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6.1.19(목)-20(금)

코스: 월정사-오대산장(일박)-상원사-비로봉-상왕봉-상원사


 

드디어 무릎이 거진 다 나은 듯하다. 덕유산과 계방산을 수월하게 다녀온 탓에 자신감도 다시 80%쯤 충전이 됐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겨울산을 경험해 보자는 취지에서 강원 영동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떨어자마자 오대산으로 떴다. 오대산이 영동은 아니지만 전국적으로도 눈 또는 비가 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예보된 날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일기예보는 틀렸다.


 

꼭 매서운 바람에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사진에 담긴 그림같은 설경들을 이번에는 볼 수 있겠지 기대하며 갈 수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 붕어빵을 먹을 때도 마지막에 상대적으로 많이 남은 팥을 음미하며 먹을 때가 가장 맛나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도 겉껍질이 다 할때까지 아이스크림이 반드시 남아 있도록 하는, 즐기는 것 자체에 못지 않게 기대하며 기다리는 그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다만 얼마 남지 않은 지리산행을 대비해 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 하나 가졌을 뿐인데, 가는 날마다 마치 따로 받아놓은 운동회 날만 같으니... 짜.증.난.다.


 

하지만 어쩌나. 창문이 뚫어져라 버스 안에서 날씨를 살피다 지친 우리가 내린 곳은 월정사 입구.  식당들 다 지나고 내려버린 탓에 제대로 된 점심을 못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오려는 찰나에, 우연히 스친 스님 한 분이 때마침 공양시간이라며 절에서 먹으라신다(부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보내주셨음에 틀림이 없다).  따듯하고 푸짐한 밥 한끼에 날씨고 뭐고 무조건 기분이 좋아지는 거 보면 인간은 정말 생각보다 무지하게 단순한 동물인 게 분명하다. 부른 배를 두들기며 느긋하니 그 유명한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산책했다. 바닥이 미끄덩 미끄덩하니 얇은 눈으로 덮여 있어 걷기도 불현했고, 괴물같은 개구리들(스피커란다)이나 깨끗이 정돈된 고만고만한 이쁘니들이 그닥 매력이 없어 절반쯤 가다 다 봤다 치고 돌아가는 길,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만들 당시에는 엄청나게 화려했을 청동 풍경이나 금동 머리장식까지도 내 눈에는 왜 그리도 슬프게만 보이는지. 괜시리 눈이 올 듯 폼만 잡고 있는 하늘 탓인지, 제대로 보존돼 온 오랜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그야, 무릉이 어디뇨~

계곡물이 옥빛으로 얼었다. 열심히 쪼깨서 보석상에 팔아도 값이 제대로 나갈 것 같이 아름다운 보석들이 지천이다. 신기하다 멋지다 말만 하고 지나다 드디어 각도가 제대로 잡히는 절경을 찾아냈고, 여기다! 유레카! 결정이 나자마자 동행은 바로 제대로 얼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간다. 물론 제대로 얼었다마다... 비취빛 얼음 술상에 새벽에 부친 얄팍한 김치전이 놓이고, 차갑고 영롱한 봉평 막걸리(지난 번 계방산행 때 먹었던 맛을 잊지 못해 진부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사다 짊어지고 왔다)가 시에라 컵에서 넘실댄다. 샤앗~! 비교적 따듯한 날씨였기에, 비교적 좋은 기후였기에 가능한 자리였다. 태어나서 처음인 이 아름다운 경험을 맛볼 수 있게 해준 하늘과, 이 순간을 함께 하는 동행에게도 감사의 샷을...


 

오대산장에 도착하니 어느새 또 어둠이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역시나 기분을 너무 많이 냈나보다...ㅋ. 오대산장은 역시 산장답게 대피소들과 달리 객실들이 따로 마련돼 있다. 낮에 너무 좋은 곳에서 여흥을 즐긴 터라 굳이 바깥에 나가 덜덜 떨며 저녁을 해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따듯하게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맛있는 밥과 안주와 함께 가스등 아래서 소주로 간단히(?) 입가심을 한다...


 

약간 눈발이 날릴 듯 말 듯 하던 전날과 달리 다음날은 절대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씨다. 괜시리 마음이 급한지 상원사 거쳐 적멸보궁을 지날 때까지 걸음걸음에 거침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상원사와 적멸보궁도 찬찬히 둘러 보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다. 목만 적시고 비로봉으로 바로 출발! 해발 1,563미터 비로봉의 얼은 눈길을 아이젠을 차고 한 발자욱씩 오르기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괜시리 새로 산 빡빡한 내복에까지 짜증을 내고 싶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듯하다. 50분이면 된다는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변함없는 오르막에 계속되는 얼어붙은 급경사 계단은 초보의 숨을 깔딱대게 만들기 충분하다. 비몽사몽 비로봉 찍고 상왕봉으로 바로 출발. 오대산 다섯 봉우리 중 다섯을 다는 아니더라도 달랑 하나만 찍고 갈 수는 없는 일...


 

상왕봉서는 맘씨 좋은 4분의 커플 산행객들 덕분에 라면 대신 얼큰한 버섯손칼국수를 배가 터지라고 얻어먹었다. 준비하신 양도 많기도 했지만 객들이 워낙에 잘 먹으니 남기고 가려던 밥이니 반찬이니 모조리 총동원된 탓이다(감사합니다. 너무너무 맛있었습니다!). 상왕봉서 북대를 거쳐 다시금 상원사로 내려오는 길은 넓은 길 대신 좁은 길(금지된 길,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간다는 길)을 택했다. 눈이 녹으면서 얼음이 얼어붙은 급경사 길이 이어져 신경을 있는대로 곤두세워야 했지만 무릎이 아프지 않은 게 신기해 힘든 줄도 몰랐다. 걸어 올라왔던 월정사-상원사 길을 버스를 타고 내려가며 어제의 신선놀음 흔적을 더듬어 보노라니, 어제 일이 아니라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만 같다...


 

설경이 좋은 산으로 손꼽히는 산들을 연거푸 밟았으나 제대로 눈맛을 보지 못했다. 약을 올릴대로 올렸다가 까무라치는 오르가즘이라도 선사해줄려나. 하긴 뭐 내가 언제부터 다녔다고 벌써 설경을 논하리오. 무릎이 다 나은 것에, 콩알만큼이라도 근육이 붙어가는 것에, 숨이 덜 가빠져가는 것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나처럼 최고의 술맛을 빚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에 만족하며, 올 겨울 남은 두 번의 원거리 산행(소백, 지리산)에 은근슬쩍 기대를 또 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