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산(363.9m, 아산시 아산면) 산행 Photo 에세이/ 사진 출처: 청파
(2006년 6월 14일/휴양림주차장-헬기장-깃대봉-연화봉-영광의탑-여민루/우리산내음산악회 따라)

*. 산내음 산악회 따라
출처: 아산홈피
출처:산내음 톱슨
수요산악회인 ‘우리산내음’ 산악회 따라 영인산을 가고 있다. 아산의 이상일 님 부부가 우릴 초대하여서다.
영인산이 있는 아산(牙山)은 이 고장을 빛낸 맹사성, 이순신, 장영실, 이지함, 김옥균, 윤보선의 고향이다. 그래서 아산에는 맹사성 고택(맹씨행단)이 있고,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의 묘소가 있다.
천안행 열차를 타고 평택에서 내려 영인행 버스를 타고 영인봉 들머리가 되는 자연휴양림을 행하는데 오후 늦게부터 내린다는 비가 벌써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 토정 이지함 전설
위에서 든 위인 중에 장영실(蔣英實)은 세종 때 측우기를 발명한 분이다. 기생의 소생으로 천한 관노(官奴)였다가 그의 뛰어난 과학적 재주로 인연하여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노예의 신분을 벗고 벼슬길에 오른 과학자다. 
그런데 이지함(李之함)은 누구신가.
그는 어려서 흙으로 쌓은 정자에서 살았기 때문에 호를 토정(土亭)이라 한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이다.
이 토정비결이 모두 맞지 않는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토정선생에게는 무위도식하는 작은아버지가 한 분 있었다.  토정은 숙부에게 비결책을 만들어 주고 남의 비결을 보아 주고 밥이나 얻어 먹게 하였다. 그런데 그 토정비결이 너무나 적중하여 토정 이지함이 일부러 몇군데를 틀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 영인산 자연 휴양림

영인산은 산보다 자연휴양림으로 더 유명하다.
2000년 4~5일 발생한 산불로 까맣게 타버린 영인산을 되살리고자 산사랑하는 이, 출생, 결혼, 창립일 등을 기념하려는 시민들의 헌수(獻樹)의 동참과 함께, 아산 시가 총 100억원의 예산을 투자 하여 15만 평의 자연휴양림을 조성하여서 1997년에 개장하였는데 2,8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주요 시설은 이전에 있었던 미군 기지의 막사를 개조한 것으로 그 중앙에 숲 속의 집(13동), 산림욕장, 수영장, 야영장, 눈썰매장, 취사장에 산 정상까지 차가 접근할 수 있는 임도를 만들어 아산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였다.

*. 영험한 산 영인산(靈仁山)
  영인산 정상에 신기하게도 우물이 있어서 가물 때 그 우물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는 영험(靈驗)한 산이라 하여 영인산(靈仁山, 363.9m)이라 한 것 같은데 ‘인(仁)’ 자는 왜 붙였는지는 어디에도 그 설명을 찾아볼 길이 없다.
  자연휴양림 입구 주차장을 들머리로 우리는 산행을 시작한다.
산내음산악회 특유의 빙 둘러서 하는 서로의 인사를 끝내고 오름길이 시작되는데 산은 육산이다.
초입 길 우측의 납골당이 멋있다.
먼 여행을 하면서 차창에 비친 모습 중에 제일 보기 싫은 것이 밭 가운데 있는 묘들이다. 산행 하다가 보기 싫은 것은 등산 길을 막는 이름 없는 묘지다. 그 하나하나의 묘지가 될 것을 하나의 납골당으로 하여 12명 이상을 하나로 모신다는 것은 우선은 신선한 감동이다.
부모님 묘소 하나 관리하는데도 얼마나 많은 정성과 투자와 시간이 들던가를 경험해서 하는 말이다.
  육산의 완만한 오름길에서 만난 능선은 오름길이 되고, 다시 능선이 시작되는 곳에 어김없이 이정표가 있다.
  주능선에 오르니 좌측으로 가면 어금니바위요, 우측으로는 정상을 향한다는 이정표가 있는데 '어금니바위'란 이름이 생소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산(牙山)의 한자 '牙'가 어금니 '아(牙)' 자이니 혹시나  지명의 유래가 되는 바위가 아닌가 하지만 정상과는 반대 방향이라서 의문만 갖고 정상을 향한다.
정상 가까이까지 차로도 오를 수 있게 임도를 만들어 놓아서 산꾼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산행의 기쁨을 누리게 하였는데 능선 길은 산 정상에 있는 2 마리 학 같은 탑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가는 길이다.
그 도중에 좌측으로 보니 상투 같은 봉우리가 있다. 상투봉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좌측 갈림길로 0.5km의 상투봉을 향하고 있는데 다시 돌아와야 하는 코스라서 나는 직진하여 정상을 향한다.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서였지만 요즈음 와서 생긴 나쁜 버릇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기를 쓰고 따라 전 코스를 다녔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심지어 정상까지 오르려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게다가 궂은비는 끊질 줄 모르고 오지, 고어텍스에 판초까지 입었건만 효험 없이 온몸은 물론 신발까지 흠뻑 젖었지, 해서 마음이 시큰둥한데 300m 겨우 넘나드는 상투봉을 가겠는가. 그래서 거기 있다는 흔들바위(動石)도 보지 못하고 청파님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영인산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산은 휴양림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구태어 먼 곳에서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산이 아니다. 더구나 다시 한 번 와야지- 하고 벼르게 되는 산은 물론 아니다.
그래서인가 손님이 없는 음식점 주인이 친절한 것처럼 등산로에는 이정표가 어느 산보다 자세하고 친절하다. 봉우리마다 빠짐없이 정상석을 세워 두었고 곳곳에 이 고장 출신의 시비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중에 백미(白眉)가 저 멀리 얼굴을 들어내고 있는 두 탑이다.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이었다.

*.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
 
정상을 향한 큰 길을 버리고 우측 오림길에 접어드니 지루한 시멘트 층계가 한없이 계속되더니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헬리콥터 장이다.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은 높이 30m, 둘레가 26m의 대형 탑이다.
아산만은 조석 간만의 차가 평균 6.1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이 일대에다가 국제 무역항과 공업단지 조성과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최고 온양온천과 도고온천, 아산온천을 더욱 개발하는데 그 배후에 우리 국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필요하여서 그래서 세웠다는 곳이 영광의 탑이요, 자연휴양림이다.



 
 


그 탑 이르기 전에 자연휴양림의 시설들이 보이고 정상을 가는 길에 대형 거북 약수터가 있다. 옛날부터 정상에 있다는 우물을 개조하여 현대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이 산에서 반갑게 만나서 마시던 약수와는 사뭇 분위기가 어색하다.
 가는 길에 깃대봉을 들려서 정상에 있는 대피소에서 우리는 점심을 함께 하였다. 영인산에 옛날에 미군부대 막사의 일부인 모양이다.
영인산은 날씨가 맑다면 동쪽으로 아산시를 눈아래 굽어보며, 서쪽으로 막힘없이 툭 터진 삽교방조제와 아산방조제가 만들어 놓은 삽교호와 아산호를 바라보며 서해대교의 위용을 완상할 수 있을 최적의 곳인데 오늘은 우중이라 모든 게 비로 가리었다.  
예보대로 '늦게나 비가 오겠지-' 하고, 그 호수를 바라보며 나의 애송시 이형석의 '호수'를 낭송하고 싶었는데 안개무중이라니-.


어쩔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 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서 지니는 일이다.
-이형기, ‘호수



*. 아산산성
 비도 계속 오고 해서 내리막길은 헬기장으로 되돌아오는 길로 안내한다는데 아까웠던 길이 아니다. 왜 일부러 가파른 내리막길일까 하였더니 아산산성을 보여주려는 배려였다.
아산산성은 백제 초기의 석성(石城)으로 추정되는 성이니 여기가 삼국시대와 청일전쟁의 격전지로 역사의 터전이 되는 곳인 모양이다. 이러한 흔적만 남은 성(城)을 시인들은 어떻게 보는가. 다음은 황금찬의 '성(城)'이란 시에서 그 마음을 읽어 보자.

사람은 가고
성터는 남아
무상함이 이리도 새삼스럽다.

무너진 성돌 위에 푸른 이끼
세월이 남기고 간 슬픈 얘기여!

  
 하산길 마을에는 활짝 핀 노란 밤꽃이 비에 젖어있었고, 뽕나무에는 오디가 까맣게 익어서 우리 일행을 동심 세계로 몰아 시각과 미각을 즐겁게 하였다.
우리가 내려온 마을이 영인면인데 돌담길을 돌아드니 영인초등학교 옆에 커다단 문루가 있다. 여민루(慮民樓,충남유형문화재 제17호)였다. 옛날에 빈객이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운 아산현의 관아였다.
여기서 멀리 좌측에 향교가 보인다. 이 향교에서는 현재도 중국의 성현인과 두명의 철학자,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석전대제를 지낸다. 
 
 
 
 

 큰길로 나오다가 교통표지판을 보니 김옥균의 묘가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지만 배고프고 술 곺은 우리들에게 우선 급한 것이 금강산식후경이라.
우리들의 뒤풀이는 예산의 송영택 님께서 손수 사오신 구기자 막걸리로 젖은 옷, 젖은 몸으로도 즐거웠던 우리의 하루를 서로 축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