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월산 (秋月山 731M) 산행기

 

 

6시 40분 교대역을 출발했다. 시내 가로를 지나는 사이 날이 밝아져서 점차 사물의 모습을 뚜렷히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고속도로로 나와 지날 때는 분당 쪽에서 떠오르는 일출도 보게 되었다. 새해 첫날 청계산에서 해맞이 행사를 할 때 그 쪽에서 뜨는 해를 본 일이 있었다.

 

근래 산행중서 아침 일출을 자주 보게 되었다.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신비스런 느낌이 든다. 오늘 아침에는 깨끗하고 선명한 파란 하늘과 높고 고요히 떠 있는 흰구름에 비친 햇살이 선홍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번 달에는 서울 건축사 등산동호회 정기 산행으로 담양의 추월산을 가기로 했다. 낙동정맥 종주를 마친 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혼자 걷는 고달픈 걸음이었는데 이번에 동호회 일행과 함께 산에 가는 것이 새로운 느낌이 든다. 올해는 정기 산행에 거의 다 참가한 편인데 일행과 함께 가는 것이 퍽 오랜만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걸은 낙동정맥은 모진 산행을 해 왔다. 하루에 걷는 거리가 멀고 찾기 어려운 산길을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때때로 무성한 수풀을 헤쳐나가느라 살갖에 상처가 나는 등 어려움을 느꼈었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야성(野性)을 갖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모진 환경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치 등굣길에 도시락을 빠뜨리고 나온 것처럼 태어날 때 행복을 미처 받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정맥 종주를 하는 동안은 제대로 변변한 식사를 해보지 못했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상식량처럼만 먹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먹고 잘 입는 것에 대한 불만도 크지 않게 된다. 

 

어제 신문에서 일본 문인이었던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에 관해 난 기사에서 그녀가 쓴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를 읽었었다. 가로변 기사 진열대에서 그 시를 읽는 순간 감회가 느껴졌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결핍했다...

 

 

내가 단독 산맥 종주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갖고 있지만 세상과의 어떤 관계 의식에 빠지지 않은 채 태초 같은 자연의 체취를 오롯이 대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깊은 산길에서는 어떤 인문적 의식에도 물들지 않는 본연의 무한의 침묵과 그 울림 등을 조용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세상을 인식한 최초 모습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도 같다.

 

내가 갖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애정 때문이다. 농사 짓는 집에서 자라며 자연을 느끼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경이로운 현상을 대할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곤 했었다. 자연은 어떠한 사상 또는 학문보다 위대하게 느껴졌었다.

 

판교 톨게이트를 지나며 이종호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추월산은 워낙에 먼 거리라 4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한다고 했다. 산행 기점 도착을 11시로 예정하여 4시간 정도 산행하면 오후 3시에 매려오게 되는데 서울로 올라오는 차가 막힐 것에 대비해 식사는 올라오는 차 안에서 해결할 계획이라고 했다.

 

버스가 들녘을 지나자 창 밖에서 가을 정취가 짙게 느껴졌다. 장성 인터체인지에서 추월산으로 가는 동안 지나는 주변에서 팡화롭게 아늑한 농촌 풍경이 펼쳐 보였다. 그리고 더 안으로 들어가다 맑고 푸른 담양호를 좌측에 바라보며 지났는데 양평 호수를 지날 때처럼 드넓게 보였다.

 

 

 

 

 

 

 

 

 이번에 가는 추월산은 호남 정맥의 한 부분이다. 그동안 동호회에서 목적지로 정한 산들을 오가면서 전에 가보았던 산에 인접한 곳을 갈 때도 있었다. 춘천의 오봉산과 용화산이 그런데 이번 추월산은 지난번 갔던 강천산과 담양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 그 때 체험한 감각과 연관지어 산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월산 강천산이 다 호남 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이다.

 

추월산과 강천산 등 이 곳 주변 산세는 마치 항문처럼 조여 들듯 담양호 부분과 인근 고을을 둘러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에 댐을 막아 담양호가 있다. 그 산에 아래쪽으로는 호남 평야처럼 온 천지에 펼쳐진 것 같은 드넓은 평야가 아닌 적당한 크기로 펼쳐진 평화롭게 넉넉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과거에는 지형지세로 고을의 경계가 나뉘어 있어서 자연과 삶터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한 원리는 현대 도시에도 중시되지만 그렇지 못한 곳들도 있다. 얼마전 지났던 경남 양산시는 낙동 정맥에 의해 좌우로 지역이 나뉜 형국인데 그 양편을 오가는데 불편하고 시의 통합성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나는 담양 지역에 대해 언제나 좋은 느낌을 가져 왔다. 담양은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이어서 전국에서 이만한 곳을 찾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적당히 크고 수려한 산세와 너무 부유하지도 결핍되게도 하지 않게 하는 들녘이 갖춰져 있다. 그리고 모든 이의 심성을 맑게 하는 평온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담양지역의 옛 중심 고을인 창평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재를(사시 합격자 수) 배출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가사 문학의 산실인 곳이다.

 

10시 10분 전남 담양군 용면 월계리 국민관광단지 주차장에 내리니 추월산 정상부의 깍아 세운 석벽이 마치 성을 쌓아 놓은 듯이 보였다. 추월산은 담양읍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전남 담양군 용면 월계리와 전북 순창군 복흥면 경계에 위치하는데 “가을의 보름달이 산봉우리에 닿을 정도로 산이 높다해서 이름지어진 산”이라고 하며 전남 5대 명산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간단히 준비 운동을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추월산은 가을 단풍이 유명한 곳이어서 10월 산행지로 정한 것은 안성 맞춤인 셈이다. 단풍나무가 많아 절정기에는 온 산이 붉게 물든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 데 올 해는 전국적으로 예년보다 단풍이 열흘 가까이 늦어진다 해서 절경의 모습을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산길로 향하는 입구에 보이는 약수를 한잔 마셨다. 추월산은 숲이 유난히 깊고 골마다 약수와 맑은 물줄기가 솟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길 가에서는 할머니들이 직접 만든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잠시 후 입구에 설치한 지도를 보며 산행 길을 정했다. 보리암을 거쳐 추월산 정상까지 올라 다시 월계리로 내려오기로 했다.

 

한동안 바위가 박힌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가다보니 경사가 잠차 급해지기 시작했다. 10시 38분 동굴 앞에 당도했다. 그 위로는 길에 바위도 더 많고 경사도 더 급해졌다. 10시 46분 담양호가 시원스레 조망되는 바위에 올라 이번 산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풍광을 직접 보게 되었다. 주변으로 넓게 펼쳐진 산세의 계곡계곡에 채워진 호수가 시원하게 보였다.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르니 경사가 급하게 놓인 사다리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아래에서 절벽처럼 보이던 추월산 정상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상까지 그렇게 올라갈 높이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듯 했다.

 

한동안 계단을 오르다 보니 보리암과 직벽이 올려다 보였다. 보리암에 오르면 조망이 좋을 것 같았다. 다시 더 오르다 보니 우측 바위 위에서 대여섯 사람이 조망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 곳이 신선대인 것 같았다. 보리암까지 올라 조망하려다 그 곳에서 보이는 풍광이 궁금하여 올라서 내려다보니 담양호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 보였다.

 

다시 왼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급경사진 절벽을 오르니 좌측으로 보리암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보리암까지 거리가 100m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계곡처럼 내려갔다 다시 오르게 되어 있었다. 그 보리암은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리암으로 다가서니 입구 우측에 다시 약수가 보였다. 그리고 안쪽에서 독경 소리가 들려 발걸음을 조심하게 되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전면 5컨 건물의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불전안에서 스님이 불상을 행해 기도를 하고 계셨다. 건물 앞에는 절벽인데도 제법 너른 마당이 정갈히 닦여 있었다.

 

 

 

 

 

 

 

보리암 마당 끝에 대나무로 쳐 놓은 울타리로 다가가면서 거기서 바라보이는 풍광이 어떨까 하는 기대가 일었다. 좌측에 큰 느티나무에 노르스레한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울타리에 기대듯 다가서 내려다보니 아까 보았던 시원한 풍광이 다시 펼쳐 보였다. 그 곳에서는 추월산 측면 한 자락이 담양호 쪽으로 비스듬히 내리 뻗어 보이는데 유독 그 산자락에는 더러 단풍이 들어 기대하던 가을 정취를 더 느낄 수 있었다.

 

스케치를 하고 보리암에 들어서던 길로 되돌아 나와 다시 계단을 걸어 정상으로 올랐다. 아까 보리암으로 들어오다 지난 이정표에서 정상까지의 오름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그리고 경사 급한 사다리도 여러번 지나게 되었다.

 

정상부에 올라서니 앞서 올라온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식사 할 자리를 만들려고 게단 공사 후 남은 부재들을 하나씩 들고 좌측의 바위에 가서 자리가 적당한지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 모두가 앉기에는 너무 좁아서 다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12시 10분 자리를 깔고 각자 준비한 음식을 펼쳐 놓으니 푸짐하고 먹음직스레 보였다. 산행에서의 식사는 여럿이 산행할 때 가장 즐거운 모습이다. 그리고 땀을 흘린 후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맛도 일품이다.

 

 

 

 

12시 45분 식사 후 능선을 따라 1.2km 떨어진 정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식사를 한 봉우리에서 정상쪽으로 펼쳐보이는 봉우리가 여러 개 보여 어느 곳이 진짜 정상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지도상에서는 중간에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 같은데 그 뒤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더 높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르던 월계리 사면 반때쪽으로도 익은 벼가 그득한 들녘이 보였다.

 

1시 12분 정상 추월산 정상(731M)에 닿았다. 오늘 오른 최고 정상부에 서면서 오늘의 목묘를 이룬 것 같은 뿌듯함이 느껴졌다. 먼저 온 일행과 함께 사진을 찍고 내려오다 올라오는 이회장을 만나 서둘러 수리봉을 들러 가겠다고 했다.

 

아까 보리암 정상에서 좀 멀어 보였지만 능선 길이라 서두르면 하산 지점에 늦지 않게 도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리봉으로 가는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나 능선 지점에서 우측으로 호수와 산세가 멀리 펼쳐보였다. 그리고 높은 봉우리를 지나가서 다시 뒤돌아보니 넘어온 봉우리 좌측 절벽과 그 아래 펼쳐진 호수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보였다.

 

 

 

 

걷다 보니 수리봉까지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게 느껴져 일행이 기다리게 될 것 같아 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런데 수리봉 가까이 다가서고 보니 경사가 급해 올라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안부를 지나 오름길을 걸었다. 앞에 바위로 된 봉우리 가까이 다가섰다. 바위틈에 자라는 단풍나무가 멋지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암릉에서 올려 보이는 봉우리가 험하고 높아 보여 조심스레 올라갔다.

 

 

 

 

1시 58분 수리봉(723M)에 올랐다. 정상보다 8m 낮은 위치였다. 잠시 주변을 졸아보았으나 지나면서 호수쪽으로 펼쳐보이던 조망은 보이지 않고 정상쪽으로 이어진 산세의 우측면 산세가 펼쳐보였다. 그 사이 다른 일행이 오는 소리가 들려 잠시 기다리니 네 분의 일행이 올라왔다. 그들과 사진을 번갈아 찍어주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 하산길을 찾아 부지런히 걸었다. 수리봉에서 바로 아래로 내려가면 걷는 거리가 더 멀 것 같았다.

 

 

 

 

지나온 중간 봉우리에서 월계리로 내려서는 이정표를 목표로 걸어갔다. 하지만 정상 아래서 바로 내려가는 길이 없었다. 올라올 때 이 회장이 지도를 보면서 설명할 때는 정상에서 보리암 정상부로 조금 내려선 곳에서 월계리로 내려가는 길이 잇을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시 수리봉쪽으로 가서 월게리 방향 이정표를 보고 하산했다. 벌써 세번째 보는 이정표였다. 그 부근에서는 모두 그 길을 들어서야 월게리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순간 아까 바로 내려 갈 걸 하는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급히 내림 길을 걷다 보니 전화가 걸려왔으나 배낭에서 꺼내는 사이 끊어졌다.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거니 조병섭 건축사로부터 위치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위치를 말하고 급경사지를 서둘러 내려갔다.

 

급경사 길을 내려선 후 이제 거의 다 왔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완만하게 이어지는 길이 더 멀었다. 가다 보니 계곡에서 부부가 탁족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도 완만한 길이 계속 이어져 한참 걸어 월게리 마을로 내려섰다. 다시 전화를 걸어 다 내려 왔다고 하니 이회장이 받으며 150m 정도만 오면 된다고 했다.

 

일행이 기다리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밖에서 아이스케키를 먹으며 한가롭게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인원 점검을 하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서울서 내려오면서 예정 했던 것 보다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가다가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기로 하고 내장사 입구로 갔으나 여의치 않아 운전 기사가 추천한 천안 삼거리 근처 식당으로 가서 하기로 했다.

 

내장산 입구로 지나오는 동안 산허리를 휘감듯 나 있는 도로를 지나면서 보이는 산세가 수려했다. 정읍 내장사 단풍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곳인데 전남북 경계를 이루는 호남 정맥의 산세에 그렇게 수려한 풍광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지났다.

 

천안 삼거리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와 8시 40분경 서울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막힌 부분도 있었지만 아침에 출발할 때 염려 한 것보다 일찍 도착해 편안한 기분으로 귀가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2010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