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산행일자:2007. 7. 29일

                                *소재지  :강원 원주

                                *산높이  :1,288m

                                *산행코스:행구동-곧은치-971.2봉-원통재-입석사갈림길

                                                -입산통제소 -계골길-세렴폭포-구룡사-주차장

                                *산행시간:9시25분-16시27분(7시간2분)

                                *동행    :송백산악회원

 

                    

 

  미친 듯이 쏟아 붓는 폭우와 이 산의 거목들을 뿌리 채 들어낼 듯이 불어대는 광풍에 겁먹어 치악산 정상봉인 비로봉을 바로 앞에 두고 왼쪽 계곡으로 내려섰습니다. 지난 4월 구룡사에서 비로봉을 오른 후 남대봉으로 남진해 상원사와 영원사를 차례로 찾아 둘러본 다음 금대리로 하산한 제가 불과 3개월 만에 이 산을 다시 찾은 것은 그 때 렌즈에 이상이 생겨 찍지 못한 이 산의 속살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였는데 이번에도 예상보다 훨씬 난폭한 폭풍우로 이 산의 연봉들과 계곡들을 사진 찍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나마 산행 초반 짙은 안개에 개의치 않고 이런 저런 꽃들이 눈에 띄는 족족 셔터를 눌러대지 않았다면 아예 빈손으로 돌아갈 뻔 했습니다.


 

  치악산이 폭풍우를 불러 내친 것은 제 욕심이었습니다.

시작부터 짙은 안개로 두텁게 치마를 두른 치악산에 속살을 내보여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었는데 눈치 없이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대자 화가 치민 이 산이 주위 산들의 비구름을 모두 불러 모아 쏟아 분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누구라도 감추고 싶은 것이 있고 감추고 싶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당연 치악산도 그러한 때가 있었을 터인데 어제가 그런 날이었나 봅니다. 여름 장마가 축축하고 구저분하다는 이유로 여름 산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의 오랜 목마름을 해갈하고  초가을 가뭄에 대비해 물 비축이 필요한 이 산들에 여름장마는 더할 수 없이 고마운 것입니다. 이런 고마운 장마 비가 이제 끝이 난다는 소식을 접한 치악산이 예의를 다해 환송하고자 조신해서 장마 비를 기다리고 있는데 눈치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속살을 내보여달라며 졸라대는 제가 밉살스러워 응징한 것입니다. 응징의 시간은 시간 반이 넘지 않았지만, 응징의 강도는 대단했습니다. 저를 날려버릴 듯한 광풍이 비로봉의 접근을 막았고 항아리로 쏟아 붓는 듯한 폭우가 제 안경을 벗겨냈습니다. 눈앞의 비로봉 등정을 포기하고 북쪽 아래 계골길 계곡으로 들어선 후 희뿌옇게 습기가 가득 찬 안경을 벗어들고 하산했습니다. 착지가 불안해서 거의 기다시피 내려오느라 자연 맨 뒤로 쳐졌습니다. “네 죄는 네가 알렸다.”하며 저를 벌한 이 산이 뒤늦게 저의 방자함이 잘못임을 깨닫고 카메라를 집어넣은 후에야 치악산이 노여움을 풀고 다시 하늘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산이 벌하고자 했던 것은 제가 아니고 바로 저의 욕심이었기에 욕심을 접은 저를 보고 비로소 계곡과 폭포를 내보여주었습니다.


 

  아침9시25분 행구동에서 하차해 치악산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관음사행 좁은 길을 지나는 차들을 피해 오르느라 곧은치매표소에 다다르기 10분 동안 신경이 쓰였습니다. 가녀린 야생화 영아자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안개가 세를 더해가 산속이 어두웠지만 길 아래 계곡의 작은 폭포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가 볼만 했습니다. 첫 번째 나무다리를 건넌 후 20분을 더 올라 합수점의 세 번째, 네 번째 다리를 연이어 지났고 다시 얼마를 더 올라 마지막 다섯 번째 다리를 건넜습니다.


 

  10시51분 해발860m의 십자안부 곧은치에 다다랐습니다.

마지막 다리를 건너 3-4분을 걸어 오르자 계곡물소리가 잦아드는가 싶었는데 이내 계곡이 끝났고 경사가 가파른 산 오름으로 이어졌습니다. 산 중턱의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 후 16분을 더 걸으며 몇 개의 고개 마루를 지나 곧은치에 올라섰습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사진이 잘 안나올까 걱정됐지만 오뉴월 땡볕을 피할 수 있어 산행하기에는 딱 좋았습니다. 먼저 오른 몇 분들이 반갑게 저를 맞으며 좁쌀 꽃 등 몇 가지 산꽃들을 가르쳐주어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이 산의 대표 봉인 북쪽의 비로봉과 남쪽의 남대봉을 잇는 주능선을 곧바로 넘어서면 부곡리로 내려가는 십자안부 곧은치 고개 마루에서 왼쪽으로 꺾어 4.8km 떨어진 비로봉으로 향했습니다. 굵지 않는 통나무계단을 걸어 오르기가 불편했던 것은 통나무와 통나무사이에 흙이 빠져나가 움푹 들어간 곳이 꽤 있어 자칫 통나무를 잘못 디디어 발목을 삘까 보아서였는데 이 정도의 경사라면 계단설치가 쓸 데 없어 보였고 굳이 해야 한다면 널판계단이었으면 했습니다. 헬기장에 다다르자 안개비를 머금은 연노랑 달맞이꽃이 청아했습니다. 능선 길에 자리 잡은 수많은 야생화들의 이름들을 꿰뚫고 계신 꿈향기 님이 일러주는 대로 머릿속에는 이름을, 카메라 속에는 실체를 옮겨 넣느라 대모산님과 제가 모두 바빴습니다.


 

  12시1분 오른쪽의 촛대봉 길이 갈리는 비로봉 2.1Km 전방 봉우리삼거리를 지났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삼각점이 세워진 971.2봉에 오르기까지 10분 동안 주홍색의 동자꽃과  핑크색의 이질꽃이 즐비한 능선 길을 걸었습니다. 971.2봉을 출발해서 얼마 후에 앞서 지나간 대장 한분이 무전기로 알려준 대로 비로봉3.4Km 전방 지점을 막 지나 길섶에 피어 있는 천마를 찾아내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비바람을 가려줄 잎파랑이 하나 없이 줄기만 댕그라니 남아 있는 천마가 이 높은 곳에 곳곳하게 서서 꽃을 피우는 강인함이 바로 야생화의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한번 눈길이 갔습니다. 지형도에 샘터가 나오는 원통재를 언제 지났는지 모르고 가파른 능선 길을 올라 봉우리삼거리에 올라서자 바로 옆의 KTF 시설물이 짙은 안개로 아주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산길을 가득 메운 안개가 이번만은 나무 대신 이 산의 주인으로 나서 속살을 드러내는 사진 촬영을 더 이상은 용납 않겠다는 태세로 온 산을 두텁게 에워쌌습니다.


 

  13시2분 비로봉0.5Km 산불감시초소에 다다라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안개의 극성이 최고조에 달해 땅거미가 진 직후보다 더 어두웠지만 이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2시27분 후드득 떨어진 굵은 빗방울은 폭풍우가 바로 뒤에 와 있음을 알려주는 P파였습니다. 재빨리 방수카바를 씌우고 우의를 갈아입어 비 막음을 했는데 등산화만은 어찌 하지를 못해 어느새 시뻘건 흙탕물이 콸콸 흘러내려 수로가 되어버린 산길을 걷느라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단순히 굵은 빗줄기로 시작된 이번 비가 7분 후에 해발1,130m의 비로봉 전방 1.3Km 지점으로 왼쪽의 입석대로 갈리는 봉우리삼거리를 지나자 천둥을 불러내더니 이내 번개까지 동원해 보통사람들 만큼은 죄를 짓고 사는 제게 겁을 잔뜩 주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기 얼마 전부터 불기 시작한 태풍에 버금가는 폭풍이 통제소에 다다랐어도 잦아들지를 않아 산행대장께서 경사가 급한 암릉 길의 사다리병창코스가 위험하다며 비로봉을 오르지 말고 바로 왼쪽 계곡으로 내려설 것을 권해왔습니다. 철계단 길을 내려선 후로는 안경 안에 뿌옇게 김이 서려 별 수 없이 안경을 벗고 하산했습니다. 안전하게 착지할 곳을 찾아 발을 내딛느라 신경을 너무 써 나중에는 골이 띵하고 눈도 아파왔지만, 그저 치악산의 분노가 어서 빨리 삭으러들기만을 기다리며 말없이 발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감시초소 출발 20분 후에 세렴폭포 2.0Km 전방 지점을 지나자 광란의 바람은 삭으러들었지만 빗줄기는 여전했고, 잠시 멈춰 서서 헤드랜턴을 꺼내 찰까 할 정도로 하산 길은 여전히 어두웠습니다.


 

  14시45분 세렴폭포에 내려섰습니다.

계속되는 돌 가닥 길을 안경을 벗고 조심조심 걸어내려 가느라 후미로 한참 쳐졌습니다. 계곡을 가로 질러 놓은 첫 번째 나무다리를 지나서 빗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하면서 계곡 길의 조도가 조금씩 높아지자 광란의 비바람으로 마음 졸였던 저도 어느 정도 안심이 됐습니다. 저의 하산 길을 안내한 계골길 계곡은 세렴폭포 조금 못 미친 합수점에서 상류부터 몰고 내려온 물줄기를 큰골계곡에 넘겼습니다. 비로봉을 다녀오느라 늦어진 대모산님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골길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다리병창길 갈림길에서 합수점 다리를 건너 통제소에 다다랐습니다. 오른 쪽으로 100m를 옮겨 세렴폭포에 도착, 짐을 내려놓고 빗물로 흥건히 젖은 양말을 벗어 빨았습니다. 바지가랑이에 옮겨 붙은 흙들을 흐르는 물로 씻어 낸 후 대모산 님이 준비해온 수박으로 시장기를 달랬습니다. 집중호우를 쏟아낸 먹구름이 가시고 하늘이 조금씩 열려 햇빛이 나기 시작하면서 세렴폭포가 온전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반시간 가까운 휴식을 끝내고 통제소로 내려가 구룡사로 향했습니다.


 

  16시27분 구룡사입구 매표소 한참 아래 대형차량 주차장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통제소에서 야영장을 거쳐 구룡사로 내려가는 데 반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이제 다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자 넓어진 산길과 계곡이 시원스레 보였습니다. 치악산 최고의 폭포인 구룡폭포와 구룡소에 잠시 눈길을 준 후 구룡사 경내를 둘러보았습니다. 이제까지 아홉 구의 구룡사로 알아온 이 절 이름이 거북 구의 구룡사임을 확인하고 나서 어느 누구도 보이는 것을 모두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아는 것만큼 볼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 점에서 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대모산님이 부러웠습니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길에 버금 갈 치악산 구룡사의 황장목 길 가까이로 큰 골 계곡이 흐르고 있어 매표소까지 힘든 줄 모르고 걸었습니다. 매표소를 빠져나가 차도와 나란한 방향으로 설치한 널판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주차장에 다다랐습니다. 폭우로 건너 뛴 점심은 산악회에서 준비한 오징어덮밥으로 대신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여름휴가를 맞은 피서객들 차량으로 귀경길이 군데군데 막혔습니다.

내가 아니고 다른 이들 때문에 길이 막힌다고 남들을 탓하면서 나들이를 나서는 한 즐거운 여행길이 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모처럼 나선 나들이 길이 차들로 막혀 마냥 늦어진다고 아무리 속을 태워봤자 부질없는 일이기에 기왕에 나선 나들이 길이 불쾌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집중적인 폭풍우로 혼쭐이 난 이번 산행도 언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으랴 생각하자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름피서를 떠나는 분들 중에 가족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 분들을 위해 산신령께 다음과 같이 기도를 올리오니 편안한 나들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산신령이시여, 오늘 같은 응징은 저 하나로 충분합니다.

저들은 매주 산을 찾는 저와는 달리 일년에 몇 번 밖에 오르지 않는 분들이어서 저처럼 자주 령님을 진노케 할 일이 없는 자들입니다. 혹시나 그런 일이 있다하더라도 저처럼 알면서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전혀 몰라서 하는 실수이기에 오늘처럼 항아리로 빗물을 쏟아 붓는 벌을 내려서는 아니 됩니다. 비나오니 령님이시여, 저기 두 부부와 애들이 편하게 산행을 할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 폭풍우를 막아주시어 이들 모두가 집에 돌아가서도 령님의 고마움에 감읍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또 다시 산을 찾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