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을 400 미터 앞에 두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황석산
 
(2005. 7. 10. 일요일)
 
 
덕유산을 가고 싶다
지난 가을부터 그리던 산...
산행기를 읽으며 지도를 펴놓고 육십령부터 할미봉을 지나
서봉, 남덕유, 삿갓, 무룡, 동엽령...  향적봉까지  내걸음으로 산에서
1박을 해야 가능한 곳을 작년 가을부터 마음은 수차례 달려갔다
주능선 종주가 힘들면 우선 남덕유에 올라 장쾌한 능선을 한번 바라만
보아도 당장은 원이 없을것 같아 지난 일요일 나서보자 했더만 지루한
장마비가 발목을 잡았다
 
매월 둘째 일요일
가까운 몇명의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 함께하는 정해진 날
큰 일이 없으면 어쨌거나 먼 산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좋은 날...
고맙게도 장마가 단 하루 쉬어가는 날이다
환준씨가 이십년 전에 첫 산행으로 갔다던  칼날 능선의 바위봉우리가
멋있다는 황석산... 날씨가 좋으면 장수덕유와 남덕유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댓명이라도 참석하면 정상으로 곧바로 치고 올라 하산하는 짧은코스가 됐을 길을
남편과 환준씨, 나 달랑 세명이라 용추사 일주문을 지나 지장골 계곡으로 올라
거망산에서 황석산까지 능선을 길게 걷는 코스가 선택되었다  
내겐 행운이다
 
긴 장마로 물이 불은 지장골 계곡은 여간 미끄러운게 아니다
뛰어야 건너는 징검돌도 힘들고 신경 쓰인다
미끄러 넘어져 봤자 물에 풍덩 빠지기 밖에 더할까... 그래도 발에 물을 넣지 않아야
긴 산행의 즐거움도 배가 될수 있으니 무조건 조심하고 쩔쩔맨다
뛰어 건널때마다 환준씨 손을 빌리자니 미안하다  모든 소리를 우렁찬 계곡물소리가
온통 삼켜버려 말없이 묵묵히 걷는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한시간 정도 걸으면 왠만히 몸이 적응해 발걸음에 가락이 실리건만...
좀처럼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고 내내 몸이 무겁다
사람소리도 전해지고 새소리도 들리고... 중턱부터 물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져 좋은데 하늘이 보이는 능선 자락엔 언제 올라설 수 있으려나...
마지막 고비 같은 오름길은 여태 올랐던 산들의 깔딱고개가 절로 떠오를만큼
힘에 부친다고 생각할 즈음 남편이 갑자기 뛰어 오른다
 
드디어 거망샘삼거리 능선에 올랐다
산상의 넓은 초원이다  억새풀 군락속에 꽃이 많다
꽃창포, 털중나리, 양지꽃, 까치수영, 선급한 마타리...
남편한테 사진을 부탁하니 모델이 시원찮아 못 찍겠단다  허...
뒤 이어 올라온 아저씨 두분이 거망산을 갔다가 온다는데 우린 5분이면 충분할
코앞의 거망산 정상을 안 가는 장난스런 이유가 나름대로 다 있다
난 힘들어 못가고 누군 가기싫어 안가고 또 누군 길을 몰라 못가고...
 
황석산 쪽을 향해 쌍안경을 들고 보니 하얀 구름이 산 자락을 막 반을
휘감아 넘어오고 있다   힘든 계곡을 오른 보상으로 거망산에서 황석산으로
길게 이어진 환상적인 능선길을 걷는다   하얀 산꿩의다리가 지천에 늘렸다
하나같이 모두 물방울을 달고...  작년 지리산에서 본 일월 비비추는꽃대 끝에
여러송이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는데 여기선 모두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라
구슬같은 꽃이 한송이로 보인다  모두 일제히 고개를 빼어들고 긴 꽃대끝에
동글동글 맺혀 발길을 붙잡는데 디카 밧데리는 교환신호가 깜빡이더니 끝이다
산꿩의다리와 산수국을 몇 개 간신히 담은 것으로 족해야 하나보다
준비성 없는 나를 보고 한 소리 하는 사람이 나 대신 좀 담아주면 좋을걸...
카메라는 폼으로 들고 왔는지....  영 ...
 
뒤처지다 보니 두사람에게 미안해 마음은 서두러라 하는데 발길은 꽃에 이끌려
따라주지 않고 검게 자잘하게 달린 뽕나무 열매는 손길을 잡아 끈다
그 옛날 어린시절 뽕밭에서 따먹은 오디는 손가락 마디만하게 굵었건만 산꼭대기
능선길에 달린 것은 너무 작다  젖은 놈을 빗물과 함께 먹어도 그 맛은 옛날 그대로다
뒤에 올 사람을 위해 아쉽지만 남겨둔다
 
앞서간 두 사람이 등로 한쪽에 점심상을 펼치고 먹고 있다
김치와 풋고추 오이 된장만으로도 산에선 진수성찬이다
아침 일찍 커피 한잔 마시고 오른 끝에 먹는 밥은 꿀맛이다
밥을 먹으며 환준씨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얘기를 한다
우리가 있는 여기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거망산을 오른 아저씨 두분이 부지런히 오셨다
뒤에 한 부대의 사람들이 온다 하니 도망치듯 상을 거둔다
 
분홍빛 노루오줌은 비에 젖어 지치고 검은 반점의 주황빛 호랑나비가
꽃처럼 앉은 큰까치수영은 한 밭뙈기로 군락져 있다
늦게사 카메라를 꺼낸 남편은 큰까치와 나비를 담느라 바쁘다
주홍빛 하늘말나리는 한껏 고개 들어 고고하고 맑고 깨끗한 노랑원추리는
노랑 외엔 그 어떤 빛깔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체가 많지 않아 아쉬움이 더하다
 
정상쪽의 두개의 바위봉우리를 저만큼 앞에 두고 전망좋은 산마루에 올라서니
맞은 편에서 온 사람들과 앞서간 아저씨 두분..  뒤어어 오는 부대의 일행들... 
비맞을 각오에 온 사람들은 그만큼 장마중에 얻은 귀한 하루 복받은 사람들이다  
좀전에 준 계란의 답례로 한 아저씨가 불가리스를 주신다   고맙게 받아먹으며
이 힘으로 저 암봉을 오르리라 다짐해보건만...
두 암봉 사이에 어떤형상(거북바위)을 한 바위난간위에 검게 막대기처럼 보이는
물체가 움직인다  구부렸다 폈다 하니  사람인줄 알겠다
벌써부터 긴장되고 부담이 팍팍온다
 
정상과 탁현으로 가는 하산로 삼거리에서 슬그머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첫번째 암봉에 올라붙었다
두 사람은 내 실력을 과대평가했다  난 형편없는데...
한쪽만 까마득한 절벽이면 다른쪽을 보면 된다
1미터도 안되는 좁은 곳에서 어느쪽을 봐도 천길 낭떠러지다
안개에 싸여 희미하다 하지만...
버팀목으로 받쳐주는 환준씨의 발을 딛고 남편의 손을 잡고  덜덜 떨면서
눈물을 찔끔 흘린다   분명 지나는 사람중에 나같은 아줌마도 더러 보였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이곳을 통과했단 말인가?
한달전 비온 다음날 팔공산 서봉 하산ㄴ길에서 바위에 미끄러 굴러 떨어진
이후로 바위공포심이 훨씬 심해졌다
앞을 내려다 보지 말고 몸을 뒤로하고 바위를 끌어 안고 한발짝씩 내려서라는데 
이러든 저러든 아무것도 못하겠다   난 오늘 죽음이다  이제 내 소원은 하나밖에 없다
무사히 여길 통과하고 살아남아 하산해서 캔커피 하나 마시는거다
 
어떻게 지났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겁먹어 울었다는 것과 두 사람을 무지 힘들게 했다는것 말고는...
거북바위 전망대에 서서 우뚝솟은 건너편 기백산과 뒤돌아 운무에 가려 희미한
남덕유쪽을 바라본다  거북바위 뒤쪽에 서니 남편이 시원찮은 모델에게 선심을 써
사진 한장 찍어준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우회길의 표시가 있다   그럼 그렇지...   분명 우회길이 있었구나..
안내산악회에서 한 부대의 사람을 인솔하려면 로프도 철계단도 없는 저 칼날 암벽을
어찌 지난단 말인가...   모든 사람들이 다 바위의 고수는 아니다
그리고 내려왔다
산성 성벽으로 보이는 저 아래쪽 평평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마지막 암봉 정상까지 400m 남았다  잘생긴 암벽의 봉우리를 오래 바라보며 
미안하지만 정상은 가지 않겠노라고... 과감하게 잘라 말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더이상 두 남자에게 스트레스를 줄 순 없다
두사람은 이십년전에 십몇년전에 올랐던 곳이다
 
정상을 못가는 사람들을 위한 길인지 희미하게 왼쪽 풀숲으로 하산로가 보인다
절대 오름길의 등산로는 되지 못할 내려꼿히는 길을 조심조심 내려와
계곡의 정상길로 접어들어서야 무사히 살아 내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일곱시간여의 천국과 지옥을 오간 산행이 마무리 됐다
지나는 차를 얻어타고 용추사 일주문앞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남편이
가지러 간 사이 환준씨와 둘이 다리앞 매점에서 음료수를 마신다
살아돌아온 기념으로 캔커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