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도 변하고,역사도 흐르고, 기억만 남아

슬픈역사의 현장 김신종루트를 따라서(인왕산 북악스카이웨이 북한산 형제봉)

 

  

 

  

  

  

철조망 속으로 본 청와대 뒷산

  

  

경복궁역 서예전을 돌아보지요

  

  

 산행일시 : 2005년 12월 13일(화요일)

 산  행 지 : 인왕산 (338m) ~ 북악산 팔각정 (328m)~삼각산 형제봉(467m)

 산행코스 : 경복궁역 = 사직공원 = 황학정 = 범바위 = 인왕산정상 = 창의문(자하문) = 북악스카

                      이웨이로 = 뒷골마을 = 팔각정 = 성북구 산책로 = 여래사 = 청학사 = 작은형제봉전망

                      대 = 큰형 형제봉 = 정릉매표소

 산행인원 : 8명

 산행시간 : 5시간 정도

  

  

산행기

  

늘 그렇듯이 새벽 2시반에 퇴근 내일은 화요 산행이 있는날이되어 토끼잠에 들어 갔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안돼에에 안돼에에~~~ 얼마나 소리를 크게 질러 댓는지 아내가 깜짝놀라 깨어 잠결에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며 안되긴 뭐가 안되느냐 하면서 정신을 차리라고 한다 ㅋㅋㅋ 정말 너무도 어이가 없는 꿈이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에 미치긴 단단히 미친듯한 어쩜 거의 병적인 증상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한다

  

꿈결 이야기 스토리 대강은 시상에 그동안 나를 잘둘 데리고 다니면서 산행을 하던 우리 산내음 화요 산내음 조대장이 나하고 뭔 어카 심정이 있었는지 일행들과 함께 나를 보이콧을 시켜 버리고 지들끼리 산행을 떠나며 오라이를 하니 이미 차는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달려 가고 있다 그러니 내가 놀라서 그눔의 차를 따라가며 안돼 안돼를 연발하며 허우적 거린것이다 꿈결에 깨어나 다시 생각을 하여 보아도 정말 나두 참 웃기는 짜장이다

  

아니 일행들이 나를 보이콧 하고 가려 할 정도면 나 자신이 알아서 처신을 하고 맴을 돌려야 하지 으이그 나이값도 못하고 달려가는 차를 따라가면서 안돼 안돼에~~~ 소리를 지르며 애간장을 태우며 따라 가다가 아닌밤에 홍두깨 식으로 소리를 질러 대면서 곤히 자는 식구들을 깨우고 있다니 ...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내 모양이 선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처량하고 마치 울밑에서 봉선화같은 가련한 기분이다 잇씨! 조대장이 나를 선봉에서 보이콧을 시키려 하다니...

  

내가 그동안 자기를 얼마나 스타를 맨들어 주려 노력을 하였는데...은공도 모르고 감히 그럴 수가 있능겨? 속으로 섭섭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하면서 게슴치레 한 눈으로 시계를 보니 으메 6시 5분전이다 서둘러 사무실로 달려가 밤사이 아무런 일이 없었나 확인을 하고 대충 정리를 해놓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배낭을 챙겨 8시 부평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3호선을 갈아타고 경복궁역에 도착을 하니 아직은 약속시간 보다 25분이나 일찍 온것이다

  

잠시 기다려 일행들을 만나고 정확하게 약속 시간이되어 조대장이 나타난다 ㅋㅋㅋ 난 속으로 음 저눔이 날 어제밤 보이콧을 시켰단 말이지 ... 생각을 하니 속으로 나 혼자 웃음이 나온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까지 내가 조대장을 겪어본 바에 의하면 만약 내가 조대장을 배신을 하면 했지 조대장이 나를 배신을 할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어제밤꿈은 개꿈같다는 결론에 다달으며 새벽들이 조대장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원점으로 돌려 놓는다

  

어이 조대장 미안혀 내가 애꾸지 아우를 오해를 했었어 그런 나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조대장은 언제나 그랬듯이 형님 형님 하면서 날 끔직이도 챙겨주는 가운데 우리 일행들은 경복궁역에서 사직공원 방향으로 코스를 정하여 산행을 시작을 한다 지하 경복궁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니 싸늘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데 그 추위에 정도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추위에 움찔 할 사람들이 아니지

  

오히려 만약의 추위를 대비하여 입고온 보온 점버들을 벗어 내낭에 챙겨넣고 사직공원에 도착하여 본격정인 산행을 시작을 한다

  

  

  

  

사진공원 사직단 전경

  

  

사직공원 (社稷公園)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공원. 면적 16만 8000㎡.

 

설명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공원. 면적 16만 8000㎡. 조선왕조 사직단(사적 121)이 보호되어 있는 곳으로, 1395년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가장 먼저 조영(造營)하게 한 것이 종묘와 이 사직단이었다고 한다. 가운데 2좌의 사직단을 두고 넓은 뜰을 가꾸어 토벽으로 둘러싸고, 1단 높은 장대석(長大石) 기단 위에 정문을 세워 성지임을 표시하였다. 동쪽에 있는 것이 사(社)인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고, 서쪽은 직(稷)으로 곡물신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양단 신좌는 국가의 대본으로 중대한 제사로 삼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이이(李珥)의 모자상 등이 있다.

  

  

  

  

좌측엔 신사임당 동상이고

우측엔 이율곡 선생님의 동상이

  

  

겨울이 싫어요 추워서 몬살겠어요

갑작스럽게 몇일째 연이은 추위로 비들기들도 지쳤는지 양지바른 햇볕에 몸을 녹이고 있네요

  

  

황학정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시는 궁사님

  

  

 

황학정(黃鶴亭)

  

[역사의발자취】서울 사직동 황학정- ‘국궁의 1번지’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뒤쪽 인왕산길에 들어서면 아담한 정자와 뜰 한채가 보인다. 사찰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 곳이 우리나라 「국궁의 1번지」로 불리는 활터 황학정(黃鶴亭)이다. 황학정은 원래 대한제국 광무2년(1898)에 고종황제가 경희궁 안 회상전 북쪽에 지었다.


임진왜란 이후 번성했다 갑오경장(1894) 때 근대식 무기체계가 도입되면서 활이 배제되자 쇠퇴 일로를 걷던 활쏘기를 다시금 민족 전통무예로 부흥시키기 위해서였다. 이후 일제시대인 1922년 경희궁이 헐릴 때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궁술에 뜻깊은 인사들이 일제의 폐쇄 압력을 물리치고 현 위치로 옮기게 됐다.


현 위치도 조선시대 유명했던 서울 서쪽 5대 활터중 하나인 필운동 등과정(登科亭) 자리다. 황학정 약수터 위 암벽에는 이전 당시 수려했던 주변 경관을 읊은 「황학정 팔경(八景)」이라는 제목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구름이 맑게 갠 날의 인왕산(白岳晴雲), 자하문 문루위의 맑은 가을 달(紫閣秋月), 사직단의 늙은 소나무(社壇老松) 등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 볼 수 없게 된 것이 많다.


하지만 한 여름에도 시원한 산바람이 불며 한가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정자와 뜰은 여전히 매력을 갖고 있어 한번쯤 들러볼만하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된 이 곳은 현재 국궁 동호회격인 「황학정 사우회(射友會)」가 관리를 맡고 있다. 사우회는 정자 입구에 주민 누구나 강습료 5만원을 내면 시위대에 오를 수 있을 때까지 훈련받을 수 있는 궁도교실을 마련하고 있다.

  

  

  

  

  

택견수련장 가는길

  

황학정을 지나고 택견수련장 가는 이정목이 있는곳에서 부터 들머리를 시작하여

약 10분 오르면 낮은 능선이 이어지면서 이곳에 택견 수련장이 조성이되어 있다

  

  

택견 훈련장

  

  

한국 고유 전통무예의 하나. <태껸>이라고도 한다.

설명

한국 고유 전통무예의 하나. <태껸>이라고도 한다. 발을 많이 쓰며 주먹을 쥐지 않고 손을 편 상태에서 두 팔은 춤에 가까운 유연한 동작을 취하며 상대방의 공격을 막는 무술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고구려시대 무용총과 삼실총의 고분벽화에 두 사람이 서서 서로 손을 앞에 내밀고 싸우는 자세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택견으로 짐작된다. 이런 기술은 한국을 비롯한 북방민족에게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무술로서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무인들 사이에서 성행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대중화된 경기로 퍼져 무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널리 행하게 되었다. 옛 문헌에는 수박(手拍)·수박(手搏)·탁견(托肩)·각술(脚術)·각희(脚戱)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특징은 ①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한다는 점 ② 손발과 몸동작이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하고 유연하며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점 ③ 음악적·무용적 리듬을 지니고 있어 예술성이 짙은 무예라는 점이다.

수련은 ① 혼자익히기: 기본자세(품), 서서익히기(품밟기, 활개짓, 발질과 손질), 나가며 익히기(활개짓, 손질, 발질) ② 마주메기기 ③ 견주기(대걸이, 겨눔수)로 나뉜다.

택견과 비슷한 것으로 한국의 태권도와 중국의 권법(拳法)이 있다. 그 차이를 비교하면 태권도는 동작이 딱딱하고 직선적이지만 택견은 곡선적이고, 권법은 동작이 길게 흐르지만 택견은 순간적으로 튀기는 탄력을 중요시하며 권법이 주먹을 많이 쓰는 것에 비해 택견은 손바닥이나 손아귀로 미는 손힘과 발동작을 많이 쓰는 것이 다르다.

1983년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면서 송덕기(宋德基)와 신한승(辛漢承)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 1987년 두 사람 모두 사망하였다. 그 뒤 1995년 6월 신한승에게 배운 정경화(鄭景和)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택견은 움직임이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신체단련을 위한 보건체조나 운동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멀리 삼각산 보현봉이 보이네요

  

 

  

인왕산 유래 안내판과 이정목

  

인왕산 (人王山)유래

  

북한산 산자락 아래에 솟은 인왕산은 서울의 이마에 해당한다. 서울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해발 338m에 불과하지만, 백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산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전해왔었다. 거리도 가깝고 산세도 험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인왕산이다. 이 산에 오르면 서울 시내와는 확연히 다른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다. 정상에서 서울 시내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것이 인왕산의 제일 큰 매력이다.

  

인왕산은 1968년 1월에 김신조 등의 무장간첩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길로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1993년 4월까지 25년 동안 청와대 경비를 위해 입산을 전면 통제했기에, 서울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오염이 적고 맑고 깨끗한 약수터도 11곳이나 보존되고 있다. 지금은 자연보호를 위해,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에는 입산을 통제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신라와 고려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열었던 호국법회 "인왕도량"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왕경>의 내용에 따르면, 어진 임금이 되기 위해 열었던 법회라 하는데, 인왕경은 부처님이 여러 나라 왕들을 위해 설법한 것으로, 통치술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 불경이라고 한다.

 

등산로는 사직동, 무악재, 홍은동, 옥인동, 부암동, 청운동, 세검정 등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모두 10여 개가 넘는다. 사직터널에서 올라 세검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제일 길며, 산행에 걸리는 시간은 하산까지 2시간이면 충분하다.사직터널에서 올라와서 성곽터와 정상을 지나 부암동으로 하산하는 길이 제일 좋다.

 

사직공원 뒤에서 황학정을 지나 성곽터로 가지 말고 곧바로 약수터를 지나면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황학정은 조선시대 무인들이 활쏘기 연습을 한 오사정의 하나로 경희궁 북쪽에 지었던 정자를 필운동의 등과정터에 이전하여 세운 것으로 구한말까지 남은 유일한 궁술 연마장이다. 지금도 궁술행사가 계승되고 있다.

 

돌과 철로 된 계단을 900개쯤 오르면 매바위와 정상을 휘감는 듯한 치마바위가 보인다. 치마바위는 단경왕후 신씨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단경왕휴는 중종인 진성대군의 원비이면서 신수근의 딸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못 이긴 중신들이 중종반정을 꾀하려 영의정 신수근을 주살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옹립했다.

 

억지로 왕이 된 중종은 아내 신씨를 염려하여 재빨리 왕후로 봉했다. 하지만 신수근을 주살하고 반정을 일으켰던 중신들은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내세워 중종에게 몰아낼 것을 강요했다. 아내를 사랑했던 중종은 왕위를 물리면 물렸지 그럴 수는 없다고 해서 중종과 반정의 주모자들 사이에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자 이를 보다못한 신씨가 남편을 위해 물러나며 살아 있는 동안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널어 놓겠다고 약속을 남겼다.

 

중종은 얼마동안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경회루에서 인왕산 바위를 살폈다. 그러나 곧 아름다운 궁녀들 품에서 단경왕후를 잊었다. 하지만 단경왕후는 그 이후, 51년 동안 중종에게 "나 여기 잘 있습니다"하고 세상 떠나기 전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었다고 한다.

 

화강암 암반으로 되어 있어 도무지 나무가 자랄 것 같지 않은  그 메마른 바위틈으로 푸른 소나무가 가지런하게 돋아 있고, 간간이 잡목이 보이는 것은 서울의 중심에 서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인왕산은 풍수설로도 명당이라 불러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산세가 빼어나서 명산으로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궁궐터로 삼으려 했다는 설도 있다. 일반적으로 명당의 조건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꼽는다.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정할 때에 경복궁을 남향으로 지었으므로 서울 전체의 지형을 놓고 보면 인왕산은 우백호에 해당한다.

 

산세는 정상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렸는데,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능선을 따라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의 하나인 이 성곽은 조선시대 서울의 도성으로 당시 서울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지금의 서울은 서울의 팽창으로 인왕산이 서울의 중심부에 해당하지만, 처음 도읍지로 정할 때만 해도 북악산, 남산 등과 같이 서울을 둘러싸는 외곽에 속했다. 당시에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인왕산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매바위, 치마바위를 지나서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은 부암동 쪽으로 잡는  것도 좋다. 또는 세검정이나 문화촌으로 내려가도 좋다. 부암동을 넘어 청와대로 가는 도중에는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와 청와대 경비팀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터가 남아 있는데, 당시에 순직한 경찰 4~5명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인왕산을 오르고 있는 일행들

  

택견 수련장에서 부터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능선길로 이어지는 산행로를 따라 오르면 이곳은 대부분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요소 요소에 청아대를 경비하는 경비 근무병들이 초소 근무를 서고 있고 철조망이 설치되어 산행은 철조망을 따라 이어진다

  

  

바라보이는 조망의 기암

  

철조망이 설치된 인왕산 가는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범바위 매바위 치마바위들이

보이지만 우리들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암릉길을 따라 가게 되므로 이를 지나치게된다

  

  

기암

  

  

인왕산 성곽길

  

  

인왕산 가는길에 바라본 조망 /  왼쪽으로 무악재건너 안산

  

  

인왕산(338m) 정상에 올라

  

  

인왕산 삼각점과 삼각바위

  

  

저건너 파란 기와 지붕이 청와대야

  

  

청아대의 모습이 보이네요

정말 세상 많이 좋아지고 변했지요 과거 같았으면 어케 함부로

청와대쪽을 바라보며 카메라 셧터를 누를수가 있나요 ?

  

 

  

인왕산에서 자하문 방향으로 성곽길을 따라 하산을 하듯이 진행되는 산행로 ...

  

서울의 도성은 북악, 인왕, 목멱산(남산), 낙산의 산마루와 산줄기를 서로 연결해 가면서 꾸불꾸불하게 쌓아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을 쌓을 당시는 말도 많았던 모양이다.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뻗어 만리재에서는 다시 남산으로 잇자는 주장도 나오는 등, 도성을 어느 규모로 어떻게 연결시켜 쌓아야 할지 결정을 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눈이 수북하게 내려 쌓이고, 날이 밝자 신기하게도 도성자리 안쪽은 눈이 말끔히 녹았고 바깥 쪽만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그것을 곧 하늘의 계시로 그어진 선이라 믿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은 것이 오늘의 도성자리라는 것이다. 조선 태조이 교서에서는 '성곽은 곧 나라의 울타리이나, 포악함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터전이니라'라고 말했다.

비록 천민일지라도 백성이거늘 성밖의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일까. 도성을 쌓는데 왕사인 무학대사는 인왕, 무악, 남산으로 연결시키고자 주장했고 정도전은 인왕에서 남산으로 바로 이어져야 한다고 맞섰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무악을 연결시키자고 주장한 무악대사는 현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다른 이름으로는 길마재, 무학재, 모래재, 추모현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 태조가 도읍 자리를 물색하는데 하륜이 무악 남쪽으로 추천하니 일부에서는 명당이 좁다고 반대했다. 이때 태조가 몸소 무학대사를 불러 자문을 구했고 이 바람에 무악재가 무학재로도 불리게 됐다. 고개의 모양이 소의 갈마같다 하여 길마재로, 또는 모래내의 이름을 따사 모래재라고 불렀다. 뒷날 영조 45년(1769년) 영조가 그이 아버지 숙종의 능은 명릉을 구미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명릉쪽을 바라 본 뒤부터는 추모현이란 이름도 붙었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월이 이 고개를 보고는 '하늘이 천 길의 관문을 지어서 한 군사가 가히 천군을 누를만 하다'고 감탄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무악재의 이름을 딴 것이 무악동이요, 무악재의 이름을 딴 것도 무악동이요, 이 무악동 뒷산이 인왕산이다. 인왕산 정상에서 사직단으로 흘러 내인 능선 중턱의 도성 밖 서쪽에 선바위가 있다. 마치 장삼에 고깔을 쓴 모양의 바위로, 언뜻 보아 불심 깊은 거인이 바위로 굳어진 모습이다. 그래서 선암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위가 우뚝 서 있다는 의미의 선바위가 선암이란 불교식 이름으로 미화된 것 같다. 도성을 쌓을때 무학대사는 이 바위을 성 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이 바위를 성밖으로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 이 바위를 성 안네 넣을 경우 불교가 융성하고, 성 밖으로 할 경우 유교가 왕성하게 된다 "는 정도전의 충고를 들은 태조 이성계가 용단은 내려 오늘처럼 선바위가 성밖에 자리하게 됐다. 무학대사는 태조이 이 같은 결정을 두고 "앞으로 중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싲우할 신세로구나"라고 크게 한탄했다고 한다.

  

  

자하문 가는길

  

 

  

성곽길을 따라서...

  

  

인왕산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지난 1968년도

김신조  일당의 청아대 습격사건을 회상을 하지요

  

그래서 당시의 상화을 지금은 목사가된 김신조씨의 증언을 토대로

박윤석<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의 글을 소개를 한다 

  

 

 

나는 두 번 죽고 다시 태어났다”

무장공비에서 목사까지-金新朝의 29년


    새벽 4시. 진녹색 마르샤 승용차가 어둠을 뚫고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2월 중순.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내일 모렌데 살짝 스치는 바람이 매섭다. 잔뜩 얼었는지 차 시동 소리가 껄끄럽다. 그러나 마음은 공해 자욱한 밤 하늘 저 멀리 반짝이는 별빛처럼 밝게 빛난다.

 

    『김선생님, 오늘도 어김 없으시네요』

    졸린 눈을 애써 뜨고 순찰 돌던 아파트 경비원이 먼 발치에서도 알아보고 익숙하게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아파트를 나서는 첫 주민이 된 듯 하다. 간혹 우유나 신문 배달원들이 오갈 뿐 불켜진 집은 거의 찾아 볼수 없다.

    金新朝(김신조)목사. 정확히는 서울 성락침례교회 부목사. 일년 열두달, 눈이 오나 비가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온 아침 기도를 나서는 길이다. 어젯밤 기독교에 입문한 한 귀순용사 집에 심방(尋訪) 갔다 귀가한 것이 밤 11시였으니까 잠은 4시간 쯤 잔 것 같다.

    지난 81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 15년 이상 계속해온 아침 기도로 하루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몸은 항상 상쾌하다.

    행선지는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역삼동의 성락교회 강남교육관. 가는 길에 여느 때처럼 교인 2명의 집을 차례로 들러 차에 태우고 4시반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난 1월22일 신길동 성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지 3주가 막 지나서인지 아침기도에 임하는 마음은 어느 때보다 절절하다.

    말과 행동을 절제하고 더욱 온유하게 하며 언행이 일치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요즘 그는 기도에 자주 담는다.

    2시간 가량의 기도를 마치고 6시반경 집으로 향한다. 날은 밝았지만 러시아워에 이르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라 10분 남짓이면 집에 도착한다. 곧바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동네 둑으로 나선다. 1시간 가량 조깅을 한다. 도중 쓰레기가 눈에 보이면 주워가며 달리기를 계속한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다. 다시 집에 들어와 씻고 아침을 먹으면 출근 시간이 된다.

    맑은 피부, 카랑카랑한 음성, 민첩한 몸놀림. 55세의 나이보다 5년 내지 많게는 10년쯤은 젊어보인다. 그의 사무실은 신길동 성락교회 와 맞붙은 기독인 월남용사 선교회. 그 자신이 89년 창립한 이 선교회에서 그는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모는 승용차는 1년전 구입한 것이다. 지방 강연과 간증 등 워낙 이동이 잦아16년 전부터 직접 차를 운전하고 다녔다. 처음 맵시나부터 타기 시작해 10년을 쓰고 쏘나타로 바꿨다가 최근 장거리 출장과 밤길 운전에 따른 피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좀 무리인 줄 알면서도 큰 차로 바꿨다.

    옛날 같았으면 『김신조, 먹고 살만 해졌구나』하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금방 들려왔겠지만 시대가 많이 변한 탓인지 요즘은 그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작년 천안에 간증 갔다가 바로 전방부대 강연에 맞추느라 과속 운전을 하다 고속도로에서 단속을 받았는데 교통순경이 그를 알아보고는 『조심해서 운전하라』며 부드럽게 대해준 적이 있었다.

    그는 결코 부자는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것은 아니다.

    오전에는 귀순용사들의 선교업무와 관련한 몇가지 사무를 처리했다. 점심 시간, 별다른 약속이 없는 날이라 직원 둘과 함께 바로 옆 교회 구내 식당에서 가볍게 점심을 때운 김목사는 의자에서 15분 쯤 샛잠을 잤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벽에는 요한복음의 한구절이 대형 액자에 담겨있고 책상 모서리에는 그의 가족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오후 6시까지 간증 스케줄를 검토하는 한편 귀순자들의 방문을 받고 각자의 신상에 관한 이런저런 상의도 하면서 사무실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챙겼다. 그의 사무실 은 종교생활은 물론 귀순자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은 한다. 일요일에도 개방돼있고 따라서 그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요일에도 사무실을 지킨다. 사무실 운영자금은 성락교회에서 지원해준다.

    오후 6시.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다. 아주 한가한 날에 속한다. 집으로 부인에게 일찍 들어간다는 전화를 하고 7시에 귀가했다. 한시간 가량 성경공부를 하고 부인과 단 둘이 저녁을 먹었다. 이렇게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에 속한다.

    부인 역시 전도사로서 바깥일에 바쁜 데다 그 자신이 되도록 저녁은 간단히 바깥에서 때우거나 거르기 때문이다. 대신 점심을 많이 먹는다. 육류는 피하고 채소 위주의 식단을 좋아한다. 50대를 넘어서면서 생긴 습관이다.

    회계학 공부하러 미국에 가 있는 아들에 대한 얘기, 출가해 7개월 된 첫손주를 안겨준 딸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11시쯤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은 지방으로 신앙간증을 하러 가야 하므로 집에 들어올 수가 없다. 이런 일로 집을 비우는 날이 한달에 3,4일은 된다. 그 밖에 열흘 정도는 이런 저런 모임으로 밤 11시나 12시쯤에 들어온다.

    그나마 지금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이 확보된 편이다. 한달 중 절반 이상을 지방에서 보내던 시절이 불과 몇년 전이다. 70년대 후반까 지만 해도 반공 강연이 끊이지 않아 스스로에게 투자할 시간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신앙을 가진 뒤 82년부터는 간증 일로 10여년 가까이 무척 바빴다.

 

    91년과 94년 서울 침례신학교와 신학원을 차례로 졸업하고 지난 1월 목사시험에 합격한 것은 이제 세상이 그를 「덜 필요로 한」데 따른 대가였다 .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그의 몸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로 침투한 무장 공비」 「생포 후 자유 대한의 품에 귀화한 반공 연사」였을 뿐 「인간 김신조」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월 22일 목사 안수식은 68년 그가 남파돼 청와대 인접 자하문 부근에서 투항한 「1·21 사태」를 염두에 두고 날을 잡은 것이다. 그 운명의 날로부터 만 29년, 『청와대 까러 왔수다』라고 기자회견에서 일성을 터뜨렸던 당시 26세의 열혈 청년은 이제 55세의 목사로 변모했다. 그가 남한에서 정착해 낳은 장녀의 나이가 지금 26세. 그리고 그는 이제 어엿한 할아버지다.

    탈북자의 행렬이 밀물을 이루는 지금 그는 자신의 이름이 뜻하듯 「새아침」을 두번이나 맞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한 땅에서 살아 남게 된 것, 그리고 종교인으로 변신한 것. 그러나 그 사이의 어둠은 얼마나 깊고 길었던가.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면 피눈물이 난다.

    그러나 6백여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의 생활, 그리고 앞으로 얼마로 늘어날지 감히 예측하기도 힘든 얼굴 모를 새 탈북자들의 행로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져 온다.

 
『남조선 수괴를 처단하는 막중임무』
 

    1968년 1월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124군 부대. 영하 25도로 떨어진 초강추위 속에 남파 특수공작원 31명을 태운 버스가 어둠을 타고 부대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공작원 초대소.

    얼어붙은 표정의 20대 초중반의 청년 장교들은 24kg에 달하는 꽉찬 배낭을 저마다 하나씩 울러멨다. 모두가 하사관에서 하루 아침에 소위로 임관되는 파격적인 계급승진을 며칠 전 경험한 뒤였다. 그 중 2명은 대위와 중위로 승진했다.

    배낭 내용물은 다양했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습,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벌,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 찹살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당초 대원은 76명이었으나 돌연 31명으로 축소됐다. 공격 목표가 청와대만으로 압축된데 따른 조치였다. 원래의 타깃은 청와대 외에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5개소였다. 가히 휴전 이래 최대라 할 만한 초특급 작전이었다.

    전날 밤 환송회에서 대취했던 대원들은 최전성기의 체력을 과시라도 하듯,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추위 속에서 더욱 맛을 내던 소련제 보트카에 북한 인삼주, 박하술에 생강주, 생맥주…먹다 남긴 닭고기, 돼지고기가 다시 눈앞에 삼삼했다.

    『남조선 해방을 위해 남조선 수괴를 처단하는 막중임무』를 강조하던 124군 부대장의 말이 청년 엘리트 전사 김신조의 폐부에 아직도 비수처럼 꽂혀있었다. 그 부대장은 불과 1년반 전 남파돼 경기도 송추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군경 포위망에 걸려 도주, 복부에 총상을 입고 5일만에 임진강을 건너 귀환한 경력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다음날 새벽, 한때 개성경찰서장의 관저이기도 했던 남파공작원 초대소에 도착했다. 대원들이 남파 직전 잠시 대기하거나 귀환한 다음 하루를 자고 가는 곳이었다. 인삼차를 마시며 40분 휴식을 취한 후 바로 남으로 향했다. 북방 분계선 초소에 도착하자 초병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 「특수전」의 사나이들을 바라보았다. 부대장의 제의로 즉석에서 혈서를 썼다.

    『수령동지의 명령대로 임무수행할 것을 맹세함』

    『임무를 확인한다. 1조는 청와대 본청사 2층, 2조는 1층, 3조 경호실, 4조 비서실 공격. 5조는 정문 보초 제거 및 청와대 차량 탈취 후 탈주 준비』

    김신조는 2조의 조장이었다.

    『돌아올 때 초소와의 문답 암호는 611이다』

    살아 돌아왔을 때나 필요하게 될 것이지만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그 암호를 뇌리 깊이 각인해 두었다. 살아 금의환향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부모 형제라도 내몫의 행복까지 누릴 수는 있겠지. 복잡한 상념이 빠르게 머리 를 스쳤다.

    부대장의 한마디를 뒤로 하고 북방 분계선을 넘은 것이 밤 9시. 비무장지대 안으로 난 「안전통로」를 따라 전투대열을 갖추고 침투를 개시했다. 1조 소속 전방 척후 2명이 길을 개척하면 후방 척후는 눈위로 난 발자국을 솔가지로 지우며 뒷걸음으로 진행했다.

    예상 침투로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 관할지의 경계선. 사각지대가 되기 십상인 부대간 경계지역으로 빠진다는 침투전술의 기본을 따른 것이다. 경계선을 밟되 3백m 쯤 미군 지역으로 들어선다는 전략이었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허술한 당시의 휴전선 방어망 이었지만 미군의 경계는 더욱 빈 곳이 많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별어려움 없이 남방 분계선에 다다랐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철조망을 헝겊으로 두르고 천천히 잘라냈다. 이곳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경계가 일렬로 펼쳐지는 철책선을 통과한다면 앞으로 듬성듬성 펼쳐질 초소와 검문소를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다. 중요한 것은 대원들이 감기나 복통에 걸리는 일 없이 계획된 시간에 계획된 장소에 정확히 들어서는 일이다. 날이 밝기 전, 늦어도 새벽 5시 이전에 철책을 2km 정도 벗어나 숙영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낮 시간은 숨어 휴식을 취하고 야간 이동에 대비하는 것이다. 대원 중 하나라도 기침이나 설사를 할 정도로 몸상태가 나빠지면 작전은 연기된다. 임진강이 바라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중턱에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보초 2명을 교대로 세우며 휴식을 취했다. 잠들면 얼어죽기 십상이다. 서로를 규칙적으로 흔들며 잠깐씩 눈을 붙였다.

    밤에 건널 임진강의 동태를 쌍안경으로 살폈다. 맞은편 석포리의 강언덕, 도하 예정지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위가 충분이 어두워진 틈을 타 강변까지 난 조그만 내를 따라 내려선 뒤 얼어붙어 눈이 쌓인 강을 건넜다. 머리에는 위장용 흰 붕대를 감고 몸에는 흰 천을 둘러썼다. 앉은 걸음으로 키를 한껏 낮추며 강을 건넜다. 충분히 결빙됐다고 본 얼음은 순간순간 무게를 받아 쩍쩍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치명적 실수
 

    어려운 관문은 거의 통과했다. 대원들은 5m 간격을 유지하며 인적 없는 밤 들판을 냅다 달렸다. 마을 하나를 우회하면서 밤 발자국에 놀란 동네 개들이 한차례 짖어댔을 뿐 별다른 소란 없이 파평산을 바라보는 들판까지 진출했다. 파평산을 거쳐 법원리 뒤 삼봉산에 올라 2차 숙영을 했다.

    이들이 산악 구릉지를 이동하는 모습은 「행군」이 아니라 「질주」였다. 생각보다 루트가 수월하게 뚫려 방심한 탓일까. 다음날 오전 우연찮게 문제가 발생했다. 오전 10시경 야간 루트를 미리 살피러 나갔던 정찰조가 민간인 나무꾼과 맞닥뜨린 것이다. 우씨 성을 가진, 대원들보다 나이가 어린 형제 나무꾼이었다. 이미 한국군 군복으로 위장해 한국군 행세를 했지만 상대는 사태를 대충 짐작하는 눈치였다.

    얼르기도 하고 협박도 했지만 처리가 모호했다. 당초 훈련받은 방침대로라면 이런 경우는 즉시 처단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러나 대원들 사이에는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만만찮게 제기됐다. 번거롭고 불필요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이유였다. 간단히 말해 사체를 묻기 위해 꽁꽁 얼어붙은 흙구덩이를 파내는 작업을 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조장과 대위 계급장을 단 지휘관은 있었지만 전체를 통할하는 일사분란한 피라미드 조직이 아니라 각기 훈련 수칙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수평적 편제가 치명적 결함을 노출한 것이다. 대위와 중위 하나씩을 제외하고는 계급도 모두 똑 같아 지휘계통이 일사분란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상황에는 일기당천의 힘을 발휘하는 용사들이었으나 돌발상황 대처 능력에는 문제가 있는 조직이었음이 차차 드러났다. 야간 이동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풀어주자는 방침이 최종 결정됐다.

    나무꾼 형제들은 간발의 차이로 사지를 벗어났지만 대원들은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이는 곧 그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계기가 됐다. 전 일정을 통해 세차례 빚어진 작전 미스 중 첫 과오였다.

    처리방침을 무선으로 북에다 조회했으나 공교롭게도 암호가 해독되지 않았다. 무선 교신에 뒤이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아리따운 목소리의 여자 방송원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숫자를 토해냈지만 어찌된 일인지 소지하고 있던 암호문으로는 도저히 풀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수사기관에서 해독해준 바에 따르면 암호전문은 「원대복귀」였다.

    북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31명의 대원들은 계속 남으로 전속질주했다. 발길을 재촉해 노고산을 넘으니 송추골짜기에는 벌써 군인들이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설마했던 신고가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진관사 쪽 계곡을 따라 북한산 자락을 타고 비봉에 도착한 것이 20일 새벽 5시. 영하 20도의 강추위였다. 체력소모가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20일 낮에는 숨어있다가 마지막 코스를 향한 행군을 밤 8시부터 다시 개시했다. 계획대로라면 새벽까지 청와대 뒤 북악산에 도착하게 된다. 그날 밤이 거사 날이다. 지금의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부근이 최종 숙영장소로 잡혀 있었다. 신고가 이미 들어갔건, 군경이 방어망을 구축했건 간에 최종 숙영지까지만 정한 시간에 확보하면 그날 밤 북악산을 통해 청와대 뒤통수를 치고 내려가는 루트는 별저항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 대통령은 이날 밤만은 예외없이 숙소에 있다는 첩보에 따라 거사일을 잡은 터였다.

 
필사의 탈주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한번 일어났다. 밤새 눈덮인 바위를 타고 넘는 악전고투 끝에 새벽녘 희뿌옇게 시야에 들어온 자리는 북악산이 아니라 승가사를 바라보는 지점의 북한산 자락이었다. 체력이 소모된 상태에서 눈길에 수도 없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밤길에 방향착오를 일으켜 다람쥐 쳇바퀴 돌기에 그쳐버린 것이었다.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북악산은 아직 멀었는데 날은 잔인하게 밝아왔다. 헬기가 산 주위를 분주히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 소음이 마치 간을 도려내는 듯했다. 이 상태로는 일요일 밤 안에 도저히 청와대에 닿을 수 없다. 루트를 변경했다. 산행을 포기하고 어두워지자 8시경 산을 내려섰다. 배낭은 산에 묻고 사복으로 일제히 갈아입었다. 기관단총과 권총에 탄환 3백50발 수류탄 단도를 몸에 차고 바바리를 덧입었다.

    바로 세검정 길에 닿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종점인지 버스 3대가 한가롭게 서있고 운전사와 차장 아가씨들이 잡담을 나누는 게 보였다. 원 계획대로라면 밤 10시 30분까지 청와대를 습격한 뒤 청와대 차량으로 북으로 전속질주, 자유의 다리나 남파루트를 통해 야음을 타고 귀환하는 것이었다.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 정문으로 바로 돌진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도보로 걸어가자는 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됐다. 예정 프로그램이 허물어진 상태에서 일으킨 세번째 판단착 오였다. 어둑한 야간 도로 양편에 종대로 갈라서서 행진했다. 상명여대 입구 삼거리 검문소를 별다른 제지없이 통과, 터널이 생기기 전의 자하문고개를 향해 비포장 자갈길을 걸어 올라갔다. 고개를 넘어설 무렵 순경 2명이 처음으로 검문을 했다.

    『누구냐』

    『방첩대다』

    『신분증을 보여라』

    『부대에 두고 나와 없다』

    옥신각신하며 계속 걸음을 재촉하는 대원들 뒤를 순경 하나가 뒤따라가는 형국이 됐다. 곧 청운중학교 조금 못미처 내리막에서 지프 하나가 길을 막아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종로경찰서장』이라며 대원들의 신분을 추궁했다. 『귀대중인 방첩대』라고 하자 『나를 모르는 방첩대원이 어디있느냐』고 심문하듯 말했다. 누군가가 서장에게 총을 발사했고 대원들은 길 양쪽으로 흩어졌다.

    김신조는 언덕바지 숲 사이로 뛰어내려갔다. 경복고 후문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인왕산으로 튀어올랐다. 가는 데까지 북으로 튀자는 생각이었다 . 다행히 아직 총은 한 발도 쏘지 않았다. 붙잡히더라도 살인누명은 쓰지 않는다. 만약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모두 산에다 버리고 위협용 수류탄 하나만 남겨 간편한 몸으로 뛰었다.

    인왕산 능선에서 바라보니 시내전역이 수경사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환했다. 당시 청와대 경비를 맡았던 수경사 예하 30대대의 지휘관은 67년부터 全斗煥(전두환)대대장이었다. 그를 따라 도주하던 대원 2명이 홍제동 길에서 처참하게 사살되는 광경을 코 앞에서 목격한 뒤였다. 그보다 나이가 어린 그 두 대원은 노련한 군경력을 갖고 있는 그를 본능적으로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적진 속에서, 특히 시가지 전투에서는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흩어져 뛰라』는 그의 말도 아랑곳 않은 채 따라붙었다. 홍제동 쪽으로 접어드는 큰 길이 앞에 열렸다. 길 건너에는 수색대가 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러나 그 길을 건너야만 진로가 열리게 돼있는 상황이었다. 좌우로 나눠 건너뛰라고 지시했다. 길로 나서는 순간 집중 사격이 쏟아졌고 대원 둘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인왕산 서북쪽 8부 능선을 타고 올랐다. 새벽 3시. 차가운 밤 하얀 초생달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흥건하게 젖은 땀이 채 마를 새도 없이 연신 새로운 땀이 솟아올랐다. 일이 성사됐다면 지금쯤 임진강을 넘어섰을 시간이다. 틀린 것 같다. 자폭할까, 항복할까.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3년 넘도록 한번도 보지 못한 그리움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문득 눈앞이 아득해지며 허깨비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위 뒤편에 잠복하고 있던 군인과 마주쳤다. 수류탄을 들고 잠시 대치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듯 느껴졌다. 투항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순간적인 결정이었다. 뭐라고 외치는 상대의 말을 귓전으로 스치며 맥없이 수류탄을 땅에다 떨궜다. 풀린 혁대로 손을 묶인 채 인근 홍은동 파출소로 연행됐다. 머리 속이 멍해올 뿐, 마음도 몸도 무감각했다. 파출소 안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쏟아져왔다.

 
「생포」 아닌 「투항」
 

    한참 후 수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마지막 들고 있던 수류탄이 작동하지 않는 불발탄이었음을 알게 됐다. 자폭하려 했어도 죽지 못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그동안의 신문 스크랩을 얼핏 훑어 보았다. 접전 이후 궁금했던 쌍방의 희생자는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종로구 청운동 서대문구 홍제동 등에 31명의 무장공비가 침입, 휴전 이후 북괴는 가장 큰 규모로 도발행위를 자행했다. 이들 공비들은 19일 오후 경기도 파주군 삼봉산에 나타났다가 민간인들에게 발견된 자들로 청운동 어귀까지 침입했다가 비상망에 걸렸는데 이 자리에서 공비들을 검문하던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 서장이 총격을 받고 순직했으며 마침 현장을 지나던 시내버스 한 대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부상시키고 홍제동 민가쪽으로 달아난 일부 공비들은 집주인을 사살하는등 만행을 자행, 민간인 6명이 희생되었다. 

    이튿날인 22일 군 수뇌부는 합참에 대간첩작전지휘소를 설치하고 서부전선의 3개사단 32전투단 미2사단등을 투입, 합동수색작전을 벌이고 공군도 헬기등을 동원했다. 합참 당국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서울에 침투한 이들 무장공비는 전원이 인민군 장교로 그들의 임무는 청와대 공격이었다. 노고산 지역 작전을 진두지휘하던 15연대장 李益秀(이익수)대령을 포함, 장교 5명과 사병 19명이 전사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뚜렷했다. 기자회견과 현장검증 때까지도 남파당시 올백으로 빗어넘겼던 포마드 바른 머리칼을 가지런히 간직하고 있던 김신조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동료들의 주검을 하나씩 확인했다. 홍제동 길 눈 앞에서 사살됐던 두 후배 대원은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있었다. 그 둘은 오랫동안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임진강까지 북상, 강 위를 흐르는 얼음을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북으로 헤쳐나가다 사살된 대원도 있었다. 노고산에서 가장 많은 11명이 사살됐다. 쓰러지면서 수류탄 안전핀을 문 채 엎드려 수색대원을 폭사케 한 대원도 있었다. 대부분 교육받은 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퇴로를 삼은 흔적이 역력했다.

    당시 군당국은 「생포 1명, 나머지 전원 사살」로 발표했지만 실은 1명이 북으로 탈주해갔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알게 됐다. 그 대원은 이후 남파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한 귀순자를 통해 듣게 됐다.

    김신조는 지금까지 남한 생활에서 몇가지 크게 섭섭한 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생포」라는 당국의 발표다. 도주중 붙잡힌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교전 의사가 없었고 자폭용 수류탄을 버리고 자의로 투항했다는 사실이 감춰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현장검증에서 그가 버린 탄창이 한발도 없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고 총신에서도 전혀 발사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데서도 확인된 사실이었다. 당시의 수사기록도 분명히 그렇게 남아있지만 대국민 홍보과정에서만 「생포」로 발표된 것이라는 것.

    남들에게는 별차이가 아닐지 모르지만 본인에게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 생포와 투항이다. 희생자들에 대해 그가 직접 가해 행위를 한 적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유가족들이 일말의 의혹도 갖지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에게 쏟아졌던 유가족들의 원망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비상 경계령이 이미 내려진 상황에 야간 청와대 뒷길을 시내버스가 헤트라이트를 켜고 한가롭게 운행하도록 방치한 당국의 무신경한 조치,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 신고를 일찌감치 접수하고서도 소수 경찰병력으로 청와대 뒷 길목을 차단하려 했던 일, 대로변 민가에 대한 안전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았던 일…휴전선 자체가 마음만 먹으면 여반장으로 뚫리던 당시의 방위망 수준으로 미루어보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치안수준이었다. 그처럼 허술한 상태에서 희생자가 더 많이 생겨났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은 무장공비, 특히 살아남은 김신조에게 쏟아부어졌다.

    그가 마음 속에 담아두고만 있던 몇몇 생각을 조금씩 말하기 시작한 것은 94년 자신의 짧은 자서전격인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동아출판사)를 출간하면서부터다. 관계당국의 논란을 거쳐 어렵게 결정된 이 책 출간은 문민시대 하에서 그가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다.

    어쨌거나 그는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그의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26세, 아직 세상의 여러 가지를 채 경험하지도 못한 청춘은 이날부로 지금까지의 전생을 한칼에 끊어버린 채 덤으로 받은 새 인생을 살도록 운명지워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느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수사가 시작됐다. 가혹행위는 없었고 스스로 과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신사적인 대접을 받았다. 오히려 괴로움은 과거를 회상하는 진술을 하면서 시작됐다. 자신이 완전히 뿌리를 상실했다는 공포감, 그리고 북에 남겨진 가족들이 당할 고초가 현실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윤석<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나는 육체는 지금 이 순간 인왕산 등산로를 따라 산행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1968년도 김신조 일당의 청아대 습격 사건을 잊지 못하며

그로 인하여 우리나라 최전방에 내려젔었던 엄격한 작정 상황을 잊을수가 없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 내가 오늘 등산객의 입장이되어 걷고 있으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왕산 성곽길을 가고 있는것이 마치 반공에 대한 역사 탐방을 하고 있는듯한 기분이다

  

  

그해 1월은 정말 눈도 엄청이도 많이 내렸었는데...

  

  

슬픈역사의 현장속으로... / 철조망속으로 본 청아대 뒷산

  

  

기차바위와 교회

  

  

창의문(자하문)

  

  

창의문 (彰義門)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청운동(淸雲洞)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城門).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북문 또는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설명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청운동(淸雲洞)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城門).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북문 또는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 창의문의 위치가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폐쇄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국가적 공역(工役) 등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에 중건한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반정에 성공하였다고 하며, 누문 다락 안에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숭례문·흥인지문(興仁之門)의 석축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작은 규모로 쌓고 그 위에 세운 단층 문루이며, 가구(架構)방식은 평주(平柱)의 주두(柱頭) 위에 바로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다시 화반형(華盤形) 부재를 놓아 마룻보와 중도리의 짜임을 받쳤다. 천장은 서까래를 모두 노출시킨 연등천장[椽背天障(연배천장)]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홍예문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자하문에서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를 따라 오르지요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북악스카이웨이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 능선을 따라 자하문에서 정릉 아리랑 고개를 잇는 10㎞짜리 도로로 지난 1968년 개통됐다. 자하문에서 육교로 인왕 스카이웨이와도 연결된다. 청와대가 등을 맞대고 있고 군부대가 들어와 있어 민간인의 통행을 엄격히 막아온 덕에 산림이 잘 보존돼 있다. 산책로에는 군사용 참호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투 사건 이후 인왕산과 북악산길에 철조망이 처졌다. 이 중 북악스 카이웨이 구간의 철조망은 지난 2001년 철거됐으며 현재는 일반 펜스가 놓여 있다.
  
◈인근 가볼 만한 명소=산책로는 서울의 전통부촌인 성북동과 신 덕왕후 능인 정릉이 위치한 정동을 사이에 두고 있다.

북악산 주변에는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 ‘성락원’(사적 378호)을 비롯해 조선시대 개량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태준가’(서울시 민속자료 11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출옥한 뒤 기거했던 ‘심우장’(서울시 기념물 7호), 고 려청자의 대가 ‘혜곡 최순우 선생의 고택’(서울시 등록문화재 지정 예고) 등 가볼 만한 유적지가 많다. 최근 성북동에는 괜찮은 음식점도 들어서고 있다.
  
서울의 하늘길을 걸어보자.’ 서울 성북구 구민회관에서 종로구 경계를 잇는 ‘북악스카이웨이 ’ 산책로가 지난 1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북악산 능선을 따라 자하문(紫霞門)에서 정릉 아리랑고개로 이어지는 북악스카이웨 이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수려한 산세로 1968년 개통 이래 드라 이브 코스로 꾸준히 인기를 누려왔다. 하지만 그동안 보행로가 없어 차없는 ‘뚜벅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린벨트 지역 인데다 곳곳에 군부대가 배치돼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 던 이곳이 산책로 완공으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개방된 3.5㎞ 산책로는 온전히 보행자만을 위한 것이라 더욱 반갑다. 곳곳에 시민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있어 산책의 즐 거움을 더한다. 간혹 차도를 건너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만 서울의 새로운 산책 ‘명소’로 꼽기에 손색이 없을 듯하다.[펌글]

  

  
  

  

  

스카이웨이 팔각정

  

  

팔각정 식당에서 해물 칼국수에 점심식사를 하지요

날씨가 을씨년스레 추우니 이곳 팔각정엔 인파의 행렬이 보이질 않네요

  

  

팔각정에서 본 북한산 묘현봉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일행들과 함께

  

  

여래사를 지나쳐 가지요

  

  

꽁꽁얼어붙은 얼음계곡과 낙옆길을 따라 가지요

  

 

  

굿당터를 지나서 철조망 개구멍속으로 진입을 하지요

이곳 등로 구간은 성북구에서 개발을 한지 얼마 안되는 등로여서 인적이 드무네요

  

  

형제봉 가는길에 바라본 조망 멀리 불암산도 보이고...

  

 

  

힘들게 너덜 오르길을 오르니 작은 형제봉 전망바위가

  

  

  

등로길 주변에 거암들...

  

  

저 많은 세검정의 호화 주택들에서 조대장이 형님 딱 한채만 고르시래네요

년말에 아마도 횡재를 하려는가 보지요 ㅋㅋㅋ

  

  

보현봉 앞에 나란히 솟은 봉우리가 형제봉이지요

  

  

형제봉(463m)

형제봉을 멀리서 보면 두 형제가 나란히 어깨동무한 것처럼 보인다. 이 코스는 서울 시내의 핵심부가  잘 조망되며, 오솔길과 바위등성이가 조화를 잘 이뤄 등산객들이 자주 이용하고 있는 곳이다.

  

작은 형제봉, 큰 형제봉, 북악 터널을 넘어서 뻗어온 능선이 오손도손 형제들처럼 손을 잡고 늘어선 봉우리들이네요 작은형, 그리고 큰형, 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의좋은 형제의 모습으로 우리 일행들을 맞아 주는지 게다가 조대장님의 형제봉에 대한 설명과 해설이 우릴 감동하게 하지요  
  
우리 일행들은 북악스카이웨이에서 새로 개설된 등로를 따라 이동을 하여 형제봉에 올랐지만 자세히 보면 능선을 중심으로 동으로 국민대를 바랍로며 정릉동,길음동,미아동, 월계동이 보이고 서편으로 평창동 구기동 홍지동,홍제동, 북악도 인왕산도 눈아래 들어 오지요 아울러 마즌편에 건너다 보이는 보현봉의 위엄이 우리를 오라 하지만 이제는 각자 바쁜 업무들로 인하여 더이상의 산행을 접고 바로 하산을 서두르지요
  

  

  

  

형제봉 정상에서 일행들과 함께...

  

  

이제부턴 하산길이지요 정릉매표소 방향으로 하산을 서두르지요

  

  

  

형제봉 동능선 이정표에서 꼭 정릉 매표소로 하산을 ...

  

  

계곡엔 조금남아 있는 물이 얼음이 얼었고

  

  

  

형제봉 가는길 이정목을 끝으로 조금 내려오면

정릉 매표소가 있고 이날의 하산구간은 끝이 나지요

  

  

정릉 매표소

  

  

매표소를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오는길

  

  

일행들이 이날 강추위에도  무릅쓰고 강행한 산행을 마감하고

허술한 주점에 들어 가볍게 동동주에 파전을 안주로 뒷풀이를 하고서

  

  

형님 잘가세요 아우들 잘가요 우리 다음 화요 산행에서 만나요

  

다음주엔 우리산내음 화요산행팀은 영화실미도와 천국의계단 드라만 촬영지

무의도 호령곡산과 국사봉산행을 가볍게 송년산행을 하려 예정을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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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길고 긴 산행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산님들에게도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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