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학산 산행기


 

          *산행일자:2006. 7. 16일

          *소재지  :경기 파주

          *산높이  :450미터

          *산행코스:초리골입구-팔각정-은굴-395봉-대피소-비학산-대피소-

                          장군바위-근린공원절개면상단-제3하산로-승잠원-초리골입구

          *산행시간:11시35분-18시(6시간25분)


 

  뻥 뚫린 하늘에서 거침없이 쏟아 붓는 장대비도 고향산을 오르겠다는 선배분과 제 뜻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의 산하”사이트를 통해 인사를 드린 고향선배이신 청파님과 함께 하는 첫 번째 산행이라서 아침부터 가슴이 설렜지만 하도 비가 줄기차게 내려 과연 오를 수 있을 까 걱정도 됐습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10시에 의정부북부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산본 집을 나섰습니다. 의정부에서 금촌행 버스를 집어탄 후 반시간이 더 지나  법원리 초입의 초리골입구에서 내려 비학산 산행을 준비했습니다. 제 고향인 파주시의 법원리  초리골을 에워싸고 있는 해발 450미터의 나지막하고 아담한 비학산은 1968년 1.21사태 때 북에서 남파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서울로 가는 중 이 산속에서 숨었다가 땔감을 구하고자 나무하러 올라간 현지 주민에 발각되어 신고된 무장공비의 침투루트였습니다. 수년전 파주시에서 산림욕장으로 개발하여 새롭게 선보였는데 휴전선과 가까워서인지 아직은 찾는 산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 자연그대로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한적해 산행하기에 좋았습니다.

  

  아침11시31분 56번도로 상의 초리골안내석이 세워진 삼거리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전통혼례 예식장인 승잠원을 거쳐 초계탕 옆 목교위로 계곡을 건너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한손에는 스틱을, 또 한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팔각정으로 올라서기까지 15분간 산 오름이 급했습니다. 팔각정에서 북동쪽으로 난 나무계단 길로 내려서야 할 것을 짙게 깔린 안개와 퍼붓는 비로 판단을 잘못하여 남동쪽으로 난 희미한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표지리본을 확인하며 반 이상을 내려갔다가 산 밑으로 시꺼먼 흙탕물이 급하게 내닫는 계곡이 내려다보여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직감하고 팔각정으로 원위치한 시각이 12시56분이었으니  어림잡아 40분가량은 알바를 한 셈입니다.  알바 끝에 다시 찾아 오른 팔각정에서 선배분께서 준비해온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팔각정에서 북동쪽으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안부로 내려섰다가 무명봉에 오르는 길에 무장공비숙영지가 1.2키로 남았음을 안내하는 표지목을 보았습니다.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기습할 목적으로 남파된 무장공비들이 능선에서 숨어 잤을 리가 없었기에 틀림없이 산 중턱 어디인가 그들의 비트가 남아 있을 터인데 이 길을 지난겨울에 이어 두 번째 지나면서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월동용 땔감으로는 볏짚과 가까운 산에서 해대는 나무가 전부였던 1960년대여서 나무하러 산에 간 현지주민이 발견하고 제 때에 신고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10년 후에만 내려왔어도 이미 연탄이 보급된 터라  나무하러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또 지금처럼 등산인구가 많지 않아 산속에서 발각되어 신고 될 리가 거의 없었기에 말입니다.


 

   13시59분 은굴을 지났습니다.

남파간첩의 은신처로 사용되지 않도록 입구를 폐쇄한 이 굴이 지난세기 초에는 은광의 갱도였음을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전혀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은굴에서 내려서 제1하산로가 나있는 안부를 지나자 길섶의 우거진 풀들과 잡목들이 얼굴을 스쳤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395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왼쪽으로 꺾어 십 수분을 걸어 완벽하게 비를 가릴 수 있는 대피소에 다다랐습니다. 한 겨울에도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바람막이 비닐커튼을 해 놓았고 안에다 커다란 식탁과 의자를 두 세트 설치해 놓아 편히 앉아서 느긋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김밥과 절편, 그리고 과일 몇 개가 차려진 점심상의 전부였지만 고향 산에서 고향선배님과 함께한 소찬은 시내 유명음식점에 들러 먹는 성찬보다 몇 배 더 맛있었습니다. 대피소 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 넓은 임도로 내려섰다가 140미터가량 고도를 높이고자 치받이 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15시25분 길지 않은  암릉 길을 지나 평평한 봉우리의 비학산에 올라섰습니다.

수많은 표지리봉 들이 나무 가지에 걸려있지 않았다면 이렇다하게 표지될만한 것이 없어 과연 이 봉우리가 비학산 정상인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정자도 세우고 나무계단도 놓고 표지목도 곳곳에 세워놓는 등 나름대로 길을 다듬느라 애쓴 파주시청에서 이곳에 정상석이나 표지목을 세워놓았다면 금상첨화였을 터인데 화룡점정의 마지막 노력이 빠져 아쉬웠습니다. 정상에 올랐어도 운무로 시야가 차단돼 제가 다닌 초등학교 뒷산인 해발 293미터의 금병산이나 집 떠날 때 이어서 오르고자 했던 해발 496미터의 파평산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커 환풍구가 정상석을 대신한 비학산을 출발해 다시 대피소 삼거리로 돌아왔습니다.


 

  15시56분 지난겨울 저 혼자서 이 산을 찾았을 때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쳤던 장군바위를 들렀습니다. 나무로 만든 전망대를 받쳐주는 암괴가 장군바위일 듯싶은데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초리골이 한눈에 잡히는 최고의 전망처인 장군바위도 제우스신의 심통을 당해내지는 못해 그 주위가 내리는 비로 희뿌옇지만 사진전문가로서 손색이 전혀 없는 선배분의 손놀림은 연신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바빴습니다. 다시 능선 길로 들어서 편안한 길을 걷다가 왼쪽으로 확 꺾어 매바위로 향했습니다.


 

  제2하산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하산하지 않고 매바위를 보고자 직진을 했습니다.

0.4키로를 훨씬 지나서도 매바위를 보지 못해 이 바위도 무장공비은신처처럼 능선에서 한참을 비껴 서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철을 만난 버섯들의 향연이 볼만했지만 버섯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제가 그들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묘사한다는 것이 능력 밖의 일이고 주제 넘는 일이기에 선배분의 잘 찍은 사진으로 가름하기로 했습니다.


 

  빗줄기는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그치지 않고 내렸습니다.

이 비가 며칠은 더 내린다 하니 수해가 막심할 것 같아 걱정되었습니다. 산에 미쳐 이 비에 산 오르기를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저희 모두 시골서 컸기에 농지가 유실되지 않을까 또 다 자란 농작물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습니다. 옛날처럼 민둥산이 아니어서 해마다 물난리를 겪는 것은 치산보다는 치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0년 전 박대통령의 주도로 산림녹화사업을 벌린 것이 결실을 맺어 온 산이 푸르르고 그래서 우리의 산들이 웬만한 큰비도 모두 담아낼 거대한 저수지로서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기에 치산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무분별한 난개발로 물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야기되는 치수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장마철 집중호우나 태풍의 피해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치산치수가 한 나라의 최대 경영목표는 아니라 해도 해마다 반복되는 수해를 막는 길은 치산치수가 요체이기에 그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16시58분 묘지를 지났습니다.

저희들의 남진은 저녁 5시가 넘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4시간 반이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이 코스를 5시간 넘게 걸었어도 능선 길은 계속되었습니다. 팔각정에서 알바를 한데다 파평산 산행을 다음으로 미룬 터라 서두르지 않고 선배분과 이런 저런 살아왔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산행시간이 길어졌지만 더 할 수 없이 마음 편하고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빗줄기가 약해지고 산자락을 가득 메운 운무가 자리를 옮겨 잠시나마 산 아래 초리골 마을 전경이 잘 보였습니다.


 

  17시38분 근린공원바로위의 절개면 상단에 다다랐습니다.

산 아래로 법원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1970년대 초 서울 시내 동숭동에서 법원리로 다방을 옮긴 한 아가씨가 서머세트 모옴의 역작 “인간의 멍에”에 나오는 밀드레드와 꼭 닮았다며 이곳 법원리까지 쫓아와 만나고 간 30대에 요절한 한 친구의 열정이 지금도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절개면 상단에서 내림 길을 찾지 못해 제3하산로로 내려서는 갈림길로 되돌아왔습니다. 내림 길은 150미터로 짧았고 이내 오름길에 지나간 승잠원에 도착해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8시 정각 초리골 안내석이 서있는 56번 도로까지 걸어 나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32번 버스를 타고 의정부로 되나가 부대고기를 들면서 반주를 곁들였습니다. 산행 중 사진을 찍지 않으셨다면 저의 완보로는 도저히 잰 걸음을 따라잡지 못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으시고 또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선배 분을 마냥 부러워하며 구로역에서 작별인사를 드렸습니다.

 

    남파공비의 침투루투였던 고향땅  비학산을 밟고나서 잠시 국가와 민족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민족이 달라도 한나라를 이루어 잘 살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하면 한 민족이 체제가 전혀 다른 두개의 국가로 갈려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남북한 두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의 뜻과는 달리 2차대전을 종식시킨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되었기에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 모두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체제를 달리하며 살아온 기간이 어느덧 60년이 넘게 지나온 지금에서 제가 몸담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가 담보되지 않는 통일은 그것이 설사 우리민족의 통일이라 하더라도 생각을 같이할 수 없겠다는 것이 어리석은 저의 소견입니다. 한반도 남단에서 우리의 어르신들이 배골리며 힘들게 가꾸어온 아름다운 이산하를 마음놓고 나다닐 수 있는  자유와 부가 너무 소중하고 백만명 이상의 국민이 아사하는 나라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리더쉽에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아서입니다.

 

   감악산과 파평산을 잇는 다음 산행을 기대하며 첫 번째 고향 산 탐방기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