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12성문 종주_050618

▶일시:05.06.18(토)

▶날씨:구름낀 날씨,오전에 약간 빗방울,오후에는 가끔 햇볕 비침

▶주행기록

06:10 집출발

06:20 광역버스 9401번 탑승, 광화문에서 환승, 지선버스 704번 탑승

07:40 북한산성매표소 입구 정류장 하차,아침식사

08:25 음식점삼거리(미미가든)  도착_들머리

08:34 시구문 통과

09:05 원효암 통과

09:40 원효봉 도착

09:56 원효봉 출발

10:10 북문 통과

10:24 상은사 입구 통과

11:13 약수암 통과

11:43 위문 통과

백운대 도착(점심식사)

12:50 백운대 출발

13:17 위문 통과

14:04 용암문 통과

14:09 북한산성 대피소 도착

14:19 북한산성 대피소 출발

14:34 동장대 통과

14:46 대동문 통과

15:06 보국문 통과

15:41 대성문 통과

15:52 대남문 도착(15분간 오침)

16:18 대남문 출발

16:27 청수동암문 통과

17:34 부왕동암문 통과

17:48 증취봉 통과

18:07 용혈봉 통과

18:21 용출봉 통과

18:40 가사동암문 통과

19:55 대서문 도착

20:21 음식점 삼거리 (미미가든) 도착_날머리(11시간 56분 소요)

만보계 측정:30,659보/열량1,069kcal/보거리20.54km/보속도3.21km

20:35 지선버스 704번 승차,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광역버스 9401번 환승

23:05 집에 도착

 

오늘 산행은 북한산 12성문 종주로서 오는 6월 28일 군입대를 앞둔 아들과 함께 하는 군입대기념 산행이기도 하다. 지훈이는 친구가 많고 자기 아빠,엄마와는 달리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도 주저 없이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인데도 군입대를 앞두고는 자기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내색하지는 않지만 마음이 착잡한 모양이다. 고등학교때 반장도 하고 2학년 담임선생님은 지훈이를 전교 학생회장감이라고 적극 추천하며 부모면담을 신청했으나 내가 거절해버렸다. 대개 학창시절 학생회장출신들이 정계에 발을 디뎌놓던데 국회에서 정치꾼들 하는 꼬락서니에 진절머리가 나서 아예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픈 생각이었는데 애꿎은 아들의 기만 죽인 것이 아닌지. 지금 생각 같아서는 그 때 담임선생님을 한번 만나 보는 건데 그랬다. 작년 12월에도 아들과 12성문 종주를 하려다가 청수동암문을 지나며 길을 헷갈려 남장대지,행궁터,중성문으로 빠지는 바람에 12성문 종주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꼭 완주를 해내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고 북한산 정기 듬뿍 받아 군복무 잘하도록 염원하는 의미 있는 산행인 셈이다.

 

▶북한산 성문종주는 대개 12성문 즉, 시구문,북문,위문,용암문,대동문,보국문,대성문,대남문,청수동암문,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대서문 등을 하는데 북한산에는 이들 성문외에 중성문이 있고 3개의 성문이 더있었다고 한다. 산성안의 또 다른 시구문, 중성문과 대서문아래에 각각 있었다는 수문 2개 하여 16개 성문이라고 한다.

 

↗시구문과 매표소

   

 ↗시구문매표소앞 표지판

 

08:34 시구문에 도착하다. 오늘 북한산 12성문 종주의 첫 번째 성문이다. 집에서부터의 시구문까지의 이동시간이 아침식사 매식시간을 포함해 2시간 24분이 걸렸다. 06:10에 집을 나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서 지선버스(청색) 704번으로 북한산성 매표소입구 정류장에 하차하여 입구까지 걸어 올라가 식당에서 해장국을 시켜 먹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이 1인분이어서 김밥4줄을 사다. 시구문매표소가 어디인지 물으니 다시 차도로 내려가 조금더 올라가란다. 북한천교를 지나 원효암방향을 가르키는 골목으로 접어드니 음식점삼거리에서 다시 원효암 방향을 가르키는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못미더워 학교가는 초등생에게 확인코자 물으니 그 방향을 가르키며 조금더 올라가란다. 정원수들이 심어져 있는 작은 길을 따라 오르니 저 앞에 시구문이 보이고 매표소도 안쪽에 보인다. 송장을 내어보내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尸柩門)이라 불리어지는 서암문(西暗門)은 수문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쯤 되는 산기슭에 있다

 

왼쪽에 성벽을 두고 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앞서가는 산님들이 몇 분 보인다. 원효암을 지나다_09:05.

 

↗원효봉 오르는 길

 

 

 ↗시구문오르는 진입로

  

↗북한산성매표소주차장

            

 

↗꽃 이름이 무엇인지

 

↗조금 가면 원효봉

 

 

 ↗원효봉

 

09:40 원효봉에 도착하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미숫가루 한 그릇씩 타먹은 후 원효봉출발하다_09:56.

 

↗북문 가다 바라본 만경대

            

 

 ↗북문

 

↗염초봉은 위험

 

 

↗백운대로 향하는 지름길이 숨어있네요

 

10:10 북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두 번째 성문이다. 북문은 원효봉과 염초봉을 잇는 능선사이의 고갯마루에 있다. 방위상으로 당연히 북쪽의 대문으로서 누각도 있었다지만, 원래부터 클 대(大)자가 빠진 채로 이름이 붙어지고, 지금은 누각조차 없어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 도성에서도 동,서,남 쪽의 문들은 다 대문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유독 북쪽의 문은 대자가 없다. 북문앞에는 염초봉을 우회하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통계적으로 염초봉는 향로봉과 함께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대표적인 인명사고 다발지역이라고 한다. 암벽등반장비를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 채 릿지산행을 막무가내로 하다보니 아차 실수가 곧바로 최소한 중상이라는 인명사고로 이어진다고 한다. 지난번 향로봉을 릿지한 경험이 있어 순간 오늘 한번 염초봉 릿지를 하고픈 마음이 잠시 동했지만 산행 왕초보인 아들을 대동하였기에 마음을 접고 상운사방향을 향하다. 상은사 입구에 도착하니_10:24 안내표지판에 등산로없음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일전에 선행자의 산행기가 생각나 무시하고 상운사방향으로 가니 상운사 직전에 오른쪽 방향 아래로 백운대로 향하는 소로가 나있다. 다만 철레일이 놓여 있기에 철레일을 넘어서 가야한다. 레일 표면이 녹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기적으로 작동을 하는 것 같아 사람이 지나다니기는 위험하여 입구에 등산로없음으로 안내를 한 모양이다. 관악산 연주암 뒤편 등성이에도 이와 거의 같은 철레일이 깔려 있었던 기억이 난다. 대동사를 지나 게곡으로 내려서다. 백운대를 오르는 계곡길은 구간 구간 너덜길과 비탈길이 반복된다. 약수암을 거쳐_11:13 위문에 오르는 길은 참으로 가파르다. 오른쪽 무릎이 어째 느낌이 안좋다. 2주전 지리산 종주시 하산길에 맞은 무릎통증이 완전히 가시지가 않은 모양이다. 오른쪽 쌍스틱을 배낭에 담고 왔지만 오늘 종주는 어디 한번 스틱없이 해보려고 아직 사용을 않고 있다. 가다 서다 한숨 돌리고를 반복하다. 막바지에는 나무계단이 놓여 있다. 계단 중간에 멈추어서 한숨을 돌리다. 게단을 내려오는 한 산님이 옛날 계단 없던 때에는 보통 힘든 구간이 아니었다고 동행하는 동료에게 일러주고 있다.

 

↗상운사 앞에 있는 철레일

 

 

↗위문

 

11:43 위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세 번째 성문이다. 일명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해발 720m이다.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네모난 형태의 암문이다. 북한산 정상 백운대(836.5m)를 오르려면 원효봉 능선이나 숨은벽등 우이능선의 릿지를 제외하곤 거의 이 위문을 통과하게 된다. 위문이 항상 붐빌 때 온 기억때문인지 몰라도 오늘은 별로 붐비지가 않다. 백운대 오르는 길도 붐비지 않는다. 어떤 때는 백운대 오르는데 30분이 족히 걸릴 때도 있다.

 

 백운대에서

 

▶백운대 정상에 서다_11:59. 사방을 조망해 본다. 스모그현상인지 약간 흐리게 조망된다. 기념사진을 몇 컷 찍다. 백운대,만경대,노적봉은 북한산의 삼각혈이다. 간악한 일본아이들이 북한산의 정기, 한민족의 정기를 완전히 끊어버리려고 노적봉,백운대,만경대 등의 정수리에 신주로 만든 못침을 박아 놓았다. 을지로5가에서 식당업을 하는 백태흠옹이 노적봉의 화강암정수리 속에 끄트머리가 보일락말락한 직경 4센티의 철침을 1년 넘게 주말마다 올라가 바위손상을 피하기 위해 끌로 철주 주변만 둥글게 파서 무려 140cm나 되는 신주를 끄집어 냈다고 한다. 이 민족적 울분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역사를 바로 인식해야 함을 되새겨본다. 언젠가는 우리 민족도 일본을 식민지화하여 후지산 정수리에 신주철침을 박아 볼 날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도봉산 오봉이 바라보이는 안부에 앉아 점심을 먹다. 도봉산,사패산 종주도 아들하고 작년 늦가을에 한바 있다. 점심을 마친 후 백운대 출발_12:50. 위문에서 용암문가는 길은 여느 토요일 같으면 교행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지체가 되던데 오늘은 좀 덜 붐비는 것 같다. 만경대 아래 기슭을 지나다. 저 위에는 피아노바위가 있다. 직벽을 풋홀드(foot hold), 핸드홀드(hand hold)를 이용해 옆으로 건너는 모습이 피아노 치는 자세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지난 3월 등산학교 암벽실습을 만경대구간에서 했는데 피아노바위를 건너며 아찔하여 로프에 카라비너를 끼웠음에도 자세를 제대도 갖추지 못하고 겨우겨우 건넌 기억이 난다. 그때 용아장성을 다녀온 산님이야기로는 용아장성구간에는 피아노바위정도의 난이도 구간이 많다고 한다. 어떤 산행기에서 그러던데 흔히들 산악인의 자격을 논하는 잣대로 지리산종주, 설악산용아장성릿지등반, 지리산천왕봉을 경유한 칠선계곡산행을 말한다고 한다. 현재 용아장성,칠선계곡은 통행금지구역으로 정해져 있다.

 

용암문

 

 

 동장대

 

14:04 용암문 통과하다. 오늘 종주 네 번째 성문이다. 해발 580m에 위치한 성문으로 도선사, 북한산장, 노적봉을 연결하며, 옛날에는 중흥사,태고사로 통한는 길목이라 한다. 북한산장에서 도선사로 바로 내려가는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문이다. 이 일대의 수비를 위해 세웠다는 용암사의 유허지에는 무너진 탑과 석축만 남아 있다고 한다. 북한산 성문 이름 중 암문이라고 되어있는 문은 누각 없이 문만 설치된 문을 말한다고 한다. 잠시후 북한산성 대피소에 도착하여 볼일 보고 샘터에서 식수를 보충한 후 출발하다. 동장대를 지나다. 시단봉 아래에 있는 동장대는 그 아래쪽 산성계곡 맞은편에 자리한 행궁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장소에 설치된 지휘소이다.

 

삼국시대부터 중원을 차지하는데 있어서 북한산 일대는 국토방위상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당시부터 <북한산을 얻는 자는 이 땅을 얻는다>라는 설이 유포되었다. 이 처럼 북한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삼국시대부터 인정되어 왔음에도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쭐이 나고서야 본격적인 축성 논의에 들어간다. 임진왜란때는 왕과 조정이 종묘사직과 백성을 버리고 엉겁결에 평양과 신의주로 피난을 가고, 병자호란때는 군신 모두가 남한산성으로 기어들어가 항쟁을 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항전을 포기하고 오늘의 송파인 삼전도로 다시 기어나와 청태조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찛는 것)>하는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만 되었다. 얼마전 무현대통령이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 전 나란히 서서 웃으며 악수를 하던데 그 옛날 상황을 패러디한다면 노무현대통령이 광화문네거리에서 만면에 웃음짓고 앉아 있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삼배구고두>한다고 상상을 해보라. 혀 깨물고 자결할 일이 아닌가. 임란이 끝나갈 무렵 선조는 재위 29년인 1596년에 왜의 재침에 대비해서 북한산성의 축성을 계획한 바 있으나 무산되고 만다. 다시 효종에 의해 축성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적이 있는 효종은 북벌론을 꾀하며 북한산에 성을 쌓기로 결심했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축성론은 다시 잠수를 한다. 그 뒤 숙종이 즉위하면서 축성논의가 다시 본 궤도에 오른다. 조정의 축성 찬반론이 팽팽이 맞선 가운데 결국 숙종 37년에 축성 공역이 시작되어 군인들을 동원시켜 착공 6개월만에 이 대역사를 마치게 된다. 이처럼 숙종 임금의 강력한 의지로 축성이 완료된 당시의 북한산성에는, 먼저 산성 내부에 임금이 머무를 행궁을 중심으로 각종 관아와 창고 및 군대의 숙영지, 여러 개의 사찰과 산성 내에 거주할 민간인들의 주택 등이 들어서서 하나의 산중도시를 형성하게 된다. 숙종 37년에 수문(水門),북문(北門),서암문(西暗門),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일명 위문),용암암문(龍岩暗門, 일명 용암문),소동문(小東門),동암문(東暗門),대동문(大東門),소남문(小南門),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대서문(大西門) 등 13개 성문을 축조했다. 그리고 3년 뒤에 중성(重城)을 축조하며 중성문(中城門),시구문(尸柩門),수문(水門) 등 3개문을 추가로 지어 모두 16개의 성문이 북한에 생기게 된다. 그리고 동,서,남,북의 각 방향의 고지대에 지휘소 겸 관측소인 장대(將臺)가 설치하게 된다.

이런 시설물들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였다고 한다. 그 때 노족봉에서 사태가 일어나 중흥사터에 있던 일본군 헌병대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동장대를 비롯한 여러 건물고 시설물들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나마 겨우 살아남은 일부 시설물마저 6.25 전쟁 당시 산성계곡 안으로 유인된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미군이 감행한 집중폭격과 포격으로 깡그리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숙종 임금의 강력한 호국의지에 힘입어 어렵사리 축조된 북한산성은, 당초 기약했던 호국의 요새로서는 제 기능을 한번도 발휘해 보지 못한 채, 참담했던 국가적 불행이 연속되는 와중에서 허물어진 성벽만을 잔해로 남긴 채 애통하게도 그렇게 스러져간 비운의 산성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근래에 들어 성벽의 여러 구간에 대한 보강공사와 함께, 대동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 등 클 대(大)자 붙은 성문과 중성문의 누각들이 복원되었고, 지휘소 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장대가 복원되었다. 치욕스런 애통의 역사 한 궤를 펼쳐보았다. 그런데도 우리 민족은 이 지구상 아직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6자 회담이 어쩌구 저쩌구 강대국 논리에 휘말리고 있으니 참으로 애통할 노릇이다. 조국통일 민족통일을 빨리 이룩해 주변국과 대등한 위상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대동문 가는 길 성벽에 핀 꽃

  

 대동문

 

14:46 대동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다섯 번째 성문이다. 해발 540m. 진달래 능선을 타면 대동문에 이른다. 서울 도성의 대문들은 동대문, 남대문 하는 식으로 클 대(大)자가 이름의 중간에 붙는데, 북한산성의 대문들은 도성의 그것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클 대(大)자를 앞에다 붙여 놓았다고 한다. 오른쪽 무릎이 안 좋아진다. 에어파스를 뿌리다. 약간 통증을 가시는 듯하다.

 

 

보국문

 

15:06 보국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여섯 번째 성문이다. 보국사가 아래에 있어 보국문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당초에는 동쪽에 있는 암문이라하여 동암문으로 불렸다 한다. 여기는 해발 567m에 위치하고 정릉을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다. 성벽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오른쪽 무릎이 전기 통하듯 찌릿찌릿하여 앗 하고 멈춰서다. 구급낭에서 안티푸라민을 꺼내 두껍게 바르며 마사지를 하다. 누르면 아프지는 않는데 무릎을 폈다 구부렸다 하면 통증이 느껴진다. 결국은 배낭에서 쌍스틱을 꺼내어 주행을 하다. 잠시 갈등이 인다. 대남문에서 하산하느냐 아니면 기어서라도 12성문 종주를 강행할 것이냐. 지훈이는 아빠 무리하지 마세요 하지만 마음속으로 지난번에 성문종주를 실패한 바 있어 오늘은 꼭해내리라 마음을 먹고 있는 모양인데 내 무릎이 말썽이니 어찌 한담. 쌍스틱이 역시 효과적이다. 오늘 들머리 출발시부터 사용했더라면 무릎통증시기를 더 늦출 수 있었거나 아니면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북한산에서 스틱을 사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나 짜리 스틱을 쓰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쌍스틱을 쓰는 사람은 거의 드문 것 같다. 우리 나라 등산 역사에서 쌍스틱을 쓰게 된 시기는 등산학교 강사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을 하면서 등산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에게도 사용하도록 홍보를 하면서 차츰 대중화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쌍스틱을 사용하는 등산학교 강사들의 모습을 보고 우스꽝스럽다고 놀려대었다고 한다. 여하튼 무릎 관절이 신통치 않는 산님들은 쌍스틱을 사용하면 덜 힘들게 주행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성문

 

15:41 대성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일곱 번째 성문이다. 해발 565m. 대성문은 북한산의 성문중 가장 크다. 평창동 쪽의 형제봉 능선과 연결되는데, 이 문이 중시된 이유는 유사시 임금이 도성의 궁궐로부터 이 문을 통해서 행궁으로 행차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방위와는 무관하게 왕격에 어울 리도록 클 대(大)자가 붙은 것이란다.

 

 

대남문

 

15:52 대남문에 도착하다. 오늘 종주 여덟 번째 성문이다. 해발 663m. 서울시에서는 서울 정도 600주년사업으로 1991년에 문루를 복원시켰다고 되어 있다. 2인용 매트를 나무 그늘 아래 펴고 방울토마토를 먹은 후 둘이 나란히 바닥에 드러눕다. 눈을 감고 잠시 가면하다. 핸드폰소리에 가면 상태에서 벗어나다. 받아보니 집에서 딸이 전화를 한 것이다. 한 10여분 정도 눈을 붙인 것 같다. 꿀맛 같은 오침이다. 머리가 아주 상쾌해 진 것 같다. 녀석이 아주 적시에 전화를 해 준 것 같다. 대남문을 출발하다.

 

 

 청수동암문

 

16:27 청수동암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아홉 번째 성문이다. 해발 694m.작년에 청수동암문을 지나 길을 잘못 들어 남장대지로 빠진 기억이 되살아나 이번에는 아예 성곽을 확인하며 주행을 하다. 보현봉에서 서북쪽으로 휘어지는 의상능선에는 의상7봉(의상봉,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문수봉)과 3개의 암문(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이 있다. 원래 이들 세 암문을 통과하는 등산로는 없었다고 한다. 김신조 사건이후 1992년까지 이 일대로의 입산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다 1993년부터 출입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부왕동암문은 멀기만 하다. 아직도 북한산 여느 능선보다 산님들의 발길이 잦지 않은 듯 이제까지 지나온 등로와는 다르다. 암릉비탈을 오르 내리는 길은 긴가 민가 하며 가는 구간이 꽤 된다. 부왕동암문이 하도 안나타나 벌써 지나치지 않았나 하며 고개를 가우뚱거리며 가다 앞에서 산님일행이 다가오기에 물으니 조금만 더 가면 나온다 한다. 그러나 무릎통증을 줄이며 쌍스틱에 의지하며 걷다보니 매우 많이 가니 부왕동암문이 나온다.

 

 

부왕동암문

 

17:34 부왕동암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열 번째 성문이다. 해발 521m. 부왕동암문은 원각문(圓覺門)이라고도 불린다. 증취봉 기슭의 험한 능선에 산토끼처럼 숨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관목이 없는 의상능선상에서는 좌우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계곡과 능선이 한눈에 조감된다. 증취봉,용혈봉,용출봉을 통과하다. 대학생인 듯한 산님이 대남문방향이 맞느냐고 묻길래 2시간 정도의 거리라고 말하다. 이 산님 대남문에서 하산한다면 일물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랜턴은 준비했는지 걱정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대전에 사는 친구가 가족들을 데리고 평소 자주 오르는 대둔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오랫만에 가족들과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머무르다 하산을 하게 되었는데 중간 정도 내려오던 중 일몰시간이 되어버렸다. 잠시후 하산길 계곡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칠흙 같은 어둠에 휩싸여 말 그대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주 오르던 산이기도 하고 해지기 전에 내려오려니 하고 랜턴도 지참하지 안했다고 한다. 할 수 없어 4식구 꼼짝 못하고 119로 구조요청을 했단다. 평소 핸드폰이 터지는 지점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용케 터졌다는 것이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아랫마을 자원구조대원 한분이 랜턴 빛을 비추며 도착했는데 4식구가 앉아있는 지점이 폭포옆 낭떠러지였다고 한다. 대둔산을 오른 분은 아시겠지만 정상에 오르는 게곡길은 길지는 않지만 대단히 가파른 그야말로 직벽에 가까운 비탈길이다. 만약 그때 조급한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 한 발자국만 움직였어도 그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져 자칫 큰 인명사고가 날뻔한 했다는 것이다. 친구한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많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앞으로의 산행에 좋은 교훈이 될 것 같다.

 

 

가사동암문


의상능선에서 백운대를 바라본 파노라마

 

18:40 가사동암문을 통과하다. 오늘 종주 열 한 번째 성문이다. 해발 448m. 국녕사가 내려 보이다. 그래서 국녕문(國寧門)이라고 불린다. 엄청 큰 좌불상이 백운대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의상봉을 앞두고 360도를 조망할 수 있는 안부에서 파노라마 사진을 찍다. 의상봉을 지나서 잠시 가니 등로로 보이는 암릉 하산길로 내려서다. 뒤따르던 아들이 성곽을 벗어남을 일깨운다. 돌아서서 좌우를 살피니 정말 성곽을 넘어서 있다. 꽤 날카로운 관찰인데 순간적인 판단을 등한히 해 막바지에 꽤 알바를 했다. 잠시 멈추고 성벽을 따라가는 길을 찾았어야 하는데 그대로 주행을 계속하다. 내려 오면서도 오늘의 종주 마지막 성문인 대서문방향이 아님을 알게 되지만 계속 내리막길이다보니 오른쪽 무릎통증을 이겨내고 되돌아 올라가 제대로 된 대서문방향을 찾을 엄두가 안나다. 아들도 대서문을 마지막으로 찍어야 하는데 하다. 그래서 일단 하산하다 용암사쪽으로 틀어 대서문을 찍기로 아들하고 의견을 모으다. 성곽을 벗어난다는 아들의 말을 인지하였으면 신중히 판단을 했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건성으로 들어버렸다. 암릉을 내려서 관목지대를 따라 상암사방향으로 가니 샘터가 나오고 몇 분이 샘터 물을 받고 있다. 여자분에게 대서문방향을 물으니 잘모른다고 하다. 옆의 남자 한분이 조금 올라가면 된다고 하다. 샘터를 벗어나니 용암사 안내 표지석이 나타나고 포장도로가 나타나다. 많은 산님이 내려오고 있다. 도로를 따라 잠시 오르니 드디어 대서문이 나타나다.

 

 

 대서문

 

19:55 대서문에 도착하다. 오늘 종주 열 두 번째 마지막 성문이다. 해발 150m.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중심이 되는 문이라고 한다. 해발 150m의 낮은 구릉지에 서쪽을 향하여 있기 때문에 당시 군사적으로 왜나 청에 취약한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상가점원에게 대서문에서 시구문까지 성곽을 따라 갈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잘 모른다고 하다. 대서문 성곽을 올라 시구문쪽을 살폈으나 잡풀이 우거지고 도저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성곽에서 내려와 성곽 아랫길로 내려서니 개 한마리가 나타나 엄청 짖어댄다.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태세다. 암자처럼 생긴 집에서 주인인 듯 한 남자가 머리를 내밀고 짖지 말고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건만 이놈의 개는 계속 개소리를 해댄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개를 무시하고 지나치니 뒤에서도 잠시 짖다가 이내 멈춘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동네 개한테 되게 물려 며칠 동안 열이 나고 물린 곳에 이명래고약을 붙이고 고름을 짜내는 등 엄청 혼이 난적이 있기에 요즘도 험하게 개소리하는 개를 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 계곡 음식점촌을 지나 산성매표소 방향을 향하다. 잠시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계곡 음식점촌을 가로지르는 철 구름다리가 있기에 건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네온싸인이 요란하여 자칫 음식점으로 들어가는 구름다리로 착각할 듯하다. 구름다리를 건너 아래로 잠시 내려오니 오늘 아침 원효봉을 향했던 음식점삼거리에 도착하다_20:21. 아들 말마따나 오늘 12성문 종주 동그라미 폐곡선이 완성되었다. 성문종주 주행시간 11시간 56분. 만보계 측정거리 20.54km.(만보계오차가 다소 있는 듯) 빠른 걸음으로 보통 6-7시간안에 주파를 한다는데 우리는 장장 12시간 두배 가량 시간이 소요되다. 소요시간보다는 해냈다는 성취감. 탐방하는 자세로 능선을 더듬으며 걸었다는데 의의를 두고 싶다. 지선버스 704번을 타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내리다. 교보빌딩 뒷편 낙지촌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세종문화회관으로 와서 광역버스 9401번으로 환승하여 동아일보 사거리를 지나다 보니 옛날 국제극장자리에 청소년축구 브라질전을 응원하려는 붉은악마들이 운집해 있다. 23:05 집에 도착하다.

 

<낙수>

성문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박인식<북한산>에서 많이 인용을 하였습니다. 산행기의 본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북한산에 서려있는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역사의 발자취를 상기하고픈 욕심이었음을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