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해 왕조실록을 건성으로 뒤적이며 잘난 체 하나 기실은 콩밭에 마음

둔 까투리처럼 어데 만만한 놈 엎쳐서 공술이래두 뜯어낼 궁리를 트고 있는데  학원을 다녀온 두 예삐의 얼굴이 사뭇 대조적으로 표정이 판이하다.

큰놈은 쓸개로 장아찌를 담다 왔는지 눈꼬리가 팽팽히 당겨져 못난이 삼형제의 복사판이 되었고 둘째는 얼굴에 붉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며 희희낙락이다.

속사정인즉 놈들이 봄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육학년인 큰놈은 고성 공룡 엑스포로 결정이 되었고 오학년인 둘째는 대구 우방랜드로 가게 되었단다.

근데 큰놈의 뺨이 죽장같이 부어올라 툴툴 대는건 공룡전엔 놀이 기구가 없어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요, 우방랜드를 차지한 둘째는 온갖 기구를 탈 생각에  크게 고무 되었기 때문이였다.


 

큰놈은 밥도 먹지 않고 두고두고 아쉬워 하는데 그것 조차도 아비인 객은 부럽기만 하다.

객의 유년 시절의 소풍이라면 의례히 백사장과 미루나무가 빽빽한 황강변이

단골 메뉴였다.

요즘처럼 관광 버스를 전세내 멀리 떠나는 건 수학 여행때나 누리는 호사 였는데 객은 불인지 행인지 초, 중까지는 수학 여행 자체가 없어 버스 한번 실컷 타보는 복록도 받지 못하였다.

깔학년인 1학년 때로 기억이 되는데 생애 첫 소풍답게 용돈을 무려 200백원이나 받아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깝죽대며 날치다 그만 구렁이 알같은 그 귀하디 귀한 돈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닭똥 같은 눈물을 좍좍 쏟으며 대성통곡을 하니 선생님이 업고서는 돈을 찾으러 다녔으나 말 그대로 백사장에 바늘 찾기로 종적이 묘연 했으나 선생님의 따뜻한 등의 체취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또 6년 때던가 가을 소풍 노래  자랑에 출전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빨간 마후라를 불러 공책 열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세월이 흘러 그 빨간 마후라가  음란물로 변질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 추억에 상처를 받기도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요즘이야 널린게 김밥 전문점인지라 김밥이 싸구려 식사 대용으로  줏가가 폭락한지 오래지만 당시만 해도 객의 안태본인 질밭골에서 김밥을 싸가는 친구는 손가락으로 헤일 정도로 귀했고 나름의 재력(?)을 과시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었다.   

두예삐가 소풍을 떠나는 날,

그때까지도 볼이 부은 큰놈에게 가만히 볼비빔을 해주고는 아비의 추억이 흠뻑 깃들인 용돈을  쥐어 주고는 출근길을 서둘렀다.


 

곁이 본가 모친을 모시고 창원의 장형댁 으로 마실 을 가버려 졸지에 고아가 된 객은 도시락을 마련할 형편도 안 되어 도락산 으로 도시락을 구하러 떠난다.

깨끗한 선암계곡에 위치한 사인암과 세 신선 바위를 보고팠으나 남의 차에 얹혀 가는 처지로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가 못 되는지라 절에 간 색시처럼 고분고분 다소곳이 처분에 따를 따름이다.

산행 들머리인 상선암은(암자)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되어 명산의 진가를

확인시켜 주는데 나무계단을 지나자마자 시작되는 급경사 오름길은 기암과 노송이 얼크러지고 설크러져 꼭 향골의 매화산과 모산재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코끝에 단내가 확확 이는 돌비알길 이기는 하나 기암에 똬리를 내린 천년 노송의 단아한 자태는 지나는 사람의 발기를 묶기에 충분하고 뒤로는 병풍같은 용두산이 산안 마을을 살포시 안아 세계의 불가사의인 페르시아의 공중 정원처럼 하늘 길에 매달려 있어 찬탄이 인다.

저 병풍 같은 용두산을 넘어서면 회미니재와 제비봉을 거쳐 충주호의 장회 유람선 선착장으로 길은 나려서니 언제나 갈수 있을려나,, 용두산에서 보는

신선봉이나 채운봉의 운치 또한 만만치가 않을텐데.

숨이 턱에 닿을 즈음 쉬어가기 좋은 자그만 봉우리가 나오고 소나무 그늘도 상큼하다.

탁주에 거친 거섶 안주로 땀을 들이며 올라갈 아우봉을 가늠하는 맛도 보통이 아니다.


 

제봉 오름길은 완만한 오름길로 시작해서 조금 오르면 코가 땅에 닿는 된비알과  초인사를 나누어야 하는데 땀을 노 드린 듯 흘리며 오른 제봉은 통상 정상을 거치지 않고 우편 사면을 우회해 곧장 형님봉으로 길을 조인다.

서고동저의 특이한 능선 형태는 광덕암이 위치한 동쪽은 아줌마의 엉덩이같이 펑퍼짐하고 시민골이 위치한 오른편은 직벽인데 특히나 형님봉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찔한 맛은 대단 각별해 소름이 쭈욱 돋는다.

형봉을 내려서면 이내 채운봉 삼거리가 나서고 계단을 거쳐 오르면 정상보다 더 정상 같은 신선봉이 황장산의 시원한 황장풍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지명처럼 황장산의 황장목은 춘향목과 더불어 최고급 목재로 궁궐의 대들보로 그 명성을 이었다니 알만하다


 

눈을 들매 황장산 오른편으로 대미산과 문수봉이 우람하고 왼편으로 한껏 고개를 젖히면 소백산의 천문대도 보인다고 하는데 무심한 객은 그기 까지는 미쳐 생각을 못하는 우를 범해 글을 쓰는 지금 탄식을 거듭하고 있다.

단양이 지명이 연단조양에서 유래 되었다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연단은 신선들이 먹는 불로불사 약인바  월악의 아름다움을 단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시황제 정이 동남동녀 오백명을 서불에게 주어 불로초를 구해오라 명 했건만  서불은 헛되이 남해 금산과 서귀포를 돌아 일본으로 건너 간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황제 정이 자신이 손수 이곳 월악으로 들었다면 아마도 삼천갑자 동방삭과 호형호제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선봉의 명물 신선샘은 생각 보다는 지저분해 조금은 실망스럽고 숫처녀가 물을 퍼내면 비가 온다는 속설은 아마도 혹심한 가뭄에 기우제를 발원하는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전설 탓이리라.

신선봉에서 두어길을 건너 띈 정상은 아무래도 조망과 운치가 신선봉 보다 못해 간혹 신선봉에서 발길을 돌리기도 하는바 역시나 상징적인 정상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게 타당한지도 모르겠다.

주린배를 채우고 식후 연초로 뜸을 적당히 들였다면 이제 도락산 최고의 명품 구간인 채운봉, 검봉 구간을 점검할 순서이다.

다시 신선봉을 거슬러 형봉  안부로 내려서면 공룡의 돌기 같은 채운봉 능선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데 누군가가 도봉산의 포대능선과 흡사하단 글을 읽은적이 있는데 포대능선을 모르는 객으로서는 궁금하기 이를데 없으나 운치로 보아서는 결코 포대능선에 뒤지지 않을 겄으로 짐작이 된다.


 

칼날 같은 암릉이 진실로 한 폭의 동양화와 흡사해 싸락눈이라도 얹히고 공산명월 이래도 돋아오는 밤이면 가위 선경의 신선이 옛 얘기가 아님을 알겠더라.  

시쳇말로 오줌이 찔끔 거리는 공룡의 돌기 부문을 비단을 묶어 내려서 뒤돌아 보면 저길 어떻게 왔나 싶은데 빙설기엔 절대 조심을 기해야 할 구간이라는 겄쯤은 첨족이라 재론의 여지가 없다.

채운봉은 구름을 모으는 뜻으로 대강 해석이 되는데 옥루몽에서 홍난성의 사제되는 도인의 법명이 채운인바 신선봉과 마찬가지로 도교적 기운이 강한

명칭이라 하겠다.

채운봉을 돌아 검봉으로 나서는 길 또한 만만찮은데 그만큼 운치 또한 대단해  그 향기가 보통이 아니다.


 

검봉 오르기 전 보호망 밖의 흔들바위는 어린애가 밀어도 맞장구를 쳐 준다기에 십수년 체육관에서 연마한 힘을 한번 시험해 보려 했으나 관객의 시선이 워낙 매워 포기하고 검봉으로 길을 나선다.

검봉을 오른편으로 우회 하면서 길은 육산으로 바뀌어 큰선바위 작은 선바위를 거쳐 무리없이 상선암으로 연결 된다.

도락산이라는 지명은 우암 선생이 깨달음을 얻는데는 길이 있어야 하고 또한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지었다 하는데 객 또한 무었을 깨달아 보려 했건만 세속의 욕심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 아무겄도 얻지 못하였으니 미상불 범부의 도량이란 한치도 되지 않나 부다.


 

말난 김에 우암 선생의 넓은 도량에 관한 얘기를 한편 보자.

선생이 지방에 일이 있어 평복에 종자 하나만을 거느린 단촐한 행장으로 길을 나섰다가 그만 소나기를 만나고 말았다.

사추리에 비파 소리를 날리며 주막으로 득달같이 뛰어드니 마침 주막집 상방엔 원산 명태처럼 뒤꼭지가 뻣뻣한 무관 한사람이 선객으로 좌정하고 있었다.

측간 앞에서 사돈 만난 것처럼 거북하게 비 그치기만을 기다리는데 젊은 벼슬아치는 엔간히 무료 했는지 우암을 한참이나 힐끗 힐끗 곁눈질로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 낫살로 보아하니 장기깨나 둠직한 첨지 같은데 한판 어울려 볼까?”

“좋지요, 한수 배워 보리다”


 

그리곤 몇 판을 둬 봤으나 젊은치는 판판히 늙은이에게 패배를 개어 올리는 신세로 맥을 추지 못한다.

“허참,, 늙도록 장기만 뒀나 ?  수가 상당 하구먼,,”

“예, 벼슬을 한 덕에 소일 삼아 둡지요”

“무슨 벼슬인가 ?  아마도 보릿섬은 좋이 팔아 없앤 모양인데.. 그래 이름

   이 무엇인고? ”

“예, 송나라 송 , 때시, 매울렬자입니다.”

우암의 말에 젊은 벼슬아치는 금방 안색이 개죽사발을 핥아 놓은 것처럼 하 얗게 뜨더니 벌린입을 다물지 못한다.

시임 좌의정 송시열 대감임을 그때서야 눈치 챘던 것이다.


 

동안이 뜨도록 꿀먹은 벙어리로 잠잠하던 건방진 무관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소매를 본때 있게 걷어 부치더니 다짜고짜로 우암의 귀쌈을 보기좋게 올려 붙인다.

“네이놈, 늙은겄이 감히 망령되이 좌의정 대감을 사칭하기에 내 뺨 한대로

  후일을 경계코져 하니 차후 구습을 고쳐 경거망동치 말라.”

그리고는 번개 같이 말을 몰아 빗속을 뚫고 도망을 친다.

이름 한번 잘못 말했다고 푸짐한 귓쌈을 대접 받은 우암은 노하기는커녕 되려 감탄해 마지 않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허 ,, 진실로 거창한 장부의 기지로다. 보기 드문 인재로구나”

후에 우암이 그를 크게 쓰려 했으나 그는 단명하여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애석함을 마지 않았다는 뒷애기가 전한다.

이런 우암도  기사환국때 노론의 영수로 지목되어 사사되니 어찌보면 숙종의 왕권 강화책의 희생물이 였는지도 모른다.


 

우암의 도량을 지니지 못한 한심한 객을 쫓기라듯 하듯 채운봉은 구름을 불러 모으니 사위가 먹장 같이 어두워 지며 소나기를 뿌리기 시작한다.

비바람에 쫓긴 객은 좌의정에게 손찌검을 한 배짱 좋은 무관처럼 쥐구멍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쁘고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더라.


 

                  2006년 4월 23일  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