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산


 

            *산행일자:2009. 4. 19일(일)

            *소재지  :경기 가평

            *산높이  :연인산1,068m, 장수봉879m, 송학산705m

            *산행코스:백둔리주차장-소망능선-연인산-장수봉-장수능선-장수고개

                             -구라우골-용추계곡-용추계곡 승안리주차장

            *산행시간:9시35분-16시40분(7시간5분)

            *동행    :과천산사랑산악회 회원

 


 

  혹시라도 백둔리를 출발해 소망능선을 타고 연인산에 오르시면 진정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제대로 하산코스를 정할 수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정 오래 살기를 소망하시면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가시다가 장수봉을 넘어 다다른 삼거리에서 정동으로 뻗어나가는 장수능선을 타시고, 몇 년 안에 짝짓는 것이 소원이시라면 정상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 만난 삼거리에서 정남으로 진행해 연인능선을 타시면 됩니다. 겨우살이가 자리한 나무 밑에서 두 남녀가 입술을 맞추면 반드시 결혼에 성공한다는 서양의 이야기도 있고 하니 이 능선으로 하산하는 젊은 연인들이라면 겨우살이를 찾아 그 아래에서 접문례를 시도해 볼만도 합니다. 나이 들어 사는 데는 장수와 연인보다 진정한 우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우정봉을 오른 후 정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우정능선을 타시기 바랍니다. 오랜 친구에 대한 세속의 서운함도 그 아래 우정고개에 이르면 눈처럼 다 녹아 없어지고 우정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소망하신다면 몇 번은 연인산에 더 오르셔야 합니다. 각각의 능선을 타본다고 소망하시는 장수와 연인 또는 우정이 제대로 얻어질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렇게 몇 번이고 연인산을 오르내리시다 보면 연인산과 연인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쯤 되면 가평군의 “연인산” 개명작전은 성공한 셈입니다.

1999년 해발1,068m의 우목봉을 연인산으로 개명하고 능선마다 고유의 이름을 새로 지어 붙여준 연인산의 브랜드화가 성공해서인지 오름 길과 하산 길이 생각보다 훨씬 부산했습니다. 제가 합류한 산악회에서는 철쭉꽃이 만개하는 다음 달에는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 산행을 한 달 앞당겼다는 데 정상이 가까워지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수많은 산객들로 먼지가 풀풀 일어 성공한 연인산 브랜드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다가오는 5월에 열리는 철쭉꽃 축제를 이 산이 얼마나 힘들게 치러낼 까는 불문가지의 일이어서 얼마간 걱정도 됐지만  몇 곳에 간이쉼터를 만들고 정기적으로 등산로를 보수하는 등 브랜드관리에 힘쓴다면 가평군은 자연의 산을 갖고 브랜드마케팅에 성공한 비영리단체로 우리나라 마케팅사(Marketing史)에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브랜드마케팅에 대한 관심도 다른 선진국에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부모님께서 한문을 아시는 동리어르신을 몇 번이고 찾아가 간청해 제 이름을 받아오신 것도 브랜드마케팅에 다름 아닙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제 이름은 우 명길(禹 命吉)입니다. 임금 禹, 목숨 命, 길할 吉자인 제 이름은 임금 목숨이 길하다는 뜻으로 풀이되니 영어로는 “Long Live, The King"이요, 그리고 “국왕만세(國王萬歲)”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지난 10월 용화산에서 발을 잘못 내딛어 바위 아래로 10m가량 굴러 떨어지면서도 허리만 다치고 머리를 다치지 않아 119에 구조요청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살아나 다시 산을 오를 수 있는 것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선견지명 덕분이라 생각되어 엄청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든 산이든 이름 석 자를 잘 짓고 관리하는 것이 이렇듯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아침9시35분 백둔리 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지난 가을 산행사고로 오랫동안 산행을 같이 못했던 과천산사랑 산악회에서 경기도 가평의 4시간 코스인 연인산을 간다고 문자메시지가 와 고민 끝에 참여했습니다. 반년 가까이 차고 다닌 허리보호대를 풀은 지 열흘 밖에 안 되어 집근처 수리산 산행도 조금은 벅차다 싶었기에 해발 천m가 넘는 연인산을 오르기가 주저되었지만 고산산행은 혼자보다 산악회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에서 고심 끝에 하루 전에 예약을 했습니다. 백둔리주자창에서 하차하여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20분간 걸어 오르는 중 초우쉼터를 지났습니다. 시멘트도로가 끝나고 5분가량 더 걸어 다다른 “연인산2.7Km/장수폭포1.1Km"의 표지봉이 세워진 임도 사거리에서 직진해 소망능선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잣나무 숲속으로 난 비알 길을 반시간 올라 "연인산1.8Km/장수폭포2.0Km"의 이정표를 지났습니다. 능선에 자리 잡은 묘지는 후손들이 이번 한식을 건너 뛴 듯 봉분이 제 모습을 잃어 초라해 보였으며 그 옆의 생강나무도 근처에서 연붉은 진달래꽃이 받쳐주지 않아서인지 노랑 색깔을 제대로 내지 못해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1시26분 왼쪽으로 장수능선 길이 갈리는 봉우리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묘지에서 조금 더 오르자 로프 줄을 쳐놓은 가파른 비알길이 시작됐습니다. 곡우를 하루 앞두어 한 낮의 기온이 섭씨26도를 오르내리는 데도 여기 연인산의 넓은잎나무들이 가지 끝에 새싹을 돋우지 않는 것은 “춘래춘 불사춘”의 변덕스런 봄 날씨를 많이 겪어보아서일 것입니다. 두 달 전에 시작한 양손으로 스틱잡기 덕분에 된 비알의 산 오름이 생각보다 훨씬 힘이 덜 들었습니다. 거의 시간 반을 쉬지 않고 올랐어도 그다지 숨이 차지 않은 것은 순전히 양손으로 스틱을 잡고 오른 덕입니다. 능선삼거리에서 물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른 후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0.9Km 떨어진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에 바람난 처녀들이 치마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재현한 얼레지 꽃과 더불어 양지꽃과 개별꽃이 도열해 철쭉보다 한 달 앞서 산객들을 반겼으며 허리가 굵직한 물푸레나무들도 능선 길에 드문드문 서서 이 인사치례에 동참했습니다.


 

  12시 정각 해발1,068m의 연인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먼발치로 경기 최고의 산인 화악산이 보였습니다. 작년 11월 한북정맥 종주를 마치고 화악지맥 길에 들어선 고교동문들이 지금 쯤 저 산을 오르겠다 싶어 전화를 걸어보고자 했으나 깜박하고 핸드폰을 집에다 두고 와 못했습니다.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정상석 옆에 세워진 이정표에 안내된 행선지가 “장재울” “귀목봉”등 모두 여덟 개나 될 정도로 이곳 정상은 사통팔달의 요지여서 화악산뿐만 아니라 명지2봉, 운악산, 칼봉산등도 잘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 들이 무리지어 오르고 있어 정상석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곧바로 하산했습니다.


 

  12시45분 점심 식사를 끝내고 오후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소망능선 갈림길에서 4-5분간 조금 더 걸어 다다른 능선 길에서 함께 모여 십 수분 간 점심을 든 후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지난 사고로 발걸음이 더욱 느려진데다 중간에 사진을 좀 찍으려면 다른 분들보다 일찍 시작해야 제 시간에 주차장에 닿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2002년 고교동기와 한 번 올랐던 산이지만 그 때는 우정능선으로 올라와 연인능선으로 하산했기에 오전에 오른 소망능선 길과 앞으로 하산할 장수능선 길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수시로 지도와 나침반을 점검해 진행방향을 확인했습니다. 산행재개 20분 만에 해발879m의 장수봉을 지나 청풍능선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라 동쪽으로 가지 친 장수능선 길로 들어선 시각이 13시17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온 일행 몇 분들은 직진 길이 맞는 것 같다며 후미를 기다리고 저만 서울시 산악회 두 분과 함께 장수능선 길을 걸은 것은 제가 특별히 장수를 소망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석 자로 제 장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굳이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산악회에서 배포한 지도에 이 길로 하산하도록 되어 있어서였습니다.


 

  13시51분 해발705m의 송학산에 올라 삼각점을 확인하자 이 길이 확실하다는 확신이 섰 습니다.

진달래꽃이 거의 보이지 않은 소망능선 길과는 달리 장수능선 길은 보기 드문 진달래 꽃길로 이 길을 걷는 동안 연분홍의 진달래꽃들을 오래도록 보았습니다. 한 달만 지나면 여기 진달래꽃들은 다 지고 이제 막 몽우리 진 철쭉꽃이 이 길을 화사하게 밝힐 것입니다. 장수능선이라 해서 화무십일홍을 넘어 마냥 장수하는 꽃을 피울 수는 없고 보면 이 길에서 장수하는 것은 꽃들도, 나무들도, 다른 생물도 아닌 바로 장수능선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뭔가 속았다 싶었습니다. 서울시의사회의 두 분은 갈림길에서 초우쉼터로 내려가고 저는 400m를 더 걸어 장수고개로 갔습니다.


 

  14시17분 좌우로 넓은 임도가 나 있는 장수고개에 다다랐습니다.

삼천갑자동방석이 몇 번이고 구른 삼년고개는 한 번 구르는 것으로 삼년간 수명이 연장되었다는데 여기 장수고개는 한 번 넘어지는 것으로 한 60년쯤 수명이 늘어나야 제대로 이름값을 할 것입니다. 사과를 까먹으며 한참을 쉰 후 오른 쪽 마일리행 임도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내 왼쪽으로 갈리는 좁은 임도 길을 만나 방향을 확인 한 즉 지도에 나와 있는 남향 길이어서 큰 길을 버리고 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0분 가까이 더 가자 임도길이 오름길로 바뀌고 용추계곡과 점점 멀어져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장수고개로 되돌아갔습니다. 그새 후미들이 벌써 지나갔나 궁금해 다른 분의 휴대폰을 빌려 산행대장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마일리행 큰 길로 들어선 시각이 15시5분이었습니다.


 

  15시38분 "연인산5.6Km/칼봉산3.4Km/주차장3.4Km"의 표지목이 세워진 용추계곡을 만났습니다.

장수고개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을 따라 3-4분가량 걷자 두 번째 갈림길을 만났는데 왼쪽 아래로 용추버스종점 길이 나 있었습니다. 남쪽 방향의 MTB 길을 따라 몇 분을 걸어 내려가자 폐가로 보이는 집 한 채가 나타났고 숲길을 조금 더 걸어 계곡을 만났습니다. 물도 많지 않고 계곡도 좁아 용추계곡이 이정도 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도를 꺼내보니 이 계곡은 구라우골로 용추계곡에 물을 대는 지계곡이었습니다. 해발고도가 300m대로 떨어지자 나뭇가지 끝에서 연녹색 잎들이 돋아나 비로소 생기가 느껴졌습니다. 4-5번 물을 건너 다다른 용추계곡은 구라우골에 비할 수 없이 물도 많이 흐르고 폭도 넓었습니다. 오른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청풍능선에 닿게 되는 여기 삼거리에서 왼쪽 아래로 방향을 잡아 용추계곡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양쪽 면에 깎아지른 바위가 직립해 있는 깊숙한 물길이 용추계곡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16시40분 승안리 용추계곡 주차장에 도착해 하루산행을 전부 마쳤습니다.

첫 번째 팬션인 해오름을 지나 칼봉산 쉼터에 다다르자 공사가 한창 진행되어 어수선했습니다. 이곳에서 물을 건너 주차장에 이르는 길에 수시로 지나가는 차들로 먼지를 풀풀 나 짜증스러웠습니다. 한창 시즌이라면 길 아래 계곡이 그 유명한 용추계곡이라 하더라도 위 길에서 내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가 과연 쉴 수 있겠나 싶었습니다. 경기도공무원휴양소를 지나 주차장에 이르자 일행들 대부분이 먼저 내려와 뒤풀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 많은 분들이 제가 십 수분 간 길을 잘 못 들은 사이에 장수고개를 지나갔나 싶어 의아해 하던 중 한 분이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 정석산행을 한 사람은 저 뿐이며 다른 분들은 장수능선이 아닌 청풍능선으로 하산했다는 말씀을 해주어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산악회에서 정성들여 준비한 맥주가 곁들인 국밥과 두부로 배를 불린 후 귀가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 안에서 옆자리의 한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저보다 두 살 연배이신 이분과 나눈 이야기는 세월이 농익은 발효식품 같은 것이어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아직도 난이도가 높은 릿지코스를 거뜬히 해내는 이 분 앞에서 바위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친 제가 대학시절 몇 년간 바위를 탔다고 내놓고 말하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연인산을 오르며 제가 진정 소망한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진실로 이루고 싶은 소망은 장수도 연인도 우정도 모두 아니었습니다. 하루 빨리 다친 허리가 완치되어 중단한 정맥종주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욕심을 부린다면 앞으로 남은 몇 십 년 동안 산행을 무탈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에 힘이 붙어 있을 것과 그 기간 동안 책도 계속 볼 수 있도록 지금의 시력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낳은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들은 갖고 있는 재산은 항상 부족하게 느끼면서 그들이 지닌 지혜는 늘 넘쳐흐른다고 생각한다며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꼬집었습니다.  지금 제게는 재산도 많이 부족합니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제 소망에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지혜를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연인산의 산신령께서 대노하실 것 같아 이만 접습니다.