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산, 현성산 산행기/ 경남 거창
(2005.7.21/마폭포-현성산-서문가 바위-연화봉-계곡- 마지막집-마애삼존불-문바위-선녀폭포-매표소)

*. 아, 카메라 컴펙트후래쉬카드여!

큰일 났다. 어제는 그냥 집에 있어도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르던데, 우리는 새벽 댓바람에  경남 거창에 있는 금원산을  안개를 뚫고 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바람 없고 구름 없는 날에 끼는 것이 안개가 아니던가. 그러니 한낮 등산은 얼마나 더울까.
고양시 일산에서 4시간을 달려 금원사 주차장에 닿은 시간은 10시30분, 바람 한 점 없는 34도의 폭염 속에 우리는 암릉을 타고  현성산(963m)을 거쳐 금원산(1,352.5m)으로 해서 유안청계곡으로 하산한다.
그런데 큰 일이 또 하나 생겼다. 디지털카메라 컴펙트후래쉬카드를 빼놓고 온 것이다. 아나로그 카메라의 필름에 해당하는 것이니 가는 도중에는 구할 수조차 없는 고가의 것을.
배낭을 챙기며 옛날에 쓰던 340만 화소의 디카와 새로 구입한 800만 화소 카메라를 놓고 어느것을 가지고 갈까 망설는 과정에서 그만 그 중요한 훌레쉬카드를 빠뜨리고 온 것이다.
다행히 카메라 폰이 있어 그래도 열심히 찍고 집에 와서 보니 한 장도 안 나왔다. 아아, 아까워라. 찍을 때마다 한 장 한 장씩 '저장'을 눌러야 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 왜 원숭이 원(猿) ‘금원산(金猿山)’이라 하였을까
금원산의 본디 이름은 ‘검은 산’이었다. 고현의 서쪽에 위치하여 산이 검게 보인다 해서 이름한 것이다. 검을 정도로 소나무가 우거져서 흑산도(黑山島)라 하였다는 것과 같이.
그 ‘검은 산’을 ‘금원산(金猿山)’이라 이름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천방지축 금빛 원숭이 한 마리의 행패에
도승(度僧)이 대노하여 원암(猿岩) 속에 가두었더니
원숭이
닮은 바위 모습에
납[원숭이]바위가 되었답니다.

*. 암릉으로 유명한 현성산(玄城山)
출처:거창홈피
현성산은 ‘거무성’ 또는 ‘거무시’로 불려오던 산이다. ‘-감’이란 말은 지금 그 자격에 알맞은 만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듯이, 옛날에는 성스럽고 높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것이 검을 ‘현(玄)’자의 한자어로 바뀌고 이 산을 오르는 암릉의 생김이 ‘성(城)’ 같다 하여 현성산(玄城山)이라 하게 된 것이다.
현성산은 차도에서 빤히 보여서 '조까짓 거' 하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우리들이 오르기 시작한 입구는 휴양림 아래 매표소 100m 아래 지계곡에 있는 미폭(米瀑) 앞 오른쪽 차도였다. 미폭은 한꺼번에 쏟아지는 폭포가 아니고 바위 등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쌀을 조리질 할 때 뜨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등산에서는 가장 힘 든 코스는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는 우정산악회 조 회장의 배려로 금원산 산행 코스 중 가장 멋진 기암 기봉의 코스였다.
눕고 서고 한 굵직굵직한 바위들을 타다 보면 길이 끊기는 하다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듯하다가 끊긴다. 묘지를 지나니 20m 정도의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 할 바위길이 있다. 이런 로푸길이 여럿이 있었다. 그때마다 전개 되는 저 아름다운 봉들. 아아, 저 장면을 그 먼 경남까지 이른 새벽에 달려와서도 사진으로 남길 수 없다니-. 아쉽기가 그지없었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금원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오름길이 1시간 내내 965m 현성산까지 계속되었다.
산에 오를 때 즐거움 중의 하나는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고생고생 하다 보면 문득 가까이 다가서는 기쁨이고, 그 도중에 평탄한 능선 길도 있으련만 바람 한 점 없는 한여름 오름길에 시야는 펑 뚫렸는데도 계속되는 스릴 있는 위험한 암봉 길뿐 능선 길은 거의 없었다.
현성산 정상은 정상석도 나무 한 구루 없는 역시 바위들의 나라였다.
건너편에 광활한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부터 뾰족한 기백산(1,331m)로 해서 1시간 40분 걸린다는 금원산(1,353m) 거기서 다시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 여기 현성산까지의 산줄기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멀리서 보니 금원산은 낙타 등과 같은 두 개의 봉우리로 된 산이었다. 10분에 갈 수 있다는 300여m 거리를 두고 있는 동봉(東峯1,335m)과 서봉(西峯 1,352.5m)인데 20m 더 높은 서봉이 금원산의 정상이다. 다녀 온 일행에게 물어 보았더니 동봉 정상은 암릉뿐이고  서봉에는 정상석이 둘이나 서 있다고-.
현성산 정상 바로 밑에 이정표에는 거리 표시도 없이 ‘서문가 바위’ 길 표시만 있다. 서문가바위는 연화봉을 지나 970m 봉 직전에 있는 바위다.
서문가 바위에는 이런 지명 유래담이 전한다.

이 현성산에 피난 온  서가(西哥) 문가(門哥)가 한 여인과 같이 이 바위 굴 속에서 함께 살다가 아들을 낳으매 할 수 없이 이자성(二字姓)인 서문씨(西門氏)가 되었다는 그 바위굴이 있어 ‘서문가바위’라 이름 하게 되었다고.

가장 후미에 우리를 도와주며 가고 있는 조 회장의 반바지도 땀에 푹 젖은 것이 오줌을 싼 것 같이 물방울이 떨어진다는 그런 날씨였다. 그래도 죽을 기를 쓰고 오르고 있는 내 뒤에 또한 분이 있다. 왕년에 등산을 좋아하였다는 75세 되는 건장한 분인데 나보다 더 땀을 흘리고, 더 힘에 겨워하였다.
후미 구릅이 점심 식사를 하는데 이르니 분명 허기가 진 것 같은데 밥을 먹을 기력도 입맛도 없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지금 꼭 저 금원산 정상을 올라야만 하는 것인가, 건강에도 해로운 것을. 전에 이 우정산악회 따라와서 정상을 탐하다가 일행을 1시간 이상 기다리게 하였으면서-.
자식은 잘못을 백 번 했더도 용서하는 것이 부모이지만, 두 번 이상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게 세상인데.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등산에서 반드시 필요한 카메라 부속품을 빼놓고 온 것도 나의 하나님께서 무리한 등산을 만류하시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조 회장께 이렇게 말했다.
일만이 길게 호루라기를 부는 소리가 들리거든 그냥 탈출로로 하산 하는 줄로 알아 주세요.”
막 피어나는 모양의 ‘연꽃바위’ 같은 연화봉(930m) 직전에서 호루라기를 길게 불었다.
내 뒤에 오던 75세 할아버지도 금원산 정상을 기권하고 이 길을 택하면서 탈출로가 어디까지 가야 나오는가 걱정하며 간다.
“아저씨, 먼저 가세요. 가시다가 하산 길 만나면 호루라기를 길게 불어 주시구요.
잠시 후 하모니카 같은 호루라기 소리가 길게 들린다.

*. MP3를 들으며 탈출 하는 하산 길
 정년을 하고 연금 수급자로 살다보니 경제적으로는 당장 큰 걱정은 없이 살지만 보너스가 없어 직장 생활 때보다 여유가 없을 때가 많았다.  그 보너스에 해당하는 것이 우리 같은 백수(白鬚)들에게도 있다면 명절 때나 생일 때 자식들이 주는 돈이다.
나는 그 돈을 가치 있게 쓰기 위해서 거기에 보태서 평소에 사고 싶던 등산 장비나 카메라 등을 샀다. 금년 삼월 내 생일에는 MP3를 용기를 내어 샀다.
언제나 함께 하던 아내도 나이가 드니 따로따로 살게 되었다. 따로 자고, 따로 놀러 다니면서 제 각기 하루하루를 따로따로 지낸다. 그래서 점심 식사를 혼자하고 그 설거지를 하기도 하고, 집안 청소를 도와주는 것이 예사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구나, 요즈음 우리 부부는 언젠가 혼자서 사는 예습을 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혼자서 전철을 타고 갈 때, 긴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단독 등반을 할 때 책을 읽는 것처럼 유익하고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중에 하나로  MP3가 필요하였다.
MP3는 전철 같은 특수한 환경을 제외한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고성능 라디오 기능에다가, 듣다가 필요한 것을 보던 하나로 녹음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1G인 경우 200곡이나 컴퓨터로나 CD로도 다운 받아 저장할 수가 있다. 녹음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CD처럼 원하는 부분을 즉시에 찾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카세트로 다운 받은 영어 회화를 들으며 하산을 하고 있다. 좋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등산을 하면서 영어회화를 공부한다니-.
“어디에서 오셨어요?( Where are you from?)
“전 한국 일산에서 왔어요. 당신은요?(I'm from Ilsan Korea. How about you?)

갑자기 생각이 난다. 젊고 건장한 산꾼 사이에서 항상 체력에 몰리는 산악회를 통한 산행이 그동안 나에게 얼마나 버거운 일이었던가. 이젠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아 나에게 맞는 산행을 하게 되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선을 다하다가 어쩔 수 없을 경우에 마음과 몸이 타협해서 찾아낸 여유를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이다.
1리틀짜리의 물을 아껴 아껴 먹다가 계곡의 물을 마음껏 마시면서 냇가에 혼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나머지 김밥 하나는 다람쥐 먹으라고 물가 바위 위에 고이 놓아두었고.

이 금원산에는 유명한 골짜기가 셋이 있다. 성인골(聖人谷), 유안청(儒案廳)계곡과  지장암에서 와전된 지명이라는 지재미골이 바로 여기다.
모자 하나 쓰는 것도 더워서 머리에 두르고 다니던 스카프도, 땀에 푹 젖은 옷도 빨고,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라 탁족도 하고 미역도 감아보았다. 산에 와서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게 되는 여유였다.
찬 내의를 입고 하산하다보니, 외딴 집 하나를 지나서 몇 채의 인가가 있는데 차를 파는 집이다. 거기를 기웃거리다 보니 푸드득 나는 새가 있다. 메추리로구나 하는데 또 한 마리 꿩이 콩밭으로 날아가 숨는다. 새끼 꿩이 엄마 꿩과 함께 콩서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동굴 속의 3존마애불상
임간도로를 따라 부지런히 내려가니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있다. 암자가 아니라 마애삼존불상의 관리소였다. 여기가 가섭사지인가 보다. 그 왼쪽으로 커다란 두 바위 사이로 난 108층계 따라 올라가 보니 두 바위 속에 동굴이 있는데 그 오른쪽 바위 벽에 마애삼존불(보물530호)이 모셔져 있다. 눈비를 맞지 않은 굴속의 세 부처라서 어느 곳에서 보던 마애불보다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고려시대 부처였다.
3존마애불상의 바로 아래 개울 위 길 가에 있는 바위가 단일 바위로는 한국에서는 제일 크다는 문바위였다. 마애불 입구라서 '문바위'인가 아니면 작은 바위와 기대선 사이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 같은 통로가 있어서 '문바위'인가.
거기서 10여분 내려오니 금원산을 편도로 2~ 3시간 걸린다는 가는 입구다. 우리는 금원산의 보물 같은 암릉을 보러 그 길을 거꾸로 온 것이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설악산 수렴동이나 오대산 소금강의 축소판이라는 유안청계곡에 거슬러 올라가 직폭이라는 유안청 제1폭과 와폭이라는 190m의 제2 폭에 가서  ‘남부군’ 소설에 나오는 남부군 500여명이 남녀 구별없이 부꾸러움도 잊고 알몸으로 목욕했다는 유안청계곡을 보고 싶었으나 왕복에 시간 반이나 넘는다하여 마음만 두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버스 주차장에서는 전처럼 하산주(下山酒) 막걸리와 돼지고기 넣어 끓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나면 파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기 오는 저분은 청화 조희식 시인 아니신가. 대학 같은 과 3년 선배이신-. 산을 좋아하신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런 우연도 있긴 있는 거구나.
“일만과 이번 달 주주총회(酒主總會)에서나 만나는가 하였더니 여기서 이렇게 만났구료.”
이렇게 금원사의 하산주의 흥은 익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