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금산

 

                                  *산행일자:2011. 5. 18일(수)

                                  *소재지   :경기 남양주

                                  *산높이   :814m

                                  *산행코스:몽골문화촌-비금계곡합수점갈림길-585m봉-주금산

                                                 -605m봉 -비금계곡합수점갈림길-몽골문화촌

                                  *산행시간:10시50분-16시52분(6시간2분)

                                  *동행      :서울사대 이상훈, 원영환 동문

 

 

  선농단(先農壇)의 추억을 같이 갖고 있는 대학동기 셋이서 주금산을 올랐습니다. 서울의 동대문구 제기동에 캠퍼스를 둔 자그마한 대학에 다니느라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수년 간 당시는 ‘청량대(淸凉臺)’로 이름 붙여진 선농단 옛 터를 자주 찾아 올랐습니다. 캠퍼스 안 나지막한 구릉에 비 하나만 달랑 서 있어 그곳이 선농단의 옛 터인 줄 정확히 안 것은 졸업하고 몇 년 뒤에 이규태님의 저서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읽고 나서였습니다.

 

  멀리 신라 때부터 우리나라 임금들은 해마다 세 번씩 농사의 신(神)인 신농(神農)씨와 후직(后稷)씨에게 풍년을 빌며 선농제(先農祭)와 중농제(中農祭), 그리고 후농제(後農祭)라는 농제를 올렸습니다. 이 중 선농제는 매년 봄 경칩이 지난 뒤 첫 번째 해일(亥日)축시(丑時)에 전농동(典農洞)의 선농단(先農壇)에서 치렀는데 이 제(祭)만은 구한말까지 이어졌다 합니다. 제를 올린 임금은 물론 신료들과 백성들도 제물로 쓰인 소를 고루 나눠먹어 신인융합(神人融合)을 기했는데, 이 때 소한마리의 희생물을 고루 나눠먹기 위해 탕을 끓여 먹었으니 이규태님의 말씀대로 과연 한(韓)민족은 탕(湯)민족이라 불릴 만 했습니다. 함께 나눠 든 이 탕은 선농탕(先農湯)이라 불렸으며 나중에 설렁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번에 함께 산행한 동기들은 대학시절 선농단 옛터인 청량대에 올라 도시락을 나눠먹곤 했습니다. 비록 탕은 아니었지만 유서 깊은 선농단 터에서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흘린 밥알이 고수레가 되어 농사 신들과 융합을 이룰 수 있었기에, 하나같이 자식농사를 잘 지은 것이 아닌 가합니다.

 

  10시50분 몽골문화촌을 출발했습니다. 이상훈 교수가 몰고 간 승용차를 수동국민관광지 주차장에 주차시킨 후 비금계곡 길로 들어섰습니다. 전날 내린 비로 계곡물이 불어나지는 않았지만 단비를 맞은 나뭇잎들이 파릇파릇해 온 산에서 생기가 느껴졌습니다. 국민관광지여서인지 비금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임도수준으로 넓었습니다. 큰비가 오면 건너기 쉽지 않을 비교적 넓은 계곡에 다다라 잠시 숨을 고른 후 건너편 짧은 구간의 가파른 시멘트 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제1코스와 제2코스가 나뉘는 삼거리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길을 걸어 오르며 하산 길에 마음 편히 쉬면서 탁족을 즐길 만한 몇 곳을 찜해두었습니다.

 

  11시40분 경 제1등산로와 제2등산로가 나뉘는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사흘 전 한북천마지맥 종주 길에 고교동창들과 함께 올랐던 제2등산로는 하산코스로 잡기로 하고 이번에는 오른 쪽의 제1등산로로 들어섰습니다. 얼마간 계곡 오른 쪽 길로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선 봉우리가 585m봉으로, 이 봉우리에서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주금산과 그 동쪽 건너편의 축령산을 이어주는 한북천마축령단맥에 합류합니다. 오른쪽 아래로 불기고개 길이 갈리는 봉우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능선을 타고 얼마 간 오르다가 만난 첫 쉼터에서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번 산행은 제1코스로 주금산을 올랐다가 제2코스로 하산해 수동국민관광지로 돌아가는 짧은 코스의 원점회귀산행이어서 시간이 넉넉해 쉬엄쉬엄 올라갔습니다. 살랑살랑 불어올라오는 골바람이 시원한 듯 연분홍 색 철쭉꽃이 입을 헤헤 벌리고 저희들을 맞는 품이 참으로 천진난만해 보였습니다. 통나무 의자가 세워진 쉼터에서 한참동안 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주금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 놓았습니다. 이맘때면 숲속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네 음절의 새소리가 돌아온 철새 검은등뻐꾸기의 귀환보고다 싶어지자 더 다감하게 들렸습니다.

 

  한북천마축령단맥이 분기되는 한북천마지맥의 토치카 위에서 반시간 넘게 점심을 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동기생의 영향을 받은 한 친구가 판소리를 배울 뜻을 밝힌 것도 생각보다 수명이 길어져 퇴직 후 삶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해서 일 것입니다. 아직은 두 다리가 견실하고 두 눈이 총기를 잃지 않아 매주 산행을 하고 책 한 권은 읽어나가지만 어느 나이를 넘어서면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눈이 가물가물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그 때를 대비해 산행과 독서가 아닌 뭔가를 배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벌써부터 해왔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저를 닦달만 하고 있습니다.

 

  13시44분 해발814m의 주금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오른 쪽 서파검문소 쪽으로 이어지는 천마지맥 능선을 따라 10분 남짓 걸었습니다. 정상에 이르기 수분 전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바위를 보고 지학과를 졸업한 한 친구가 저 정도 바위라면 웬만한 지진에 견뎌내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릴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제껏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으로 불려온 것은 한반도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지대에 자리한 덕분에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지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전망이 유력하고 보면 언제 지진이 닥쳐 설악산의 천불동계곡이나 금강산의 만물상이 제 모습을 잃을 수 도 있다 싶었습니다. 표지석이 서 있는 주금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이내 오던 길로 되돌아가 독바위로 향했습니다. 축령단맥이 분기되는 능선삼거리에서 막 내려선 헬기장위 정자에서 잠시 머물며 훤칠하게 잘 생긴 뒤편의 독바위를 사진 찍었습니다. 서울에서 내촌을 거쳐 일동으로 가는 길에 오른 쪽으로 높은 산에 위치한 큰 바위를 볼 수 있는 데 이 바위가 바로 주금산의 얼굴마담 역할을 하고 있는 독바위입니다.

 

  15시56분 제1등산로와 제2등산로가 갈리는 분기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주금산정상에서 시작한 천마지맥 따라 걷기는 독바위를 지나 시루봉을 얼마 앞둔 능선 삼거리까지 이어졌습니다. 능선 삼거리에 이르기 얼마 전에 길가에 서있는 나이든 소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이 소나무가 참으로 명품이다 싶은 것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가지들이 몸을 뒤틀며 뻗어나가서인데 누군가가 그 중 한 가지를 잘라내어 균형미가 깨진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거꾸로 소나무가 우리 손가락을 보고 왜 엄지만 떨어져 있느냐며 잘라버려야겠다고 덤벼든다면 펄쩍 뛸 것이 분명한데 펄쩍 뛸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에 마다 않고 길을 내주는 이 산이 고마웠습니다. 능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계곡으로 내려가는 중 올 들어 처음 본 피나물 등 여러 봄꽃들을 보았습니다. 제1등산로가 갈리는 분기점으로 되돌아와 잠시 숨을 고른 후 오전에 올랐던 비금계곡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16시52분 출발지인 수동국민관광지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오름 길에 찜해 둔 계곡 쉼터를 그냥 지나지 않았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발을 씻으면서 조선조 양반자제들이 계곡을 찾아 즐긴 피서를 그려보았습니다. 몇몇이 동아리지어 산골 깊은 계곡을 찾아 오르다가 너럭바위가 있는 계곡 가에 자리를 잡습니다. 우선 물에 들어가 발을 씻으며 탁족을 즐깁니다. 다음으로 머리를 감은 후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는 즐풍을 하면서 시원해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지를 다리 밑으로 내리고 사타구니 사이로 바람이 지나도록하는 거풍도 즐깁니다. 탁족과 즐풍, 그리고 거풍을 순서를 정해놓고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모두가 끝나면 너럭바위에 앉아 시 한수를 지며 음풍명월을 할 수 있어야 지체 높은 사대부의 자제라 할 만했을 것입니다. 혼자서 종주산행을 하면서 거풍과 탁족은 자주 합니다만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즐풍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수동국민관광지로 되돌아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조상께서 이 땅에서 농사를 짓도록 해주신 농사 신에 제를 올려온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제례란 본시 번거로운 것이어서 우리 왕실은 일 년에 세 번 올리는 농제를 단 한 번으로 줄여 선농제만 지냈습니다. 근대를 맞으면서 이마저도 사라져 신농씨와 후직씨를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산신들은 전성기를 맞았다는 생각입니다. 불교의 전래 이후 산신각에 갇혀 있던 산신들이 다시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산악회들이 시산제를 지내서일 것입니다. 저 또한 정맥종주를 시작하고 마칠 때에는 무릎 꿇고 산신령께 무사 산행을 빌곤 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버려졌던 선농단이 최근의 사진을 보니 자치단체에서 철책을 쳐 놓고 보호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선농단을 대학 캠퍼스로 써온 서울사대만이라도 관심을 갖고 선농제를 되살려 농사 신이 산신만큼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면서 산행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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