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정맥 제5구간

  

배티재에서 덕목재까지

날짜 : 5월 7일


배티재에 도착한 시간이 9시50분이었으니 많이 늦은 시각이다.

오늘 까지 비가 온다고 했는데, 아침에 눈떠보니 비는 안 오고 흐린 날씨다.

비가 온다고 하여 전혀 준비도 안했는데.............. 침이 꼴깍 넘어 간다.

아침을 먹고선 산에 간다하니 와이프 얼굴이 싫은 눈치다.

어제와 그제 장모님과 두 처남 내외와 이틀을 보냈으니, 와이프는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라 한다.

그래도 가고 싶은걸 어떻게 해.......

  

배티재에서 덕목재까지는 지형도상 약19Km 정도다.

서둘러 차를 배티재 휴게소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17번 국도을 건너 우측 리본이 많이 매달린 길로 들어서니 등로가 잘 나있다.

경사가 심한데다가 비에 젖어 있어 초반부터 땀이 밴다.

대기 중의 습기가 만만치 않다.

곧 나무 나이테무늬 같은 바위가 나오고 검은 햇빛 가리개 천으로 덮은 얼마 되지 않은 무덤이 나온다.

이런 곳에(돌이 많은 경사가 심한 곳)묘 을 쓴 이유를 모르겠다.

이치 전적비와 대둔산 집단시설들이 조망되는 곳이 나타나고, 곧 완만한 능선에 닿았다.

조금 후에 주능선에 도달했으나 안개구름으로 인해 조망이 없다.

“야호 하지 맙시다”라는 야생동물 보호협회 충북지부에서 건 작은 현수막이 걸린 능선 길은 소나무와 연분홍 철쭉이 초반부터 땀에 젖은 내 몰골을 비웃듯이 멋지게 자리하고 있다.

메모를 할려고 배낭의 작은 주머니를 뒤지나 펜과 시계가 없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빼놓고 나온 모양이다.

오늘 시간과 위치에 대한 메모는 다 틀렸고, 기억에 의존한다고 해도 얼마나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핸드폰의 시계를 보니 40분이 걸린 셈이다.

이정표 상으로는 장군 약수터까지는400m 낙조대까지는 1.2Km 남았단다.

소나무아래 넓은 공터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땀을 닦는다.

바위능선 길을 우로 돌아 조금 가니 상여바위가 나오고, 이윽고 철계단을 만나면 바로 낙조대와 마천대의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낙조대, 왼쪽은 마천대.

마천대로 향해서 조금 가니 용문골 가는 길 전에 멋진 경치가 순간순간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하면서 사진 찍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몇 분을 기다려서 간신히 한 장 박고 칠성봉을 지나 뒤를 돌아보니, 낙조대 밑으로 낙조산장이 산뜻하게 보인다.

구름이 조금씩 걷히면서 태양이 보이고 더위가 뒷목덜미까지 올라온다.

일주일사이에 산자락은 연두에서 녹음의 초록으로 많이도 변해가고 있다.

간이매점을 지나 미끄러운 바위 경사면과 계단을 오르면 마천대다.

 밑창이 밋밋한 일명 스니커즈을 신은 여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쩔쩔매고 있다.비 그친지 얼  마 되지  않았으니 미끄러울 수밖에, 별수가 있나, 그저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마천대 정상의 저 개척탑은 무엇인가?

무엇을 개척했단 말인가?


대둔산!

한듬산!

삼국시대이래로 이 지역, 이 지방 사람들에게 대둔산 마큼 편안하게 다가서는 정신적 지주는 없었다.

백제의 패잔병들이 한듬산으로 숨어들었고, 임진왜란당시에도 내가 오늘 오른 배티재 밑에서 권율장군의 독전하에 동복현감 황진, 공시억, 위대기, 의병장 황박등은 목숨을 내놓고 왜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했으니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불리는 이치대첩이다.

또한 1894년 갑오 동학농민 전쟁당시에도 우금치에서 패한 농민군들은, 접주급 이상의 고위직만 해도 25명이 넘는 농민군이 이 한듬산 정상 일대에 진을 치고 3개월을 일본군과 교전하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만 남기고 모두 다 전몰한 곳이기도 하며, 6.25때는 조선 공산당 충남도당이 휘하 도, 군, 면 이하 세포조직과 9.28서울 수복이후 미처 월북하지 못한 인민군이 합세해 이 한듬산에 들어 이산에서 멀지 않은 백암산(금남정맥, 제3구간상에 나옴)일대로 옮겨 갈 때까지 사살2,247명 생포1,025명 귀순100명이 되며, 아의 피해도 커 전사1,376명이 나왔고 경찰관서 피습이 156회나 된다 한다.

    

왁자지껄한 정상에서 잠시 사진을 박고 남쪽의 안심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안심사와 수락계곡으로 갈라서는 삼거리에 도착하고 정맥은 안심사 쪽으로 이어 진다.

마천대에서 안심사 쪽으로 가면서 뒤 돌아 보는(840m봉) 대둔산의 운주쪽 경관은 황홀하다.

또한 진행하는 능선의 오른쪽으로 보여 지는 논산 쪽의 경관도 오늘 가야할 월성봉과 바랑산의 원경이 육산의 모습과 암산의 자연스런 어우러짐으로 아름답다.

월성봉이 여기서 보니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집안의 오녀 산성을 닮아 보인다.

대둔산의 남쪽 능선도 천등산을 배경으로 훌륭하다.

언제고 한번 옥계천에서 마천대로 오르고 싶다, 아니면 그 반대로 여기서 옥계천으로 내려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기는 것은 능선의 아름다움이 크기 때문일까?

두 번째로 만난 삼거리상의 오른쪽으로 정맥은 이어지고, 여기서 직진하면 안심사와 옥계천으로 떨어지며 옥계천 건너에 천등산이 우람하다.

이 멋진 경관을 더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삼거리 바위봉(845m)에 걸터앉아 두리번두리번, 이른 점심을 먹는다.


 840m봉에서 뒤 돌아본 운주쪽의 대둔산

  

 
 845m봉에서 내려서다 바라본 월성봉과(중앙)좌로 바랑산, 우측으로 수락저수지가 보인다 

  

20여분 황홀한 조망과 함께 점심을 먹고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는 수락계곡을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며 가는 길이 내내 이어진다.

일요일이고 연휴라서 그런지 비교적 한가한 등산로인데도 많은 산님을 만난다.

오늘따라 부부 등산객님이 많은 것이 보기에 좋다.

계속해서 내림 길을 가고 오른쪽으로 대둔산 본능선이 올려다 보이고 멀리 수락 저수지와 숲에 가린 군지계곡 그리고 대둔산 본줄기 밑에 석천암이 재빛 스레이트 지붕으로 살짝 모습을 보인다.


석천암!

근세 주역의 한 산맥인 “야산 이달”선생이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수행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야산 이달선생은 주역을 공부 하는 사람들에겐 커다란 이정표이시다.

일부 김항이 망원경이라면 야산 이달은 현미경이라 주장하는 분이 있을 정도로 그의 주역의 경지는 경이로우면서도 서민 대중적이다.

1945년 4월부터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고 다니거나 8.15해방 전날 문경군 문경면 문경리에서 마을 잔치를 열고 닭 춤을 춘 것이나, (聞慶이란 뜻은 경사스런 일을 듣는다 란 뜻) 6.25전에 안면도로 들어간 일화등은 그의 주역에 대한 이해가 얼마 만큼인가를 알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내가 가야할 정맥 능선에서 조금 떨어진 계룡산 국사봉은 김일부 선생이 정역을 연구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김일부 선생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민족종교가(동학의 최재우, 증산교의 증산 강일순, 원불교의 박중빈 등등) 후천개벽을 주장한 종교이다.

일부 김항 선생과 야산 이달선생은 근세 우리나라 주역의 양대 산맥으로서 많은  학자들은 물론 일반 역사학자들에게도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의 넷째 아들은 유명한 토종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능선 길을 타고 간다.

수락계곡 왼쪽 편에 세워진 경찰 승전탑이 보이고 장쾌하게 들리는 물소리는,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더욱 멋진 장관을 연출 하고 있음을  수락계곡의 많은 폭포들의 알림이랴.

왜 수락(水落)리라 이름을 지었는지 보지 않고 물음은 우문이겠지........... 

오르고 내리고를 계속하고, 누군가가 부로 그리 하였는지 표지기(리본)가 치워져 있는 것이 자주 눈에 보인다.

비가 와서 그런지 능선 한가운데로 물이 고여 있다.

금방 사라 질것이다, 2구간의 성봉 아래 늪이나 연못처럼 오래갈 웅덩이가 아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묵은 묘가 나오고 여기서 한참을 헤 메인다.

삼거리인데 표지기가 하나도 없다, 태양은 뜨겁고 나무로 인해 조망도 없다.

오른쪽과 왼쪽, 두 갈래 길을 좌측으로 20여미터, 다시 돌아와 우측으로 20여미터을 가보지만 표지기는 없고, 다시 돌아와 지형도를 꺼내보니 왼쪽길이다.

진즉 꺼내 볼 것을..........

태양을 마주 보고 가니 더욱 덥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월성봉이정표가 보이고 무수재 사거리다.

계속해서 가고 또 가고 영주사 갈림길을 지나고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 계단을 오른다.

오래된 소나무 몇 그루가 나타나고 월성봉 급경사를 네 발로 오른다.


 

월성봉을 오르다 바라본 8각형의 법계사와 양촌면 오산리일대

  


 수락 흔들바위 (벼랑위에 아슬하게 올려져 있다, 사진 중앙 멀리 논산 저수지가 보인다)

  

조망이 좋다.

왼쪽으로 적게는 50m에서 많게는 200m넘게 절벽을 만들며 정맥을 이루고 간다, 바랑산까지......

그 아래로 8각형모양의 법계사가 보이며 넓은 들판이 단애와 어우러져 멋진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곧 벼랑 위에 아슬아슬 올려져 있는 수락 흔들바위가 나오고, 올라가 힘주어보니 조금씩 움직인다.

흔들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으려니 고사리 꺽는 아주머니 두분이 점심도 못 먹었다면서 물 좀 달라 신다.

두병의 물중 한병은 내가 이미 다 비웠고 한병을 두분이서 거의 다 마신다.

나에겐 한모금의 물만 남겨 주시니.............참외 하나를 더 드리니  고마워 하신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금 진행하니 넓은 헬기장이 나오고 650m의 월성봉 정상이다.

성의 흔적같은 것은 발견 하지 못하였다.

역시 조금 진행하고 여기서 좌측의 영주사 쪽으로 간다.

급한 내리막길을 가고 곧 급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바랑산 삼각점에 시선을 거두고(555.4m)왼쪽 내리막으로 발길을 놓는다.

곧 안부 삼거리에서 직진을 해야 하는데 왼쪽의 뚜렷한 길로 무심코 따라 내려오다 보니 길이 점점 아래로 쳐진다.

아 뿔 사!!

경사가 심한 너덜 길을 무작정 치고 오르지만, 만만치 않다. 그대로 주저 않아 쉰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이렇게 알바를 하고 나면 더욱 힘이 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심 하지 못하는 것이 쓰리다.

물이 없어 더더욱 힘이 든다.

작은 봉우리들을 몇 개 넘고 도착한곳이 물한이재, 도로 양쪽으로 다 포장을 했는데 정상 부위만 하지 않았다.

양촌면 반암리에서 벌곡면 덕곡리로 길을 내는 중이다.

꼭 이렇게 절개를 해서 도로를 만들어야 만하나?

굳이 하려면 터널을 만들지, 하는 생각이 든다.

절개지 높이가 40~50m는 될 것 같다.

절개지 옆으로 돌아 조심스럽게 내려오다 보니 절개지 한쪽에서 물이 흘러 도로로 내려간다.

조심스럽게 내려가 입을 대고 물을 먹는다, 시원하다, 살 것 같다.

또다시 조심조심 절개지를 내려서고, 차가 꽤 많이 다닌다.

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따라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경사가 심한 등로로 접어든다.

코를 땅에 끌며 오른 봉오리부터는 순한 능선길이다.

날이 어둑어둑 해져 걸음을 빨리 하지만 거미줄과 목마름으로 힘이 든다.

물한이재에서 어려워도 물을 조금 담아 볼 걸 하는 후회가 입을 태운다.

이윽고 곰치재에 닿고 임도를 건너 골짜기로 내려선다, 물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부연 물이지만 마시고 물병도 채운다.

또 다시 급경사를 오르고 (삼각점,370m)왼쪽으로 급하게 내려간다.


 370m봉에서 바라본 걸어온길(왼쪽멀리 대둔산 , 중앙에 월성봉, 오른쪽에 바랑산과 사진 한가운데에 공사중인 물한이재가 희미하게 보임

 

고속도로의 요란한 차소리와 고압선 철탑이 있고 오른쪽으로 넓게 자리한 밀밭을 지나니 호남 고속도로다.

역시 고속도로 절개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니 묘목 밭이 나오고 좀 더 진행하니 논에다 심은 인삼밭에 물이 고여 있다.

농로를 따라가니 고속도로 통로가 나오고 많은 물이 흘러 수로인지 통로인지 구분이 어렵다.

통로를 터벅터벅 걸어 나와 통로의 흐르는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핸드폰시계를 보니

18시 48분이다.

길을 건너 차을 세우니 첫 번째 오는 차가 선다.

아버님 묘소에 다녀오시는 대전 사시는 분이다, 자가용은 처음 타본다(히치 할 때마다 트럭을 얻어 탔었다).

한삼천리에서 차를 내려 물을 살려고 슈퍼를 찿아 두리번거리니, 논산쪽에서 수락리행 버스가 온다.

버스를 타고 도산에서 내려 진산행 버스을 물어보니 금방 갔단다.

음료수를 한 병 사먹고 역시 지나가는 차를 세우니 자가용이 선다.

엉?! 

월성봉 못 가서 만난, 나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던 부부 산님이시다.

진산 못 밑 쳐서 내리고 호출택시 명함을 꺼내는데 택시가 내 앞에 선다.

저번에 이용한 그 택시다.

배티재에서 내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정확히 20시 3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