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영월백운단맥종주

 

종주에 필요한 5만분의 지형도 도엽명 : 정선 예미

 

한강영월백운단맥이란?

 

백두대간 오대산 두로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한강정맥(기맥)이 흐르다 계방산 가기전 홍천군 둔내면과 평창군 진부면 용평면의 삼면지점에서 동남방향으로 분기한 영월지맥이 남하하다 구영동고속도로 속사리재 지난 평창군 용평면, 진부면, 대화면의 삼면봉인 白積산(△1141.2)에서 서남방향으로 금당단맥을 분기하고 주왕산에서 동쪽으로 가리왕단맥을 분기하고 벽파령에서 오르다 서쪽으로 남병단맥을 분기하고 흐른다

  

靑玉산(1250)에서 서남방향으로 영월지맥은 흘러가고 한줄기를 동남방향으로 분기하여 정선군 정선읍과 평창군 미탄면의 경계를 따라 육백마지기 임도(1190, 0.5)-△1179.8봉(2.7/3.2)-

실제적인 성마령(930)-△949봉-지도상 星摩령(970, 3.9/7.1)-△891.9봉 지나서

서남방향으로 鼎蓋산(△849.3, 여맥) 삿갓봉(770)을 떨구고 동진하여 

42번국도 비행기재(마전치, 610, 4/11.1)로 내려선다

 

마전치에서 동쪽으로 喇叭봉(△693.4, 여맥)을 떨구고 남진하여 水靑산(△872, 2.5/13.6)-수갈령재-

돌도끼산(963)에서 북쪽으로 萬支산(△715.5, 여맥)을 떨구고 동남진하여 푯대봉(△962, 3.5/17.1)-

상정바위봉(950)-시목재(730)를 지나 동강변에 있는

 

단산산행으로 유명한 암릉의 白雲산(△882.5, 2.8/19.9)에서 점재로 가는 수리봉능선을 떨구고 칠목령능선으로 절벽같은 급경사를 한없이 내려가며 684봉-천연기념물260호 백룡동굴이 있는 곳으로 내려갈 수있는 나륜재(450)에서 칠목령(510, 2/21.9)으로 올라간다

 

이후 길지내능선을 따라 하늘벽 뼝대가 있는 등고선상410봉을 지나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연포마을이 있는 동강변(370, 2.5/24.4)에서 끝나는 약24.4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의 특징은 좌측 동쪽방면으로는 전부 절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겨울 등반이나 야간산행은 금지해야 하는 엄청나게 험한 산줄기라 반드시 경험자와 같이 산행하기를 권하며 동강변을 직접 끼고 가는 구간은 더욱 더 조심해야 하는 산줄기다   

 

 

 

한강영월백운단맥종주제1구간

 

종주에 필요한 5만분의 지형도 도엽명 : 정선

  

언제 : 2011. 5. 30(달의날) 맑음

  

누가 : 신경수

  

어디를 : 평창군 대화면 하안미리3구 갈번지 몽골캠프에서 영월지맥 벽파령으로 올라 청옥산까지 가서 영월지맥은 서남진하고 동남방향으로 한강영월백운단맥을 따라 비행기재(마전령)에서 미탄면 백운리 매대마을까지

  

靑玉산(1250) : 정선읍, 평창군 미탄면, 평창읍

星摩령(970)   : 정선읍, 평창군 미탄면  

  

구간거리 : 22.1km  접근거리 : 5.4km 단맥거리 : 11.1km 하산거리 5.6km

  

구간시간 10:30 접근시간 2:20 단맥시간 7:00 하산시간 1:10 휴식시간 1:00 

 

동서울터미널에서 대화가는 버스는 아침 7시10분 차가 첫차다 결국은 10시에나 백운단맥 능선으로 올라설것 같아 짧게 비행기재에서 끊어타기를 하기로 하고 아주 느긋하게 출발한다 대화에 도착하니 9시30분이다 전주에 이용했던 평창군 모범운전사 회장인 남용철님의 택시를 타고 전번에는 임도를 따라 벽파령으로 오르다 중간에 길 상태 때문에 더 못 올라간 일이 있어 이번에는 아예 하안미리 갈번지 몽골캠프로 가는 삼거리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한다

 

몽골캠프입구 : 10:10

 

전번에 벽파령으로 올랐던 철제차단기가 있는 곳에 이른다 무려 20분이나 걸린 것으로 보아 1.5km 이상은 걸어 오른 것 같다

 

벽파령 등산로입구 : 10:30

 

전번에는 여기서 벽파령으로 직접 올랐지만 시간과 체력이 너무 많이 소모가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좀 멀지만 빙글빙글 도는 임도를 따라 가기로 한다 세월아 네월아 오르다보니 내 예상대로 임도 삼거리에 이른다 이정목에 "직진하면 고길리16.3 이길은 남병단맥 기러기재 임도 삼거리로 가는 길이다 온길 하안미1.7 좌측으로 오르면 벽파령1.3" 여기서 하안미까지 거리는 아마도 벽파령입구까지 거리인 것 같다 하안미마을이라면 보통 가평동 삼거리를 일컫는바 거리가 1.7km 밖에 안될리가 없기 때문이다 

 

임도삼거리 : 10:50        

 

임도삼거리 이정목

 

또 무려 20분을 걸어 철탑이 있는 신벽파령 임도 고갯마루에 이른다

 

신벽파령 : 11:10 11:15출발(5분 휴식) 

 

전번과 똑같이 오르는데 옥잠화 닮은 독초인 박새와 여로가 하얀꽃을 몽글몽글 피워내고 있다 이 두 독초는 꽃이 없으면 구별하기 힘들다 야실야실 한 것이 박새고 두꺼우며 탐스럽게 피는 꼿이 여로다 내가 써놓고도 나도 구분이 안간다^^ 암튼 둘다 독초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

 

박새꽃

 

여로 꽃망울

 

참나물이 지천으로 깔린 평평해 지는 곳에 이른다 : 11:30

 

미역줄나무 성가신 곳을 지나 평지길을 간다 : 11:40

 

또 미역줄나무가 성가신 나물밭을 아니 오른듯 시나브로 가다가 여기저기서 아주머니들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동네 아주머니들로 참나물을 채취하러 올라왔는데 벌써 푸대가 그득그득하다 "아주머니 이곳은 완존히 참나물밭이네요 나야 등산온 것이니까 나물 뜯을 시간이 없으나 뜯는다면 금방 한푸대 되겠네요" 그러며 참나물 실한 것 하나 꺽어들고 "참나물 맞지요" 하니 맞는다며 어디 청옥산을 가느냐고 묻는다 청옥산으로 해서 비행기재까지 간다니 놀라서 입을 다물줄 모른다 "그 먼 곳을 혼자 간단말이여" 말도 안된다는 눈치다

 

인사하고 또 평지길을 가듯 살그머니 오르다보면 우측으로 펑퍼짐한 초지를 가로질러 전번에 남병단맥 할 시 붙여놓은 내 표시기 2개가 얼마나 되었다고 반갑다       

 

남병단맥 갈림길 : 11:55 12:00출발(5분 휴식)

 

3분 정도 천천히 오르면 등고선상1210봉 정상으로 전번에 알바했던 장소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임도를 만나 고길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청옥산은 좌측으로 높이 보이는 산으로 경사도 없는 등로를 따라 시나브로 가면된다

 

등고선상1210봉 : 12:05

 

잠시 내려갔다가 지천으로 깔려있는 참나물을 뜯어 씹으며 향기에 취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펑퍼짐한 청옥산 정상에 이르면 "청옥산1255.7" 정상석이 있고 이정목에 "우측으로 가면 지동리4.5 좌측 육백마지기0.5"이라 한다 이정목에 높이가 다른 "청옥산1270" 그 옆으로 "정선313 2006복구" 삼각점이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내가 온길로 멋들어진 모자를 쓰고 오르는 사람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등산오셨느냐 어디서 오셨느냐 나물 뜯으려 오셨느냐 물어도 아니라며 혹시 톱을 가지고 다니며 나무를 자르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느냐고 거꾸로 물어와 이상해서 그제사 복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동부산림..........그런 문구가 들어있는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냐

 

잠깐 사이에 똑같은 복장을 한 또 한사람이 합세를 한다 자기네들은 동부산림관리소에서 나와는데 이 근처에서 엄나무를 통채로 밑둥부터 자르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잡으러 왔단다 "아니요 못보았는데요" 마침 잘 되었네요 하며 이정목과 정상석 사이에 서란다 자기네들은 이곳에서 하도 많이 사진을 찍어봐서 아는데 바로 그 자세로 찍는 것이 제일 잘나온다며 카메라를 달랜다

 

참 산줄기를 하다보니 이 깊은 산줄기에서 단속원들을 만나 정말로 오래간만에 사람이 나오는 정상 사진을 한장 건지는구나 하며 감사합니다

그래서 서라는대로 서서 분명히 한장 찍었는데 그 때 확인 안해 본것이 화근이라 정상석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즉 카메라 셧터가 아닌 다른 곳을 누르고 찍었다고 한 것이다 참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격습니다 그려^^ 

 

청옥산 : 12:35 12:45출발(10분 휴식)

 

좌측 육백마지기 쪽으로 잠깐 가니 또 단속원 한명이 똑 같은 복장을 하고 나타난다 셋이서 도대체 그 사람을 어디가서 잡느냐고 툴툴 거리는데 내가 맞장구를 친다 "이 깊은 산중에서 찾기란 아마도 바다에 빠진 바늘찾기가 아닐까요" 말은 내뱄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적당한 비유는 아니라 쬐금 미안해진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에구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말을 삼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들 이왕 올라온 것 못잡고 내려가기가 뭐한지 잠깐 풀숲으로 들어가더니 확인도 안하고 그저 무심코 뚝뚝 뜯더니 어느새 손아구 가득 참나물이라 하나 뜯고 확인하는 나하고는 천지 차이라 에고 부러워라

 

그런데 이게 뭔일인가 스텐 정상안내판이 하나 떡 하고 나타나신다 "청옥산 정상 높이 1255m이고 일명 육백마지기로 불리며 옛날부터 이 산에는 곤드레와 청옥이란 산채가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백마지기는 그 면적이 육백두락이나 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정목이 또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삿갓봉3.8 좌측으로 가면 육백마지기0.9 온길 지동리2.3" 어떻게 된게 조금 더 왔는데 육백마지기까지 거리는 따불로 늘어나있다 믿지를 말자 삿갓봉으로 가는 길이 영월지맥길이고 백운단맥은 좌측 육백마지기쪽으로 가야한다

 

2번째 청옥산 정상 안내판

 

2번째 청옥산 정상 이정목

 

산나물의 보고 참나물과 나물취밭이다 잠시 내려가니 새로 골을 골라놓은 너른 밭이 나타나며 이정목이 서있다 "청옥산0.2 육백마지기0.3" 길은 없으니 오른쪽 능선으로 가 밭 가운데로 진행한다

 

육백마지기 초입 이정목 : 12:50

 

너른 산사면이 전부 밭으로 일구어졌다

 

송신탑을 가기전 좌측으로 꺾어야 단맥능선길이다

 

밭안으로 진행해 농로가 나오고 밭가로 내려가면 차들이 세워져 있는 안부에 이르기 바로 전 삼거리가 나오고 농사용 트럭이 한대 주차를 하고 있다 이정목에 "청옥산0.5  직진하면 회동리" 그런데 이 회동리가 문제다 좌측 일대도 정선읍 회동리이며 우측 일대도 평창군 미탄면 회동리이기 때문이다 한문까지도 같은 檜洞리이다

  

육백마지기 : 12:55 13:00출발(5분 휴식)

 

육백마지기 삼거리 왼쪽 숲속에 이런 안내판이 방치되어 있다

 

내용인즉슨 "강한친구 대한민국육군 이 지역은 1968년 울진 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120명이 미탄면 석정리 고씨 일가족 5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이곳 청옥산을 거쳐 중왕산을 넘어 계방산으로 도주하면서 이승복일가를 포함한 민간인 4명을 잔인하게 사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도주한 지역입니다 주변에 거동수상자 뱔견 즉시 신고하여 주십시요 적 과거 침투로 삼척원덕해안-정선 가리왕산-청옥산-중왕산-계방산 육군제1670부대 3대대장"

  

안부에서 살짝 오른 작은 헬기장에서 바라본 청옥산 정상과 내려온 삼거리

  

청옥산 좌측 사면 밭과 농기계 차량들 한창 일에 열중이다

 

육백마지기에서 본 미탄면 회동리 일대와 산사면 밭

 

멀리 장쾌한 백두두위예미분맥 계족산 산줄기

 

 

목조주택과 밭 비닐하우스단지  

 

작은 헬기장 지나 농로를 따라  목조주택 한동과 비닐하우스단지를 지나 잠깐 내려간 안부 가기전 농로삼거리에서 앞에 있는 송신탑이 있는 곳으로 가면 안되고 좌측으로 살짝 돌면 녹슨 문이 열려 있고 마당엔 민들레가 지천으로 깔려있는 "민족화합성토제단, 인류평화성토제단"이 봉안되어 있다

 

 

 

삼신제단안내문

 

이산에 오르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오며 건강과 하시는 일이 형통하시기를 합장으로 정성하면서 안내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곳은 가택안녕과 성역화해 나라안정 그리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지성하는 천제단입니다 수암배선문선생께서 임인년 4월15일(1962년도) 이산에 입산한 뒤로 30여년간을 지역화해와 민족의 화합 통일을 앞당기고 뒷밭침 하기 위한 뜻으로 전국 1천명산의 성토를 그리고 세계인류의 인적 물적 교류와 평화를 영원하여 172개국 성토(흙과 돌)를 모아서 삼신제단을 조성하고 임인년4월15일(1992년도)에 봉안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한 영원의 제단이므로 직업 종교 노소남여 구별없이 온 민족이 한마음으로 합심한다면 나라의 안정과 통일의 길이 앞 당겨 질 것입니다 경내에서 지켜야 할 몇가지 주의 말씀을 드린다면 조용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임하여 주시고 도로에서는 위험한 낭떠러지와 낙석을 주의하시고 모든 시설물과 자연환경을 훼손되지 않게 유의하여 주십시요 특히 채약 채석 벌목 등은 금하고 있습니다 풀한포기 돌한개라도 무단 채취하시면 고발조치되오니 유념하여 주십시요  

 

 

삼신제단

 

 

옛 동이배달국가지도

  

몽고 중국 전역에 해당하며 소련과의 경계가 된다

  

단군조선시대 역대기

 

글씨가 흐려 내가 예전에 작성해놓은 우리의 상고사 역대기를 아래에 실습니다

 

우리나라는 나라명이 桓國(한국)이며 파내류산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미르고원이나 천산을 말한다 바로 그 산아래서 천해의 동쪽까지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천해는 바이칼호이며 그 동쪽이라함은 만주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말한다

남북 오만리 동서 2만리에 걸쳐있었다 여기에는 모두 12나라 아홉족속 즉 九桓이 살았다 즉 이들이 모두 한국사람들인 것이다

 

그 때는 법과 명령이 없어도 모든 삶은 이치에 맞도록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공적인 일을 결정할 때 그를 대표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어 12나라 아홉족속이 다 모여 桓仁을 桓花로 둘러쌓인 곳에 앉히고 높이 임금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桓花는 槿花 즉 지금의 무궁화꽃을 말한다

 

그때가 BC7199년의 일이었으며 그후 桓仁시대가 열리며 BC3899년 까지 7세 역년 3301년을 이어왔다 혹자는 역년 63182년이라 하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 알수는 없는 일이다

 

제1세 安巴堅 桓仁

제2세 赫 胥 桓仁

제3세 古是利 桓仁

제4세 朱于襄 桓仁

제5세 釋提壬 桓仁

제6세 邱乙利 桓仁

제7세 智爲利 桓仁

 

이때에 “우주의원리”를 밝힌 天符經은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다음에 나라를 세우신 桓雄天皇이 배날나라를 세우면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鹿圖文으로 옮겼으며 이 천부경은 伏羲씨가 지은 桓易의 모체이며 여와와 주양을 거쳐 주나라때 周易이 되었다

또한 녹도문은 현재 경남 남해군 낭하리 계곡과 만주 길림성 경박호 선춘령과 부오소리의 암석에 그 때 새겨놓은 것으로 보이는 글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桓國의 마지막 임금때 사람은 많아지고 물자가 부족해 삼위산과 태백산에서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겨 지위리 한인의 아들인 환웅을 천거하여 “弘益人間”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天符印 3개를 주며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고 무리들이 桓雄을 임금(天皇)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倍達이라 하였다

이래서 배날나라는 BC3898년부터 BC2334년까지 18세 역년 1565년간이다

 

제1세 桓雄 居發桓 :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360여가지 일을

風伯 雨師 雲師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역법을 만들어 일년을 365일로 정하였으며

곰족의 딸을 황후로 받으며 혼례법을 제정하고

그 외 여러 가지 복식 제도등을 만들었으며 공수와 두 열이라는 음악이 있었고 계산할 때 쓰는 算木이 있었다 

제2세 桓雄 居佛理

제3세 桓雄 右耶古

제4세 桓雄 慕士羅

제5세 桓雄 太虞義 : 黙念 淸心 調息 保精의 장수법 터득

아들 12명중 막내아들 太皞가 바로 伏羲씨로 天河에서 卦圖를 얻었는데 이것이 바로 河圖이며 洛書와 함께 桓易의 이치가 되었으며 八卦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제6세 桓雄 多儀發

제7세 桓雄 居 連

제8세 桓雄 安夫蓮 : 우리의 시조인 高矢씨의 후손인 小典에게 지금의 중국 섬서성 기산현 서쪽에 있는 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하였 고 그의 아들이 神農씨로 의약의 체계를 세웠으며 물 물교환 제도를 만들어 생활이 편리해졌다

제 9세 桓雄 養 雲

제10세 桓雄 葛 古

제11세 桓雄 居耶發

제12세 桓雄 州武愼

제13세 桓雄 斯瓦羅

제14세 桓雄 慈烏支 : 蚩尤天皇이라고도 하며 창과 투구등 쇠병기를 만들었 으며 12제후의 나라를 합병하였다

중국 軒轅과 전투를 하여 이겼으며 도읍을 지금의 중국 절강성 항주 근방에 있는 靑丘로 옮겼다

망나니인 헌원이 치우천황을 뵈러 가는 길에 사람이 되라는 말과 함께 자부선인에게 삼황내문경을 받았 으며 이것이 노자로 이어져 도교의 기초가 되었으며 헌원은 지금도 도교의 개조로 숭배받고 있다

제15세 桓雄 蚩額特

제16세 桓雄 祝多利

제17세 桓雄 赫多世

제18세 桓雄 居弗檀 : 檀雄이라고도 하며 그의 아들 단군 왕검이 단군조선 을 건국하였다 이때가 BC2333년의 일이다

 

단군왕검은 배달나라 18세 거불단 환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곰족의 왕녀이다 BC2370년 5월2일 寅時에 태어나 성장하여 河伯의 딸과 결혼하여 扶婁 扶蘇 扶虞 夫餘 이렇게 4아들을 두었다

九桓의 백성들이 BC2333년 10월3일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왕검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를 연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3일을 개천절로 정한 것이다

도읍을 새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진 지금의 중국 할빈의 완달산에 있는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이름을 “檀”이라 하였으며 이 아사달을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이라고 불렀다

 

이런 단군조선은 BC2333년부터 BC238년까지 47대 역년 2096년간이다

 

제1세 檀君 王儉 : BC2311년 도읍을 송화강가로 정하고 이름을 平壤이라 하였다

BC2283년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을 마리산에는 塹城 檀을 만들었다

BC2266년 도산회의에서 중국의 태평성대를 말하는 요 순시절의 순임금이 회대의 제후를 감독하게 하였다

BC2241년 3월15일 세상을 뜨다

제2세 檀君 扶婁 : BC2238년 도량형의 표준을 정했으며 물건 가격을 통 일시켜 모두 편리하였다

BC2231년 토지제도인 정전법 시행과 토지대장을 만들 어 세금의 기틀을 잡았다

BC2299년 신지 귀기가 七回歷과 邱井圖를 만들었다 칠회력이라 함은 일곱신에게 제사 지내는 주기로 천신 월신 화신 수신 목신 금신 토신을 말하며 요즘의 일주 일인 “일월화수목금토”요일을 말하는 것이며 구정도는 지금의 지적도를 말한다

제3세 檀君 嘉勒 : BC2181 을보륵이 국문정음인 지금의 한글의 모태가 되는 “加臨土” 38자를 제정하여 소통이 잘 되도록 하 였다

지금의 한글과 흡사하여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했다 는 뜻은 이 가림토를 조금 변형하여 새로 정비하였음 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BC2180년 동양사학의 원조인 倍達留記를 편찬하였다

제4세 檀君 烏斯丘 : BC2137년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왕으로 봉했다 후에 그의 자손들이 몽고족이 되었다

10월 태백산에서 하느님께 제사 지내고 선약(인삼)을 얻었다

BC2133년 조개껍질로 만든 圓孔貝錢을 만들었다

제5세 檀君 丘乙 : BC2087년 감성관이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기를 만들어 천도와 맞게 하였다

제6세 檀君 達門

제7세 檀君 翰粟

제8세 檀君 于西翰

제9세 檀君 阿述 : BC1980년 매년 8월1일을 정기회의 날로 정하여 민권 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0세 檀君 魯乙 : BC1950년 임금의 자문기관 설치

BC1949년 고시제도 도입

BC1946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1893년 천문대 축조 감성관을 둠

제11세 檀君 道奚 : BC1891년 종교개혁을 실시 종교의 중흥시대를 열었음

BC1879년 곡식을 찧는 그릇과 띠풀로 지붕을 만들었으 며 배를 만들어 무역이 트였으며 농사를 절기에 맞추어 짓도록 하였음

BC1864년 만국박람회개최

BC1854년 기계를 만드는 작청을 설치해 현상을 걸어 발명을 한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예를 들면 자명종 진천뢰 측우기 등 26점

제12세 檀君 阿漢

제13세 檀君 屹達 : BC1767년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눈 지방자치제 실시

BC1763년 독서 활쏘기 등을 가르키는 법정학교를 설립 해 학생인 國子郞을 뽑았으며 사람들은 이를 天指花郞 이라 불렀다

제14세 檀君 古弗 : BC1680년 쇠로 子母錢이라는 돈을 주조했다

BC1670년 국립대학 설치

BC1666년 인구조사를 하니 1억8천만명이었다

제15세 檀君 伐音

제16대 檀君 尉那

제17세 檀君 余乙 : BC1535년 고수노가 政法原論 38질을 바침

BC1533년 日蝕이 있었음

제18세 檀君 冬奄 : BC1480년 고수노에게 國史 18권을 편찬하게 함

제19세 檀君 縱年 : BC1433년 국문서당을 세움

BC1426년 조개로 貝葉錢을 주조함

BC1420년 공창을 설립 종이와 옷감을 생산하였음

BC1410년 송화강가에 조선소를 설치했음

BC1391년 황운갑이 지남차와 목행마를 발명하였음

BC1385년 목아득이 우주원리론을 저술하였음

BC1382년 지이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저술했음

제20세 檀君 古忽 : BC1341년 共工 을홀이 九桓의 지도를 만듬

제21세 檀君 蘇台

제22세 檀君 索弗婁

제23세 檀君 阿忽 : BC1206년 군관학교를 설립해 병학을 가르쳤다

BC1183년 토지제도인 井田法을 가르침

제24세 檀君 延那 : BC1152년 조대원이 정치원론 10권을 바쳤음

제25세 檀君 率那

제26세 檀君 鄒魯 : BC1024년 의학원을 세워 백성들에게 가르침

BC1005년 위문국이 정치론 28권을 저술함

제27세 檀君 豆密

제28세 檀君 奚牟

제29세 檀君 摩休 : BC925년 왕문이 예부터 있어온 神篆이 번거로워 새로 운 글을 지었음

제30세 檀君 奈休 : BC880년 부분석이 정법원리론을 저술하였음

제31세 檀君 登屹

제32세 檀君 鄒密 : BC837년 3월 日蝕이 있었음

제33세 檀君 甘勿 : BC816년 황선문이 유황발사총을 발명하였음

BC813년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음

BC812년 순길이 장생불로단을 만듬

BC804년 고삼도에게 현인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물 으니 그 방법은

가까이 하여 그 겸손함을 보고

멀리하여 그 신용을 보며

갑자기 물어 그 말재주를 보며

급히 주어 어떻게 처리하는 가를 보며

난을 말하여 그 용맹을 보며

술에 취하게 하여 그 태도를 보며

색을 시험하여 그 몸가짐을 보며

재물로써 시험하여 그 청렴함을 보며

글을 통하여 그 학문을 보며

말로 물어 그 변론을 보며

잡사람과 같이 있게 하여 그 절개를 관찰하는

11가지가 구비되면 비로서 현인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박달산에 있는 감물왕국이 바로 이 단군님께서 치세를 하였던 것이며 안타깝게도 지워져 있으니 다시 글자를 새겨야 할 것이다

제34세 檀君 奧婁門

제35세 檀君 沙伐 : BC765년 日蝕이 있었음

제36세 檀君 買勒 : BC699년 초나라사람 오자도가 목면종자를 가지고 입국

BC687년 채저명이 정치형법서를 전하였음

BC680년 오경박사 우문충이 토지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고 遊星說을 저술했음

BC675년 우세숙이 성리학과 심리학을 저술함

BC650년 손숙문이 의학과 화학을 저술함

제37세 檀君 麻勿 : BC642년 쇠로 方孔錢을 주조함

제38세 檀君 多勿

제39세 檀君 豆忽 : BC525년 8월에 日蝕이 있었음

제40세 檀君 達音 : BC507년 윤복지가 도덕경을 저술함

BC500년 진개가 치국요람을 저술함

제41세 檀君 音次 : BC488년 공상의가 종교론을 저술함

제42세 檀君 乙于支 : BC469년 철인 이일선이 천리경을 저술함

BC467년 백호돈이 지리학과 광물학을 저술함

제43세 檀君 勿理 : BC454년 장자학이 논리학을 저술함

제44세 檀君 丘勿 : BC423년 日蝕이 있었음

BC421년 최화덕이 동물학과 식물학을 저술함

BC416년 서백원이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사상의학을 저술함

BC410년 국학박사 황운원이 백과서를 저술함

BC408년 유종득이 理財學을 저술함

BC405년 적우순이 심리학을 저술함

제45세 檀君 余婁 : BC393년 법률을 개정하여 대동률령 공포

BC385년 곽태원이 양생론을 저술함

BC382년 마자은이 이기일원론을 저술함

BC369년 장소부가 의학대방을 저술함

BC367년 홍문선이 태학조문을 저술함

BC357년 조문휴가 자본론을 저술함

제46세 檀君 普乙

제47세 檀君 高列加 : BC274년 소정국이 건축학을 저술함

BC271년 구노선이 種樹學을 저술함

BC265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248년 10월1일에 日蝕이 있었음

BC239년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북부여를 세움

BC238년 임금이 유약하여 제후들의 난을 이기지 못 하고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단군 조선을 넘어 기원전 약7199년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이칼호 동쪽 드넓은 지역을 다스리며 용맹을 떨쳤으며 갖가지 법과 학문 등이 꽃을 피웠으며 갖가지 기술들이 발전하여 국민들이 편리하게 살만한 그런 태평성대가 47세 단군때에 이르러 급격히 쇠약해져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워 BC239년에서 BC58년까지 6대 역년 180년을 이어갔으며

 

그 사이 부여임금의 딸인 동신성모 파소의 아들인 박혁거세가 13살 때 왕으로 뽑혀 신라를 건국했으며

이후 고주몽이 북부여를 이어받아 단군조선의 북쪽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뒤를 이어 온조가 단군조선의 땅인 황하와 회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대륙 동쪽에다 백제라는 나라를 세워 삼국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7천 누백년의 역사를 없애고 작금 우리의 교육은 여기서부터 역사라 하였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상으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았으니 이 글을 보시는 산님들 우리 역사의 허구성을 잠시나마 한번쯤 뒤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성토를 모은 세계172개국의 이름

 

172개국의 흙을 모은 세계지도

 

 

단기 1년에 발효한 한배검의 칙어 8조문

 

 

 

농로삼거리 인류평화 삼신제단 : 13:10  13:25출발(15분 휴식)

 

민가뒤 푸른 초원이 드넓게 펼쳐지며 온 산하가 내려다보인다 사방으로 숨가쁘게 펼쳐지는 산줄기들의 흐름이 장쾌하며 발아래로는 예쁜 꽃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졌다

 

 

민가 뒤 푸른 초원 뒤로 빼꼼히 보이는 산봉우리가 청옥산

 

오른쪽으로 보이는 조그만 봉우리로 가지말고 그냥 농로를 따라 민들레 꽃밭을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면 흐린 어자안부에 이르고 미탄면장님의 안내말씀과 벽파령입구에서 본 똑같은 프래카드가 걸려있다

 

내용인즉슨

"산나물 산약초 불법채취 밀반출 특별단속" 프래카드인데 얼마나 사람들이 극성을 부리면 저런 프래카드가 다있나 싶다 제발 좀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데 산전체를 감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 신고를 기다릴 수밖에 다른 단속을 할수있는 묘안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외지 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이나 그 무거운 벌금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채취를 하는 입장이라 안타까운 현실이다 

 

흐린 어자안부 : 13:30 13:35출발(5분 휴식)

 

안내판 옆으로 좋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둔덕 좌측 사면으로 길이 이어지고 지난 안부보다 더 내려간 어자안부에 이른다

 

어자안부 : 13:37

 

너무나 평퍼짐해서 어디가 능선인지도 모를 정도지만 푸른 초지로 덮힌 평지같은 무리뭉술한 등고선상1210봉으로 추정이 되는 봉우리로 올라선다

 

등고선상1210봉 : 13:45  

 

초지 한가운데로 길은 잘나있고 둔덕을 왼쪽 사면으로 돌아 좌측 사면은 벌목해버린 초지만이 있는 곳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붙어 잠깐 내려사 어자안부에 이른다

 

어자안부 : 13:55

 

또 좌측 사면 초지 사이로 길이 이어지고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능선으로 올라서면 지금까지 이어지던 좋은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길없는 능선을 가늠하며 진행한다

 

14:00

 

사람 시껍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하게 큰 맷돼지 목욕탕을 만나고 곧 진흙이 잔뜩 묻은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 같아 걸음을 빨리한다 

 

멧돼지 목욕탕 : 14:05

 

이런 고달픈 미역줄나무를 헤치며 시나브로 올라 둔덕에 이른다 : 14:10

 

초지로 이루어진 등고선상1110m 안부에 이른다 : 14:15

 

별나게도 많은 쏘파리(쏘는 파리라 하여 내가 지은 이름임) 때문에 잠깐도 서있을 수가 없다 주로 장딴지나 허벅지를 물어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인데 가려워서 미칠 지경에 이르러 물린디로 범벅을 하는 그 와중에도 쏘파리는 양말을 뚫고 먹자고 덤비는데 이 쏘파리에 안쏘일려면 무조건 빨리 걷는 것이 장땡인데 잡목 때문에 속력도 안나오고 그저 죽을 맛이다 그런 여건하에서 지독한 미역줄나무를 헤치고 뾰족한 봉우리로 올라서면 "정선443 2004재설" 삼각점이 있는 도면상1179.8봉 정상이다 작은 삼각점안내판은 뽑혀져 잡목 사이에 쳐박혀 있다

 

지금까지 없던 길이 우측 남쪽으로 내려가는 흐린 길 흔적이 보이면 그리로 내려간다

 

1179.8봉 : 14:30

 

 

예쁜 은방울꽃 이름하고는 완전히 틀리게 독초임

 

미역줄나무 귀찮은 능선을 내려가다 바위를 만나면 그대로 넘어가고 두번째 바위가 나오면 좌측으로 내려간다

 

14:40

 

등고선상1110m 부근 편평한 곳에서 우측 남쪽으로 급경사를 내려간다 : 14:50

 

드문드문 바위들도 나오는 능선을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가다 몇m 오르다 완만하게 내려간다

 

15:00

 

시나브로 한없이 내려가면 등고선상930m 부근 십자안부에 이르면 당산나무와 약간의 돌무더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성황당이 있었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돌비석을 만나는데 특이하게 얇은 5장의 석판을 겹쳐서 글을 작성하고 기판위에 얹고 맨위에 옥개석을 얹은 모습으로 지나가는 길손을 맞는다 이곳은 성마령이라고 부르는 고갯길로 그 유래와 노래 그리고 한면에는 시인의 시한편이 음각되어 있어 정선땅이 얼마나 오지였는지 보여주고 있다

 

즉 지도에 나오는 성마령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실제로는 이곳 험준한 고갯길을 말하고 있다   

 

성마령비

 

성마령(星摩嶺)

 

성마령은 정선군(읍) 용탄리와 평창군 미탄면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979m의 산등성이로 조선시대 정선사람들은 평창 원주 충청도 등지와 한양을 가기 위해선 필히 이고개를 넘어야 했다

성마령이란 하늘의 별을 매만질듯한 고개란 뜻으로 높고 험준하여 1887년 선정을 베풀었던 오횡목군수 부인이 이고개를 넘어와 읇은 아리랑 가사가 있으니 

 

아질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관음베루

지옥같은 정선을 누굴따라 나 여기 왔나

 

정선아리랑은 관문인 성마령을 넘나드는 행인을 따라 평창 등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정선읍내야 일백오십호 몽땅 짐드려놓고서

임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이에 성마령에 담긴 뜻을 길이 전하고자 시인 구성달 선생의 시와 함께 이 비를 세우노라

2008. 9. 11 정선문화원 정선군  

 

돌무더기와 성마령비 그리고 당산나무

 

시인 구성달의 시비

  

세상의 관문-성마령

 

정선땅 성마령은 세상의 관문이다

빼어난 선인들이 의젓이 들어선 곳

우리의 만세 성도가 여기에서 열렸다

 

도원땅 정선고을 민족의 고향이다

여기서 우리노래 아라리 솟아났다

민족혼 춤추는 가락 너와 나의 아리랑

 

활짝 핀 도원문화 사위로 뻗어갈때

성마령 둥실넘어 천하로 번져갔다

겨레얼 실어나르는 성마령은 정선땅  

 

 

성마령 : 15:15 15:29출발(5분 휴식)

 

지천으로 흐드러진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하얀 은방울꽃을 보며 등고선상970봉으로 올라선다

  

등고선상970봉 : 15:30

  

 

낮은 둔덕을 좌측 사면으로 길 흔적이 이어지고 본능선에 이르러 동남방향으로 내려간다 : 15:35

  

은방울꽃과 마찬가지로 청초한 아름다움을 팍팍 풍기는 둥글레꽃밭을 지나가 낮은 둔덕으로 올라선다

 

15:45

 

둥글레꽃

 

 

둥글레밭

  

팔손이 처럼 보이는 개두릅나무인 엄나무가 막 땅을 뚫고 일어섰다

   

 

너무도 아름다운 빨간 병꽃나무

  

 

잠깐 내려간 펑퍼짐한 초지에서 우측 남쪽으로 내려가 펑퍼짐한 등고선상890m 어름 초지 안부에 이른다

  

15:55

  

명확한 능선이 존재하지 않은 돌리네 지형 즉 함몰된 지형이 가끔씩 나타나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특이한 지형은 굴이 무너질때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바 이 밑이 옛날 광산자리가 아니었을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이런 곳을 지나감

 

 

949봉 정상 삼각점

  

뾰족한 도면상949봉으로 올라서면 "정선311 2004복구" 삼각점이 있다

  

949봉 : 16:10

  

등고선상870m인 안부에 이른다 : 16:20

  

돌리네 지형 지나자마자 초지속에 헬기장이 있는 둔덕에 이른다 : 16:25 16:30출발(5분 휴식)

  

 

개미취가 지천을 깔린 이런 잡목 밀림을 뚫고 나가 길 흔적이 좌측 사면으로 이어져 등고선상870m 지점 안부에 이른다

  

안부 : 16:35

  

푹 파진 돌리네지형 안부를 살짝 올라서 낮은 둔덕에 이른다 : 16:40

 

십자안부

 

내려가 조그만 돌무더기와 성황당나무로 추정이 되는 나무가 있는 십자안부에 이른다 : 16:45

  

좌측이 절벽인 능선을 끝까지 오르면 바위들이 조금 있는 뾰족한 등고선상970봉으로 성마령이라고 표기된 곳이다

  

도면상 성마령 :  17:05 17:10출발(5분 휴식)

  

우측 남쪽으로 좌측이 절벽인 능선을 내려가며 나오는 망가진 철사줄을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서 등고선상850m 안부에 이른다

  

17:25

 

좌측이 절벽인 능선을 시나브로 올라 뾰족한 풀밭 잡목속에 "449재설 77.6건설부  " 삼각점이 있는 도면상891.9봉 정상이다

  

891.9봉 : 17:35

  

좌측이 절벽인 능선은 계속되고 몇m 올라선 곳 : 17:45

  

우측 서남방향으로 내려간다 절벽 능선을 벗어나 계속 내려간다 성긴길이 나타나고 돌무더기가 조금 있는 등고선상770m 지점인 아자안부에 이른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대항동으로 내려가는 길이라 대항동안부라고 표기한다

  

대항동 아자안부 : 18:00

  

그 좋던 날씨가 저녁이 되니 흐려지면서 조금은 분위기가 음산해진다 등고선상810봉 좌측 사면으로 길 흔적은 이어지고 동진능선에 이른다

  

동진점 : 18:15

  

끝이 없는 철쭉터널을 올라 둔덕에 이른다 : 18:20

  

보도블럭이 묻혀있는 아주 작은 헬기장 흔적이 있는 안부를 지나 암릉이 나타나고 오른쪽 사면으로 한동안 진행해 등고선상770봉을 오른쪽 사면으로 나가 능선에 이른다

  

18:30

  

"백운리등산로"라는 빨간 표시기가 간혹 보이는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고 죽여주는 양쪽이 바위 절벽인 날능선을 내려가 오른 둔덕에 이른다

  

둔덕 : 18:40

  

날릉은 계속되고 막판 급경사를 오르면 등고선상750봉 정상이다 : 18:50

  

날릉이지만 나무들이 있어 위험을 덜 느끼는 그런 능선을 진행해 또 암릉이 나오면 우측 사면으로 나가 몇m 오른 암봉에서 우측 사면으로 내려간다

  

19:00

  

조망좋은 날암릉을 내려가 몇m 오른 둔덕에 이른다 : 19:05

  

찻소리가 들리고 비행기터널로 빨려들어가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날릉에서 벗어나 살짝 둔덕으로 올라선다

  

둔덕 : 19:05

  

조금 내려가면 헬기장 흔적이 있는 조그만 풀밭을 지나 낮은 둔덕에 이른다 : 19:20

 

 

 

SK미탄기지국 송신탑과 관리초소가 있는 임도삼거리인 비행기재(마전치)에 이르렀는데 분명히 5만지도에는 포장도로로 표기되어 있는데 상태가 안좋은 임도길일 뿐 그 옛날 버스가 넘나들던 고개는 분명히 아니다 터널이 뚫리고 나서 이 고개를 넘던 모든 차량들이 단 한대도 지나가지 않고 오직 임도를 관리하는 차량만이 다닐 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평창에서 이 고개를 넘어 정선으로 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다 버스가 넘던 고갯길이 이제는 다 망가져 가고 있다

  

비행기재(마전치)

  

비행기재(마전치) : 19:25 19:35출발(10분 휴식)

  

도면에 포장도로라 미탄택시를 부르겠다는 생각은 접고 우측 미탄쪽으로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데 도면으로 보아서는 10리길도 넘는 것 같아 우측 어디로 비행기재터널 입구로 내려가는 길이 있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없다 그러면 내려가다 포장도로가 시작이 되는 지점에서 택시를 부르겠다던 생각도 접어야 한다 끝까지 중간중간 포장길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비포장길이다

  

임도가 오른쪽으로 유턴하는 지점에 이르고 밤은 금방 찾아온다 : 19:55

  

한없는 내림짓을 하다가 포장도로를 만나서 좋아했는데 금방 다시 포장으로 바뀐다 : 20:10

  

좌측으로 철책을 친 밭을 지나 새로만든 도로 지나 장장 십리길은 실히 걸은 것 같다

"비행기재터널400m" 전 안내판 있는 42번국도를 만나고 미탄에서 개인택시를 하는 모범운전기사인

오흥범(011-370-9971)씨를 불렀으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몇번을 누르면서 그냥 있으면 무엇하나 도로따라 내려간다

  

비행기터널입구 : 20:20

  

할수 없어 대화면에 계시는 모범택시회장에게 SOS를 친다 전화를 안받는다고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 그랬더니 알아서 연락을 하고 걷고 또 걷고 힛치를 하고 싶어도 언제올지 모르는 택시를 기다리는 바람에 힛치는 시도할 생각도 안하고 걷고 또 걷고 도면상 도로변에 379m 수준점이 있는 미탄면 백운리 백골마을 입구를 지나 매대마을입구에서 쌍라이트를 켜고 올라오는 택시를 만난다

  

백운리 매대마을입구 : 20:40

  

그후

  

내일 아침 4시30분에 전화하기로 하고 기사님이 추천한 식당으로 가는데 파장중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이것 또 난관을 만났다 이곳은 조그만 면소재지로 어디 골라서 갈 그런 여건이 아니라 일단은 여관으로 가 방값을 먼저 지불하고 가까스로 손님을 받는 음식점을 발견 하루종일 일을 안시킨 위장운동을 한다

  

이곳에서는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집도 없고 24시마트나 김밥집 같은 곳도 없으니 내일 아침 새참 점심거리를 미리 다 준비해야 한다 물어물어 구멍가게로 가 빵몇개를 구입하고 모텔값을 지불한 여관으로 가 일찌감치 내일을 위해 눈을 붙인다 사실은 TV는 있으나 작동이 안되고 더워 죽겠는데 에어컨 역시 작동이 안된다 그래서 시간 보낼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어서 그리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