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조 조계 계곡 도일봉가면서..

경기도에서 네번째로 높은 용문산은 산세가 웅장하며 사방으로 뻗어있는 산줄기 북동쪽 위취에 있는 도일봉은 863.7 M 이며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산이다 도일봉에서 보는 남쪽에 중원계곡 의 중원폭포와 치마폭포는 수려한 계곡의 미를 자아내고 있다 용문산 기슭에 위치한 용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692)년에 대경 화상이 창간 하였으며 경내에는 보물531호인 정지국사 사리탑이 있으며 절앞에는 신라마의 태자 지팡이를 꽂아 살았다는 수령이 천년 넘은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 그리고 남쪽에 자리잡은 상원암은 조선 태조7년에 조안 선사가 중창 하였다고 하며 북쪽능선 백운봉 성터로 있는 함왕성터는 삼국시대에 함씨라는 성을가진사람이 이곳에 성을쌓고 왕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있는 성터이며 둘레는 2km이고 자연적 지형을 이용 하였다고 한다.

양평에 가는 길 팔당 능내역 아래 다산 정약용 선생묘와 다산관 우리는 선생이 펴낸책 (전간기사)이책은 눈물없이 읽을수 없는 책이며 백성들은 누구나 구별없이 살아야 하며 세금을 바쳐야 국가가 지탱할수 있다는 (목민심서) 유배기간에 풍을만나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학문을 연구했던 다산 선생은 남한강 북한강 이 만나는 강을 바라 보면서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 이곳에 묻혀있다. 선생은 자신의 저서 (경세유표)를 통해나라가 개혁을 해야하며 과학의학 경재를 지표를삼아야 한다고 글을써서 임금에게 올렸으며 먹고 노는 자나 신분 구별없이 활동해야 한다 고했던 선생의 의지는 오늘날에도 완성을 못하고 부정비리를 저지른 사람이 수없이 많다 . 다산은 기중기를 발명햇으며 백성들에게 특수 작물을 권유했다 특수작물이란 인삼재배 고구마 토마토 등 여러 과일그리고 양잠 재배를 말한다 (자찬요지명)책을 보면 제일많이 언급한 임금이 정조 임금이며 정조 임금은 보답으로 승하할 때 선물로 주엇다는 (한시선) 책에는 정조 임금이 다산을 사랑했던 기록과 선물목록이 기록 되었던 책이라고 한다.다산은 전간기사 책을 쓰게된 동기는 유배지 강진에서 유월에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마음 아파 차마 눈뜨고볼수 없어 생활상을 글로써서 알려 많은 사람 싱금을 울린첵이다.

책속에 시한수를 보도록 하자

쑥을띁네 쑥을띁네 쑥아닌 지칭개도 띁네

양때처럼 몰려다니며 저산언덕

치맛자락 허리 구부리고 붉은 머리 나부끼며 쑥을띁네

눈물만 하염 없고 쌀한톨 없이 쑥으로 살아가네

그때 백성들 생활상을 우리는 시를통해서 알 수 있다 .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쓰르라미나 귀뚜라미도 슬피 울었으며 밤이 이슥토록 글을 쓰던 다산 선생 노력덕택에 수백년 전 생활상을 우리가 지금 알수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그냥 그곳을 지나지 말고 다산 선생을 생각하자.  

 등산과 웃음은 건강의 기본이다  그러면 웃음 속으로 한번가보자 .

퇴촌에서 잘사는 김 선비가 있었는데 한집에서 마누라 두사람을 두고 살았다 .

그런데 두 마누라가 붙으면 닐마다 싸움질을 하는 것이였다.

이웃보기도 부끄럽고 사람들 보기도 민망할 뿐아니라 어느 누구를  두둔할수 없으니 . 고심끝에  하루는 두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않히고 , 타일렀다. 왜들 이러는거야 하면서 남의 눈도 생각하고 지아비 체면도 좀 생각해라. 타일러 놓고 있으니. 본처와 소실. 다시 이년 저년 하면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김선비가 소실 머리째를 잡고 이년 죽여버리겠다고 한뒤 방으로 끌고갔다 .  그런뒤 한시경이 지나도록 아무소식이 없어 진짜로 죽였는가 하고 본처가 뒤방을 가보니 소실년을 죽인게 아니라 두 년놈이 옷을 모두벗고 그짓을 하면서 정신이 없어 본처가 온줄도 모르고 . 그 절정 즐거운 시간에 이룰 때 본처가 그 모습을 보니 그만 눈이 뒤집힌 것이다 . 방문을 차고 들어 가서 남편성기를 잡고 이놈아 이것으로 이년을 죽일것 같으면 나부터 죽여야지 이년부터 죽인 네놈 심뽀 이제 알았다하고 이대로 나두엇다가 이놈이

저녁마다 이물건으로 이년을 죽일 것을 생각하니 울아통이 터져 옆에 있던 방망이로 남편 성기를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후부터는 남편은 성불구가 되어서 . 이년이나 저년  모두 죽일 일이 없어서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한다 .

 

지금부터 50년전 1960년 어느날 사주 관상 지리에 일가견이 있는 이석영 박해월 유명한 풍수지리 셋사람이 양수리에서 만났다고한다 .

년.월.일. 시를보면 그사람 미래를 알수있는 것이 사주다 .

관상. 수상. 골상.족상등을 보면 그사람 운명을  정확히 예견하는 것이 관상이며 조상을 천지 기운에 좋은 기운이 뭉친 곳에모시면 자손이 부귀겸전하고 운수 대통하는 것이 풍수 지리다 . 사주 관상 풍수지리 이믿음 뿌리가 오랜 전통으로 인식되어 오늘날 까지 영양력을 행사 하고 있다. 유명한 정재계 인사치고 일년에 신수나 명당에 대해 한번쯤은 지대한 관심을 안가져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 탁월한 실력을 갖춘 이 세사람이 양수리 매운탕집에서  흥미 진전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가는데 실제 체험을 통해 방법을 찾기로 했다고 한다.

마침 다리 밑에서 움막을 치고 살아가는 청년을 발견하고 일행 셋은  그청년을 불렀다 .

세사람은  그청년 이야기를 듣기전에  사주와 관상을 먼저 보기로 했다.  먼저 박해월 선생이 관상을 보니 . 천하에 둘도없는 거지상이였다고 한다. 상이란 상을 다 보아도 틀림없이 거지상이였으며 . 다음은 이석영 선생이 초년 중년 말년 사주를 다풀어도 마찬가지로 태어난 팔자가 거지 팔자였다고 한다...

사주와 관상을 다보아도 그야말로 완벽한 거지였던 것이다. 거지라 결론 짓고 그 청년에게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때 나이가 열아홉 살이고 아버지는 세상 태어나기 전에 돌아 가셨고 .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도망 갔다고 한다. 어렸을 때에는 친척집에 돌아다니면서 신세를 졌지만 지금은 이렇게 선생님 말씀대로 거지생활 한다고 솔직히 말을했다.

자신 신세가 한탄하여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우는 청년이 하도 불쌍하여 이번에는 풍수지리에 일각연이 있는 선생이 물었다. 총각 아버지묘 있는곳을 알고 있는가 물었다. 총각은 눈물을 그치면서 아버지 묘가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을 하였으며. 풍수 지리 선생이 사주관상 두사람에게 총각운명이 앞으로 좋아질수가 없는지 다시한번 물었다. 도저히 좋아질수가 없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풍수지리 선생은 총각 운명을 한번 바꾸어 놓겠다고 결심하여 자신이 양수리 근처에 조그마한 명당 자리를 점찍어 놓은곳에 총각 아버지를 이장 해주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날 밤에 총각 아버지 체백을 운구해서 그 명당 자리에다 묻어주고 지리 선생은 총각에게 예부터 인걸은 지렁이라 했네.  자네 사주와 관상은 비록 거지지만 자네 아버지 체백을 좋은데 모셨으니 곧 발복이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자. 평생 거지 신세를 면치못할 것이라던 총각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 누구도 상상 몾할 정도로 발복이 빨리 찾아 왔다고 한다.

총각아버지 묘를 옮기고 몇일뒤 다리믿 총각 움막이 있던 곳에서 어느날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고 한다. 그런데 강쪽을 바라보니 어떤 여인이 강에 투신 자살을 하려고 강으로 뛰어 내렸다.총각이 자세히 총각이 자세히 살펴보니 새파란 아가씨였다. 총각은 비록 자신이 거지지만 죽어가는 여인이 불쌍해서 길다란 장대를 가지고 허우적 거린 아가씨 곁에 가서 기진맥진한 여인을 밖으로 건져냈다 진심으로 한사람 생명을 구해준 거지였다. 그후 한참만에 그 처녀는 이 기구한 목숨을 구해주셔서 고맙다 하고  서울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후로부터

몇날이 지난후에 부모님들을 모시고 그 여인이 찿아왔다. 일전에 모습과는 달리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로 거지 총각 앞에 나타난 여인을 본 거지총각은 눈이 휘둥그래질 뿐이였다 고 한다 . 처녀 부모님들은 딸 목숨을 구해주어서 고맙다 하고 총각 불쌍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전세방이나 얻으라하고 큰돈 뭉치를 주고 가는것이였다 . 총각은 극구사양 했으나   놓고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받았지만 , 난생처음 만져본 큰돈이라 어찌 할줄을 몰라서 자신 움막을 파고 독을 묻어 그속에다 넣어 두었다 . 그 자신은 그대로 거지생활을 했다.   그후 여러달이 지나 처녀 부모들은 거지총각이 어떻게 살고있는지 궁금해서 그처녀와 함께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거지 신세였다 . 부모들이 자초지정을 알아보니 그돈은 그대로 땅에 묻어놓고 거지 생활이 원낙 편해서 평생 이렇게 살겠노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서야 부모들이 지금 내딸이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하면서 내딸이 모대학 약대 재학생인데 아주 가깝게 지낸 애인이 있었다 . 그애인이 어느날 갑자기 다른 처녀와 약혼을 하는 바람에 내딸이 청전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지금 한시 바삐 다른 혼처를 정해 결혼을 시킬려 해도 딸이 한사코 거부하니 걱정이라 하면서 딸은 이미 죽은 목숨이니 이세상에 없는 딸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할수 있다면 목숨을 구해준 자네 밖에 없다고하니. 자네가 내딸과 결혼해주게 처녀 부모님들은 거지 총각에게 그말을 할 때 심정은 어떠했을까 . 총각 의사와는 상관도 없이 그처녀 일방적인 결혼을 천명하니 확고한 단언이라 생각하고 자식 이긴 부모 없듯시 그 부모 들은 딸이무슨 귀신이라도 쓰인 것이 아닌가 으아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처녀 부모 이름을 대면 다 알수있다. 우리나라 제일부자 라고하며  이글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 실화인 사건이다.  명당의 조화란 이렇게 신묘할 뿐이다 .그처녀 부모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허사였고 할수 없이 그해 겨울 19세 천아고아 거지 총각과 23세 미모의 여대생이며 부호의 딸이 전대 미문의 결혼식이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거지 운명 운세는 옥일승천이요. 일취월장으로 발전해 나가니 상팔자 중 상팔자로 변한 것이다. 이거지 총각은 아버지 묘 한번 잘쓰고. 그 발복으로 어여쁜 아내도 생기고 이때부터 공부도 열심히해서 지식층에 끼였으며 그의 아버지 묘가있는 그 일대땅을 모두 사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일들을 지켜보면서 좋은 명당 자리를 권세가나 부자들만이 쓰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수 있으며 좋은 일 하면서 거지 생활을 해도 착하게 살아가면 언제든지 기회가 있다는 것알수 있다..

산악인 여러분 이런 현실을 보고 천지 조화의 신비에 입을 안 벌릴수가 없다. 다만 그 사람 실명을 밝히지 못한점 양해 바라고 지금은 양수리레서 제일 부자이며 제일 부자 사위가 그고을 제일 부자인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러면 인간다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웃음 야한 웃음이 아니라 . 그냥 웃음속으로 가보자,,

양평에 사는 김생원이 사십이넘도록 슬하에 자녀 하나가 없어서 두 부부는 쓸쓸하게 지내다가 부인이 절에서 지성을 들인 덕택에 부처님이 점지하심이 있었던지 옥동자를 낳았다. 그런데 낳은아이 머리털이 붉은 색이라 . 이를 이상히 여긴 김생원이 어느날 양평읍에 있는 의원을 찿아갔다 . 의원은 아무리 이리 진맥을 해보고 저리 진맥을 해보아도 애 머리털이 붉은데 대해 결론을 내릴수가 없어서 김생원 가문 내력을 물어 보았다 그래도 도저히 그럴만한 흔적을 발견할수 없고 김생원 아내흔적 행실에 의심이 안가는 바도 아니지만 . 섣불리 그런말을 입밖에 낼수도 없고 의원이 생각해낸 끝에 김생원을 불렀다.

의원은 김생원에게 부부 잠자리에 대해서 물었다 . 김 생원께서는 부부 생활을 일주일에 몇 번하십니까 몇 번이라니요 그럼 한달에 한번 아니요 우리부부는 반년에 한번 정도 부부생활을 함니다. 의원은 그때서야 무릅을 치면서 하하 알았습니다. 김생원님 아들 머리털이 붉은 것은 두분이 오래 도록 부부 생활을 안했기 때문에 녹이슬었군요.

그래서 아이 머리털이 녹물이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습니다. 이말을 들은 김생원은 그동안 오해했던 모든 것을 잊고 그날로부터 밤마다 부부생활을 열심히 해서 다음에 낳은 애기는 털이 검은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산악인 여러분 께서도 녹슬지 않을려거든 부부생활을 날마다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

양평휴게소 근처에 조선 인조때 반정을 일으켜 경북궁을 차지했던  이괄 그로인해 이괄 아버지 묘를 뜸을 떠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지난번에 소개 했기 때문에 생약하고 양평 청운면 비룡산을 넘으면 청학 삼거리가 나온다 .  . 여주 방면쪽 다리를 건너면 백악골로 통하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조선 4대문장가 중 한사람인 이식 묘와 그가 후학들을 가르친 택풍당이 있는 곳이다. 이식은 조선중기 문신이며 덕수 이씨다 광해군때 선전관으로 있던 이식은 1618년 인목대비 페모론이 제기되자 . 하늘에 도가 땅에 떨어진 것을 한탄하여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양평 백악골로 낙향해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그후 인조 반정이 성공되자 이조 좌랑에 등용되어 1632년까지 대사간을 3차례나 역임했으며 . 그의 학문 묘사가 뛰어나고 직선적인 경향이 있으며. 택당 이식은 봄날 제비가 오는 것을 보고 그의 주옥 같은 글중 시한수를 옮겨보기로하자.

 

근심스런 일들은 웃음으로 잊고.

초당에 비가오니 사립문을 닫았네.

뜾밖에 밖에는 제비가 돌아와

한가한 이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듯히네.

이식은 어린시절 몸이 허약해 공부하기조차 힘들었으나 . 성장해서 주역을 가지고 용문사에 들어가 공부를 열심히했다. 이식은 함께사는 스님이 향상 밤이면 신을 만들었다.

그래서 무식한 스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식이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날 스님이 나이도 어린 서생이 정신을 몰두하여 깊은뜻을 알려고 하니 몸이허약해 질 수밖에  걱정이로다. 그말을 듣고 이식은 깜짝 놀라 그후부터는 그 스님에게 찾아가서 스님은 주역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친 것 같으니  가르처달라고 정식으로 요청을 하니 .스님은 겸손하게 거절했으며 이식의 끈질긴 청을 결국은 스님도 더 이상  숨기지못하고 주역의 형묘한 뜻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식은 마음속으로 깊이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식이 용문사에서 공부를 마칠 때 스님은 이렇게 말을 했다.

내년1월 한양에서 만나자 과연 1월이되자 스님이 한양에 있는 이식집을 찾아왔다 . 이식과 스님은 이야기를 사흘동안이나 나누었으며 스님이 헤어질 때 이렇게 말을했다. 병자년에 큰날리가 있으니 영춘으로 피신하시오. 그래 우리는 서관에서 다시 만날것이요. 그후역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식은 영춘으로 몸을피해 무사했으며 마침내 재상까지 올라 350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의 가르침이 살아 있다는 것 자랑스럽기만 하다..

 

웃음에 해학 그러면 용문 웃음속으로 또가보자 용문면에 옥부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가족이라고는 부인과 딸 여옥이 식모 삼월이년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무남독녀인 딸 여옥이를 갑자기 홍천에사는 정씨집안에 출가를 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옥부자 부인은  근심걱정이 생겼다 사위될 정도령이 코가 너무크다고 홍천 일대와 양평일대에 아는사람은 다 아는 코가큰 사람이다 멀지않아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어느날 저녁에 옥부자와 부인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부인이 말했다 . 영감 사위 될사람이 코가 너무 크다고 하니 걱정이요 왜 코가크면 어떤가 부인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코가 크면 그것도 크다고 하는데 .  딸 여옥이가 밤마다 시달릴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됩니다.

옥부자는 부인을 보고 그건 괜한 소리야 그렇다고 사위될 놈한테 그 물건좀 보자고 할수도없고 그러니 부인은 괜한것 가지고 신경 쓰지말아요. 이때 부인이 그럼 삼월이년을 시켜알아 보도록 하면 어떨까요. 옥부자는 그렇게 해보도록 하라하면서 돈을 준다.

부인은 돈을 받고 삼원이년이 그일이라면 사죽을 못쓰게 좋아하기 때문에 찿아가서  하루밤을 지내면서 알아보도록 돈을주면서 시켰다. 사위될 정도령은  결혼전에 삼월이와 하루밤을 자게되었다 . 그날이 지나고 이튼날 삼월이가 돌아왔다 , 부인이 걱정이 되어서 한시바삐 알려고 삼월이를 불렀다. 삼월이가 이야기를 하는데 마님 걱정 안해도 되겠습니다. 너무 크지나 안더냐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꼭 옥부자 나리님 치수와 같던데요.  그때 마님이 화를 내면서 너 이년 그러면 너년이 우리 영감하고도 잠자리를 했단 말이냐,,  참으로 옥부자 가족과 삼월이년 촌수를 따져보면 복잡하다.

옥부자와 사위는 구멍 동서간이고 옥부자 부인과 삼월이는 형님 아우 관계이며 딸 여옥이와 삼월이 관계는 결혼전에 삼월이와 먼저 잠자리를 했으니 삼월이가 여옥이 형님이 된 것이다.

 삼월이가 옥부자 소첩이아닌가,, 장인과 동서간이기 전에 처 작은 장모가 되는것이다.

코가크면 그것도 크다는 설 때문에 옥부자 딸 사위 장인 장모 관계가 삼월이년 때문에 개판이 되어 버렸다.. 코 큰사람들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비범한 꿈과 평범한 삶 누구나 시대에 이르면 나름대로 과거를 돌아보고 남은 여생을 생각하게 된다 . 50대 인생 여름내내 땀흘려 농사를 지어 가을 황금빛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꿈 나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자.

그러면 오늘도 즐거운 산행 하시길 바람니다....    끝까지읽어주셔서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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