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산행기


 

               *산행일자:2006. 9. 10일

               *소재지  :전남화순/담양, 광주시

               *산높이  :무등산1,187미터/안양산853터

               *산행코스:무동리-광일목장뒤 삼거리-규봉암-서석대-안양산-둔병재

               *산행시간:11시10분-16시45분(5시간35분)


 

  바늘로 기은 자국이 전혀 없어 보이는 깔끔한 무등산도 스물여섯 해 전 봄에 아랫마을 빛고을에서 빛을 앗아간 이 고을의 수난사를 지켜보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문명의 20세기가 이 땅에서 겪은 마지막 반문명적인 권력의 폭거로 이 고을의 어머니들 가슴속이 새 까맣게 타들어가 숯덩이로 변했어도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무등산이 그동안 심하게 자책해온 것은 빛고을의 진산으로서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속으로는 분노하면서 겉으로 아무 것도 못 보았다는 듯이 빛고을의 고통을 외면해왔기에 아직도 이 고을을 지날 때면 마음 한 구석에 부채 의식이 자리 잡고 있어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빛고을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그들의 한을 예술로 승화시켜주는 무등산을 찾았습니다.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해서 서석산으로 불린 이 산을 무등산으로 다시 부른다는 옛 이야기가 하나도 그르지 않아 이 산이  전북의 장수의 영취산과 전남 담양의 백운산을 잇는 길고 긴 정맥의  한 가운데에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룬데다 그 넓은 오지랖으로 광주와 화순 그리고 담양을 모두 어우르고 있어 이 지역의 모산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꼬막재에서 장불재까지 거의 같은 높이로 등고선을 그어가며 산허리를 에돌아가기에 등급뿐만 아니라 등고선도 필요 없는 이름 그대로의 무등산이 빛고을의 한을 비엔날레의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없음의 비움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전 늦게 11시10분 무동리에서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한 무리의 산악회 식구들은 유둔재에서 하차하고 나머지 명산팀은 897번 도로를 따라 20분여 남하하다가 무동리에서 오른 쪽으로 난 시멘트 길로 조금 더 들어가서 하차했습니다. 논가를 지나 10분 후 길을 가로 막은 철문을 비껴들어가 비포장임도로 올라서자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야생화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왔습니다. 마침 움직이는 사전이신 야생화 박사님과 동행을 하게 되어 그동안 궁금했던 몇 종의 들꽃들을 물어 확인했는데, 떼 지어 피어 있는 연자주색의 물봉선, 풀 숲길에 발목을 잡는 넝쿨 식물 며느리밑씻개, 일명 들국화로도 불리는 쑥부쟁이, 며느리밑씻개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청가시 등이 이번 산행 중 배워서 이름을 확실히 익힌 식물들입니다. 두 번째 임도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택해 오르다 제 길이 아닌 것을 확인한 산행대장께서 지형을 관찰한 후 원위치를 하지 않고 묘지에서 바로 치고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광일목장 위 능선 길로 통하는 지름길을 개척했는데 마침 풀 숲길은 끝났기에 치고 올라가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12시25분 광일목장을 막 지나 그늘 진 길가에서 처음으로 쉬었습니다.

묘지에서 20분 가까이 치고 올라가 만난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조금 더 걸어  호남정맥의 마루금에  올라서자 바로 아래 우공들과 같이 놀던 한 떼의 흰 새 들이 놀라 후다닥 날라 가 버렸고 눈만 껌벅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우공들은 개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여유로움을 한껏 보여주었습니다. 꼬막재 방향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 무등산 골짜기의 가을을 실어 날랐습니다. 광활한 목장 한 가운데로 난 정맥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 일행들과 함께 점심을 들면서 15분을 쉬었습니다.


 

  12시40분 장불재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7-8분을 오르자 꼬막재-장불재로 갈리는 광일목장 뒤 삼거리에 다다라 3.9키로 떨어진 왼쪽의 장불재로 향했습니다. 재작년 1월에 이 길을 한번 걸어 장불재를 거쳐 서석대에 오른 터라 길이 눈에 많이 익었습니다. 큰비가 오면 수로로 변할 돌길과 발바닥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흙길을 차례로 걸으면서 이 길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와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가며 걷기에 딱 알맞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도가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 정상을 옆 지르는 꼬막재-장불재 우회길이 장장 7키로나 이어진다는 것이 꿈같아서였습니다. 꿈같은 우회 길을 큰 나무들이 가려주어 너덜지대를 지날 때 말고는 남중한 태양빛을 바로 쪼일 일이 없어 파트너만 있다면 꿈의 대화를 이어가는 일이 어렵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13시26분 규봉암을 들렀습니다.

얼핏 보면 육산으로 보이는 무등산에  7천만 년 전에 용암이 굳어서 만들어진 육각형의 세로기둥 바위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는데 그중 여기 규봉과 입석대 그리고 서석대가 단연 최고라고 합니다. 바닷가나 강가의 화산암 절벽 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주상절리(Culumnar Joint)의 거암들을 여기 산위에서 접하게 되어 무등산을 오르는 기쁨이 배가되었습니다. 동쪽 건너편으로 아담한 저수지 동복호가 자리 잡고 있고 바위들이 곧추서있는 규봉을 뒤로한  규봉암의 샘터에서 목을 축인 후 장불재로 향했습니다. 규봉암에 다다르기까지 잠깐 선을 보인 너덜강이 장불재에 이르는 동안 몇 곳에서 더 보았는데  그 중 인도의 지봉스님이 그의 법력으로 돌들을 괴어 놓았다는 지봉너덜이 으뜸이었습니다. 바위 돌들이 흘러내리는 듯한 거대한 암괴류(Block Stream)인 지봉너덜을 건너고 석불암을 지나 통신탑이 서있는 장불재에 도착했습니다.


 

  14시41분 서석대에 올랐습니다.

장불재에서 안양산으로 바로 가지 않은 것은 무등산의 또 다른 이름인 서석산을 서석대에서 따왔을 만큼 서석대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빛을 빼앗긴 빛고을에 다시 빛을 모아주어 비엔날레를 열도록 보살펴준 무등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에 감사인사를 지근거리에서 고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서석대의 아름다움을 찬하는 것은 오래전에 아랫마을에서 두해를 사셨던 여성회원분의 몫이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일은 한 남성회원분이 맡아주셨습니다. 천황봉에 맞닿은 하늘은 곱게 펼쳐진 새털구름으로 평화로웠고 산 밑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골바람을 맞으며 평화로운 하늘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35분 만에 장불재로 되돌아왔습니다.


 

 

   15시3분 장불재를 출발했습니다.

안양산으로 향하는 중 유둔재에서 출발해 정맥길을 걸어 온 호남정맥 종주 팀의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백두대간을 같이 종주했으면서도 워낙 걸음이 빠른 분들이라 따라잡지를 못해 함께 산행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무동리에서 지름길로 올라 능선길에 먼저 올랐기에 이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맥 길을 단독으로 종주하겠다는 뜻을 세운 한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산 오름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서 정맥을 종주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산행구간을 나누는 일입니다. 대중교통에 전적으로 의존하기에 버스가 지나는 차도에서 시작하여 차도에서 끝내도록 구간을 자르는데 발걸음이 재지 못한 제 경우 다른 분들은 7-8시간이면 족한 거리를 12시간 가까이 걸어야 마칠 수 있으므로 전날 내려가 가까운 도시에서 머문 후 새벽같이 서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안전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기에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합니다. 사전 준비시간이 제게는 희열의 시간이어서 가슴이 설렐 때가 많습니다. 홀로 산길을 걷다보면 외로움을 견뎌내기 힘들다 하는데 경험이 쌓이면 저절로 산에 사는 산식구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게 되어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이야기 끝에 그분께 비교적 길이 잘 나있는 금북정맥을 한번 단독종주해볼 것을 권해드렸습니다. 


 

  16시8분 해발 853미터의 안양산에 다다랐습니다.

장불재를 출발하여 얼마고 흙길을 걷다가 억새풀밭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길섶의 억새풀과 철쭉들을 헤쳐 가며 반시간 가까이 걸어 해발936미터의 암봉에 올라서자 정북쪽으로 천황봉이 보였고 동쪽으로 조금 비껴서 지봉너덜과 규봉암이 한눈에 잡혔습니다. 암릉 길에서 표지목이 서있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1.3키로 남은 안양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방금 지나온 암봉과는 달리 안양산 산마루는 넓은 공터에 사방으로 억새풀 초원이 펼쳐져 있어 가슴이 탁 트였습니다. 억새풀이 길을 덮고 있어 바닥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인 풀 숲길을 지나서 나무들이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서자 둔병재로 하산하는 길이 경사가 하도 급해 로프를 잡고 내려서야 했습니다.


 

  16시45분 둔병재 주차장에 도착해 하루산행을 마쳤습니다.

메타세콰이어와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가에서 반가운 분들과 함께한 식사시간은 더할 수 없이 즐거웠습니다. 퇴계 이황선생께서 인과 지를 이루고자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단순히 산과 물을 보고서는 인과 지의 낙을 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오래 산을 다니다 보면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산에서만은 산을 닮아 인자해지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 산을 즐겨 오르는 산악회님들 모두가 인자한 분들이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댓글로만 인사를 드린 빛고을이 고향이라는 한 분을 탄천휴게소에서 처음으로 만나 뵈었습니다. 그 분 말씀인즉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해서 무등산으로 명명되었다 하는데 혹시라도  어떤 분이 무등산의 등급을 매기자고 나선다 해도 화내거나 서운해 하지 말 것을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없음의 무 속에는 분노나 서운함도 애당초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