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 향로봉(1,029m)-전북 무주]신내주차장→서창탐방지원센터→장도바위→적상산성(서문)→향로봉→안국사→적상사고(적상호)→치목갈림길→제2목교→제1목교→송대→치목마을(10.7 Km)
 
 
 
 
 
 
 
 
 

이 지역은 호남에서 영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삼국시대에는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요로였으며, 고려 때 왜군과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인근 수십여 곳의 군현이 도륙되었는데도 여기에 사는 주민들과 이웃 군민들은 이곳으로 피하여 그 참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도통사 최영장군은 이곳에 산성을 축조하고 창고를 지어 불의의 변에 대비하기를 청하였고,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도 이곳을 살펴본 뒤 반드시 축성하여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산성은 고려 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난 1614년(광해군 6년)에 실록을 보관할 사고가 설치되었고, 1633년(인조 11년)에는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묘향산에 있던 사고를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계속하여 1641년에는 선원각·군기고·대별관을 세우고, 1643년에는 산성의 수호대책으로서 승군을 널리 모집하고자 호국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들은 별장·참봉·승장 들이 거느리는 조직에 의하여 수호, 보존되었다.


 
 
적상산 정상부의 통신시설 등으로 인하여, 오래 전부터 적상산 등정을 대신하여 이 곳 향로봉 등정을 하므로써 자족하게 되었다.


 

적상산성은 둘레 약 8,143m, 높이 1.2~1.8m이며,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현재 북문지·서문지 및 사고지 등이 남아 있으며, 당시 성 안에는 비옥한 토지가 있었고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 있었다 하며, 성벽은 무너져서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서를 보관하였던 사각(史閣)과 기타 건물의 터만 남아 있다.
1901년만 하더라도 사각 등의 수리를 위하여 고종이 수리비를 지급하였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인 안국사(安國寺).

<적상지>에 따르면 1277년(충렬왕 3년) 월인이 세웠다고 하나 조선 태조 때 자초가 적산산성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증축하고 이듬해 사고를 두어 사각과 선원각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이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8년 유정환이 이 건물에 천불을 모시고 천불보전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옮겼다.


 

 
 
 
 
 
적상산 산정호수.

적상산 분지(해발 800m)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양수 발전소에 필요한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댐으로 적상호라 명명되었다.


 
 
 
 
 
 
 
 
하산후 막걸리 등으로 갈증을 달래려고 일행보다 훨씬 먼저 내려 왔으나, 치목마을엔 편의점이 없으므로 그 기대는 빗나고 말았으니, 산행종점을 치목마을로 정할 때는 참고하기 바라며, 산행기점을 치목마을로 하여 본인의 트랙을 역방향으로 산행함이 보다 슬기로운 산행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붉은치마를 두른 듯 단풍이 온 산을 감싼다 하여 적상산이라 하건만, 찾아 볼 때마다 그 산명이 무색할 정도로 적상산의 단풍이 풍성할 때를 본 적이 없다. 여러가지의 사정으로 인하여 생략하려다가, 뒤늦게 산행후기를 작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