 하던지

그저 달칙지근한 그 밋밋함 

그럼에도 가련하고 수더분하고 초연해서 좋다.


 

 그 아련한 꽃들이, 두견새를 연상시키는 가련한 꽃들이 하늘을 향해 일제히 슬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상의 화원을 만들었다. 비슬산 진달래군락지를 천상의 화원이라 부르는 그 이유를 30만평이라는 진달래가 몸으로 말했다. 진달래 한포기에 열 남짓 줄기가 꽃을 피웠다. 스무 포기 이상이 넘으면 가련함도, 수더분함도, 초연함도 화려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움푹 패인 군락지에는 셀 수 없는 진달래 포기가 널리 널려 있다. 천상에 사는 선녀가 물주고 가꾼 꽃밭이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요란하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산행을 한다는 것 - 그것은 계산이기도 했다. 산 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힘들게 땀 흘리고 올라온 사람들에게만 그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치밀하고 정교한 계산을 봤다. 

 시간이 없어 비슬산 정산과 휴양림은 포기했다. 군락지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대견사지에서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면서 발길을 돌렸다.


 

멀리서 볼수록 빨갛군요.

무리져 서있는 슬픈 자태를 보면

뒤돌아 자꾸 보면

한껏 토해내는 불결 보는 것 같고

꽃 이불 닮아서 화려하기도 하네요.

 

 양복과 구두 사이를 오갔던 갈등도, 양반 산행 체험도,  진달래 무리가 수놓은 환상적 아름다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4. 월촌역에서 내린 여인


 

 달성5호가 5시 50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야 했다. 산길을 내려갈 때도 올라갈 때만큼이나 신경 쓰면서 걸었다. 체중이 쏠리기 때문에 속도를 조절하고, 평평한 곳이나 맨땅이 아닌 돌맹이를 보면 신경을 써야 했다. 결국은, 옮기는 다리 전체에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속도가 빨랐고 누가 군락지를 궁금해 하면 자신 있게

“끝내줘요, 여기 잘 오셨어요!”

그러면서 지나갔다.   

 5시 30분에 유가사 앞으로 왔다. 그리고, 맡겨둔 가방과 옷을 찾으러 만물식당(053-614-2456)으로 갔다. 점심때의 젊은 아주머니가 보였다.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차 때문에 가보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튀어 나왔다.

 매표소 직원이 한 마디 했다.

“어? 제 시간에 오셨네요.”


 

 달성 5호는 좀 기다리다가 5시 50분 정각에 출발했다.

그런데, 비슬산 진달래 군락지에 취해서 있고 잊던 걱정거리가 다시 일깨워졌다. 예매할 때만 해도 서울 대구간 빼고, 4시간 산행에 4시간 이동이면 될 거로 짐작하고 여유 있게 한 거다. 그런데, 전철역 대곡에 7시까지 갈는지도 모르고, 그 시간에 간다면 놓칠 수도 있다. 비슬산에서 철도역으로 그걸 알아봤을 때는 아예 포기했다. 열차가 떠난 뒤 철도역 오는 시간에 따라 환불금이 차등 지급되고 서울 목적지 도착 시간까지 못 오면 환불금이 없다는 말에 신경 쓰는 것도 싫고 해서 2만원 버린 셈 치니 편했다. 그런데 이제 확률이 반반 되니 신경을 안 쓸 수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오는데 차가 서더니, 내 뒷자리에 아름다운 여인이 앉았다. 한참을 달리다가 뒤돌아보고 물었다.

“이차 전철역까지 가지요?”

“예, 첫 번째 역이요?”

“예, 첫 번째가 대곡역인가요?”

“예”

 그리고, 한참 가다가 다시 물었다.

“오늘 준비 없이 비슬산에 갔다가 왔는데, 저녁 7시 2십 몇 분에 예매를 했거든요. 동대구역까지 갈 수 있을까요?”

“일단 전철역까지는 7시 되기 전에 갈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15분 정도 걸리거든요. 잘 하면 탈 수 있어요.”

 말할 때 보조개가 있는 것 같고, 잇몸이나 이를 보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 쓰는 것 같다. 친근함과 푸근함이 돋보였다.

 정말, 그 여자 말대로 대곡역에  6시 55분에 내렸다.

 그런데, 그 여인도 함께 내렸다. 

 이어, 나를 뒤돌아보더니 빨리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하철 입구를 향해 함께 뛰었다. 문득, 천 원짜리나 동전이 없겠구나 생각했다. 만물식당에서 식대 5천원을 낼 때 만 원 권을 주고 5천원을 신권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동전은 아예 없다. 일단 내려갔다. 

  승차권 발매기에 5천원을 넣고 승차권을 뽑으려고 했더니, 들어가지 않고 계속 밖으로 흘러나왔다. 당황했다. 그러자 옆까지 다가 온 그 여인이 동전을 대신 넣더니 뽑아줬다. 나는 고맙고 미안해하며 전철을 탔다. 그리고,  혹시 빌린 돈을 줄 수 있나 해서 계속 주머니를 뒤지고 뒤졌다. 없어서 승객들에게 바꿔줄 수 있나, 물을까 생각했는데 용기가 없다. 그 허둥대는 모습을 보더니 그녀가 말했다.

“잔돈 없으면 두세요. 괜찮아요.”

“그래두요.”  

“급하시면 동대구까지 가지 말고 대구역에서 내려요. 동대구역은 세 정거장 더 가거든요.”

“그래요?”

“아, KTX는 대구역에서 안서겠네요.”

“아니에요. 무궁화호에요.” 

그러자, '무궁화호 탈 사람 같지는 않은 데' 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나는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떠들고 대꾸했다. 그런데, 돈 빌린 것이 영 걸렸다.

 남 보이지 않게 5천원을 그 여자 옆에 놓으면서 속삭였다.

“초면에 이러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이거라도”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동전이 있으니까 도운 거예요.”

 그러면서 간단한 짐을 챙겨 내리는 것이다. 그때 전광판을 보니 월촌역이다.

 왜, 그 말을 못했을까.

 주소나 전화번호나 이름을 모르면 안 알려 줄 테고, ‘한국의 산하 사이트 산행기에 고맙다고 올릴게요.’ 라고 말하는 건데.

 그런데, 지금은 이미 내리고 없다.

 나를 돕다가 돈까지 뺏겼으니(?), 주변을 돕는 아름다운 마음까지 뺏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생면부지의 미인에게 도움을 받아 고마웠으나, 기쁜 한편으로는 더욱 찜찜했다.


 

 대책이나 깊은 생각 없이, 다만, '그 여자는 틀림없다' 는 이유로 대구에서 내렸다. 한편으로는 늦는다면 좀더 빨리 반납해서 위약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지금 7시28분인데 동대구에서 탈 열차를 놓쳐서 환불받으려고요. 낮에 전화했더니, 늦으면 가까운 역으로 빨리 가라고 하던데요.”

“20%제하고 환불돼요. 그런데, 카드 사용분은 돈을 내주지 않고 카드 사용을 취소만 해요.”(이 말도 낯설어 그렇게 하면 내 일방적인 피해라고만 생각했다. 돈도 안준다니 다음 차가 궁금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열차 있어요?”

“KTX는 동대구에나 있어요. 여기는 없어요.”

“무궁화호는요?”

“그 표로 지금 나가서 타세요. 7시 33분 열차에요”

(어? 무궁화 열차가 또 있네. 동대구역 전 정거장이니 태워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예매표를 가지고 나가서 탔다. 그런데도 갸우뚱했다. 계속 대구역을 출발해서 동대구역으로 가는 줄 알고 있었던 거다. 열차를 타고 한참 가다가 차내를 다니는 역무원에게 물었다.

“동대구역 출발 예매표로 대구역에서 무궁화호를 탔는데 맞는가요?”

“예. 맞는 거예요. 동대구역에서는 7시28분 열차지만 그 열차가 대구역에 와서 7시 33분에 출발하니 맞는 거예요. 제대로 타신 거예요.”

 아! 월촌역에서 내린 여인은 상당히 치밀하고 정확한 여인이었구나. 대곡에서도  그 여자와 뛰어가서 표를 끊어 타고나자 바로 출발했다. 그 여인은 동대구역에서 출발해 대구역까지 오는 시간까지 감안해서 내게 대구역에서 내려 타라고 권했던 거다.

 아침, 그 불안하고 불확실한 순간에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고 출발한 산행 결과는 시도한 대로 끝이 나서 흐뭇했다. 엉성해도 밀어붙인 묘미를 느꼈다. 겨울 털신을 빌려준 식당 여주인, 동전을 빌려준 월촌역에서 내린 여인, 천상의 화원 등 자동차 부속 같은 역할을 해준 그분들이 무척 고맙다. 그 인연 아쉬울 정도로 깊이 새겼다.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블로그 마켓팅’을 읽었다. 그렇게 떠난 열차는 11시 22분경 서울역 도착 예정인데 여유 있게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그라고 막차 성북행 열차를 탔다.

 집에 와서는 대구에 초상이 나서 급히 다녀왔다고 말했다.(07.04.26.cnilter@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