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산 산행기(광주)


 

            *산행일자:2008. 7. 23일(수)

            *소재지  :경기광주/용인

            *산높이  :태화산644m, 마구산595m, 정광산563m, 노고봉574m,

                      발이봉514m, 용마봉503m, 백마산464m

            *산행코스:추곡리백련암입구-백련암-태화산-마구산-정광산-노고봉

                      발이봉-용마봉-백마산-쌍동리동광아파트앞

            *산행시간:9시10분-18시18분(9시간8분)

            *동행    :나홀로 

 

 

  경기도 땅 광주와 용인은 제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파주에서 태어난 제가 1974년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 집사람을 만나 3년 후 결혼했고, 1978년 용인으로 이사가  연년생의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두 아들이 흙을 만지고 놀면서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몸과 정신 모두 건강하게 클 수 있었던 것도 그 후 1991년 과천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만 13년간 줄곧 소읍 용인에서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상급학교 진학 건으로 큰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용인을 떠나야 했지만, 어찌했던 저를 가장으로 한 우리 집 가족사는 이렇게 광주에서 잉태되고 용인에서 시작됐습니다.


 

 제가 각별히 광주나 용인을 지나는 산줄기에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그 특별한 의미 때문입니다. 그간 저는 이 두 곳의 산들을 나름대로 올랐습니다만, 아직도 더 올라가야 할 산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2005년 겨울 한남정맥을 종주하며 용인 땅을 지났고, 올 초 한남검단지맥을 따라 광주와 용인의 산줄기를 나란히 밟았습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광교산, 검단산, 무갑산, 앵자봉, 양지산, 태화산과 백마산을 점의 산행으로 올랐으며, 검단산(하남)-용마산-남한산, 검단산(광주)-남한산-객산 및 태화산-마구산-노고봉을 연계해 선의 산행도 했습니다. 이제 남은 산들은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앵자지맥을 종주하고, 또 검단/앵자 양 지맥에서 분기된 몇 개의 분맥이나 단맥들을 종주하면서 올라볼 생각입니다.


 

  어제는 그동안 별러왔던 태화산-노고봉-백마산을 잇는 산줄기를 종주했습니다.

2002년 7월에는 출발점인 태화산에서 길을 잘 못 들어 포기했고 그 다음 달에는 백마산에서 용마봉을 지나 발이봉을 오르는 중 안부에서 왼쪽으로 잘 못 빠지는 바람에 두 번 다 종주에 실패했습니다. 2003년 9월 태화산에서 시작해 마구산을 거쳐 노고봉까지 진출했으나 시간이 모자라 오른 쪽 골프장으로 내려서는 등 도합 3번을 시도했으나 모두 불발로 끝났습니다. 그 후 백두대간과 정맥을 종주하느라 새까맣게 잊고 지내다 얼마 전 “한국의 산하”사이트에서 우연히 먼저 다녀온 분의 자세한 산행기를 보고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고 뜻을 세웠습니다. 금남호남정맥 종주 차 진안으로 내려가고자 했으나 비가 많이 내린다하여 그만두고, 밤늦게나 비가 온다는 서울근교지역의 산들을 찾아보다가 이때가 찬스다 싶어 경기도 땅 광주와 용인을 지나가는 태화산-노고봉-백마산의 연계산행에 나섰습니다. 


 

  아침9시10분 추곡리 백련사입구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7시 반이 조금 지나 강변역을 출발한 동원대 행 좌석버스가 천호동을 거쳐 경안I.C를 빠져나가기까지는 제 속도를 냈습니다. 광주시내로 진입한 후부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느라 8시40분에야 곤지암에 도착했습니다. 8시40분에 출발하는 추곡리 행 버스가 2분가량 늦게 정류장에 도착하는 바람에 간신히 이 버스를 잡아탈 수 있었습니다. 9시 조금 넘어 백련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짐을 챙긴 후 이내 오른 쪽 위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백련암으로 올라갔습니다. 26분간 걸어 시멘트 길이 끝나는 주차장 공터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동행한 벌레들이 20분간 더 걸어 다다른 백련암에서도 물러서지를 않았습니다. 비온 뒤끝이라 습도가 높고 날씨도 후덥지근해 이번 산행 내내 벌레들의 극성이 멈출 것 같지 않았습니다.


 

  10시22분 해발644m의 태화산을 올랐습니다.

오름 길과 절이 위치한 높이만 보면 운길산의 수종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했는데 막상 올라와보니 절의 규모나 운치가 수종사에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양수리의 한강물만은 못해도 남동 쪽 아래에 자리한 도척저수지만 보였어도 좀 더 시원한 느낌이 들었을 텐데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는 데다 절터도 좁아 답답했습니다. 대웅전 뒤 산신각의 샘터에서 물을 떠 마신 후 그 옆으로 올라 헬기장에 이르자 비로소 시야가 탁 트였고 왼쪽으로 통신탑이 보였습니다. 통신탑을 지나 오른 쪽으로 조금 옮기자 정상석이 나타나 이제껏 제가 통신탑이 서있는 봉우리가 태화산의 정상으로 오인해왔음을 알았습니다. 정상에서 만난 광주시 도척면의 한 직원은 다른 두 분들과 함께 나무의자 설치공사를 마무리 중이었는데 제가 광주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1975-1977년에는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합니다. 


 

  1974년 12월 파주의 문산종고에서 전보되어 광주의 광주중학교에 부임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여선생 한 분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해 한동안 의아해 했습니다. 나중에 결혼해 1966년 고2 때 서대문의 한 회관에서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모임에 참석하느라 여러 번 얼굴을 스쳐본 것임을 확인하고 나자 천생배필의 인연이 바로 이런 것이다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초월면의 무갑산이 제일 높고 험한 것으로 들었을 뿐 막상 광주 최고봉인 태화산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험하다는 무갑산은 감히 오르고자 생각도 못했고, 1975년 늦은 여름 그녀와 함께 해발4백m대의 백마산을 오르다가 산 중턱의 백운사에서 내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늦고 길이 나있지 않아 정상을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날 밤 2시간여 경안리까지 걸어가면서 사랑을 키운 것이 크나큰 수확이었기에 이제껏 여기 백마산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11시27분 해발595m의 마구산을 올랐습니다.

태화산 정상에서 15분을 쉰 후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마구산으로 향했습니다. 내림 길이 가팔라 로프도 걸려 있고 자칫 방심했다가는 발을 잘 못 내딛어 밑으로 고꾸라질 만큼 거의 수직에 가까운 철제 계단도 놓여 있었습니다. 참나무와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길을 걸어 내려가는 중 금어리에서 올라온다는 한 젊은이를 만나 인사를 나눈 후 한참을 더 걸어 헬기장에 올라섰습니다. 방금 내려온 태화산의 전모가 한 눈에 잡힐 만큼 시야가 탁 트인 헬기장에서 사진 몇 커트를 찍은 후 북서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야트막한 봉우리 2개를 넘어 왼쪽으로 용인의 둔전리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를 지난 지 5분 후 용인시에서 가장 높다는 마구산에 다다랐습니다. 정상의 바위가 말아가리 모양으로 보인다하여 말아가리산 또는 마구산으로 불린다는데 태극기가 꽂혀있는 돌탑 옆에 마구산으로 점잖게 표현된 표지판이 서 있었습니다. 2시간 남짓 걸어 광주시와 용인시의 최고봉을 두루 밟았다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북쪽으로 얼마만큼 내려서자 길이 완만해졌습니다. 얼마 전에 인사를 나눈 젊은이는 어느새 태화산 정상에 올랐다가 되내려와 왼쪽 아래 금어리로 내려갔습니다.


 

  12시37분 패러그라이딩 활공장에 올랐습니다.

오른쪽 아래로는 광주의 시어골로 내려서는 길이 갈리는 안부사거리에서 10분 남짓 쉬며 한동안 만나지 못한 후배사장에 전화를 걸어 귀가 길에 강변역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안부사거리에서 15분간 가파른 비알 길을 올라 삼각점이 서있는 475.1봉에 올랐습니다. GPS수신을 돕기 위해 주위의 나무들을 베어낸 475.1봉에서 활공장으로 올라가는 비포장차도와 만나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차도를 따라 10분가량 걸어 초록색과 파란색의 비닐 망을 뒤집어쓴 넓은 공터의 활공장에 올라서자 삼색의 풍향기가 바람이 부는 방향을 일러주었습니다. 왼쪽 아래로 보이는 군부대안 넓은 공터가  10년 전 두 아들과 같이 패러글리이딩을 배운 곳인 듯 했습니다. 활공장을 떠나 자동음성기가 달린 무인관측소를 지나자 바위길이 이어졌습니다. 노르스름한 개살구를 하나 따먹고 샛노란 산나리 꽃에 눈길을 주면서 480-520m대의 능선을 한참 걸어 13시11분에 헬기장에 다다랐습니다.


 

  1977년 여름 생각지도 않게 집사람이 암에 걸리는 바람에 막 배우기 시작한 골프를 그만두었습니다. 20년 가까이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 옮긴 회사에서 임원들에 골프를 칠 것을 권장해 실내연습장에서 배워나가는 중 집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접하고 바로 골프 연습을 중단했습니다. 수술경과가 좋아 다시 직장생활을 해도 좋다는 의사선생의 말씀을 듣고 이듬해 3월 다시 학교에 복직했습니다. 그해 11월 부서직원들의 권유로 두 아들과 함께 패러글라이딩을 배우러 한 번 나갔고 그 때 연습장소가 바로 저 아래 군부대 공터인 것 같았습니다. 70m높이에서 이륙하여 딱 두 번을 날라보고 상공을 비행 때의 짜릿함이 바위를 오를 때보다 절대 못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골프대신 패러글라이딩을 더 배워 더 높이 하늘을 날라보자는 제 꿈도 완치됐다는 집사람의 암이 재발되어 접어야 했습니다. 생사가 기로에 놓여있는 집사람을 놔두고 저만 뭔가를 새로 배로 배우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14시 정각 해발574m의 노고봉에 올랐습니다. 

메뚜기 4촌 쯤 되는 곤충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푸른 풀밭의 헬기장에서 고도를 20m가량 낮추어 안부사거리에 내려섰습니다. 노란 몸통의 꾀꼬리(?) 한 마리와 삼색조의 이름 모르는 새들이 자주 얼굴을 내보여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한 곳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지를 못하는 새들의 순간동작을 포착해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제게는 역시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그들이 지저귀는 울음소리만은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안부사거리에서 15분을 가파르게 올라 해발 563m의 정광산을 올랐습니다. 키가 아주 낮은 표지석 상단에 산 이름과 산 높이가 새겨진 정상에서 점심을 들은 후 비교적 높낮이가 별로 없는 평탄한 능선 길을 따라 걸어 노고봉에 오르자 바퀴달린 나무의자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백련암 입구에서 여기 노고봉까지는 5년 전에 친구들과 함께 한번 오른 길이어서 길이 많이 눈에 익었습니다.  


 

  야생조류가 내는 소리에는 송(song)과 콜(call)이 있다합니다.

새들이 짝을 부르거나 자기 영역임을 선언하기 위해 내는 소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울음소리이면 송(song)이고, 울음소리가 아닌 나머지 소리들은 콜(call)이라 부릅니다. 나무를 두드리거나 몸을 흔들어 내는 소리는 울음소리가 아니고 콜입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는 대표적인 콜(call)입니다. 일반적으로 작은 새일수록 울음소리를 잘 내고 큰 새들은 소리다운 소리를 내지 못해 콜(call)로 존재를 나타냅니다. 어떤 새들이 내는 울음소리는 세력권방위용과 구애용이 서로 다르다는데 앞서 본 새들이 낸 소리는 저를 침입자로 오인하고 세력권을 지키고자 내는 울음소리 같아 화답송을 보내기가 머뭇거려졌습니다.  


 

  15시45분 해발514m의 발이봉을 올랐습니다.

노고봉에서 서쪽으로 4-5분을 진행하다 북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몇 걸음 옮기자 삼거리가 나타났습니다. 능선이 오른 쪽 바위 뒤로 이어져 왼쪽의 좋은 길을 버리고 희미하게 난 이 길로 들어선 것이 반시간 이상 생고생을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먼저 오른 한 분의 산행기에도 오른 쪽 길로 나와 있고 능선의 흐름으로 보아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 주저하지 않고 바위에 올랐다가 풀 숲길로 내려섰습니다. 자랄 대로 다 자란 산딸기와 또 다른 가시나무들이 얼굴을 때리고, 땅을 뒤덮은 풀들이 발목을 잡아 조심스럽게 진행했습니다. 100m가 훨씬 넘어 보이는 풀 숲길을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공사 중인 골프장의 가파른 절개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쇠줄로 고정시킨 초록색의 철 그물망 위로 발을 내딛자 죽 미끄러져 하마터면 저 밑으로 떨어질 뻔 했습니다. 절개면 상단의 사면을 따라 내려가자 해도 바위가 미끄럽고 가시나무 밭이어서 쉽지 않을 것이고, 쇠줄을 잡고 바로 내려가기는 경사가 너무 심해 중간에 팔에 힘이 달려 그냥 떨어지지 않을 까 걱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몇 분을 보냈습니다. 다시 왼쪽을 보니 바로 앞의 바위를 비껴갈 만한 공간이 보여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가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스틱과 카메라를 배낭 속에 집어넣고 한 층을 내려서는데 성공했습니다. 한 층을 더 내려가 만난 평평한 면을 따라 풀숲을 헤쳐가다 적당한 지점에서 오른 쪽 골프장 안으로 내려섰습니다. 시멘트 길을 따라 2-3분을 내려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붙어 능선 길에 오르니 골프장영역을 알리는 하얀 로프 줄밖으로 길이 잘 나 있어 다행이다 하면서도 또 멍청하게 알바를 했다 싶어 씁쓰레했습니다. 최종확인은 못했지만 바위 앞 삼거리에서 왼쪽의 좋은 길로 내려가면 좀 돌더라도 제가 막 올라선 이 길로 확실하게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제 길로 올라선 다음 편안한 길을 걸어 안부사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오른 쪽 길은 광주의 독고개로 내려서는 길이고, 용인시 모현의 한국외국어대로 내려가는 길은 왼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안부사거리에서 오른 쪽의 철조망울타리를 따라 고도가 170m 차이 나는 발이봉을 오르는데 반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이정표가 서있는 넓은 공터의 발이봉에서 7분간 쉬었다가 백마산으로 향했습니다.  


 

  왼쪽 아래 한국외국어대가 자리 잡은 모현면(慕賢面)은 고려 말 충신인 포은 정몽주선생이 묻히신 곳입니다. 쇄포면이 모현면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포은선생의 유해가 이 면의 능원리에 안장된 후 부터라 합니다.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모현면에 모현중학교가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77년 결혼한 부부가 한 학교에 근무할 수 없어 집사람이 전근을 간 곳이 바로 모현중학교였습니다. 부임 다음해에 첫 졸업생이 나왔으니 학교를 열고 신입생을 처음 받은 것은 1975년이고 따라서 올 봄 31회 졸업생을 배출했을 것입니다. 집사람은 두 번에 걸쳐 5년간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학생들을 현인(賢人)으로 키우고자 애썼습니다. 선생이 되어 남의 자식들을 현인으로 키우지 못하면서 제 자식이 현인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은 잠시 교직에 몸담았던 제가 다 아는 일인데 교직을 천직으로 삼은 집사람이 몰랐을 리가 없기에 두 아들의 올곧은 커나감을 위해서도 더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에 광주와 용인을 어우르는 산줄기를 이어가면서 가슴이 뿌듯한 것은 그 당시에 저는 광주에서, 그리고 집사람은 용인에서 둘 다 학생들을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17시24분 해발 464m의 백마산을 올라 태화산-노고봉-백마산을 잇는 산줄기 종주를 마쳤습니다. 이번에 처음 오른 발이봉에서 왼쪽으로 내려섰습니다. 480봉을 넘어 안부삼거리에 내려서자 오른 쪽 아래로 난 큰 길이 눈에 익은 것은 5년 전 백마산을 출발해 용마봉을 거쳐 발이봉을 오르는 중 이 길로 잘 못 들어 하산한 적이 있어서입니다. 안부삼거리를 출발해 20분간은 헬기장이 들어선 군부대훈련장을 지났습니다. 모형대포가 설치된 군부대 훈련장을 지나 로프를 잡고 암릉구간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삼각점과 정상석이 세워진 해발503m의 용마봉에 오른 시각이 16시40분이었습니다. 빗줄기가 드세져 잠시 멈춰 숨을 고른 후 곧바로 백마산으로 향했습니다. 용마봉 출발 반시간이 조금 못되어 여러 곳의 로프 구간을 지나 오른 쪽 백운사로 내려서는 안부사거리에 내려섰습니다. 마지막 백마산까지는 오름길만 남아 있어 천천히 올랐습니다. 태화산에서 백마산까지 5시간 걸린다는 이정표의 표시시간보다 1시간47분이 더 걸려 백마산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의 쉼터에서 10분 여 쉬면서 백마산의 유래를 일독한 후 오른쪽 쌍동리방향으로 하산했습니다.


 

  도선대사와 고려태조 왕건의 인연은 참으로 끈끈하고 돈독했던 것 같습니다.

통일신라 말기 월출산의 한 자락에서 태어난 도선대사는 앞으로 태어날 왕건이 새 나라를 세울 큰 인물임을 미리 알고 개경에 태어날 집터를 잡아주고 왕건이 태어난 후 그를 직접 가르쳤다 합니다. 서기898년 72세로 입적하기까지 왕건에 도선비기를 전하는 등 음으로 양으로 왕건을 도와준 흔적이 꽤 여러 곳에서 전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백마산도 왕건을 돕고자하는 도선대사의 진정이 서려있는 산입니다. 대사가 이 산을 보고 새 나라를 건국할 왕건이 타고 지휘할 백마를 닮았다하여 백마산으로 이름 지었다 합니다. 이 산에서 왕건을 위해 군사들을 모집하고 병마를 훈련시켰다는 대목을 읽고 나서 대사의 왕건에 대한 충정이 참으로 대단함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국에 3,800개의 절을 지었다는 그 바쁜 대사께서 경북 문경의 대야산이 숨겨놓은 비경의 용추계곡까지 가서 왕건에 도선비결을 넘겨줬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왕건이 고려의 도읍지를 이곳에 정하고자 여러 번 내려와서 재고 또 쟀다 합니다. 백마산 동쪽 사면의 도척면(都尺面)이 도척(都尺)의 이름을 얻은 것도 따지고 보면 대사와 왕건의 인연덕분입니다. 유비가 공명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왕건은 그런 노력 없이 도선대사를 얻었으니 행운아임에 틀림없습니다. 도선대사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왕건도 그가 모셨던 궁예와 같이 풍운아는 될 수 있어도 고려왕국을 세우는 행운아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 정부의 어려움도 인사가 만사의 근본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그 옛날 대사와 인연을 맺은 왕건은 현 대통령도 부러워할 만한 행운아임에 틀림없습니다.


 


 

  18시18분 쌍동리 동광아파트 앞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이번 산행은 시간도 충분하고 날씨도 후덥지근해 백마산까지는 동네 뒷산을 산보하듯이 작정하고 천천히 걸었습니다만, 하산 길은 서둘렀습니다.  안부로 다시 내려가 33년 전에 집사람과 같이 올라 쉬었던 백운사를 둘러보자는 생각을 바꿔 50분 걸린다는 오른 쪽 쌍동리길로 바로 내려섰습니다. 고교후배사장과의 약속도 있고 다시 비가 뿌리기 시작해 급한 마음에 뛰다시피 하산했습니다. 10분을 내려가 돌탑을 지났고 얼마 후 동광아파트로 표시된 왼쪽 길로 내려가 정상 출발 40분 만에 동광아파트 앞길로 내려섰습니다.


 

  3번 국도가 지나는 도척면 쌍동리 정류장에서 강변역 행 좌석버스에 올랐습니다.

아침의 차 막힘이 그대로 재현되어 광주시내를 지나 경안IC로 진입하기까지 시간이 꽤 많이 걸렸습니다. 버스 안에서 집사람과의 이런 저런 추억들을 반추하는 시간이 자연 길어졌습니다. 그 많은 추억이 제게 전해준 한마디는 “곁에 있음이 행복입니다”였습니다. 도선대사와 고려태조 왕건은 그 끈끈한 인연이라면 살아서도 그랬으려니와 죽어서도 함께 고려왕조의 국사를 논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두 분들의 인연은 서로 살아있는 동안에만 “곁에 있음이 행복이다”라는 명제가 유효한 것이 아님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족보에 두 이름을 같이 올릴 만큼 부부의 연이 끈끈할 진대 살아있는 잠시 동안만 곁에 있을 수 있어서야 말이 안 될 것입니다. 이번에 오르내린 저 산줄기들처럼 영원히 같이 있는 것이 부부의 인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