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1,288m) 산행 Photo 에세이
(치악산: 강원도 원주시,횡성군 안흥면/ 황골- 입석대- 갈림길- 비로봉- 사다리병창- 구룡사- 주차장/고양우정산악회/http://cafe.daum.net/rhdiddnwjd) 
 
*. 치악산 구간 종주
  어제는 천둥 벼락이 치고 집중 호우가 와서 자다가 일어나 아파트 베란다 문을 열고 몇 번이나 창밖으로 손을 뻗어 비가 오나 안 오나를 확인 하며 걱정하면서 우중 등산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고어텍스, 우비, 여벌옷, 비 맞아도 아깝지 않은 등산화 그리고 우중 촬영 장비 등등.
그러다가 새벽 5시 25분에 집을 나서서 산악회 버스를 타고 원주를 지나 치악산이 가까워 지다보니 오히려 햇빛이 쨍쨍 나니 옆에 있는 회원이 말한다.
"우리 고양우정산악회가 등산을 가는 날에는 신기하게도 비가 오다가도 그치지요."

  우리들의 오늘 치악산 등반은 황골에서부터 시작한다.
치악산의 대표적인 등산 코스로는 '구 구룡매표소-세렴폭포- 비로봉- 계곡길- 구룡매표소의 11.5km/ 7시간'이지만 우리네 같이 먼 곳에서 치악산 비로봉 정상을 밟아보려고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가장 단 거리로 인기 있는 코스가 황골 구 매표소를 통하여 오르는 길이다.
황골 구 매표소- 입석사입석대-비로봉- 세렴폭포- 구룡사(총 9.8km/6시간)
구룡사를 들머리로 할 수도 있지만, 그 코스는 옛날과 달리 층계가 많은데다가 너무 가팔라서, 이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귀에 설은 황골을 들머리로 하는 코스가 치악산 구간 종주로는 제격이다.
황골 코스는 '치악8경' 중에 하나라는 기암괴석 입석대를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하산길이라서 구룡사를 대충보고 지나치는 아쉬움도 있을 수 있는 코스다.
  황골은 비로봉에서 시작하여 원주시 흥양리로 흐르는 시내 골짜기 이름이다.

*. 치악산 8경
  치악산은 원주시, 횡성군과 영월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원주 사람들은 치악산을 원주의 진산(鎭山)이라고 말한다.
우리 국토의 등줄기라는 태백산맥 중의 오대산에서 서남으로 가지를 뻗은 차령산맥이 원주 분지에서 크게 솟구쳐서 매화산(1,084m), 비로봉(1,288m), 향로봉(1,042m), 남대봉(1,181m)을 이루며 부채살처럼 C형으로 감싸 뻗으면서 서쪽으로 원주시, 동으로 횡성과 영월군을 나누어 주고 있는 산이다. 그냥 산이라기보다는 치악 산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이다.
  이 치악산을 제대로 탐방하여 보려면 '치악 8경'을 알아야 한다.
  제1경 비로봉의 미륵불탑, 제2경 보은 전설이 깃든 상원사, 제3경 구룡사와 구룡계곡, 제4경 식물의 보고 성황림, 제5경 사다리 병창, 제6경 호국의 성지 영원산성, 제7경 태종대와 부곡계곡, 제8경 기암괴석 입석대

*' 입석사와 입석대
우리들은 일산서 관광버스로 2시간만에 원주시 윗황골 마을에 도착하여 9시부터 입석사를 향하여 산행을 시작하고 있다.
간밤 내린 비에 입석골 개울 물은 불을 대로 불어서 하얀 물줄기로 소리 내어 흐르고 있다. 길은 황골단지에서부터 입석사 절까지 시원하게 뚫린 꼬불꼬불 오르는 아스팔트 가파른 길이지만, 비온 뒤끝이라 시원한 바람까지 더하여 등산에는 더 없이 상쾌하고 좋은 날씨였다.
그런 아스팔트 길을 따라 계류 소리를 들으며 오르다가 제일 처음 만난곳이 구 황골매표소인데 이정표를 보니 거기서 입석사 1.2km, 비로봉 3.7km 거리이다.
  아스팔트의 가파른 오름 산길이 어찌나 지루하고 힘들던지, 오늘도 맨 뒤에 처져서 땀으로 멱을 감으면서 50분을 오르다 보니 축대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반가운 절의 처마가 나타난다. 치악 8경 기암괴석 입석대가 있는 해발 720m의 입석사였다. 해발 568m만 더 오르면 비로봉(1,288m)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치악산에는 구룡사, 상원사, 영원사, 입석사, 보문사 5개의 절이 있는데 원주에서 황골 오르는 길에는 인가가 거의 없고 교통이 불편하여서였는가. 겉보기에도 사세(寺勢)가 미미한 절로서 절이라기보다 초라한 암자 같은 크기의 당우였다. 울타리도 없었고, 위치도 전망도 없는 곳이었다. 있다면 유난히 큰소리로 흐르는 황골의 계곡뿐이다.
절에 와서 누구나 찾게 되는 약수터는 어느 절이나 그 절의 간판 같은 곳인데, 이 절에는 마당 끝에 달랑 수도 꼭지 하나뿐인데다가 그것도 비닐 호수를 따로 연결하여 붉은 자배기에다 물을 흘리게 하여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부터 비로봉 너머 구룡사까지 약수터가 없으니 충분히 물을 준비하여 가져갈 일이다.
  의상대사가 신라 시절 이곳에 와서 수도하였다는 전설도 있는 이 절은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미상인 절이다. 현재의 절은 여기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원주 근교에 있던 암자를 옮겨온 절이라는 말도 있는데, 단청을 하지 않은 삼성각(三聖閣) 뒤에 쌓아 놓은 옛날 이 절의 석가래와 기둥들을 보면 근래에 와서 새로 지은 절 같다.

  그래서 이 절의 볼거리로는 제8경 기암괴석 입석대라는  절의 뒤 좌측 100m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입석대와 마애석불인데, 마애석불 200m는 잘못된 이정표 표기인 것 같다. 입석대에서 앞 산길을 우측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바로 있는 것을 100m 더 가야 있다 하여 등산 길에 바쁜 이들을 포기하게 만들게 하니 말이다.
대웅전 뒤에 있는 철계단으로 0.1km를 오르니 높이 20m, 너비 5m의 네모꼴 커다란 입석이 있다. 50m나 되는 바침돌 같은 바위군의 절벽 위에 우뚝 서 있고, 이를 가로 질러 멋진 쇠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입석대 뒤에 허름한 입석탑이 있다.
- 이 탑은 조선 태종이 즉위한 후 스승이었던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을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태종이 스승을 생각하여 세운 탑이라고 전하여 온다. 원래 입석사 석탑은 청석탑(靑石塔)이라 하며 입석사 주변에 흩어졌 있던 석탑 조각을 모아 놓은 것으로 화강암과 점판암이 섞여 있다. 

-암벽에 양각으로 부조된 이 마애불좌상은 앉은 자리 밑 대좌 오른쪽에 연호 원우(元祐, 고려 선종 때)가 새겨져 있어 더욱 유명하고 귀중한 석불이다. 풍만한 얼굴에 눈, 코, 입의 비례가 잘맞는 불상이다. 오른 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왼손은 배 앞부분에 놓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옷주름, 머리의 상투구슬, 둥글넓적한 얼굴 모습 등으로 보아도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게시판에서 말하는 원천석이란 누구던가.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붙였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이 눈물 겨워 하노라.
-원천석

고교 국어교과서에 있던 시조 '회고가(懷古歌)'의 지은이 원천석은 고려 말 충신으로 이방원의 어렸을 때 스승이었다. 장원급제를 하고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사양하고 치악산에서 은거하다가 죽어 치악산에 묻혔다. 그의 묘는 우리들이 버스타고 지나온 원주시 행구동 석경사 남쪽 개울 건너 편에 있다.
태종 이방원은 스승을 찾아와 지금의 태종대(강원도 문화자료 제 16호)에서 스승을 기다리면서 스승을 찾아 헤멨다. 그곳에서 30m 아래에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던 노파에게 스승이 간 곳을 물으니, 노파는 원천석이 시키는 대로 거짓으로 임금에게 고하였다. 그리고는 그 뒤에 나라님을 속였다는 그 죄책감에 스스로 몸을 강에 던졌다는 전설 어린 노고소(老考沼) 부근이 제7경이라는 부곡계곡 하류에 있다
치악산의 계곡에는 구룡계곡(치악산 3경)을 위시해서 부곡계곡, 영원사계곡, 관음사계곡, 황골, 상원골, 황지암계곡, 변암계곡 등 7개가 있는데, 부곡계곡은 곧은치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8km를 흘러가는 계곡으로 치악산에서 가장 긴 계곡이다.

*. 치악산에 대한 선인들의 글
  신소설 '치악산' 모두(冒頭)에서 국초 이인직은 다음과 같이 치악산을 묘사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 경내에 제일 이름난 산은 치악산이라. 명랑한 빛도 없고 기이한 봉우리도 없고 시커먼 산이 너무 우중충하게 되었더라. 중중첩첩하고 외외암암하야 웅장하기는 대단히 웅장한 산이라.
그 산이 금강산 줄기로 내린 산이나 용두사미라. 금강산은 문명한 산이요, 치악산은 야만의 산이라고 이름지을 만 한 터이러라.
  위와 같이 치악산을 '야만의 산'이라고 말한 것은 산이 험하다는 말인 것 같다.
당시 이인직이 치악산 정상 비로봉를 올라보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숙종 때 실학자 이중환이 30년 동안이나 전국을 방랑하면서 62세에 지었다는 '擇里志'(택리지)'에서는 치악산이 영험한 산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치악산은 산신의 영험이 많아서 사냥꾼도 감히 짐승을 잡지 않는다.

*. 상원사의 보은 설화
  산에 와서 제일 힘든 때가 능선에 오르기 전까지의 산행 길이다.
그러다가 일단 능선을 오르기만 하면 대개의 경우에는 처음보다 한결 더 편한 길이 된다. 치악산은 육산 길이다가 바위산 길이 되는 것이 되풀이 되는데 북한산 같은 커다란 바위는 없었다. 그래도 험한 길은 예외없이 튼튼한 층계를 설치하여 놓았다.
길은 통나무 길이다가 쇠층계길 등으로 계속되는데 쇠층계는 기둥과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어 촉감을 부드럽게 하였고, 디딤 층계마다 그 위에 나무를 대고 그 나무 위에 폐타이어를 곱게 잘라 붙여서 미끄럽지 않게 하였다.
국립공원 답게 곳곳에 이정표는 물론, 세로 기둥에다가는 친절히 해발 높이까지 명기하여서 초행길로 혼자 뒤떨어져서 가는 길이건만 길을 잘못 들까 염려되지가 않았다. 
입석대에서 1.2km를 오르니 비로소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는 능선길이더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좌측으로 가면 비로봉 1.3m요, 우측으로 가면 9.2km의 상원사 길이다.
불현듯 상원사(上院寺)로 향하고 싶어진다. 원통재를 지나서 곧은치를 넘어 향로봉(1042.9m)을 지나 남대봉(1,18.5m)에 가면 그 기슭에 꿩의 보은 설화로도 유명한 상원사가 있기 때문이다. 
상원사는 해발 1,100m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사찰로도 유명한 절이다. 여기서 국립공원 치악산 당국이 말하는 치악산 전설을 들어보자.
  -치악산은 예로부터 단풍이 아름다워서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다가 꿩이 보은(報恩)을 한 산이라 하여 치악산(雉岳山)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 설화가 얽힌 절은 남대봉 아래에 위치한 상원사(上院寺)입니다.
( 그림 출처: 국립치악산홈페이지)
-한 나그네가 과거길에 올라 적악산 오솔길을 지나고 있는데 구렁이에 휘감긴 꿩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측은히 여긴 나그네는 구렁이를 죽이고 꿩을 구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나그네는 한 여인의 대접을 잘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여인은 구렁이로 변해 나그네를 휘감고, 죽은 수구렁이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만약에 동이 틀 때까지 상원사의 종이 세 번 울리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꿩의 보은으로 종을 울려 나그네를 살렸다는 꿩의 보은 설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설의 주체가 다른 문헌에서는 꿩보다 까치로 더 많이 나온다.
까치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석탈해왕(昔脫解王)을 담은 궤짝을 따라 오면서 계속 울어대던 새가 까치요, 그래서 탈해왕은 까치 '鵲'(작) 자를 파자(破字)하여 '昔(석)'씨로 성(姓)을 삼았다.
경북 부석사(浮石寺)는 까치가 나무껍질을 물어다가 떨어뜨린 곳에 세운 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까치의 영험함을 말하여 주는 이야기들이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사람이 온다'고도 하고, '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내일이래요.' 라고 노래 부르기도 한다.
이런 말들은 동구 앞에 집을 짓고 사는 까치는 동내 사람을 냄새로 하나 하나 알아볼 만큼 머리가 좋다. 반가운 사람이나 설날 전에 고향을 찾아오는 자식들은 까치에게는 낯선 손님일 뿐이다.
그래서 까치가 짖게 되는 것이다.
보은(報恩)은 인간에게도 고차원적인 이야기인데, 꿩이 그런 지능이 있겠는가. 그래서 보은으로 논한다면 까치가 맞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까치와 비슷한 까마귀를 부모에게 보은하는 효조(孝鳥)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까치는 한자로 '鵲(작)'이라 쓴다. 그렇다면 '치악산(雉岳山)'은 '작약산(鵲岳山)'으로 불러야 하니 음이 좋지 않다. 그래서 치악산에 꿩이 많았으니까 까치를 꿩 '雉(치)' 자로 대치하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억설일까. 그보다 치악산의 '치'는 한자의 꿩 '雉'(치) 자가 아니라 '까치'의 준말 '치'라고도 유추하여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종소리는 무슨 뜻일까?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종소리를 통한 종교적인 구원의 승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깊은 산속은 분명 뱀이 많을 법한데, 절에 뱀이 있다는 말을 나는 일찍이 어디에서도 들어 보지 못하였다.
모든 동물들이 그렇지만 뱀은 특히 종소리를 싫어하는 동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절에 있는 인경, 운판, 풍경 등이 모두 종소리의 주체인데 어찌 뱀이 절에 범접할 수나 있겠는가. 그래서 설화 속의 구렁이는 절에서 치는 아침 인경소리에 놀라 물러난 것이리라.
그래서 나도 깊은 산 나 홀로 등산 할 때에는 스틱을 무기처럼 들고 다니기도 하지만, 배낭에 종을 매달고 다니곤 한다. 그 소리에 뱀은 물론 요즈음 자주 출몰한다는 멧돼지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요랑으로서다.

*. 치악산 정상 비로봉
  치악산의 비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떡이나 쌀 같은 것을 찧는 시루 같다고 해서 시루봉이라고도 하는 비로봉이.
이 방향으로 멀리서 보니 동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머리에 뿔이 셋 달린 도깨비 머리 같은 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더니 헬기장에 이르니 지금까지 하늘을 가려 주던 나무들이 사라지며 찬란한 치악의 정상이 얼굴을 내민다. 나뭇가지가 열리니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은 기분이 된다.
잠자리가 한가롭게 낮은 비행을 하고 있는 정오 무렵이었다.
  그 안부는 구룡계곡을 통한 세렴폭포 2.3km와 마지막 오름길인 비로봉 0.3km의 갈림길이었다.
입석대와 매애석불을 둘러 보느라고 나는 지금 맨 후미로 함께 온 우리 산악회 일행과 1시간이나 혼자  떨어졌지만 드디어 나는 세 번째로 비로봉에 올라왔다. 

치악산 주봉은 '毘盧峰(비로봉)'이 아니라 '飛蘆峰(비로봉)'으로 쓴다.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등의 주봉을 '毘盧峰(비로봉)'이라 하는 것은 불교적인 용어로 비로자나('毘盧자那')의 준말이다. 비로자나는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천태종에서는 '법신불',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와 같이 각 종파에 따라 달리불리는 부처다. 그러나 모두 부처 중에 으뜸되는 부처인 석가모니 불을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산에서 가장 높은 봉의 이름을 비로봉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왜 치악산만은 날 飛(비), 갈대 '蘆'(노)의 비로봉(飛蘆峰)으로 쓰는 것일까?
비로봉 근처에 지금에는 없는 갈대가 옛날에는 많았는가. 그래서 바람에 흣날렸는가. 후학의 연구를 기대하여 본다.
  비로봉에 서면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다지만 나는 그보다 그곳에 우뚝 솟은 미륵탑 칠성탑(붂쪽), 신선탑(주앙), 용왕탑(남쪽)을 카메라 한 컷에 담으려고 골똘하다가  실패하고 그 멋진 조망도 놓치고 말았다.
점심도 행동식으로 하여 가며 시간을 아껴 가며 나름대로는 기를 쓰고 따라 왔는데 일행은 벌써 하산한 모양이다. 그래서 서둘 수밖에 없었다.

미륵탑은 우람하였으나 정상석은 너무나 초라하였다. 그 정상석 뒤를 보니 누군가가 돌로 그 일부분을 뭉개어 놓았다. '원주시장 XXX가 쓰고/ 치악산 관리소 세움' 이런 경우에 나부터라도 지워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제 돈 내고 세운 것도 아닌데 원주 시장 아무개라고 자기의 이름을 쓴다니 세상에는 이런 명청한 분도 있구나 해서였다.
  그 탑을 세운 전설 같은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하여 온다.
  -원주시내에 사는 조그마한 과자방을 운영하던 용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현몽을 하였다. '나는 치악산 산신령이다. 너는 지금부터 내가 있는 치악산 시루봉 (비로봉)에 3개의 돌탑을 쌓되 "너 혼자힘으로 직접쌓으라." 하며 탑의 모양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부터 3년 동안 3일 중 2일은 탑을 쌓고 1일은 장사를 하면서 탑을 완성하기를 몇 번이나 하며 고초를 겪고 세웠다는 탑이다.
 
*. 사다리병창길
  나는 내심으로 우리 일행이 정상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막 일어서기를 바랬으나 일행은 나보다도 1시간도 훨씬 넘게 앞서 하산하고 있는 모양이어서 서둘러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준족(駿足)의 반대 편에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은 올라갈 때는 힘들어서 자주 쉬어야 하고, 하산할 때는 위험해서 천천히 가야 한다. 그런 나를 뒤에서 제치고 자꾸 앞질러 가는 사람이 있어서 나를 더욱 초조하게 하였다.
옛말에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라. 하였는데 나는 달리기는 커녕 잘 가지도 못하면서 자주 쉬어야 하는 체력으로 태어났으니 이를 어쩌랴. 내가 따라온 고양우정산악회는 하산하면 산악회 버스 옆에서 뒤풀이로 전을 벌여주는 산악회여서 그걸 믿고 따라 나서기는 하였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늦으면 안되는 것이 아닌가.
비로봉에서 사다리 병창까지는 1.7km였다. 가는 길은 내려가기만 하는 길이어서 편하였지만 옛날과 달리 층계에서 층계를 바꾸어 내려가는 것이어서 고층 빌딩을 오르내리는 식 같았다.
'악산에 왔다가 를 떨고 간다.'는 말은 구룡사에서 비로봉까지 올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하는 말이다. 그래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애써 설치하여 놓은 층계였다.
그러나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화장을 너무 요란하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처럼, 명산 치악산에 이렇게 인공적인 층계가 많은 것은 산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중국 서파에서 백두산을 오르다 보면 5호 국경비까지 1,386개를 개의 층계를 올라가게 되는데 그 돌들을 자세 히보면 정성껏 일일이 조각된 것이고, 그 층계도 가파른 층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두어 걸음 걷는 층계에다가 하나하나씩 오르는 식의 여유로운 층계던데, 단순한 층계에다 이렇게 미를 가미하여 만든 이런 층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 같다.
  좌측 깊은 계곡에서 계류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한참 정신없이 내려가다 보니 저 위 절벽 위로 쇠줄 난간이 있는 것이 거기에도 길이 있는 모양이다. 뒤돌아 올라가서 그 길로 가다 보니 커다란 바위가 하나의 좁은 돌길이 계속되는데 좌측은 절벽이라서 '추락주의' 라는 표지 판이 있는 복도 같은 자연석으로 된 큰 바위의 돌길이다.
'아아, 여기가 바로 그 경사로 악명 높은 사다리병창이로구나!' 하였더니 얼마 안가서 '사다리병창길(해발 700m)'이라는 표지판이 그림과 함께 서 있다.
  -거대한 암벽군(岩壁群)이 마치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있고 내리막길 좌측은 천길 절벽 암벽이라 내려다 보기조차 힘든 병풍 같은 절벽이다. 그 사이 사이에 자라난 나무들과 어우러져 사시사철 독특한 풍광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여 '사다라병창길'이라 한다.
"병창은 영서방언으로 "벼랑', "절벽"을 뜻함
이곳을 향하여 떠나오기 전 권위 있는 산의 서적마다 그 '병창'의 뜻을 몰라서 답답해 하는 글을 보고 사전을 서너 개 찾아보다가 "병창: →벼랑(강원도 방언)"이란 것을 발견하고 희심의 미소를 띠고 찾아왔는데 여기 와서 보니 벌써 그게 표지 판에까지 명기되어 있다.
'병창'의 '병'은 병풍이라면 창은 무슨 뜻이었을까?  높을 '敞(창)' 자는 아닐런지.

*. 세렴폭포
사다리병창길에서 0.5km 지점에 이르니 나뭇가지 사이로 하얗게 흐르는 계류와 함께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 계곡을 가로질러가는 길다란 쇠다리가 있다. 거기가 구룡계곡 큰골로 바로 세렴폭포 입구였다.
'세렴(細簾)'은 가늘 '細(세)', 발 '簾(렴)'으로 '가는 대(竹)로 총촘하게 엮은 발'을 말한다. 폭포의 물줄기를 형상화한 말 같다.
그 쇠다리에서 상류로 한 50m쯤 조금 올라간 좌측에  2단으로 꺾여 흐르는 폭포가 세렴폭포였다.
힘차게 성낸듯이 흐르는 폭포를 보니 갑자기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잡가(雜歌) '유산가(遊山歌)'가 생각난다.
-층암 절벽상(層岩絶壁上)의 폭포수(瀑布水)는 콸콸,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 골 물이 주루루룩,저 골 물이 쏼쏼,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合水)하여
천방져 지방져 소쿠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소부 허유(巢父許由)문답하던 기산 영수(箕山潁水)가 예 아니냐. 
 나는 오늘 한국의 명산 치악산의 정상을 밟아보는 요산(樂山)에 이어, 산에서 흘린 땀에 젖은 심신을 적셔 주는 폭포를 만나 요수(樂水)를 하고 있으니, 여기 세렴폭포는 노랫속의 기산 영수(箕山潁水)요, 나는 그 소를 몰던 소부(巢父)요, 귀를 씻던 허유(許由)가 바로 이 ilman이 아니냐?
 마추어 중년 남녀가 세렴폭포 앞에다가 '조(棗), 율(栗), 이(梨) 시(枾) 등'으로 주과를 접시에 정성껏 올려 놓고 망자(亡者)를 기리고 있다.
그 망자가 나처럼 산을 좋아하다가 간 그들의 부모요, 장인 같다.
아, 죽은 후 우리 자식들이 한 번만이라도 이렇게 산수를 찾아와 그들처럼 나를 기려 준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해 할까?
  여기서 후답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세렴폭포 바로 건너에 칠선폭포(七仙瀑布)가 있으니 나같이 놓치고 후회하지 말고 꼭 찾아보고 가라고. 

*. 구룡사(龜龍寺) 이야기
세렴폭포서부터는 차가 다닐 수 있는 평평한 길이어서 속도를 내었다.
함께 온 분들보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니 웬만한 곳은 그냥 나칠 수 밖에 없구나 하였다.
그래도 나에게는 간절한 소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룡사 일주문 하나라도 카메라에 담아가는 것이다. 구룡사의 '구'자 가 거북 '龜(구)' 자임을 밝히고 싶어서다.
 또 하나의 욕심은 구룡사의 생수를 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룡사까지 가는 길가에 장마 비에 물을 가득이 담고 있는 이 큰골의 '선녀탕(仙女湯)'도, 구룡사 못미쳐 있는 용머리를 한 멋진 길 옆의 '구룡소(龜龍沼)'도 아깝게고 지나치고 말았다.
물론 치악산 일주문 바로 안에 있다는 거북바위도 지나치고 말았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은다.'는 말처럼.

 
  부처님이 나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신 것일까.
길을 잃고 잠깐 방황하였던 것이 복이 되어 구룡사 경내로 들어선 것이다.
구용사는 경사진 산에 지은 절이라서 절의 입구가 되는 멋진 2층 지붕의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올라서면 세로로 '雉岳山龜龍寺' 란 현판이 있는 보광루(普光樓)가 앞을 막는다.
그 보광루 가운데 문을 통하여 몇 개의 층계를 오르면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가는 이른바 누하진입(樓下進入) 방식의 멋진 통로였다. 
그 구룡사의 전설은 대웅전 앞에도, 사천왕문 앞에도 있는데 다음은 사천왕문 앞의 설명이 더 자세하다.
                                                                          - 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제 24호인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6년(666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지금의 대웅전 터에 큰 연못이 있어 그곳에 청룡 아홉마리가 살로 있었는데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불도의 힘으로 용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으며,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하여 구룡사(九龍寺)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찰이 퇴락하게 되었는데 한 노인이 타나나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의 혈(血)을 끊으면 번창할 것이라 하여 혈을 끊었으나 오히려 신도가 더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도승이 거북의 혈맥(血脈)을 다시 이으라고 하여 그때부터 거북바위를 살리자는 뜻에서 거북을 뜻하는 구(龜) 자를 써서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등산을 마치고 절에 들린다는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즐거움 중에 하나다.
절은 살아 있는 그 산의 역사를 들려주고, 산은 절의 역사를 말하여 주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오늘처럼 절에서 받아가는  청정수(淸淨水)를 집에 돌아가서 마시면서 한 동안은 이 산과 절을 기억하면서 나의 산행기 하나를 또하나 써서 보탤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 하루는 나에게 얼마나 즐거운 날이던가. 
일주문(一柱門)은 속계(俗界)와 진계(眞界)의 경계선이다.
일주문이 불가와 속세의 경계선인 것처럼, 산은 나의 밖과 나의 안의 경계선이다. 산에서 얻은 행복으로 살고 그 행복을 찾아 다시 올 것이다.
그런데 다른 절의 '일주문(一柱門)'이 치악산에서는 왜 '원통문(圓通門)'으로 명명하였을까? 
원통(圓通)이란 이르지 않은데 없이 두루 통한다는 뜻이라는데, 관세음보살의 육근원통(六根圓通)을 상징하여 붙여진 이름이 원통이라던데 , 육근(六根)은 눈, 귀, 코, 혀, 몸을 말하는 것으로 육식을 낳는 여섯가지 근원이라는데-.  그게 일지문과 어떻게 같고 다른 것인가. 커다란 화두를 안고 서둘러 우리 일행이 있는 주차장을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