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술령(鵄述嶺)767m등산 및 박제상 유적지 탐방기

위치

경북 경주시 외동읍 석계리 와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일시

2011년3월25일 금요일 날씨 대체로 맑고 기온0도에서10도로 등산에 양호했음

탐방 및 등산코스

1=>9:00 경부고속도로 인보 정류소 출발함

2=>9;10 상수원 저수지 삼정교 앞 望鄕亭 순회

3=>10:30 박제상 기념관 탐방 후  산행 시작함

4=>11:38 통로 변 충효사 통과

5=>11:50 숲속의 소류지 통과

6=>12:10 7부 능선 위 소재 법왕사 통과

7=>12:55 첫 능선위의 울주 쪽 망부석 순례( 경주 쪽과  두 곳에 있었음)

8=>13:10 치술령 정상 도착과 동시에 정상 표시석 및 신모사지 석조물 순회

9=>13:15 경주 쪽 망부석인 거대한 암봉과 설명문 입간판 순회

10=>13;40 하산 길 석계저수지 전방3.5km 9부 산 중복에 위치한 약수터 지남

10=>15:00 하산 종점인 석계저수지 도착으로 종료함 거리 약18km 소요시간6시간

개설

치술령은 북쪽으로 경주 남산과 호미기맥으로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능선으로 전설의 은을암(隱乙庵) 경유 국수봉(國讐峰)으로 이어 지는  등산 처 인 동시에 그곳 산록 출신인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얽힌 망부석의 설화 등이 너무 유명해지고 있음에 등산과 동시에 역사 공부에 일조 하는 곳으로 또 산록 일대에는 우리민족이 선호 하는 소나무 등 상록수가 무성하게 성장 하고 있어 단순 정상을 밟고 두 곳의 망부석 및 은을암 탐방으로는

산 중복에 위치한 법왕사를 지니고서 울주군 당국에서는 건강 등산 코스로 A. B 양 코스를 지정 먼저 A 코스를 따라 오르면서 울주 쪽의 망부석을 경유하고 정상 밟고는 남쪽으로 은을암과 헬기장 경유 법왕사로 원위치 회귀 하는 것과 B 코스는 A 코스와 반대로 역시 원위치 회귀하는 등산로를 설치 해두고 있었는데 이는 군민의 체력 향산 등산 코스인 동시에 산록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 충신 박제상 유적지를 순회함으로 서 등산과 역사 공부의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산이라고도 생각되는데 다만 7부 능선위로는 급경사 길로  고지와 안부간의 고저가 심한 편임임과 동시에 설화 등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쪽이 가까이가 동해 바다이나 실제로 육안으로는 전망이 불투명한 위치임을  지적 하지 않을 수 없는 산세임을 들 수 있었음

내용

치술산767m은 망부석에 얽힌 박제상의 부인 김씨가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끝내 죽어서 육신은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되어 날라 가서 그곳 은을암에 숨었다는 애닯픈 사연 등의 역사를 회상 하는 곳임에 많은 등산인 들이 찾고 있다함에 힘입어 찾게 되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찾기 에는 교통의 불편함을 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대구에서는 부산과 양방향에서 매시간 마다 1회식 운행하고 있는 고속버스를 이용 하여

7시10분에 대구를 출발 두서면의 인보 버스 정유장에 8시45분경 하차 하는 동시에 두동으로 통 하는 1025번 도로 따라 진행 하면서 상수원 저수지 30m의 높이와 360m 길이의 삼정교를 지나기 전에 망향탑 공원을 순회 하고는 진행 하여 등산입구에 소재한 박제상 기념관에는 10시30분경 도착 순회 하고 동쪽 마을길 따라 진행 하면서 통로 변에 있는 충효사를 지니고는 산림속으로 진행 하면서 계곡에 위치한 소류지를 지나고 부터는 소나무

숲길 따라 진행 그이 산 7부 능성위에 자리하고 있는 법왕사라는 절을 지나게 되었는데  절의 가람들이 상당 규모 었으며 목하 많은 돌 부쳐의 설치 등 불사가 진행 중임을 보기도 하고는 그 곳 부터는 계곡 위험 길에는 수100m 이상의 추락 방지 시설에 의지 하면서 진행 능선 위 정상 전방0.3km의 지점에 커다란 바위 남쪽 면에 음각으로 한자 望夫石이란 표시가 있었고 그 북편에는 망부석의 설명문 입간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보기도 하면서 정상

쪽으로 걸음을 빨리 했는데 주중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녀 등산인들과 교행 하기도 하면서 진행13시10분경에는 정상에 도착하여 그곳정상에 설치되어 있는 神母祠祉비석과 부속 석구조물에 비하여 정상 표시석은  돌 널빤지로 규모면에서 초라한  표시석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는 동쪽 수십m 아래에 위치한 거대한 암석 옆에 망부석이라 설명문 입간판이 설치 되어 있었으나 암반에는 아무런 표시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정상에는

북쪽으로는 경주 남산으로 이어지는 호미기맥의 여러 봉우리들이 있었으나 안부와 고지의 고저가 심한 동시에 7부 능선위로는 그이 80도 이상되는 급경사로 이뤄져 있는 것도 확인하기도 했다 횡단을 위해서는 설화의 은을암을 찾지 못하고 외동읍 쪽으로 하산 하면서 80도의 급경사를 내리 오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곳 석계리  3.5km 전방에 위치한 약수터에 들여 시원한 약수 물로 해갈을 하기도 하면서 진행 하여 중도 산록에서는 봄을 알리는

조생종 나무 잎이 활짝 피고 있는 장면들은 보기도 하고는 15시 경에는 하산 종점인 석계리 저수지에 도착함으로 종료 했는데 약18km거리를 6시간 소요 한 등산을 마치면서 공업화에 따르는 위락 시설이 절대 필요함에 따라 그곳 산록 일 대는 물론 심지어 저수지 에 까지 교량을 설치하여 위락 시설을 하는 공사가 한창임을 목격하기도 한 치술령 등산을 마치다 

 

 

     
     

치술산▲박제상,치술령과 망부석,신모,은을암,비조로 이어지는 역사의 재구성

고개 이름같은 치술령이 산 정상석으로 새겨져 있는 치술산은 신라 만고충신 박제상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얼마나 그가 충신이었는지를 드높이다보니 그의 부인과 두 딸이 신神의 반열에 오른다.설화라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필요한 부분은 좀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설화의 속성상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앞뒤가 안맞는 부분도 있을 수밖에 없다.그렇지만 설화는 역사를 파악하는 좋은 파편의 흔적은 분명히 된다는 측면을 간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화라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그 역사적 사실성이 담보된 것이기에 산행 곳곳에서 만나는 박제상과 그 부인의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했다.

먼저 박제상에 대한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을 소개하면서 실제 탐방한 것과 비교를 해보고자 한다.

박제상(朴堤上, 363~419)은 417년 삽량주(삽良州)의 간(干)으로 있다가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 삼국유사에는 寶海)를 지략과 계교로 데려왔다. 다시 일본에 건너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자 미사흔(未斯欣: 삼국유사에는 美海)을 고국으로 탈출시켰으나, 일본군에게 잡혀 기시마[木島]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살해당하였다. 왕은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추증하고, 그의 둘째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켜 그 충절에 보답하였다. 부인 또한 열녀로 지아비를 기다리다 지쳐 망부석(望夫石)으로 변했다고 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좀 더 상세히 소개해 본다.

4세기말 내물왕(재위기간 : 356~402)은 석씨계열 왕조를 대신하여 경주 김씨 계열의 왕조로 교체하였지만, 백제와 가야 왜국으로 구성된 3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내물왕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기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그로 인하여 고구려의 강력한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내물왕은 조카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지만, 내물왕이 사망하자 고구려의 원조를 받은 실성이 왕위에 올라 이번에는 내물왕의 아들들을 볼모로 보내게 된다.

실성왕 1년 402년에는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未斯欣)을,왜국으로 보냈으며,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이어 실성왕은 내물왕의 장자 눌지마저 암살하려 하였지만, 도리어 눌지가 실성왕을 살해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치열한 왕위 다툼끝에 왕위에 오른 눌지왕(417∼458)은, 고구려와 왜국에 각각 붙잡혀 있는 두 동생을 하루라도 빨리 귀국시키는 일이 시급하였다.

나중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만 이때만 해도 약소국가의 비애를 절실히 느끼고 있던 시절이다.

그에 따라 눌지왕은 당시 양산(梁山)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삽량주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박제상을 기용하였다.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왕의 5대손인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강직하고 계책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눌지왕은 고구려가 후원하였던 실성왕을 살해 한 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복호를 귀국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지만, 눌지왕이 외교사절을 청하자 망설임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의 왕이 누가 되느냐 보다 과연 고구려와 얼마나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박제상 역시 그러한 고구려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제상은 고구려의 장수왕과 대면한 자리에서 '질자(인질)를 교환하는 것은 말세에나 있는 매우 안좋은 풍습이며, 지금 우리왕이 형제를 매우 그리워 하고 있기 때문에 대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준다면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설득하였다.

이에 동북아의 평화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장수왕으로써도,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생각하여 복호의 귀국을 허락하여 주었다.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문제는 왜국에 붙잡혀 있는 미사흔을 무사귀국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왜국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뿐아니라, 오히려 백제보다 더 자주 신라국경을 침범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는 적대국이었다.
박제상 역시 '고구려는 대국이며 임금역시 어질어서 대화로써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왜인들은 대화로 해결할 수 없으니 거짓 모책으로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한다'고 눌지왕에게 아뢰었다.

하지만 박제상의 모책이라는 것은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눌지왕에게 "신이 적국에 가면 청컨데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의하여 저들이 듣게 하십시오"라며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그가 떠나던 날, 아내는 배가 떠나는 포구까지 따라와 배웅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잘 다녀 오십시오"라는 말을 하였지만 박제상은 "그대는 다시 만날 기약을 생각하지 마시오"라며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렸다.
박제상의 아내는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한없이 통곡하였지만, 이미 배는 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국을 위해 오명(汚名)을 뒤집어 쓰다.

박제상이 예상대로 일본에서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또 왜국은 백제로부터 신라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그들을 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신라를 공격할 모의를 하고 있었다.
박제상은 이러한 왜국의 반신라 정서를 역이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박제상은 스스로 배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그것을 일본에게 믿게 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은 물론 미사흔의 가족 역시 옥에 가두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왜국은 박제상과 미사흔이 신라를 배신하였다고 굳게 믿게 되었으며, 이들을 신라공격의 길잡이로 이용하였다.
왜국의 신라공격 계획을 역이용하여 서기 418년 미사흔을 귀국시키는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이제 그를 어떻게 왜병의 진영에서 탈출시키냐는 문제가 남았다. 더욱이 왜병 장수들은 신라를 없앤 후에는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식을 잡아 그들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그야말로 왜인의 모략과 박제상의 지략이 맞서게 되는 상황이었지만, 박제상은 왜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간파한 후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먼저 박제상은 미사흔과 뱃놀이를 하면서 오리나 고기를 잡는등 왜인들을 방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뱃놀이를 하는 척 하면서 신라진영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홀로 남겨질 박제상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박제상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미사흔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상은 두사람이 함께 떠나면 의심을 살 수 있기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하였다.
그러자 미사흔도 박제상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목을 안고 울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미사흔이 떠난 것을 확인한 박제상은, 느긋하게 실내에서 늦잠을 자는 대담함을 보였다. 매일같이 일찍일어나던 박제상이 그날따라 늦잠을 자자, 왜병장수들도 의심하였지만 '어제 늦도록 배를 타서 피곤하여, 일찍 일어 날 수 없었다.'며 태연스럽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미사흔이 도주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왜병들은 박제상을 결박하여 왜왕에게 돌려보냈지만, 자신을 속인것에 화가난 왜왕은 박제상을 즉각 목도라는 곳으로 귀양보냈다.
하지만 왜왕의 복수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왜왕은 사람들을 시켜 박제상을 화형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불에 탄 시신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박제상은 두 왕자를 모두 무사귀국시켰지만, 자신은 타국에서 객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눌지왕은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박제상의 둘째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현재 울산 광역시 울주군 해발 700m 정도의 치술령에는 망부석 전설이 전해려오는 바위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박제상이 떠난뒤, 그의 부인은 두딸을 대리고 매일마다 치술령에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 죽으니 그 몸은 돌로 변하였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어디론가 숨어버렸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그녀가 변한 돌을 가르켜 '망부석(望夫石)'이라 하였고, 그녀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 숨어버린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록 후대까지 사당도 만들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지만, 이처럼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지는 것 또한, 당대약소국이었던 신라가 낳은 비극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박제상이 일본 왕의 회유를 뿌리치며 다음과 같이 말하며 충절의 죽음을 택한다.

이에 일본왕은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돌려 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한다. "나는 계림 신하이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제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祿)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대답한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을 받지 않겠다."
於是囚堤上 問曰 汝何竊遣汝國王子耶 對曰 臣是?林之臣 非倭國之臣 今欲成吾君之志耳 何敢言於君乎 倭王怒曰 今汝已爲我臣 而言鷄林之臣 則必具五刑 若言倭國之臣者 必賞重祿 對曰 寧爲鷄林之犬豚 不爲倭國之臣子 寧受鷄林之추楚 不受倭國之爵祿

왜왕은 노했다.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겸가]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 놓고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王怒 命屠剝堤上脚下之皮 刈겸가 使趨其上(今겸가上有血痕 俗云堤上之血) 更問曰 汝何國臣乎 曰계林之臣也 又使立於熱鐵上 問何國之臣乎 曰鷄林之臣也 倭王知不可屈 燒殺於木島中


기념관 앞에는 의미를 둔 설정인지는 모르지만 박제상의 부인 김씨(貞烈夫人)와 두딸이
문밖에서 기다리는 모습의 삼모녀상이 있고 기념관 뒤쪽에는 추모비가 있다.

기념관 우측에는 치산서원이 있는데 여기서 치산이라는 것이 치술령이 있는 치술산의
옛 이름으로 느껴진다.치산서원을 둘러보고 바로 산행에 나선다.치산서원에서
얼마 오르지 않아 삼사백년된 노거수가 있는 수왕사라는 사찰이 나오고 여기에
박제상과 관련된 사적 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에는 박제상의 부인과 두딸이 모두 정절사貞節死라고 하여 모두 죽은 것으로 나와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 즉
눌지왕이 박제상의 둘째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켜 그 충절에 보답하였다고
하였는데 앞 뒤가 맞지 않는다.살아있는 미사흔과 죽은 둘째딸과 결혼 시켰다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이후 신라왕이 신모사神母祠라는 사당을 치술령에 세운 것으로 나와있다.

 

경부고속도로 인보정류장 부근의  두동면과 두서면 경계 표시석

 

1025지방도 변 상수원 땜 앞 삼천교 부근 공원의 망향정 비석

 

동상 망향정의 정자및 비석의 모습

 

정자에서 내리다 보이는 땜의 모습

 

두동면 사무소앞 치술령 행로의 모습(우측으로치술령행임)

 

박제상 유적지전방3km 지점에 세워진 표시판등

 

박제상 유적지전방2km 지점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국수봉의 원경

 

주차장에 세워진 박제상 기념관 표시판

 

기념관 앞 정원에 세워진 박제상 삼모녀상

 

기념관 건물 입구와 표시판등의 모습

 

기념관내에 있는 4.5세기 생활상 기록 족자

 

박제상 부부의 영정(影幀)

 

기념관 조감도

 

치산서원의 홍살문

 

치산서원의 설명문 입간판

 

통로변에 세워진 등산로도 입간판

 

통로변에 있는 충효사의 모습

 

통로변 울창한 숲속의 소류지

 

치술령7부 능선위에 위치한  법왕사 조감도

 

 

통로변 산7부 능선위의 법왕사 종루등의 모습

 

법왕사가 조성중인 석불들의 모습

 

통로변 추락방지용수백m 에 걸친 나무 계단길등의 모습

 

첫 능선위 울주쪽의 망부석 설명문  입간판

 

울주쪽의 망부석 (음각의 망부석 표시가 있었음)

 

치술령 정상에 세워진 신모사지 비석등

 

치술령 정상에 세워진 각방면별 표시및 이정표시팜

 

정상 표시석을 배경으로

 

정상 동편에 세워진 경주쪽 망부석 입구 표시판등

 

치술산 동쪽 경주망부석 행로 나무계단길과 석계리 방면 원경들

 

경주쪽 망부석 설명문 입간판

 

경주쪽 망부석의 모습 (거대한 암반이 었음)

 

하산길 석계저수지 3.5km 전방에 위치한 약수터 풍경

 

하산길 정상2km 전방에 설치된 등산로 표시판등

 

등산로 입구 산록에는 봄의 전령인 나무 잎이 활작 피고 있었다

 

 산행 종점에 위치한 상당크기의 석계저수지의 모습(저수지 안쪽에  모의 교량등의 위락 시설을 설치 하는 준비 작업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