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방산(포천) 산행기/ Photo 에세이
(2005. 12. 6/포천 한국A-약수터-유불선 탑-왕방산-왕산사/일산 한뫼산악회 대장 홍미화 연락처 016-372-2269)

*. 포천의 진산 왕방산(王訪山)
왕방산은 동두천 시와 포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포천의 진산(鎭山)이다.
한자로 왕방산(王訪山)이라 쓰는 것은 왕과 관련한 두 가지 전설이 전하여 오기 때문이다.
신라 872년 무렵이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 산에 머물고 있을 때 헌강왕이 친히 행차하여 도선을 격려하였다 해서 왕방산이라 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와 연관 된 전설도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왕자들의 골육상쟁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왕방사(지금의 왕산사)에 며칠 동안 머물렀다 해서 왕방산이라 했다는 이야기이다.
포천 이동교리에 용상동(龍翔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하룻밤을 쉬었다는 곳이라 하는 것을 보면 위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 왕방산과 창녕 성씨와의 인연
한뫼산악회에서 왕방산을 간다고 하기에 주저 없이 자청하고 따라 나선 것은 우리 성씨 문중과 왕방산은 특수한 인연이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이하 독자의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무례하지만 함자에 ‘字’를 넣는 것을 생략한다.
고려 말 우리 성씨의 시조 성인보(成仁輔) 할아버지의 증손자의 아들이 창녕 성씨를 빛낸 5대조 성여완(成汝完, 호 怡軒)이시다. 이헌 공께서는 고려 국에서 벼슬을 하실 때 이성계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각별한 친교가 매우 두터웠다. 포은을 만나러 가다가 선죽교에서 포은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되돌아와 애통했다는 말이 모시고 있는 족보에 전하여 온다.
이태조가 개국한 다음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때도 절개를 지켜 함께 따라 나서지 않았다.  태조4년이었다. 이 태조가 친구의 정으로 개경[개성]에 가마를 보내어 이헌 공을 초청함에 백의(白衣)로 참석하니, 정도전이 다음과 같은 7언 절구를 지어 두 분의 우정을 기렸다.

禁苑春深花正繁(금원춘심화정번): 궁 안에 봄이 깊어 꽃이 만발하려 하였는데
爲招嗜舊置金樽(위초기구치금준): 늙은 친구 초청하여 금잔에 술이 가득다
天工忽放知時雨(천공홀방지시우): 하늘도 홀연히 단비를 철 맞추어 뿌리시니
便覺渾身雨露恩(편각혼신우로은): 온 몸에 우로 같은 성은 문득 깨닫겠네

그 후  태조의 부름을 피해 포천 왕방산에 들어가  묘덕암(妙德庵)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며 스스로의 호(號)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 하며 왕씨(王氏)를 잊지 않았다.
삭망(朔望)이 되면  뒷산에 올라가 개경을 바라 통곡하며 옛 임금을 잊지 않았다 해서 사람들이 그 봉을 두문(杜門)이라 하였다는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하여 오고 있다.
우리 성씨 가문에는 '두문동' 실기'라는 책이 전하여 온다. 조선 초에 새 왕조를 거부하고 두문 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고려 충신 72인에 관한 일을 성사제를 중심으로 한 그 후손이 엮은 책이다.
이헌 공 성여완 아들 셋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큰아들 독곡 석린(石璘)은 영의정, 둘째 회곡 석용(石瑢)은 대제학, 셋째 석인(石因)은 우의정을 지내어 초창기부터 명문 성씨 가문을 빛내었다.
우리 성씨는 단본으로 크게  자손을 세파로 나누고 있는데 독곡파(獨谷派), 회곡파(會谷派), 상곡파(桑谷派)가 인 제공 성여완 할아버지의 자식들이다.

*. 왕방산 가는 길

왕방산 가는 가장 대표적이고 쉬운 길이 ‘포천읍-호병골-왕산사-왕방산 정상-한국아파트’ 코스다. 이 코스의 결점은 우이동에서 도선사 오르는 아스팔트 길 같이 한국 아파트에서 왕방사까지의 2.5km나 되는 지루하게 계속되는 아스팔트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코스는 왕방사를 둘러보며 식수도 준비할 수도 있고,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대신 거리가 2.1km밖에 되지 않아서 초심자라도 1시간 내로 오를 수가 있다. 정상에 오른 이후로는 6.1km의 완만한 주능선 길을 느긋하게 즐기며 하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역(逆)으로 한국아파트의 왼쪽을 돌아 200m에 있는 약수터를 들머리로 해서 왕방산에 오르고 있다.

오르면서 금년에 가장 추운 날씨라는 뉴스에 집에서 중무장하고 온 옷차림을 양파 벗기듯 하나하나 벗으며 오르고 있다.
 전국에 크게 설화(雪禍)를 입힐 정도로 많은 첫눈이 내린 지 며칠 후였지만, 여기는 자취 눈이 등산길을 덮고 있어서 그리 미끄럽지 않은 눈길 따라 우리는 초겨울의 왕방산 등산을 즐기며 오르고 있다.  
정상까지는 6.1km, 정상서 왕방사까지 2.1km로 지금은 10시를 조금 넘었는데 4시까지 돌아오라 하니 오늘은 여유 있는 산행을 하게 되었다.

 

*. 술산 등산
어제는 7월에 백두산 종주를 함께 했던 시화공단의 박 형이 손수 담가 택배로 보내온 복분자 술을 동네 산꾼인 하 형과 함께 늦도록 과음한지라, 설사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오는 도중도 그랬지만 산에 오르면서도 위기의 순간을 몇 번이나 무사히 넘겼다.
내 이름 ‘성철용’의 ‘성(成)’은 조상이 주신 성(姓)이요, ‘용(鏞)’은 가까운 조상이 주신 돌림자다. 가운데 ‘철’은 철이 들라고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 같은데, 고희 나이에도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나, 목숨을 걸고 술을 마시고 다니니 이를 어쩌랴. 그러나 아버님도 나 같은 술꾼셨으니 설마 용서를 안 하여 주실까.
  양지 바른 곳에 있는 무덤을 지나서 통나무층계를 지나니 치악산 정상에서 보던 뾰족한 3기의 돌탑이 여기도 있는데 이건 뭔가.
정규현씨란 분이 2000년에 쌓은 포촌 수호의 탑이라는 ‘유불선지탑(儒佛仙之塔)’이었다. ‘유불선의 탑’이라고 하지 않고 구태여 ‘之’ 자를 쓴 것을 보면 이 탑을 쌓은 분은 70대를 훌쩍 뛰어넘은 유불선 사상에 심취하셨던 분인 것 같다.
포천시에서는 정상을 향하는 길목마다 시민들을 위해서 도중 도중에 체육시설을 하여 놓았는데 우리의 일행이 전을 벌이고 있다가 반갑게 술 한 잔을 권한다.
엊저녁 복분자술로 행복한 강타 당한 위장을 두고 '오늘은 술 한 방울고 먹지 말아야지-' 한 맹세가 이 한 잔의 술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성 삿갓이나 되어볼까?

 
아침마다 술을 끊고
저녁에 또 술이라.
목 숨 걸고 마셨지만, 후회 못할 우리라서
정 든 밤
                                                                               한 잔의 술은
                                                                               깨는 것이 아깝구려.
                                                                                                                    -술

                   

*. 주능선의 시설물들
 겨울산행의 멋은 땀이 숨으로 흐르는 것이요, 겨울 산의 멋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 아래 전망이다.
그런데 우측에 꼬불꼬불한 길이 멋진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데 무슨 고개인가.  포천시내에서 서북쪽인 창수면을 넘는 무럭고개였다.
왕방산은 완만한 산이었다. 약간의 땀을 흘리고 얼마를 오르면 긴 능선이 시작되는 그런 육산이다. 그래서 가족이 어린이와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한 길이었다.
길은 모두 자취 눈으로 덮여 있었고, 발자국에 밟힌 오솔길이 약간은 낮았는가. 갈잎, 참나무 잎 등이나 솔잎이 소복이 쌓여 있는 것이 우리들을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무들이 뜻을 모아 정성들여 곱게 뿌려놓은 것 같다.
 
작은 나무 하나 없는 능선 길의 수목들을 보면 삼림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할 정도로 키 큰 나무들의 나라였다. 그 나무들이 많아서인가. 아니면 운치 있게 하려했음인가. 쉼터가 될 만한 곳마다 옆으로 엮어놓은 외통나무 의자가 있어 서둘러 가지 말고 쉬어가라고 옷깃을 잡는다.
 바위가 거의 없음을 의식해서인가 가끔가다가 나무의 이름과 속성도 써 놓았다.
“노린재나무/ 가을에 단풍이 물든 잎을 태우면 노란색의 재를 남긴다 하여 노린재라 한다.”
그러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산과의 약속, 산불조심’ 등의 현수막이 여느 산보다 많았다.
백양산 단풍 보러 갔다가 상왕봉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이후 보통 때도 신경이 다리에 가서 오늘은 무릎 보호대를 양쪽에 하고 왔더니 그 덕인가 생각보다는 무릎에 덜 신경이 쓰인다. 무릎보호대가 근육의 역할을 하여 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오늘도 맨 꼴지에 가던 또 다른 우리를 제치고 속도를 가했더니 갈림길이 보인다. 정상까지는 0.4km, 왕산 사까지는 1.7km인데 벌써 선두의 일행은 정상 근처에서 점심을 끝내고 하산을 재촉하고 있다.
헬리콥터 장을 지나 정상에 서니 능선 길에서 계속 시야를 가리던 나무도 없는 널찍한 공터다. 공항 같이 풍향기가 있고, 기상대 구조물인가 안테나가 서 있다.

 오르면서 서북쪽으로 나뭇가지 사리로 보이던 대낮인대도 등을 환히 켜고 있던 군부대가 있던 산이 손에 잡힐 듯이 건너다보인다. 국사봉(745m)이었다. 여기서 2.6km의 국사봉을 거쳐  능선 길을 따라가면 깊이울계곡의 심곡저수지로 내려가게 된다. 국사봉 너머 희미한 것이 소요산인가 보다.
왕방산(732.2m)은 남북으로 길게 포천을 두르고 있는 산이다. 그 남쪽으로는 장기바위(674m) 너머에 있는 산이 해룡산(660.7m)이고 그 뒤가 포천 올 때 지나온 축석령이다.
 모두가 점심 걱정을 해주지만, 늦게 와서 늦게 내려올까 걱정하는 분들을 위해서 점심을 생략하고 하산 길에 들어섰다.
거북이 산행을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점심을 행동식으로 하여 점심시간을 생략함으로써 남들과 조금이라도 보조를 마추는 것이 궁색하게 찾아낸 지혜였다.
산꾼은 분명 정상을 가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막상 정상에 머무는 시간은 거의 10여분 내외다. 등산의 목적지가 정상이면서도 하산을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 목적이 달라져서인가. 아니면 애초의 목적이 정상이 아니었나. 여기까지 오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나.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 네 발로의 하산 길
하산 길에서는 조심조심 내려왔지만 느림보 나를 뒷사람들이 따라붙지를 못하였다. 아이젠을 한데다가 네발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어찌 인간이 네발로 내려올 수 있을까. 처음으로 스틱 두 개를 이용해서 내려왔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파른 내림 길에 길가 나무를 잡고 내려오듯이, 스틱 둘에 인조 나무처럼 의지하고 내리막길을 거침없이 망설이지 않고 발을 내 디딜 수 있어서다. 옛날에는 비싸던 스틱도 동대문 축구장에 있는 풍물시장에 갔더니 쓸만한 3단의 지팡이를 1만원에 2개를 주었다.

중간 쯤 내려왔는가. 반가운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니까 공연히 물을 아껴 먹었구나 하는 후회가 난다.
눈 덮인 묘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곳부터 길은 차가 드나들 정도로 넓은 길이라서 급히 아이젠을 벗었다.

*. 왕방산이라 하지 않고 왜 왕산사라 했을까
등산 내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왜 신라 헌강왕이나, 태조 이성계가 방문하였다 하여 산 이름을 왕방산(王訪山)이라 했다면서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할까?

왕산사 홈페이지(http://www.wangsansa.org/)에서 이 절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왕산사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877년 신라 헌강왕 3년 도선 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方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이성계 전설 생략"
그러니까 왕산사란 왕방산사의 준말 같다.

세월이 흘러 절터만 전해오던 해방 직후였다. 금강산에서 중생구제의 큰 뜻을 품고 수도하던 청매화상이 있어 이 지역에 하루 밤을 유하다가 현몽(現夢)을 얻었다.
그 현몽이 인연이 되어 1947년 이곳에 초가삼간을 짓고  편액(扁額)을 보덕사(普德寺)라  붙이고 34년 동안 수행과 포교에 힘썼더니 부처의 가피(加被)로 왕산사는 이 고장의 기도처(祈禱處)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그때의 현몽에 따라 지하에서 파낸 것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천년석불(千年石佛) 미륵불 등이다.
지금 왕산사의 귀중한 출토유물로 '王山寺'라고 새겨진 암기와, 돌거북, 막새기와, 미륵전의 미륵과 탑의 색깔이 천년 고찰 왕산사의 역사를 입증해 주고 있다.

그래서 보덕사(普德寺)란 이름 대신에 옛날에 쓰던 왕산사(王山寺)란 이름을 되찾아 쓰는 것 같다.

-사진 왕방사 홈피서

*. 왕산사의 꿈
 왕산사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일주문은 왜 사람처럼, 새의 다리처럼 기둥이 둘뿐일까? 여기서부터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에 귀의하란 뜻인가. 두 기둥으로 쓴 한자의 한 일(一) 자인가.
왕산사에는 빈 게시판만 서 있을 뿐 절의 연혁도 없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요(空卽色)이요,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니(色卽空) 그래서 없는 것인가.
경내에 들어서면 멋진 연못이 있고 그 위에 대웅전보다, 지장전보다 주차장이 요한하고 절 마당이 드넓을 뿐이다.
 -사진 왕방사 홈피서
이것이 서두르지 않고 '왕산사 10년 중창불사 원만회향'을 기원하는 것이 현 법해 주지스님의 꿈이다.

현재 5백여 평의 왕산사를 3,200여 평의 천년 고찰 대 왕산사로 다시 세우고 싶어 하는 법해 주지 스님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좁은 삼성각과 산신각을 오늘날처럼 지워 놓은 것처럼,



         




-사진 왕방사 홈피서
 지금보다 더 대웅전과 지장전 등을 넓고 크게 세우고자 하는 것은 법해 스님의 꿈을 넘어선 포천 불자들의 꿈이요, 포천을 사랑하는 지방유지들의 꿈이기도 하다.
능력 있는 불자의 시주와 포천시가 그를 도와 법해 스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빌어본다. 그것은 지역 발전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왕산사에서 특히 인상 깊은 곳은 미륵전이다. 108 층계를 오르다 보면 좌측에 잘 생긴 보살이 반기고 있고 꼭대기에는 미름불이 함박웃음을 핀 얼굴로 맞는다.
나는 전 세계를 돌아다녀 보아도 예수님의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부처가 화를 내는 모습도 한번도 보지 못하였는데, 왕산사의 미륵불은 은근한 미소가 아닌 막 폭발하려는 웃음 직전의 상호(相好)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