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주왕산(周王山, 721m)  Photo 에세이
(청송군 동면: 대전사- 주왕굴- 제1폭- 제2폭 -제3폭- 전기없는 내원마을 원점회귀/ 신도시산악회 따라 http://cafe.daum.net/goyangjayooro)

*. 주왕산 코스


*. 주왕산(周王山) 명칭

  한반도 서쪽에 소백산맥이 지리산을 만들고 다시 남하하여 조계산(884m)을 일구더니 호남 명산 월출산(月出山)을 솟게 하였다면, 동으로는 백두대간이 금강(金剛), 설악(雪嶽), 오대산(五臺山)을 일구고 낙동정맥으로 나뉘어 내려와 경북 땅에 이르러서는 돌만으로 골짜기와 마을을 이루어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는 주왕산(周王山, 720.6m)을 만들었다.
-이 주왕산(周王山)은 병풍처럼 둘러 서있는 기암괴석이 있는 산이라 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 하다가, 신라 때에는 선덕왕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이 은거하면서부터 주방산(周房山) 또는 대모산(大모山)이라고도 불렸다.
이 일원은 예로부터 난리 때마다 피난 온 사람들이 많았고, 최치원, 도선(道詵), 보조, 나옹, 무학대사, 사명당, 김종직, 서거정, 등 이 입산수도 하며 지냈다 하여 대둔산(大遯山, 숨을 遯'둔' )이라고도 한다.
  그보다 당나라 때 동진(東晉)의 왕족인 주도(周鍍)가 자칭 후주천황(後周天皇)이라 칭하고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곽자의(郭子儀)에게 패하여 1천명 군마를 이끌고 멀리 도망 와 이곳의 험한 지세에 웅거하였다. 그 후에 신라(?)의 마일성(馬一聲) 장군의 5형제 장수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주왕굴에 꼭꼭 숨어들었다가 잡혀서 최후를 마친 곳이라서 주왕산(周王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이 고장 사람들이 말한다.
  -여말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에 와서 수도할 때 '이 산을 주왕산(周王山)이라 부르면 이 고장이 복될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주왕에 관한 전설이 전하는 곳으로는 이 외에도 대전사, 주왕굴, 주왕암, 무장암, 백련암, 기암, 자하성 등이 있다.

*. 대전사(大典寺)에서
  대전사는 무엇보다도 뒤에 서 있는 우람한 기암(旗岩)과 절묘한 조화가 멋지다.
성의매표소(해발 260m)를 지나 주왕산 초입에 있는, 이 산에서 가장 큰 사찰 대전사(大典寺)의 창건 설화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고려 태조 때 주왕의 아들 대전(大典)이 죽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는 설이다. 그래서 절 이름이 대전사(大典寺)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전사는 보광전과 우측에 명부전(冥府殿)과 그림같이 멋진 산령각(山靈閣)이 남아있고 주왕암이나 백련암은 부속 암자다.
-이 절 계곡 건너 250m 거리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는데, 이 암자도 주왕의 딸 백년(白蓮)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암자다. 그래서인지 이 암자는 비구니만 수련하고 있는 절이다.

 


대전사에서 근처 다리 자하교에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좌측으로는 백련사를 지나 빛이 나는 바위가 있다는 광암사(光岩寺)를 지통해 장군봉(일명 이마바위)까지 2.1km/ 0:30분 가는 길이다. 가운데 길이 제1폭포('2.2km/1:20분) 가는 길이요, 우리 신도시산악회 회원들이 간 우측 길은 주왕산까지(3km/1:20)의 등반길이다.
나는 산행을 접고 주왕산의 하이라이트라는 주방천이 만들어 놓은 세 폭포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관람 길에 들어섰다. 가급적이면 제3폭포를 지나 있다는 전기 없는 마을이라는 내원마을에 들러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오고 싶다.

*. 주왕산의 수문장 기암(旗岩)
35년 년 전 아내와 함께 주왕산을 찾았을 때에는 주왕산을 등산하고 제 3폭포로 내려와 제1폭까지 하산하면서 주왕산의 엑기스를 완상하며 왔다.
그때 내가 본 주왕산은 평범한 육산으로 정상이 어딘지도 모르고- 이정표와 정상석이 없던 시절이라서- 지나왔었지만 제3폭포에서부터 시작되던 계곡 길은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보던 그런 크기와 모양의 많은 바위산이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음을 연출하면서 계곡에 몰려 있어서,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벼르게 하더니 그 소원을 오늘에야 원 없이 푸는가 보다.
  기암(旗岩)은 주왕산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거대한 바위산으로 주왕산의 로고에 늘 나타나는 산이다.
대전사 뒤, 주왕산 입구에서 큰 비석처럼 웅장하게 '山'자 모양을 하고 솟아있는 40여m의거대한 이 바위산은 옛날 신라 시절 주왕 주도(周鍍)가 마 장군과 싸우던 이야기로 되돌아가게 한다.
  - 주왕이 이 산속에 들어와서 주위 마을을 습격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는데다가 당 나라에서 그 토벌을 부탁해 와서 마 장군이 그 토벌에 나섰을 때였다.
주왕과 마 장군과의 전투는 장기전이어서 주왕은 군량미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유달산 노적봉 이야기처럼, 마 장군의 병사를 속이려고 이 바위산에 깃발을 세우고 볏짚으로 이엉을 덮어 이 봉우리에 식량을 가득 쌓아 놓은 것처럼 위장하고 물에 횟가루를 뿌려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래서 기암(旗岩)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정상에는 70여 평의 평지가 있고 노송 몇 구루가 기암의 아름다움을 뽑내고 있다 한다.


*. 주왕굴의 비극

  주왕암 가는 길은 예전과 달리 철교가 멋지게 놓인 약간의 오름길이었다. 주왕암에서 울려 퍼지는 불경소리를 들으면서 오르고 있다. 주왕암은 1.5km 계곡 깊숙한 위치에 있어 '안절'이라는 별칭을 갖고도 있다. 주왕의 넋을 위안하기 위해 대전사와 함께 창건되었다는 암자가 주왕암이다. 촛대봉 아래 문간채인 가학루(駕鶴樓)의 중층 누각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주왕암이란 요사체가 있고 그 좌측 높은 곳에 16나한을 모신 법당 나한전이 있다. 이 요사체를 우측으로 끼고 돌면 약수터가 있고 그 바로 위로 협곡을 따라 50m되는 절벽 하단에 세로 5m, 가로 2m 정도의 동굴이 바로 주왕굴이다.

  -신라의 마일성 장군과 그의 형제와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이 굴에 숨어 둘어 살던 어느 날, 왼쪽 입구에 떨어지는 물로 세수를 하고 있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는 곳이 주왕굴이다. 그때 주왕과 그의 식솔들이 흘린 피가 주방천으로 흐르면서 그 이듬해부터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붉은 꽃이 피기 시작하였는데 이 꽃을 주왕의 피가 꽃이 되어 핀 '수달래'라고 한다.
수달래란 꽃은 다른 지방에서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꽃으로 여기 주왕산 계곡에서만 피는 꽃이다. 수단화(水丹花), 수단화(壽斷花)라고도 한다.
그때 주왕의 서러운 마음인가 울음소리인가. 왼쪽 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큰 소리를 내고 있는데 겨울이면 하얗게 빙벽을 이루어 주왕산 9경의 하나인 '주왕산 빙하'라 부르는 장관을 이룬다. 그 굴속에는 산신상이 안치되어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 전망대에서
출처: 국립공원주왕산 홈피/ 무장굴 
주왕굴에서 되돌아 나오다 보니 3갈래 길이 있다. 직진하면 대전사로 되돌아가는 길이요, 왼쪽은 약 200m 산록 우측에 있다는 무장굴(武藏窟) 가는 길이다.
-무장굴(武藏窟)은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무기를 은닉하였다는 곳이지만 우측 제1폭포를 향한다. 이 길은 산 중턱인데도 평지 같은 길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간 지점에 전망대가 있고 거기 안내도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좌측 봉우리가 연꽃 같이 생겼다 해서 연화봉(蓮花峰)이고 연화봉 우측이 병풍바위, 그 앞에 넘어질 듯이 높이 솟아있는 바위봉이 급수대(汲水臺)다. 그 정상에 신라 왕손 김주원이 지었다는 대궐터가 있으며 급수대(汲水臺)라 하는 것은 이 바위 위에서 두레박으로 물(水)을 퍼 올렸다(물길을 급'汲')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 급수대 우측 봉이 주왕의 아들 대전(大典)과 딸 홍련(紅蓮)이 이곳에 올라와 달구경을 하였다는 망월대(望月臺)다.


 

* '한국 자연 100경' 학소대(鶴巢臺)
  그 오솔길 같은 산길을 버리고 큰 길로 들어서니 북한산 인수봉 같은 바위들이길 양옆에 무리지어 있는데 멋진 무지개 같은 다리가 있고 앞으로 넘어질 듯이 솟아 있는 바위가 병풍바위가 급수대 인데 이 학소대와 커다란 이마 같은 바위가 학소대(鶴巢臺)요 그 건너에 있는 병풍바위와 아울러 '한국 자연 100경' 의 하나로 꼽는 절경 중에 절경이다.
-옛날 저 바위 위에 있는 소나무에 청학과 백학이 한 쌍이 살았는데 지각없는 일인 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으니 청학이 며칠을 두고 울다가 이곳을 떠나갔다 하여 학 '鶴,' 새집 '巢', 학소대(鶴巢臺)라 하는 곳이다.
-출처:국립공원 주왕산 홈피

 


*. 환상의 제1폭포와 제2폭포
꽃이 모여 살듯이 아름다운 봉(峰)들도 몰려 있는가. 제1폭포 가는 길에 생김새가 옆에서 보면 험상궂은 얼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떡을 찌는 시루 같기도 한 바위 봉이 있다. 시루봉이었다.











 



주왕산은 기암과 함께 주왕폭포 셋으로 유명한 산이다. 그 주왕 폭포 중 제일 먼저 만나는 폭포가 6m의 아담한 제1폭포로 일명 용소(龍沼) 또는 선녀폭포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폭포가 기대보다 작아서 약간은 실망하다가도 제1폭포 바로 위의 선녀탕(仙女湯)을 보면 누구나 '아-!' 하는 탄성을 발하게 된다.
  -제1폭포의 소(沼)는 70평 정도 크기지만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는 소(沼)의 깊이가 명주꾸리 하나를 다 풀 정도로 깊었고, 달 밝은 여름밤이면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신선대로 간다고 한다.
이곳은 기우제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기도 하여서 산 아래 상의리 마을에 가뭄이 들 때 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3일 이내에 비가 내렸다는 곳이다.

제2폭포는 제1폭포에서 2km거리에 있는 곳으로 제3폭포로 가다가 좌측으로 1.0km를 들어갔다 다시 나와야 하는 위치여서, 모르고니 귀찮아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에 있다. 이 폭포는 후리메기 쪽의 사창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만든 2단 폭포다. 위 폭포가 호박 같은 모양의 커다란 소로 떨어져 휘도는 물이 다시 굽이쳐 떨어져 내리는 모양이 설악산 12선녀 탕의 복숭아탕을 연상하게 하는데, 조물주가 정성들여 만든 조각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용폭포(龍瀑布)란 이름을 갖는다.

 

*. 전기 없는 두메산골 내원마을
  제1폭포에서 1km 거리의 제3폭포는 돌아올 때 보기로 하고 그냥 지나치기로 하였다. 제3폭에서 1.2km/30분 거리에 있다는 전국에 몇 안 되는 전기 없는 내원마을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원마을은 산삼이나 약초, 송이, 당귀 등이 자생하여서 이를 채취하여 시장에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화전민들이 살던 마을인데 지금은 전기 없는 마을로 더 유명하다.
전기가 없다는 것은 문명을 외면하고 산다는 말이다. 전화, TV, 냉장고, 청소기는 물론 선풍기, 컴퓨터 등과 인연을 멀리 하고 산다는 말이다.
세계에서 IT 강국을 자랑하는 현대를 사는 Korea에 전기가 없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전화와 TV와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는 물론 선풍기, 컴퓨터에 매어 사는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 분들은, 현대문명을 외면하고 현대에서 옛날의 멋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전기 없는 마을이 충남 천안 광면 원덕리에도 있고, 안동댐 근처에 와룡면 산야리 등에도 있지만 그 곳은 점점 전기가 들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내원마을은 그럴 염려가 없다. 국립공원 측은 자연보호를 내세워 이 마을을 없애려고 벼르고 있고, 마을 주민들은 250년의 마을의 역사를 지키려고 주민 10명이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전기 없는 내원 마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음에서 전기 없는 마을 내원골에서 '내원산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왕산의 깊은 이 오지 전기 없는 마을 내원골은 전국에서 산을 찾아온 사람들이 목이 마를 때 식수를 제공하여 주고, 비가 올 때 비를 긋거나 도시락을 먹거나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수 있는 대피소나 산장이 되어 왔습니다. 전기 없는 마을이 주왕산에 있다는 것은 주왕산의 하나의 멋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주왕산으로 부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산을 좋아하시는 여러 국민들이 협력하여 주셔서 250년의 역사를 지닌 이 마을을 살리는데 일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내 일찌기 세상을 두루 둘러보았더니 관광은 굴뚝 없는 산업으로, 무언가 남다른 특색이 있는 곳이어야 관광객이 찾아오더라. 

 내원동에는 80년대에 폐교된 초등학교가 있다. 이 분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고 4학년부터는 해발 500m 이 마을에서 저 아래 상의리로 내려가 4학년부터 다녔다는 분교가 후락하나마 주민에 의해 고이 보존 되어 있고, 거기에 멋을 더해서 그 앞에 여러 가지 나뭇조각이 그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분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졸시 한 편을 응원으로 보낸다.

 
전기 없는 마을 내원골에

해가 지고면
4 가구 10 명만을 위해
까만 하늘이 달과 별을 켭니다.
호롱불 가에 옹기종기 둘러앉던 자식들도

대처(大處)로 훨훨 날아가 버리고,
외로운 나이는
나뭇잎을 갈리는 바람 소리와 함께
유일한 낙(樂)인 라디오를

건전지가 아까워서 켰다 껐다가, 껐다 다시 켭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 일을 하다가
더우면 큰골 냇가에서 멱을 감고
선풍기 대신 시원한 바람을 쐬지요.
신문도, TV도, 핸드폰도 처들어올 수 없는 두메산골
오지마을 내원동 귀(耳)는
신기함을 찾아드는 사람들의 입(口)이랍니다.

아내 엄마 모시고 옛날을 사는 내원산방네, 

송이 따러 왔다가 눌러 사는 산수유 강 보살,
토굴 산사 정도사님 댁,
'내원동 가는 길' 시집을 파는 방랑시인도 있답니다.

뭐해 먹고 사냐고요?
감자 심고, 나물 캐 먹고
송이 팔아, 약초 팔아 용채하고
'내원산방' 산골 카페에 오시거든 차 한 잔 들고 가세요.
목이 마르시걸랑
냇물로 냉동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시구요.

그래도 사는 건 어느 하나 불편함이 없습니다만,
다만 두려운 건
6.25 때 빨치산에게도 지켜낸 우리 땅, 우리 마을을,
쌍 심지 눈 켜고 쫓아내려는 국립공원이지요.
주왕산 대피소를 자처하는 우리들을.

 요즈음 나는 병원에 다니고 있다. 열흘 전 이 무더위에 경남 함양의 황석산(黃石山, 1,235m)을 간 것이 무리가 되어 대상포진이 왼쪽 눈으로 온 데다가 감기까지 겹쳤다. 안과 내과 의사들이 절대 안정을 권했지만, 그저께는 북악산(北岳山)에 이어 또 주왕산에 온 것이다. 그래서 목숨 걸고 마시던 그 맛있는 술도 못먹고 있다. 그렇다고 어찌 내원마을 사람들에게 수작만 걸고 그냥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산악회 일행에게 주려고 막걸리 2병을 배낭에 넣고 제3폭포를 향하고 있다. 주왕산 산행을 마치고 계곡에서 쉬고 있을 우리 산악회 회원들에게 주면 얼마나 맛있게 마시랴.

 

*. 주왕산 제3폭포

제1폭, 제2폭의 예술조각 같은 미에 감탄하면서도 그 낙차가 너무 초라함에 조금은 섭섭하였는데 제3폭은 주왕산을 대표하는 폭포로 우람하다.
이 폭포는 금은광이(812.4m)에서 흘러내리는 세밭골의 물과 큰골물이 합수하는 곳이어서 수량도 풍부하고 낙차도 11m로 비교적 크다. 청송읍 월외리에 있어서 '월외폭포'라고도 하고 2개의 폭포를 합치면 22m 높이여서 '쌍폭포'라고도 불린다.
경치가 하 좋아서인가. 독사 한 마리가 나들이 나왔다가 나를 보고 기겁을 하여 바위를 오르고 있다. 그만큼 주왕산은 청정한 곳이다.

*. 보고싶은 호수 '주산지'

-출처:국립공원 주왕산 홈피

주왕산은 우리나라 20개 국립공원 중에서도 12번째로 지정된 한국의 명산이요,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주방계곡은 경북이 자랑하는 계곡 명소다. 고양시 일산에서 장장 차로 7시간 반을 달려야 하는 327.3km나 먼 곳을 왔으니 그 유명하다는 달기약수를 맛보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철분이 많은 탄산수여서 설탕을 첨가하여 마시면 영락없는 사이다 맛이던데. 그 물로 밥을 하면 파란 색이 돌고 그 약수로 찐 통닭은 너무 너무 맛있어 배탈이 날 정도로 먹었었는데.
그보다 아쉬운 것은 요번에도 주산지를 못보고 가는 것이다.
주왕산 국립공원의 북서쪽에 있는 주산지는 조선 경종 때인 1721년에 준공된 길이 100m, 넓이 50m, 수심8m의 아담한 농업용 저수지다.

그 호수 속에는 150여년이나 묵은 왕버들 30여 그루가 물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풍치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별천지를 이룬다는데-.
자연에 대한 욕심을 이렇게 끝없는데 몸은 이렇게 자꾸 늙어가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