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

 

 

                              *산행일자:2010. 7. 9일(금)

                              *소재지 :전북무주

                              *산높이 :1,034m

                              *산행코스:서창삼거리-장도바위-향로봉-안렴대-안국사

                                             -사고지-전망대-송대-치목마을

                              *산행시간:10시36분-18시9분(7시간33분)

                              *동행 :나홀로

 

 

   세 해전에 다녀와 산행기를 남긴 적상산을 어제 다시 찾은 것은 그때 못 찍은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아오기 위해서였습니다.중간에 바터리가 나가 이 산 정상과 안국사, 적상산 사고, 전망대 등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이번 산행도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대신에 적상산사고에서 해설사 권중헌님을 만나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이해도를 높인 것은 제게는 생각지 못한 큰 소득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우리 선조들이 일궈낸 기록문화의 결정판이라면, 사고에서 멀지 않은 양수발전소는 에너지보전법칙을 최대로 활용한 과학문명의 진수를  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양수발전소의 상부댐인 적상호 자리가 안국사 자리로 그 곳에 사고를 지었다가 1992년 발전소건립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화가 문명에 까탈 부리지 않고 자리를 넘겨준 드문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경과 문화지킴이들의 극렬한 반대가 다반사로 행해지는 요즈음 같았다면  사고지가 그리 쉽게 이전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전10시36분 서창리삼거리의 적상산가든을 출발했습니다. 아침7시40분에 남서울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무주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 반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무주터미널에서 10시20분에 삼유 가는 버스에 오른 지 10분이 지나 서창리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버스에서 같이 내린 서울 사는 두 아가씨는 안국사로 간다는데 그중 한 아가씨는 구두 때문에 고생 좀 할 것 같았습니다. 서창공원지킴센터 위에서 이 아가씨들에 안국사 행 들머리를 알려준 후 제가 먼저 이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내 나무다리를 건너 돌계단 길을 따라 오르면서 때마침 제철을 만난 매미들의 시끄럽기 짝이 없는 합창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 산에 들기 전에는 오름 길이 엄청 가파를 것 같지만 막상 산길로 들어서면 길이 넓고 지그재그로 나있어 산 오름이 생각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오름 길에 만난 덕유산국립공원 직원에 치목마을로 내려가는 하산 길을 알아본 후, 산행초반부터 덥다며 연신 물을 마시는 것으로 보아 물이 곧 동이 날 것 같은 두 아가씨들에 전해주라고 여분의 500ml들이 식수 1팩을 건넸습니다.

 

 

  11시40분 향로봉1.7Km 전방 지점을 지났습니다. 세 해 전 산행시작 1시간 만에 다다른 이 지점에 이번에는 4분이 더 걸려 도착했는데 커다란 뿌리를 박아 바위를 둘로 갈라놓은 서어나무는 여전히 자기자리를 지켰습니다. 동쪽으로 조금 오르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얼마간 오른 후 다시 동쪽으로 오르는 지그재그 길은 장도바위를 지나 나지막한 적성산성 서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서어나무가 갈라놓은 바위보다 몇 백 배 커 보이는 거암을 둘로 갈라놓은 것은 여말 최영장군의 긴 칼이었다는 설화에 근거해 이 거암을 장도(長刀)바위로 부릅니다. 장도바위에서 7-8분을 올라 만난 서문지를 지나 적성산성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삼국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적성산성을 고려조의 최영 장군이 조정에 축성하자고 건의했다는 것은 새로 성을 쌓는 것이 아니고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서문 앞에서 짐을 내려놓고 점심을 들면서 10분여 푹 쉰 후 서쪽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길을 따라 안국사 쪽으로 천천히 올랐습니다.

 

 

  13시10분 해발1,034m의 향로봉에 올랐습니다. 서문 출발 15분 후 올라선 능선삼거리에서 0.5Km 떨어진 향로봉으로 향하고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0분가량 능선을 따라 걸어 올라선 향로봉은 해발1,034m의 고도를 알리는 표지판만 달랑 서 있을 뿐 그 흔한 표지석이나 삼각점이 보이지 않아 여기가 과연 정상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서쪽으로 고속도로 건너 산만 보일 뿐 전망이 별로여서 이내 오던 길로 되돌아가 안렴대로 향했습니다. 능선삼거리를 지나 SK기지국 봉우리를 올라간 것은 제가 가지고 간 지형도에는 이 산의 정상이 해발1,034m로 여기 어디쯤이고 앞서 오른 향로봉은 해발고도가 1,024m로 나와 있어서였는데 이 봉우리 또한 아무런 표지가 없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안국사로 내려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안렴대에 올라서자 사방이 탁 트여 덕유산의 향적봉과 앞서 오른 향로봉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14시18분 안국사를 들렀습니다.  안렴대에서 학송대를 거쳐 안시내로 하산하는 길이 폐쇄되어 안국사 갈림길로 되돌아갔습니다. 종주산행과는 달리 명산탐방은 길 잃을 염려가 거의 없고 종종 졸음을 느낄 정도로 산행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좋아하는데 이번 적상산 산행도 그러했습니다. 되돌아온 갈림길에서 10여분 쉰 후 폐타이어로 만든 계단을 따라 남쪽 바로 아래 안국사로 내려갔습니다. 경내로 들어서자 대웅전을 대신한 극락전이 돋보였습니다. 법당 중앙에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봉안한 극락전을 중심으로 오른 쪽 아래에 법고가 배치되었고 좌우로 천불전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조 충렬왕 3년인 1277년에 월인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을 광해군 6년에 중수해 관군과 승병들로 하여금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게 했다합니다. 3년 전에 한 번 들른 일이 있어 눈에 많이 익은 이 절을 이번에도 카메라에 담아가지 못한 것은 장도바위를 찍고 나서 바터리가 다나갔기 때문입니다. 청하루(淸霞樓)를 거쳐 “國土第一淨土道場”이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빠져나가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려가다 길 왼쪽의 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를 들렀습니다.

 

 

  실록각과 선원각의 한 옥 건물 두 채가 들어선 적상산사고에서 50분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향로봉 남쪽 아래에 자리한 적상산 사고는 후금의 침략위협이 높아지자 묘향산사고에서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자 설치한 것으로, 광해군 때 실록각을, 인조 때 선원각을 건립했으며 원래는 지금의 적상호 자리에 지었는데 1992년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그 위편인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전란 중 부산에 옮겨놓은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북한에서 몰래 몽땅 빼갔다 하니, 같이 보관한 허준의 동의보감이 남아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의 사정이 이러하니 이곳에 보관된 실록은 당연히 정본이 아니고 영인본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조선조의 빼어난 기록문화를 체감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조선조를 세운 태조부터 태종까지는 필사본이고, 세종실록부터 인쇄본이라 합니다. 인조실록부터 표지가 청색에서 황색으로 바뀐 것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고생한 효종이 청나라를 상징하는 청색을 하도 싫어한 나머지 황토색으로 바꾸었다는 후문입니다. 조청전쟁 때 잡혀간 아녀자를 환국시키는데 돈을 많이 들어가 광해군 실록은 끝내 인쇄를 하지 못했으며,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일본사람들이 쓴 것이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제외된다는 등 이제껏 몰랐던 것들을 무주군의 관광해설사로 일하시는 권중헌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실록각에서 선원각으로 옮겨가 전시물들을 일별했습니다. 선원각이라 해서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만 전시된 것은 아니고 실록과 관련한 자료들도 여러 점이 같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16시5분 적상호 전망대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적상산 사고에서 전망대에 이르는 길은 25분 거리로 적상호를 왼쪽으로 끼고 도는 땡볕 차도이어서 얼굴이 후끈거렸습니다. 둥근 원형의 흰색 건물인 전망대는 여느 전망대처럼 주변 경관을 멀리 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고 양수발전을 위해 만든 것임을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해발860m에 위치한 상부댐인 적상호에 전기사용량이 떨어지는 야간에 해발278m의 하부댐인 무주호에서 끌어올려 물을 채운 후, 전기사용량이 늘어나는 낮 시간에 물을 낙하시켜 해발201m에 설치한 지하발전소의 터빈 2대를 돌리는데 터빈 1대의 발전용량이 30만Kw라 합니다. 대용량의 물을 낙하시키다가 어느 시점에서 멈추면 물이 상부로 치켜 올라 상부댐을 강타하게 되는 데 이를 막고자 90m 높이의 수직 수로를 중간에 하나 만들어 놓았고 그 상단부분이 바로 전망대인 것입니다. 전망대에서 제가 본 것은 덕유산의 향적봉과 바로 아래 무주호만이 아니었고 수시로 전환되면서도 그 양이 변하지 않는 에너지보전의 법칙이 작동되는 현장도 같이 보았습니다. 위치에너지 0의 하부댐인 무주호의 물을 전기에너지를 사용해 표고차가 582m인 상부댐 적상호로 끌어올려 위치에너지를 증대시켰다가 다시 저수된 물을 하부댐으로 낙하시키면서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어 지하의 터빈을 돌립니다. 이때 운동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전환되면서 우리가 원하는 전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망대에서 내려가 다시 사고지로 향했습니다. 사고지 왼쪽 길 건너에서 치목마을로 내려서는 길로 들어선 시각은 16시28분이었습니다.

 

 

  17시18분 송대를 지났습니다. 사고지 옆 들머리에서 3.2Km거리의 치목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남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조금 내려가 철제계단과 목제다리로 적상산 남쪽 계곡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 계곡의 동쪽 능선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오른 쪽 아래가 경사가 급한 사면이어서 낭간을 해놓은 산허리를 에돌아 능선 길의 묘지에 다다르자 길이 좌우로 갈렸습니다. 오른 쪽 길을 따라 내려가 다리를 건너자 철제 난간을 해놓은 낭떠러지 바위가 나타났고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아 다시 묘지삼거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왼쪽 길로 따라 내려갔는데 이내 오른 쪽 길과 합류해 당황했습니다. 조금 내려가자 왼쪽으로 희미하게 사람 다닌 흔적이 보여 이 길을 따라 7-8분을 진행하다가 아무래도 길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돌아가 낭떠러지난간까지 내려갔습니다. 이번에도 길을 찾지 못하면 사고지로 되올라가기로 마음먹고 내려갔는데 난간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여 그러면 그렇지 하고 안도했습니다. 왼쪽 아래 마른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오른 쪽으로 조금 옮겨 치목마을 1.6Km 전방에 자리한 깊은 계곡의 송대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제 길로 들어선 것이 확실하다 싶어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갔습니다.

 

 

  18시9분 치목마을로 내려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송대에서 치목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편했습니다. 계곡에서 오른 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 허리 길은 난간을 핸 놓을 만큼 왼쪽 사면이 낭떠러지였지만 일단 능선으로 올라서자 그 다음부터는 서창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만은 못해도 웬만큼 속도를 내도 좋을 만큼 길이 편했습니다. 묘지에서 잠시 쉬며 팬티를 갈아입은 후 치목마을로 내려섰는데 개 짖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처음에는 유령의 마을을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스팔트 포장이 다 된 동네 길을 따라 내려가 경로당 건물을 보자 이 동네가 참으로 깨끗하고 넉넉한 마을이다 싶었습니다. 삼베 짜는 공동작업장 건물도 큼직했고 골목길도 모두 포장이 되어 깨끗했습니다. 마을 어른 말씀대로 가게가 없어 맥주를 사마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18시30분 발 무주행 버스에 오르려 20분가량 기다리는 동안  바터리가 되살아나 동네 곳곳을 사진 찍었습니다.

 

 

  귀가 길은 멀었습니다. 무주읍내로 나가자 서울 가는 차가 끊어져 버스로 대전을 거쳐 천안까지 갔습니다. 천안의 버스터미널에서 천안역으로 옮겨  전철 타고 산본으로 가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집에 도착한 시각이 23시20분경이었으니 무주의 치목마을에서 산본 집까지 5시간이 거의 다 걸린 셈입니다. 긴 시간 귀가 길이 느긋하게 느껴진 것은 적상산사고를 들러 조선왕조5백년을 실록으로 남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체취를 맡은 덕분일 것입니다. 당쟁에 골몰하다 끝내 나라를 잃은 조선조가 이토록 자랑스러운 실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에 대한 후세의 비난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